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 본 기사에는 다소 잔인한 장면과 폭력적인 묘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 붉은색, 검은색, 하켄크로이츠... 그리고 디스토피아.

시간의 축은 어긋났다. 수천만의 인명을 앗아간 2차 세계대전은 '아돌프 히틀러'를 총수로 하는 나치 독일의 승리로 마무리되었다. 뉴욕 맨해튼에는 원자 폭탄이 떨어졌고, 연합국은 하나하나 항복하고 말았다. 나치는 그들이 말하던 아리안 민족의 거주공간인 '레벤스라움'을 구축했고, 베를린은 히틀러가 꿈꾸던 계획도시 '게르마니아'로 거듭났다. 나치의 일원이 된 팝 그룹 '비틀즈'의 엘범 'Abbey Road'의 재킷에는 나치 군복을 입은 네 명이 걸어간다. 세계는 침묵했고, 세상은 나치의 룰에 의해 굴러간다.

▲ 뭐... 대충 이렇게 됐다.

'대체 역사물'은 전부터 영화나 게임 등에서 흔한 소재로 쓰이곤 했다. 지금 당장 생각나는 작품이라면 장동건이 주연을 맡았던 '2009 로스트 메모리즈'가 있다. '2009' 로스트 메모리즈에서 히로시마에 투하될 원자 폭탄은 독일 베를린에 대신 투하되었고, 일본은 일본 제국을 꾸려 1988년 나고야 올림픽과 2002 일본 월드컵을 개최했다.

'울펜슈타인: 더 뉴 오더(이하 뉴 오더)'의 세계관 역시 대체 역사물, 이른바 평행 세계관을 다룬다. 실제 역사의 흐름에 'If'의 요소를 도입해 '만약 ~~~했더라면...'이라고 가정하는 것이 그 시작이다. 게임을 시작하면, 우리는 나치 독일이 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한 바로 그 세계로 들어가게 된다. '거대한 정부'와 '자유를 상실한 개개인'의 클리셰로 점철된 디스토피아. 1960년대의 세계를 무대로 주인공 B.J.블라즈코윅즈(이하 블라즈코윅즈)는 활동을 개시한다.

▲ 이 녀석이 총을 겨누는 바람에 조용히 있던 킬링머신이 각성하고 말았다.

▲ 적극적 자기 PR이 경쟁력을 높이는 비결



◈ '존 카멕 : FPS의 스토리는 포르노의 그것과 같다.' 하지만 지금은...?


서문에서도 언급했듯 뉴 오더는 생각보다 치밀한 스토리라인을 갖고 있다. 물론 '생각보다' 이다. "FPS 게임의 스토리는 포르노그라피의 그것과 같다."라고 말을 했던 존 카멕의 말처럼 FPS에서 스토리가 차지하는 비중이 제로에 가깝던 시절 역시 있었다. 퀘이크와 언리얼 시리즈가 한창 붐을 일으키던 시절, 실제로 스토리 라인은 FPS에서 권총 탄약보다도 비중이 없는 존재였다.

그러나 콜 오브 듀티를 비롯한 밀리터리 FPS가 수면으로 급부상하면서 FPS에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찾아왔다. 치밀한 스토리라인과 극적인 연출은 FPS에서 빠질 수 없는 요소가 되었다. 물론 기존의 스타일을 고수하는 작품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비교적 최근 발매되었던 리스폰 엔터테인먼트의 '타이탄폴' 같은 경우를 예로 들 수 있다. 애초에 멀티 플레이를 노리고 구상되었던 '타이탄폴'은 나름의 스토리를 가지고 있지만, 대작 FPS의 기준에서 볼 때 비루하기 짝이 없다.

▲ 재미는 있는데 스토리는 그닥

뉴 오더는 무리하지 않고 기존의 세류에 편승해 스토리텔링에 힘을 실은 작품이다. FPS 치고는 많은 NPC가 존재하고, 각자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게임을 하며 볼 수 있는 갖가지 신문 조각들을 보며 나치 휘하의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간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다. 나아가 뉴 오더의 스토리라인은 실제 게임 플레이에 밀접하게 연관되어있다.

