가잘라 전투의 시작

 

1942년 5월 26일, 베네치아 작전 개시 당시 양측 전력은 아래와 같았다.

영국군독일-이탈리아 추축군

제8군 - 닐 리치 중장

제13군단 - 윌리엄 고트 중장

남아프리카 제1보병사단
- 제1, 2, 3 남아프리카보병여단

남아프리카 제2보병사단
- 제4, 6, 9 남아프리카보병여단

제50보병사단 <노섬브리아>
- 제69, 150, 151 보병여단

자유폴란드군 카르파티아 소총여단
제1기갑여단
제32기갑여단

제30군단 - 윌로비 노리 중장

제1기갑사단
- 제2, 22, 201 기갑여단

제7기갑사단
- 제4 기갑여단
- 제7 차량화보병여단
- 제3 인도차량화보병여단
- 제29 인도보병여단
- 제1 자유프랑스여단

제18군 직할부대

인도 제5보병사단
- 제10인도보병여단
- 제2자유프랑스여단

인도 제10보병사단
- 제20, 21, 25 인도보병여단

인도 제5보병여단
인도 제11보병여단

아프리카 기갑군 - 에르빈 롬멜 상급대장

독일 아프리카군단 (발터 네링 대장)

제15기갑사단

제21기갑사단

제90경사단

 

크뤼벨 집단 - 루트비히 크뤼벨 대장

이탈리아 제10군단

제60보병사단 <사브라타>

제102차량화보병사단 <트렌토>

이탈리아 제21군단 - 에네아 나바리니 중장

제17보병사단 <파비아>

제27차량화보병사단 <브레시아>

독일군 제155저격병연대(90경사단)

 

전차 전력을 비교해보았을 때, 영국군 840여 대, 추축군 560여 대로 영국군이 50% 가량 많은 전차를 보유하고 있었다. 그나마 추축군 전차 중 절반 가까이 되는 228대는 이탈리아 전차로, 성능도 그렇거니와 운용하는 부대의 기량 역시 영국군에 밀리는 편이었다.

그에 비해 영국군은 미국제 신형 그랜트 전차 167대와 M3 스튜어트 경전차 140여 대, 밸런타인 보병전차 160여 대, 크루세이더 전차 250여 대, 마틸다 전차 110대를 보유하고 있어 양적 측면만이 아니라 질적 측면에서도 추축군보다 우세한 상황이였다. 이 정도 전력은 독일군에게 비장의 장포신 3호 전차와 4호 전차가 있다 해도 도저히 극복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전력 격차였다.

 

1942년 5월 26일부터 27일까지의 전황 지도
1942년 5월 26일부터 27일까지의 전황 지도 

붉은색이 독일군, 푸른색이 영국군이다

 

롬멜의 계획은 기만전술로 시작되었다. 5월 26일, 독일군은 가잘라 라인 전면에 배치된 영국 제13군단 주력을 모든 병력으로 공격하는 것 처럼 위장하며 전투를 시작하였다. 하지만 그 다음날, 크뤼벨 대장이 지휘하는 이탈리아군만 남아 13군단을 붙들어놓고 아프리카군단 주력을 전선 남단의 비르 하케임 방면에 집중, 30군단을 격파하며 가잘라 라인의 배후로 아군의 주력 부대를 밀어 넣는 것이 실제 작전 계획이었다.

만약 롬멜이 아프리카군단 주력을 가잘라 라인 후방의 아크로마 일대로 투입, 13군단과 주요 보급기지인 토브룩 사이를 끊는 데 성공한다면 13군단은 자연히 포위 섬멸될 수밖에 없었다. 이를 막기위해서는 영국군 30군단이 아프리카군단 기갑부대 주력과 상대할 수 밖에 없었고, 롬멜은 정예 아프리카군단이 지난 작전 때처럼 영국군 기갑부대에 치명타를 가할 것이라고 믿었다. 이 작전대로 된다면 북아프리카의 영국군은 말 그대로 존폐의 위기에 놓일 것이었다.

 

5월 26일에 시작된 공격은 순조로웠다. 일부 아프리카군단 기갑부대를 포함한 크뤼벨 집단의 가잘라 라인 공격에 영국군은 롬멜이 예측한 대로의 반응을 보였고, 이에 롬멜은 아프리카군단 주력과 이탈리아 제20군단을 비르 하케임 방면으로 투입해서 본격적인 포위 기동을 감행했다. 이탈리아 제20군단은 비르 하케임 북쪽과 남쪽 측면을 돌파, 아프리카군단은 이탈리아군보다 더 남쪽으로 돌아가 가잘라 라인을 완전 우회하고, 90경사단은 그런 아프리카군단의 측면을 엄호하며 기동했다.

