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게임은 내가 가장 힘들어 하는 장르다. 다른 이유가 없다. 그냥 무서운 것이 싫고, 깜짝 놀라는 것이 싫다. 이는 지루함, 노잼, 취향, 등 다양한 논리적 근거에서 벗어난, 그냥 내 본능에 따른 결론이다. 난 공포게임을 못한다. 그리고 하기도 싫다.

그럼에도 어쩔 수 없이 게임을 해야 하는 상황이 오기도 한다. 물론, '취미'로서 게임을 즐기는 이들에게 이런 일은 있을 수 없으나, 엄연히 난 '게임'을 업으로 짊어지고 사는 사람이니까.

'에일리언 아이솔레이션' 역시 그런 이유로 접하게 되었다. 하기 싫다고 무작정 다 손에서 놓아 버리면, 나중에 공포게임에 대한 글이라도 써야 할 때 난감하지 않겠는가. 그렇게 청심환 두 알과 함께 시작한 '에일리언 아이솔레이션'은 말 그대로 색다른 공포를 가져다 주었다. 뭔가 칙칙한 회색빛, 아니면 짙은 핏빛으로 느껴지는 공포가 아닌, 진짜 깨끗하게, 티없이 짙은 검은색의 공포였다. 마치 반질반질한 에일리언의 이마처럼 말이다.

GDC2015의 본격적인 강연이 시작되는 수요일, 암담하기 짝이 없었던 그 과거의 게임을 다시 되새기게 만드는 강연을 듣게 되었다. 강연자는 '알리스테어 호프(Alistaire Hope)'로, 20년 가까이 '크리에이티브 어셈블리'에서 수석 기획자로 일하며 그들의 대표 프렌차이즈인 '토탈워' 시리즈를 비롯한 거의 모든 작품에 기여한 베테랑 개발자다. 강연의 내용은 '에일리언 아이솔레이션'에서 '공포'를 구축해낸 방법이었다. 그래, 한번 들어나 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가고싶지 않은 화장실을 들락거리게 만들고, 청심환을 도핑하듯 먹게 만든 그 공포의 '근원'이 탄생된 과정이 궁금해서였다.

▲ 크리에이트 어셈블리 '알리스테어 호프(Alistaire Hope)' 수석 기획자


■ 1. 간단한 선택 - 보이지 않는 '공포'를 만들어라.

"우리는 플레이어에게 아주 간단한 선택지를 제공하고 싶었습니다. '전진이냐 혹은 정지냐(Should I Stay or Go?)'이죠. 게임을 플레이하는 사람들에게 생존 본능을 요구하는 겁니다."

알리스테어의 첫 마디는 굉장히 간단했다. 흔히 영어로 진행되는 강연을 듣게 되면 생기는 변역 및 의역의 과정, 그리고 그것을 확인하는 과정마저 필요없을 정도로 명확하고, 단순한 문장이었다. 그리고 그 어떤 요소보다도, 게임에 제대로 구현되어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실제 게임 내에서, 플레이어는 수없이 많은 고민을 해야 한다. '움직여야 할까? 일단 숨을 죽여야 할까?'에 대한 고민이다. 게임 속 에일리언은 굉장히 똑똑하다. 확인한 장소를 반복하는 경우도 거의 없고, 플레이어가 흘리는 기척을 귀신같이 잡아챈다. 때로는 플레이어가 나올 때 까지 조용히 대기하는 인내심도 보여준다. 고민이 생길 수 밖에 없다. 지금 당장 내 눈에 보이지 않아도, 에일리언은 어디선가 인내심을 갖고 내가 튀어 나오길 기다리고 있을 지도 모른다.

이 '선택'이 가져다 주는 결과는 결국 '보이지 않는 공포'로 우리 마음 속에 자리잡는다. 옷장에 숨어 고민을 한다 해도 결과는 알 수 없다. 에일리언이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 수도, 혹은 이미 사라지고 없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문을 열고 나가자마자 덮쳐져 머리가 뜯기는 장면을 상상할 수 밖에 없다. 스스로가 만든 공포에 스스로가 잠식당하는 꼴이다.