▲ 신문 읽으라는 말이 괜한 소리가 아니다.

물론 그 방식은 기존의 게임과 사뭇 다르다. 적합한 예시를 들자면 '콜 오브 듀티: 모던 워페어'와 비교해 볼 수 있다. 모던 워페어에서 플레이어는 존 '소프' 맥태비시와 존 프라이스 등으로 분해 임무를 수행한다. 주인공은 여러 명이다. 플레이어는 모던 워페어를 플레이하며 여러 캐릭터를 조종해야 하고, 각 캐릭터는 각자의 위치에서 잠입, 전투, 암살 등의 임무를 수행한다. 다원화 스토리텔링의 정석과도 같다.

반면 뉴 오더의 주인공은 블라즈코윅즈 단 한사람 뿐이다. 모든 스토리는 그의 행동에 따라 결정되고, 그를 중심으로 흘러간다. 이런 일원화된 스토리 진행은 플레이어로 하여금 더욱 게임에 밀접하게 적응하도록 도와준다. 실제로 모던 워페어 시리즈를 플레이하던 중 주인공이 전환되며 조금씩 긴장이 풀리곤 했던 것과는 정 반대다.

여기에 약간의 롤플레잉맛 나는 양념과 어드벤쳐 요소를 잘 버무려 놓은 게임. 그것이 바로 뉴 오더다. 플레이어는 블라즈코윅즈가 올바른 길을 찾도록 지도를 살펴야 하고, 진로를 개척하기 위해 갖가지 아이템을 모아야 한다. 블라즈코윅즈는 싸우면서 점차 성장하고, 갈수록 강력해진다. 게다가 깨알같이 숨어있는 히든 퀘스트들은 뉴 오더가 확실히 기존 FPS들과 그 방향성을 달리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아 물론 시리즈 특유의 전리품 모으기는 또 다른 재미다.

▲ 아 어차피 악당들껀데 내가 좀 쓰면 어때.

▲ 내 필력도 Perk 처럼 성장했으면...



◈ FPS 본연의 재미: 쏘고 부수고 모조리 눕혀라.


하지만 FPS 본연의 가치는 이런 추가 요소들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FPS게임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사운드와 움직임, 그리고 적의 머리를 깨부술 때 느끼는 타격감 아니던가. 뉴 오더의 게임 플레이는 현대 FPS보다는 90년대 후반에 등장했던 클래식 FPS의 기본에 굉장히 충실해 있다. 그 요소들을 나열하자면 어떤 상황에도 흔들림 없는 조준점과 무한에 가까운 무기 수용량, 그리고 산지사방으로 흩어지는 신체 파편들을 일단 들 수 있겠다.

▲ 총에 소음기도 달줄 알았던가...

▲ 뭐 못하는게 없으니 암살도 하긴 합니다.

블라즈코윅즈는 날카로운 움직임의 암살자도 아니고, 적의 숨통을 일격에 끊는 저격수도 아니다. 또한 코만도 삼보와 백병전 기술의 스페셜리스트도 아니다. 그는 그 전체다. 이해가 안가는가? 신장 193cm, 몸무게 111kg의 거구인 블라즈코윅즈는 상기한 모든 움직임을 수행한다. 그 큰 체구로 조용히 다가가 목을 그어버리는가 하면, 저격용 라이플을 조준 없이도 정확하게 발사한다. 게다가 연속으로 수십명과 백병전을 벌여도 지치지 않고 모조리 때려눕히며, 몸에 나이프가 꽂힌 상태로도 멀쩡하게 돌아다닌다. 나치가 자랑하는 그 어떤 슈퍼 솔져나 결전 병기보다도 강력한데 그냥 미군이다.

▲ 수틀리면 바로 청소모드로 전환

▲ 철분이 흩날리지만 과도한 정도는 아니다

▲ 쇠주먹에 맞아도 멀쩡합니다.