초반 공격은 성공적이어서 5월 27일 정오까지 아프리카군단은 쾌진격을 거듭, 정오가 되기 전에 90경사단이 토브룩 남단 엘 아뎀에 도착하고 15기갑사단 역시 엘 아뎀 서쪽에서 영국군 제4기갑여단과 교전, 이들을 엘 아뎀 방향으로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이 과정에서 90경사단은 우연히 영국군 제7기갑사단 사령부를 급습, 사단 지휘부 전체를 28일까지 마비시키는 성과를 올렸다. 사단장을 생포했다가 단순한 병사인 줄 알고 관리를 소홀히 해서 놓치는 실수가 있었지만, 그럼에도 원래 의도하던 것 이상의 전과를 달성한 것이다. 21기갑사단 역시 순조롭게 진격, 정오 무렵에는 비르 하케임을 완전히 우회해서 1941년의 격전지였던 나이트브리지 바로 남쪽까지 진출하고 있었다.

 

독일군에게 찾아온 시련


하지만 이미 이 무렵부터 작전이 어긋나기 시작하는 징조가 조금씩 눈에 띄기 시작했다.

먼저 오전에 실시된 이탈리아군 트리에스테 사단의 비르 하케임 북쪽 박스진지 공격, 그리고 이탈리아군 아리에테 사단과 독일 21기갑사단 일부의 비르 하케임 남쪽 박스진지 공격이 실패했다. 비르 하케임을 중심으로 해서 이 일대를 수비하고 있던 부대는 제7기갑사단의 지휘를 받는 제1자유프랑스여단으로, 독일 망명자가 다수인 외인부대와 프랑스 최정예 식민지부대, 해병대 등이 통합된 부대였다.

이들은 1차 세계대전의 명품이자 M4 셔먼 주포의 원형으로 1940년대까지도 위력을 발휘했던 75mm 야포 50문을 주축으로한 강력한 대전차전력을 보유하고 있었고, 절대적인 수적 열세 하에서도 성공적으로 독일군과 이탈리아군의 공격을 저지해냈던 것이다.

 

사막에서 전투 준비 중인 M3 그랜트 전차들사막에서 전투 준비 중인 M3 그랜트 전차들

 

여기에 나이트브리지 인근까지 진출한 21기갑사단과 15기갑사단 역시 정오부터 영국군 제1기갑사단과 교전하면서 예상하지 못한 피해를 입고 있었다. 바로 그들이 존재조차 깨닫지 못했던 미국제 신형 전차 M3 그랜트 때문이었다. 아직까지 아프리카군단의 주력이었던 3호전차의 50mm 42구경장 전차포로는 M3 그랜트에게 유효타를 낼 수 없는 반면, 상대방의 75mm포는 명중시키는 대로 독일 전차를 일격으로 격파해 버리는 기염을 토한데다, 전차의 숫자마저도 영국군이 많았던 것이다. 그나마 공세의 주도권을 독일군이 쥐고 있었기에 당장 그 열세가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상황이 조금만 나빠지면 바로 전세가 뒤집히고도 남을 만한 국면이었다. 그리고 그런 상황은 생각보다 빠르게 찾아왔다.

27일 오후부터 독일군은 물자 부족으로 적극적인 공격을 감행하기 곤란한 처지가 되었고, 비르 하케임 북쪽 돌파구를 통해 전달되어야 할 보급품은 후방에 발이 묶였다. 때문에 아프리카군단은 적 후방으로 40km나 파고든 상태에서 정지하고 말았고, 그 상황에서 비르 하케임 남단으로 영국군이 접근하면서 아프리카군단이 돌파에 이용한 길은 보급로로 쓸 수 없게 되었다.

여기에 15기갑사단에 쫓겨 엘 아뎀으로 철수한 제4기갑여단이 90경사단을 공격, 결국 90경사단은 5월 28일에 이르러 비르 하케임 방향으로 철수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게다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가잘라 라인을 압박하던 크뤼벨 집단의 사령관인 크뤼벨 대장마저 5월 29일 직접 전선 항공정찰에 나섰다가 영국군에게 격추, 그만 토브룩 인근에서 영국군에게 포로가 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그나마 크뤼벨 집단의 지휘는 마침 현장에 시찰 차 나와 있던 알베르트 케셀링 공군 원수가 인수하면서 지휘 공백은 막았지만, 다른 사태들은 그리 간단하게 수습될 상황이 아니었다.

