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엔진'.

'게이머'들에게 게임 엔진은 개발자들에게 다가오는 것만큼의 임팩트가 없다. 게이머에게 '엔진'은 게임 시작 전 오프닝 영상에서 짧게 스쳐 지나가는 로고 정도로만 기억될 뿐이다. 어지간히 게임을 플레이했고, 전문적으로 즐기지 않는 이상, 게임 엔진에 관심을 두는 게이머를 찾기도 어렵다. 그나마 게이머들에게 친숙한 엔진을 꼽으라면 '언리얼', '크라이엔진', '유니티' 정도만 나오는 것도 그 때문이다.

'하복' 엔진 또한 게이머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엔진 중 하나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것은, 하복 엔진이 아무도 모르는 베일 속 엔진이란 뜻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그 쓰임새, 그리고 지금까지 이뤄온 성과에 비해 덜 알려졌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GDC2015의 마지막 날. GDC 비즈니스 홀에서도 한적한 변두리에 위치한 하복의 부스를 찾아갔다. 하복의 부스는 그 엔진의 이미지와 그대로 맞아떨어졌다. 한적했지만 정돈되어 있었고, 거대했다. 마케팅 디렉터인 'Darren Williams'와 PM 총괄 'Andrew Bowell', 그리고 한국 지사의 김병수 지사장과 강정훈 과장이 함께 한 자리. 이야기 언리얼 엔진과 유니티 엔진이 서로 가격 정책을 바꾸고 차세대 게임에 대한 장악력을 확보하려 하는 상황이다. 하복은 앞으로의 시장을 어떻게 개척해 나갈 생각일지 궁금했다.

▲ 하복 엔진 PM 총괄 'Andrew Bowell'


■ 다양한 미들웨어 엔진의 본산

'하복' 하면 생각나는 것은 일단 '물리 엔진'이다. 지금에 이르러 물리 효과는 게임 전반에 다양하게 활용되고 있고, 사실상 물리 효과가 없는 게임은 '뭔가 고전적이다.'라는 느낌이 들기까지 한다. 하지만 과거, '하프라이프2'의 테크데모가 공개되었을 당시, 게이머들의 반응은 전례 없이 뜨거웠다. 그리고 그 뒤에, 하복 물리 엔진이 있었다.

그렇게 엔비디아의 '피직스'와 함께 물리 엔진의 양대 산맥으로 불리던 하복은 이후로도 다양한 미들웨어 엔진을 만들어냈다. AI의 경로 설정 및 행동 양식을 지정하는 '하복 AI', 각종 파괴 행동에서 자연스러운 효과를 만들어주는 '하복 디스트럭션', 종합 게임 엔진인 '하복 비전 엔진'에 이르기까지 총 7종의 엔진을 시중에 내놓았다. 그리고 그 엔진들은, 다른 업체의 게임 엔진과 함께 게임을 만들어냈다. 가령 '인하우스 엔진'을 사용하면서 하복 물리 엔진을 사용하는 경우나, 언리얼 엔진으로 게임의 기반을 짜면서도 하복 AI를 이용해 게임의 틀을 짜는 식이다.

▲ NPC의 행동 양식을 짜는 '하복 AI'


이렇듯 하복이 강조하는 것은 바로 호환성, 그리고 범용성이었다. 현존하는 모든 게임 플랫폼에 대응할 수 있는 것도 하복의 '범용성'을 말하는 척도 중 하나라 볼 수 있다. 그러면서도 게임 내에서 '엔진'이 풍기는 향기를 배제하고, 그 게임 자체만의 매력이 더 살아날 수 있도록 하는 마치 찌개에 넣는 조미료 같은 느낌으로 말이다. 그 때문일까? 하복 엔진은 생각보다 다양한 플랫폼의 수많은 게임에 적용되어 있었다. 현재까지 출시된 상용화 타이틀 기준으로 그 수는 600여 종에 이르고 있었다.

물론 하복 엔진을 전적으로 사용해 만든 게임도 존재한다. 최근 공개된 작품 중 대표적인 작품이 바로 네오위즈의 '애스커'다. 애스커는 하복 비전 엔진을 포함해 다양한 하복의 엔진을 사용했다. 강정훈 과장의 말을 빌리자면 '하복 엔진을 사용해 제작할 수 있는 게임의 표준'으로 삼을만한 작품이다. 눈여겨볼 점은 바로 '파괴'의 효과다. 애스커에서는 다양한 사물이 파괴되고, 각각의 파티클이 독립적인 물리 효과를 받게 된다. 하지만 그 정도는 다들 한다. 멋진 것은 그 모든 파티클의 효과가 네트워크에 동기화되어 게임에 접속해 있는 모든 유저들에게 실시간으로 같은 모습을 보인다는 점이다.

▲ 하복 엔진을 다각적으로 사용해 만든 '애스커'


각각의 엔진 또한 강력했다. '하복 FX'의 시연 프로그램은 언덕을 내려오는 엄청나게 많은 자갈의 모습을 보여주었는데, 8만여 개에 이르는 파티클들이 각각 물리 효과를 적용받아 자연스러운 움직임을 보여주었다. 하복 AI 엔진은 수천, 수만에 달하는 AI들의 경로를 자동으로 잡아주었으며, 옷감 효과를 전문적으로 만들어주는 '하복 Cloth' 엔진은 옷과 동체가 겹쳐지는 일 없이 자연스러운 옷감의 나풀거림을 표현해냈다.