■ 2. 제한 속의 공포 - '기술'이 통하지 않는 죽음의 장

이어 알리스테어는 게임의 '배경'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에일리언 아이솔레이션'이 리들리 스콧 감독의 '에일리언'과 상당 부분 닮아있다는 것은 게이머들에게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리고 그 덕분에 유저들로부터 더 좋은 평가를 받았다. '에일리언'이라는 존재가 절대 죽지 않는 '죽음'의 상징 그 자체라는 점, '대결'이 아닌 일방적인 학살과 생존이 주 소재가 된다는 것 등이 '에일리언' 본연의 모습을 잘 살려냈기 때문이다.


게임 내에서도 공격은 굉장히 제한되어 있다. 총기도 있고, 근접 무기도 존재하지만, 이는 다분히 시나리오 상 처해지는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주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예를 들어 강도로 돌변한 생존자 그룹이 등장하는 곳에는 약간의 탄약을 얻을 수 있고, 적대적 사이보그를 상대하기 위해 파이프를 휘두르는 정도일까? 그나마 탄약을 남겨도 에일리언은 총소리를 곧바로 잡아내기 때문에 마음대로 쓸 수 없고, 사이보그를 상대로 휘두르는 파이프 역시 최후의 수단일 뿐, 어지간해서는 두들겨 맞기 십상이다.

분명 우주 시대가 배경이건만, 그 어떤 기술적 혜택도 받을 수 없다. 주인공인 아만다 리플리가 들고 다니는 '모션 트래커' 역시 에일리언의 위치를 굉장히 제한적으로, 그것도 그냥 둥근 점으로 표시할 뿐이다. 어선에 장착되는 어군 파악용 소나도 이것보단 잘 나온다.

알리스테어는 이렇게 말했다. "공포를 고조시키기 위해, 우리는 에일리언 1편의 분위기를 최대한 재현하려 노력했습니다. 첨단 기술의 등장은, 유저들에게 헛된 희망만을 주게 됩니다. 게임 내에서는, 그 어떤 옷장을 열더라도 엄청나게 큰 총이 당신을 기다리지 않거든요."


■ 3. '학습'하는 에일리언 - 긴장을 유지하라

'에일리언 아이솔레이션'의 꽃은 누가 뭐라 해도 '에일리언'이다. 잔혹하고 민첩한데다 강력하기까지 한 이 녀석은 위에서 몇번 언급했다시피 굉장히 머리가 좋다. 알리스테어는 '에일리언'이 어째서 짜여진 움직임이 아닌, 역동적이며 무작위적인 움직임을 갖추게 되었는가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짜여져 있는 움직임은 긴장감을 단번에 날려버릴 수 있습니다." 그의 말이다.


맞는 말이다. 만나는 순간 죽음과 직면하게 되는 '에일리언'이지만, 이게 짜여진 순서에 따라 움직이는 존재라는 것이 파악되어 버리면 그 순간 게임의 장르는 '공포'보다 퍼즐 게임이 되어 버린다. 모르는 이들이야 당연히 무서울 수 밖에 없을 거다. 하지만 게임을 계속 플레이하다 보면 에일리언을 요리조리 피해 달아나는 과정에 익숙해지고, 곧 긴장감의 상실로 이어질 수 밖에 없다.

'무작위성'을 넣게 된 이유도 그 때문이다. 플레이어에게 '익숙함'을 느끼게 할수록 게임은 점점 더 루즈해질 수 밖에 없다. 게임 내에서 에일리언은 끊임없이 학습하고, 강해지며 또 이동한다. 이미 사라진 에일리언의 위치를 절대 알 수 없다는 것에서 오는 '보이지 않는 공포', 그리고 언제 어디서 돌발적으로 나타날 지 모른다는 전제 하에서 유지되는 '긴장의'순간'까지, '에일리언'이 갖는 이 무작위성은 유저들의 뒷목을 잡게 하는 '에일리언 아이솔레이션'만의 독특한 무기라고 할 수 있다.