연이어 일어난 일련의 일들로 아프리카군단은 가잘라, 비르 하케임, 엘 아뎀을 잇는 삼각형 구간 내에 고립되어 버렸고, 이들은 속속 증원되는 영국군에게 강력한 압박을 받게 되었다. 훗날 이 삼각형 구간은 가마솥이라는 별명을 얻었으며, 이 가마솥 안에 아프리카군단이 갇힌 상태는 이후 6월 11일까지 계속되었다.

 

이탈리아군을 진두지휘하기 위해 전선에 나온 롬멜이탈리아군을 진두지휘하기 위해 전선에 나온 롬멜
지휘차 너머로 이탈리아군의 세모벤테 75/18 돌격포가 보인다

 

이 가마솥의 고립을 풀기 위해 롬멜은 이탈리아군을 진두지휘, 20군단 전 전력을 동원해서 5월 29일에 비르하케임 북쪽에 작은 돌파구를 뚫고 지뢰지대로 보급차량을 강행 투입하는 무리수 끝에 간신히 보급로를 잇는 데 성공했지만, 이 돌파구만으로는 도저히 충분한 물자를 보급할 수가 없었다. 때문에 가마솥 전투가 일시 소강상태로 접어들기 직전이었던 5월 31일 무렵에는 아프리카군단은 말 그대로 절망적인 상황에 놓여 있었다.


영국군의 실수


이 위기에서 독일군을 구원한 건 다름아닌 영국군이었다. 영국군의 상황은 독일군보다 나았지만, 3일간 계속된 전투로 인해 마찬가지로 심각한 손실과 물자 부족에 직면해 있었는데, 이 상황에서 영국 지휘부 내에서 불협화음이 발생한 것이다. 오킨렉은 독일군이 실제보다 훨씬 심한 피해를 입었다고 믿었으며 가마솥을 압박하는 대신 이탈리아군을 격멸하러 주력을 출동시킬 것을 명령했고, 8군 사령관 리치는 반대로 독일군의 피해를 과소평가해 독일군이 토브룩 방면으로 반격해 오는 것을 우려했다.

때문에 영국 제8군은 가마솥에 위치한 독일군을 적극적으로 제거하려 들지 않았고, 거꾸로 가마솥 방면의 부대를 빼내 엘 아뎀 남쪽으로 이동해 방어선을 강화하고 남쪽의 독일군을 압박하는 데 주력했다. 그나마 이탈리아 제10군단의 비르 하케임 북부 일대에 대한 대규모 공세와 더불어 비르 하케임 남방 일대에 전개된 영국군을 아리에테 기갑사단과 90경사단이 그럭저럭 막아낸 탓으로 영국군은 결국 이도저도 못 한 채 병력과 시간만 낭비하고 말았다.

 

탈취된 벙커를 탈환하려 반격하는 자유프랑스군 외인부대원들의 모습탈취된 벙커를 탈환하려 반격하는 자유프랑스군 외인부대원들의 모습
프랑스군의 이런 과감한 반격은 종종 전선 자체를 무너뜨릴 위기로까지 몰고 가곤 했다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비르 하케임의 자유프랑스군은 여전히 아프리카군단의 목을 조르는 밧줄로서 건재를 과시했다. 6월 1일 롬멜은 이탈리아군 전 전력을 투입해 비르 하케임의 프랑스군을 일소하려 했지만 역시 실패했고, 오히려 이탈리아군이 프랑스군의 반격을 받아 무너질 뻔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그나마 함께 전개돼 있던 독일군의 반격으로 사태는 간신히 안정화됐고, 단지 힘겹게 유지되던 보급선의 안전을 조금 더 나아지게 하는 정도의 성과만을 거두고 말았다.

물론 프랑스군의 상황도 악화일로를 걷고 있었으므로 롬멜은 6월 3일 프랑스군에 항복을 권고했지만 프랑스군은 이에 응하지 않았다. 오히려 다음날 다시 감행된 공세마저 격퇴되는 바람에 독일군은 전력과 물자만 다시 한 번 낭비하고 말았다. 그나마 이 공세 이후 프랑스군에 대한 육로 보급이 거의 차단되면서 비르 하케임은 결국 사실상 포위 상태에 이르고 말았다.

이렇게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상황에서 영국군은 6월 5일에야 간신히 아프리카군단에 대한 전면 공격에 나섰다. 하지만 이 공격은 각 방향마다 시간이 제대로 맞지 않고 연계조차 제대로 되지 않았고, 그에 비해 독일군은 며칠 되지 않는 소강상태를 틈타 방어 태세를 굳히고 영국군의 공격을 맞받아칠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결국 그날 하루 동안 벌어진 영국군의 공세는 모든 공격 전면에서 무참한 패배로 끝났다.