강력한 각각의 엔진, 그리고 게임 자체의 색을 살리는 힘. 그 모든 것이 모여 하복의 매력을 만들어냈다. 높은 사양의 3D게임부터 대전 격투, 전략 시뮬레이션을 넘어서 모바일 게임에까지 적용될 수 있는 '범용성' 말이다.

▲ 혼자서도 충분히 게임을 뽑아낼 수 있다.


■ 드러내지 않는 조용한 강자.

하복 엔진은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CPU 제작사 중 하나인 '인텔'의 자회사다. 물론 개발자들 사이에서 하복의 인지도는 높을 터였다. 그렇기에 15년이란 세월 동안 무리 없이 비즈니스를 해 왔을 테고, 노하우를 쌓아 왔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시점은 조금 다르다. 앞서 언급했던 언리얼 엔진과 유니티 엔진을 필두로, 수많은 게임 엔진들이 저렴한 가격에 솔루션을 제공하며 개발자 풀을 넓히고 있다. 하복의 생각이 궁금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질문에 하복 측은 아직 구체적인 답변은 할 수 없는 상황이라 말했다. 하지만 김병수 지사장의 '최상의 지원과 제안을 할 준비가 되어 있다.'라는 말에는 확신이 담겨 있었다. 하복은 이미 준비를 하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구체적으로 드러난 방침이나, 차후 정책은 없지만 말이다.

다만 '유동성' 높은 가격정책이 될 것이라는 정도는 들을 수 있었다. 예를 들어 프로젝트 성과 혹은 규모에 따라 엔진 사용료 또한 유동적으로 변화할 수 있으며, 그 때문에 작은 규모의 프로젝트라 탄력적인 자금 유용을 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주관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 부분이기에 조금은 걱정이 되었으나, 현재 상용화된 다른 엔진들과 가격 면에서 큰 차이가 없을 것이란 말에 안심할 수 있었다.

▲ 하복 엔진을 이용한 모바일 게임 '루팅 크라운'


반면, 하복 엔진을 사용하고 있는 개발자들에 대한 지원책은 확실히 보장되어 있었다. 하복 전체 직원 중 60-65퍼센트의 직원이 기술 지원 팀에 속해 있을 정도였다. 특히 한국 개발자들에 대한 지원에 대해서 하복은 그 어느 지역보다도 강력한 자신감을 보여주었다. 한국 지사 총인원의 약 80%가 기술 지원 인력이며, 본사 내부에도 전문적으로 한글화를 담당하는 '기술 번역'팀이 있을 정도였다. 이 팀이 존재함으로써 한국 지사에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도 즉각적으로 본사로 전달해 해결할 힘을 갖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하복 게임 엔진을 사용하는 게임사들이 쌓은 노하우는 결국 엔진 자체의 노하우가 되고, 나아가 새로 게임을 개발하는 이들에게 새로운 방법이 된다. 예를 들어 트리플A 게임으로 칭할 수 있는 '데스티니'의 게임 노하우를 그대로 묵혀두는 것이 아닌, 같은 '하복'엔진을 이용하는 이들과 공유함으로써 엔진 활용의 효율을 늘리고, 더 편한 개발 환경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 진짜 '가치'는 개발자들이 정하는 것.

하복은 그랬다. 불붙은 게임엔진 시장에서 살아남으려면, 끊임없는 홍보와 마케팅이 동반돼야 할 것이라는 예상과 달랐다. 오히려 김병수 지사장이 답답해할 정도로 그들은 자신을 내세우지 않았다. '하복 엔진이 좋은 엔진이라는 것은 쓰는 개발자들이 잘 알 것이다.' 자그마한 마을에 모여 새로운 엔진을 만들어간다는 하복의 마인드였다.

그리고 실제로도 강력했다. 각종 미들웨어 엔진, 그리고 주력 게임엔진인 '하복 비전 엔진'까지, 어디 가서도 빠지지 않을 강력한 퍼포먼스를 보여주는 엔진이라 할 만했다. 하복이 현재 주력하고 있는 분야는 '비전 엔진'의 지속적인 개선이었다. 하복의 다양한 미들웨어 엔진은 다른 게임 엔진들과 잘 융화되어 사용되고 있지만, 그들 역시 '주력 엔진'으로서의 욕심은 버리지 않고 있었다. 조용히, 그러나 강하게 그들의 엔진을 만들어나가는 것. 그것이 그들이 생각하는 '진짜 가치'이며 동시에 이 시장에서 살아남는 법인 듯싶었다.

▲ 하복의 주력 개발 엔진인 '비전 엔진'


샌프란시스코에서 만난 '하복'과의 만남은 상당히 즐거웠다.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프로모션'을 위한 자리임에도, 결코 엔진의 성능을 과장하거나, 뽐내지 않았다. 그저 담담하게 이야기하고, 받아들이는 사람이 스스로 판단하게끔 하였다. 그 때문에 더욱 자리가 편하지 않았나 싶었다. 장황한 문장, 그리고 연출된 PPT가 아닌, 그 자리에서 바로 엔진을 직접 실행해 화면을 보여주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물론 게임을 개발함에 엔진의 선택은 굉장히 신중하게 결정되어야 옳다. 게임의 방향, 그리고 의도하는 바에 따라 최적의 엔진을 선택해야 하고, 게임 엔진에 따른 이용료의 지급도 그 고려 대상이 될 것이다. '하복'과의 만남은 '확인'의 자리였다. '하복' 엔진이 여전히 훌륭한 퍼포먼스를 보여주며, 동시에 차기 게임 개발을 앞둔 개발자들이 고려할 수 있는 '선택지'의 하나로 꼽힐 수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