이 말도 안되는 피지컬 덕분인지 블라즈코윅즈는 뉴 오더의 세계에서 걸어다니는 재앙으로 군림한다. 가장 단편적인 모습은 뉴 오더가 내세우는 액션 요소인 '아킴보'(게임 내에서는 'Dual Wield'라 칭한다)에서 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생각나는 아킴보의 모습은 쌍권총이다. 영웅본색에서 주윤발 형님이 보여준 쌍권총 액션과 이퀄리브리움에서 크리스챤 베일이 열연했던 존 프레스턴 신부의 '건 카타'를 보면 아킴보 액션이 뭔지 잘 보여준다.

▲ 우아아아악! 죽어라! 우아아아아!

하지만 블라즈코윅즈의 아킴보는 조금 다르다. 권총은 당연히 기본으로 가능하고 어썰트 라이플과 전투용 산탄총도 양손으로 잡고 쏜다. 아니 심지어 이분은 저격용 라이플도 양 손으로 잡고 쏘시는 분이다. 특수 기능인 로켓 발사기 또한 양손으로 부여잡고 쏜다. 이쯤되면 아킴보가 우리가 아는 그것이 맞나 의심된다. 흡사 '보더랜드 2'의 벨런스 종결자인 살바도르의 건저킹을 보는 기분이다.

▲ 적을 죽이고 전리품으로 갑옷을 뜯어다 붙이는 버릇...

▲ 로봇이라도 깨부셨다 하면 풀아머가 되어버린다.

하여튼 이 인간같지 않은 성능 덕에 플레이어는 FPS가 선사하는 원초적인 쾌감의 끝을 맛볼 수 있다. 수십발의 총탄을 맞고 피박살이 나는 나치 군인들을 보고 있자면 쾌감보다 동정심이 느껴질 정도이니 말이다. 게다가 이 인간은 양 손에 기관총을 들고 쏘면서도 거의 정확하게 화면의 정 중앙에 탄막을 쏟아붓는 놀라울 정도의 정확도도 보여준다. 비현실적 요소를 넣어 오히려 FPS 본연의 쾌감을 살린 케이스다. 최근의 대세인 2개의 주무기, 전술 수류탄과 파편 수류탄, 그리고 컴뱃 나이프로 이뤄진 주인공의 무장을 정면에서 부정했지만, 그 때문에 더 재밌다.

▲ 요즘 액션스타라면 이정도는 상시휴대가 가능해야 한다.

▲ FPS 게임에 약한 이들도 자유롭게



◈ 멀티플레이는 할 수 없는걸까?


뉴 오더의 장점은 확실하다. 몰입도 있는 시퀀스 구성과 과격한 액션, 그리고 마초들의 꿈과 희망 아킴보까지. 더불어 울펜슈타인만의 느낌인 디젤 펑크와 세계관에서 오는 디스토피아적 느낌도 잘 구현해놓았다. 깨알같이 등장하는 울펜슈타인 IP만의 오컬트적 느낌 역시 살아있다. 뉴 오더는 잘 만든 웰메이드 싱글플레이 게임이다.

▲ 울펜슈타인 특유의 오컬트 요소 중 하나인 오파츠(Ooparts)도 구현

▲ 아이언맨인줄

문제는 다른 곳에 있다. 최근 발매되는 게임의 요소인 '롱 런' 요소가 없다는 것이다. 영화와 게임은 같은 문화 콘텐츠이지만, 유저가 직접 참여할 수 있다는 점에서 차별화된다. 나아가 게임은 영화보다 확실히 오랜 시간 즐길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뉴 오더의 싱글 플레이를 한 차례 플레이하고 나면, 마치 잘 만든 영화를 직접 체험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예전 콜 오브 듀티 시리즈를 한창 즐길 때 느끼던 기분과 비슷하다. 하지만 그 이상은 없는가?