 

가마솥 전투 중에 파괴되어 버려진 영국군의 밸런타인 전차
가마솥 전투 중에 파괴되어 버려진 영국군의 밸런타인 전차

 

역으로 롬멜은 15기갑사단으로 하여금 가마솥 바로 북쪽의 비르 엘 하르맛을 공격하게 했는데, 마침 이 지역에는 공격에 나선 영국군 2개 사단과 8군 예비여단들의 지휘부가 집중돼 있었다. 이들이 15기갑사단의 공격으로 와해되면서 결국 영국군은 가마솥 공격을 당일로 포기해 버렸고, 적지 않은 전차 손실(최소 100대 이상)을 입은 상태에서 인도군 2개 정찰대대와 공격부대 예하 포병 대다수를 포함한 많은 부대를 적지 한가운데 버려둔 채 퇴각해 버렸다. 이들은 결국 다음날 아프리카군단에게 완전히 섬멸되고 말았다.


자유 프랑스군의 분전

 
반격의 성공으로 한숨 돌린 롬멜은 보급로를 넓히기 위해 비르 하케임 일대의 박스진지들에 대한 공격을 강화했고, 결국 이때까지 완강하게 전선을 고수하던 비르 하케임의 제1자유프랑스여단은 완전 포위 상태에 놓이고 말았다. 그러나 비록 진지 자체는 축소되었어도 제1자유프랑스여단은 아직 건재했고, 그들은 포위망 바깥의 제7차량화보병여단과 제29인도보병여단의 지원을 받으며 보유한 야포로 추축군에게 지속적인 타격을 가하며 추축군의 보급선을 계속해서 교란했다.

자유프랑스군의 분전은 말 그대로 1940년의 완패로 땅에 떨어진 프랑스의 명예를 끌어올릴 만큼 뛰어난 것이었고, 포위 당사자인 롬멜조차 그들의 분전을 칭찬할 정도였다. 하지만 이미 대세는 기울었고, 결국 병력을 증원해 6월 9일에 감행된 공격에 자유프랑스군은 더 이상 방어전을 지속할 물자도, 탄약도 없는 상태가 되었다. 결국 제1자유프랑스여단 여단장 피에르 쾨니그 준장은 철수를 결정했고, 8군 사령관 리치의 허가를 받아 다음날 오후를 기해 적중 돌파를 감행해서 성공적으로 안전지대까지 퇴각하는 데 성공했다.

비르 하케임에는 도저히 움직일 수 없는 부상자들만 남겨졌고, 이들은 다음날인 6월 11일까지 저항하다가 결국 제90경사단에게 항복해서 포로가 되었다. 이 퇴각이 워낙 교묘하게 이뤄졌기 때문에 추축군은 프랑스군의 철수 사실을 깨닫지 못했고, 뒤늦게 깨달았을 때는 이미 추격하기엔 너무 늦은 상태였다. 공군 역시 지난 며칠 동안 쓴 연료가 너무 많아 이날 중에는 후퇴하는 프랑스군을 폭격하는 데 쓸 연료가 없을 정도였다.

이 14일에 걸친 전투 기간 동안 자유프랑스군은 이탈리아군 전차 50대를 파괴하고 추축군 3천여 명을 사상케 해서, 퇴각 때 남겨진 이들을 포함해도 사상자 교환비 10:1, 전투 중만 따지면 30:1을 기록하는 등 사상 초유의 전과를 거두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사실상 추축군 전체의 공세를 붙들어 매는 결정적인 쐐기 역할을 해냈다. 이들의 완강한 저항 때문에 추축군은 6월 6일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전면 공세에 나서지 못했으며, 이 거점을 파괴하기 위해 항공전력을 집중 투입하느라 다른 지역에 충분한 항공기를 투입하지 못했다. 말 그대로 영웅적인 전투였다.

 

비르 하케임을 탈출해서 안전지대에 도착한 자유프랑스군 장병들
비르 하케임을 탈출해서 안전지대에 도착한 자유프랑스군 장병들

 

그러나 이들의 철수는 영국군에겐 말 그대로 재앙을 의미했다. 이들이 비르 하케임을 버린 이상, 이제 추축군의 배후를 위협할 수 있는 영국군 세력은 없었다. 그에 비해 영국군은 이미 심각한 피해를 입었고, 독일군이 전면 공세로 이전해 오면 이를 막아낼 수 있으리라 장담할 수 없는 상태였다.

영국군에게 진정한 재앙이 다가오고 있었다.







예끼 프랑스군보다 못한 영국군놈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