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소 진부하긴 하지만, 추억 속에 존재하는 대사 하나를 꺼내며 시작하고자 한다. 이 게임은 '추억'이라는 이름에 갖다붙여도 충분한 작품이니까.


"당신을 다시 한 번 만나고 싶습니다."


메인 컴퓨터 지그문트에 입력되어 있던 암호. 살라딘의 목소리와 함께 오딧세이는 출발했다. 새로운 미지의 세계를 향해. 사실 그 이후의 이야기가 궁금한 적도 많았다. 뫼비우스의 우주라는 세계관에 따라 그들은 무사히 새로운 땅에 도착해 '안타리아'라는 이름을 붙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 이전, 출발 직후에 과연 그들은 어떤 일을 겪었을까. 다시 1편의 이야기로 돌아간다는 것만 알려져 있을 뿐, 그 곳까지 가는 구체적인 과정은 상상의 영역에 머물러 있었다. 이를테면, 100명으로 출발했던 영능력자들 중 25명만 깨어나 빛의 12주신과 암흑의 13악신이 성립된 과정에 대한 구체적인 이야기 같은 것들 말이다. 넘버링 작품을 하나 따로 내서 그 부분을 다뤄줬더라면 어땠을까. 음... 별로 재미가 없었으려나.

어찌됐건 다시 한 번 만나고 싶었던 '창세기전' 시리즈의 후속작은 2009년 발표와 함께 윤곽이 드러났다. 한동안 잊고 있었던 설렘과 기대에 다시 불이 붙었다. 사실 이미 알고는 있었다. 신작이 나온다한들, 개인적인 상상의 영역을 채워줄 가능성은 지극히 낮다는 것을. 시리즈 전체를 아우르면서 형성된 뫼비우스의 우주에서 군데군데 비어있었던 의문을 풀어주는 정도나 되면 다행이었을 게다.

하지만 최연규 이사는 또 한 번 새로운 행보를 보여줬다. 창세기전 역사의 창조주이자 산증인임을 증명하듯, 그는 '원작을 그대로 놔둔다'는 길을 택했다. 평행세계와 시간여행이라는, 사실상 낯설지 않은 콘셉트였다. 그럼에도 기대감이 생겼던 건, 개인적인 창세기전 시리즈에 대한 감상 때문임을 부정하지 않겠다.

소프트맥스 최연규 이사


철가면(클라우제비츠) 형님은 패기충만하게 말씀하셨다. "목숨을 걸려면 미래에 걸어라! 라이트블링거와 함께!"라고. 정말 미안한 일이지만, 라이트블링거를 타고 아르케로 가려던 시도는 무위로 돌아갔다. 라이트블링거의 잔해로 건설된 시간 여행자들의 도시 '에스카토스'는 그 원인이자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제 9차 아수라 프로젝트... 모든 프로세스 종료.
오차율 5.672%. 루스 더 벨제부르, 모든 활동을 종료한다."


'창세기전3'의 엔딩에 등장했던 대사. 제 9차 프로젝트, 오차율 5.672%. 이 사소한 듯 사소하지 않은 사소한 것 같은 단어들에 새로운 창세기전의 핵심 개념이 담겨있는 셈이다. 라이트블링거가 본래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으니, '창세기전4'의 시작 지점을 따져보자면 '창세기전3'와 '창세기전3 파트2' 사이라고 할 수 있다.



본래 안타리아와 아르케는 서로 끊임없이 순환하는 관계였다. 위 대사에서도 언급됐듯, 9번째 순환 프로젝트에서의 오차율은 그리 높아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프로젝트가 반복되면서 오차율은 점점 커졌고, 그 과정에서 하나만 존재해야 하는 세계가 여럿으로 나눠져 평행세계를 형성했다는 설정이다.

그리고 그 안에서 새롭게 추가된 개념이 바로 '크로노너츠(시간여행자)'와 '아르카나'다. 좌초된 라이트블링거의 생존자들은 이 거대 전함의 코어로 시간나침반을 만들고, 그 잔해를 활용해 시간여행자들의 도시 '에스카토스'를 만든다. 이 곳을 기점으로 크로노너츠들은 시공간 도약 프로젝트가 실패한 원인을 파헤치기 위한 활동을 시작한다. 이는 기존에 알던 창세기전 세계관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가 진행될 것임을 알리는 출발선이다.