울펜슈타인 시리즈는 많은 타이틀을 보유하고 있다. 애플 소스로 개발되었던 초기작부터 희대의 명작인 '울펜슈타인 3D' 그리고 RTCW(리턴 투 캐슬 울펜슈타인)과 그 이후에 개발된 작품들까지 나열하면 꽤 많은 편이다. 다만 그 중 내가 가장 즐겁게 즐긴 게임은 아이러니컬하게도 RTCW의 무료 확장팩으로 공개되었던 울펜슈타인: ET(에너미 테러토리)다.

▲ 울펜슈타인: ET는 굉장히 재밌는 작품이었다.

멀티플레이 요소가 게임에 필수적으로 필요한 것은 아니다. 또한 싱글플레이도 필수적인 요소가 아닌 것도 동일하다. 실제로 '타이탄폴'을 보면 캠페인조차 멀티플레이로 진행된다. 싱글 플레이라는 개념 자체를 염두에 두지 않은 개발이다. 반대로 멀티플레이를 완벽하게 배제한 게임들도 존재한다. 뉴 오더 역시 그 중 하나로 볼 수 있다.

뉴 오더의 게임 구성은 꽤나 흥미롭다. 진행에 분기를 두어 2회차 플레이가 가능하게 했고, 여러 곳에 숨겨진 수집 요소는 유저들이 자연스럽게 다회차 플레이를 하게끔 만든다. 아직 접해보지는 않았지만, 게임 내에서 모을 수 있는 여러 요소들을 모을 경우 언락되는 콘텐츠들 역시 풍족한 편이다.

▲ 레코드도 모을 수 있다. 재생도 가능

하지만 멀티 플레이의 부재는 확실히 아쉬운 점이다. 게임이 '롱 런'하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콘텐츠나 혹은 인스턴트식으로 즐길 수 있는 무언가가 꼭 필요하다. FPS 고유의 액션성을 잘 살린 뉴 오더. 그래서 더욱 아쉬웠는지도 모른다. '이 타격감과, 느낌을 살린 채로 멀티플레이가 가능하다면 얼마나 즐거울까?'하는 마음이 게임을 하는 내내 마음 한켠에 남아 있었으니 말이다.



◈ 죽어버린 하이퍼 FPS의 향기를 간만에 맡게 해준 게임


뉴 오더에 대한 느낌을 한 마디로 정의하자면 '원초적인 재미' 였다. 뉴 오더만의 묵직한 액션감은 지금까지 어떤 게임에서도 느낄 수 없었던 묘한 쾌감을 불러일으켰다. "총탄이 바닥나면 바닥 날 때까지 다 쏜다. 그리고 나면 다른 총을 꺼내 또다시 총탄이 다할 때 까지 퍼붓는다."에서 시작되는 바로 그 재미 말이다.

비록 '바이오쇼크'와 같은 강렬한 음침함을 갖춘 것도, '모던 워페어' 만큼 극적인 연출을 보인 것도 아니었지만. 뉴 오더는 그 나름대로의 세계관을 명확하게 보여주었고, 게이머들에게 나름의 즐거움을 선사했다. 어쩌면 기자가 기다린 작품이 이런 작품이었을런지도 모르겠다. '퀘이크'와 '언리얼'에서 느꼈던 특유의 시원시원한 액션을 다시 맛보고 싶었으나, 떨어지기 시작한 피지컬 때문에 차마 그 게임들을 손대지 못했던 기자에게 뉴 오더의 묵직하면서도 철분넘치는 액션은 가뭄의 단비와도 같았다.

여름이 다가온다. 곧 푹푹찌는 햇빛 아래 모기 밥이나 주며 더운 날을 보내게 될 것이다. 아쉽지 않은가? 만약 여름의 시작을 시원하게 열고 싶다면 이 게임 어떠한가? 집 근처 까페에서 마시는 커피 한 잔보다 훨씬 확실하고 빠르게, 당신의 더위를 없애버릴 게임이 바로 앞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