■ 4. 1인칭 시점 - 캐릭터와 당신이 동화되는 순간

사실 공포 게임에서 1인칭 시점이 사용된 것은 처음이 아니다. 국내 굴지의 공포게임이었던 손노리의 '화이트데이'도 1인칭 시점이요, 공포게임 하면 다들 고개를 끄덕이는 '암네시아'나 '아웃라스트'도 1인칭 시점을 선택했다. 어떻게 보면 하드코어 공포 게임에서 1인칭은 교과서와 같다.

물론 1인칭 시점에서 오는 부작용도 만만치 않다. 3D울렁증에서 오는 구토 문제며, 앞만 보아야 한다는 점에서 오는 단순한 '편의성'에 관련된 문제까지 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1인칭이 공포 게임에서 많이 쓰이는 이유는, 1인칭 시점만큼 플레이어의 감정을 강하게 이입할 수 있는 시점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옛 '에일리언: 아이솔레이션' 3인칭 빌드영상

알리스테어는 말했다. "우리는 3인칭 시점으로 게임을 만드려는 시도도 했었습니다. 근데 그게 말이죠. 생각보다 무섭지가 않았어요. 그래서 우린 1인칭으로 방향을 전환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에일리언'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죠. 만약 우리가 3인칭 시점으로 에일리언을 조정한다면, 우리는 이런 느낌을 받게 됩니다. '아 나는 에일리언 게임을 하고 있구나.' 하지만 1인칭으로 플레이한다면, 이렇게 바뀝니다. '아 지금 나는 에일리언이구나.'"

1인칭 시점 역시 앞서 이야기했던 '에일리언 아이솔레이션'의 공포가 칠흑같이 어둡게 느껴졌던 이유 중 하나였다. 대항할 수도 없는데 점점 더 강해지는 적, 1인칭 시점, 복고 느낌의 무대까지, 이 모든 요소가 어우러져 게임을 플레이하는 '나'로 하여금 이성적 선택이 아닌, 감정과 본능에 충실하게 만들어 버린 것이다. 플레이 중 이성과 계산이 뛰어들 틈새가 좁으니 전해지는 공포의 감정이 더욱 진하게 느껴질 수 밖에 없다. 마치 갓 뽑아낸 에스프레소 같이 말이다.


강연을 마치며, 알리스테어는 한 마디를 덧붙였다. 사실 그때서야 그는 밝혔지만, 그 역시 공포게임 및 1인칭 게임에 대한 이해도는 높지 않았다. 크리에이티브 어셈블리는 '토탈워' 시리즈로 유명한 개발사다. 전략 게임에 대한 노하우는 풍족할 망정, 1인칭 공포 게임은 그들에게도 도전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결국 해냈고, 유저들의 호평을 받았다.

알리스테어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청중들을 향해 조용히 힘있는 목소리로 마지막 말을 하며 강연을 마무리지었다.

"만약 당신이 어떤 일에 인생의 몇 년을 바칠 생각이라면, 그만큼 가치가 있는 일인지 확실히 해야 합니다. 분명 그 일은 당신의 팀에 굉장히 힘든 과제가 될 것이지만 그럴 때일수록 더욱 강하게 꿈을 가져야 하죠. 새로운 분야에 도전하는 과정에서 자신감을 유지하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결국 그 일을 해내게 된다면, 어떤 일이라도 도전할 수 있을 겁니다."

“If you're going to dedicate years of your life to creating something, make sure it's something that you care about. It may place a lot of strain on your team, but having a dream and a strong vision is crucial. Maintaining your confidence is difficult when attempting something different. But if you are successful in this, anything is possib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