정사(正史, 정확한 사실의 역사. 또는 그런 기록)와 야사(野史, 민간(民間)에서 사사로이 기록한 역사)라는 개념이 있다. 창세기전 시리즈에서 '정사'라고 부를 수 있는 부분은 당연히 원작에서 다뤄진 이야기라고 봐야할 것이다. 하지만 창세기전4에서 정의된 '정사'는 원작의 내용과 다르다.

원작을 플레이했거나 익히 알고 있는 유저라면, "어? 내가 알던 거랑 다르네?"라는 의문을 가장 먼저 품게 될 것이다. 바로 여기에서 가장 원초적인 선택지가 발생한다. 원래 알고 있던 이야기대로 역사를 바꿔갈지, 새롭게 정립된 역사에 흥미를 느끼고 또다른 방식의 스토리 전개를 풀어갈지를 선택하게 되는 것이다.

통상적으로 시간여행을 소재로 한 콘텐츠를 접할 때면, 단골처럼 따라다니는 콘셉트가 있다. '뭔가 잘못 흘러가고 있으니, 시간을 되돌려 이것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설정. 과장을 좀 보태자면, 거의 실과 바늘 같은 관계다.

창세기전4는 여기에 한 가지 의문을 더 얹어놓는다. '잘못 흘러간다'는 것은 무엇을 기준으로 한 것인가? '올바른 역사'라는 것은 누가 정한 것인가? 현재를 살아가는 존재들이 스스로 기준을 세우고 더 나은 역사를 만들어가겠다는 의지. 창세기전4의 가장 기저에 깔려있는 신념이다.


어떤 점에서는 매력적일 수도 있다. 원작 시리즈를 플레이 해본 유저라면, 어떤 순간의 스토리 흐름에 반발심이 생긴 적도 있을 것이다. 그들은 그저 개발사가 짜놓은 '설정대로의 운명'을 맞이할 뿐이건만, 개인 취향이나 플레이 성향에 따라 아쉬움을 느꼈던 사례는 분명 있을 것이다.

즉, 달리 생각하면 각 캐릭터들의 운명 자체를 어느 정도 유저가 직접 쓸 수 있다고 볼 수도 있다. 음... 그런 시각에서 가만히 생각해보니 몇몇 떠오르는 인물이 있다. 내 손으로 꼭 다른 운명을 만들어보고픈 캐릭터 말이다. 부지불식간에 그 콘셉트가 내게도 제법 매력적으로 다가왔나보다.

물론, 처음에는 원작을 반영하려는 생각도 했었다. 하지만 이내 그런 시도가 별로 긍정적이지 않을 거라 판단했다고 한다. 연이은 시리즈를 출시하는 동안 생긴 설정 상의 구멍들도 시원스럽게 채워지지 않는 경향도 있었고.

평행세계라는 개념과 역사관의 대립. 이 두 요소가 도입되면서 창세기전4는 이데올로기적인 대립을 제시한다. 역사를 바꿀 것인가. 그대로 유지할 것인가. 작품의 핵심이 되는 크로노너츠들 사이에서 가장 근본적으로 다뤄지는 가치관이다.

절정의 밸런스 감각(?)을 맛보게 해줬던 창세기전 아레나...


창세기전이라는, 제법 거대한 스케일의 세계를 온라인으로 구현하는 과정은 적지 않은 난관의 연속이었을 것이다. 그 중에서 한 사람의 유저 입장이 되어 가장 우려되는 것을 꼽자면, 우선 스토리텔링이다. 감정이입이라든가 '주인공'으로서의 몰입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패키지 게임이던 시절, 플레이어는 게임 속 주인공에 '빙의'되는 것이 가능했다. 모니터 앞에 앉아있는 내가 곧 흑태자이자 시라노였고, 샤른호스트와 살라딘이 될 수 있었다. 그들이 겪는 일들은 내가 마음먹기에 따라 얼마든지 내 이야기가 될 수 있었으며, 더 깊게 파고들수록 각각의 캐릭터성을 온전히 만끽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온라인 게임은 다르다. 주위를 둘러보면 나와 똑같이 혹은 비슷하게 생긴 존재들이 여기저기 뛰어다닌다. 아무리 캐릭터에 온전히 몰입하려 노력해도, 이런 환경에서는 생각처럼 쉽지 않은 법이다. 이런 일이 반복되고 익숙해지다보면 어느새 캐릭터들 각각의 스토리와 개성은 그저 하나의 장식처럼 여겨지고 마는 것이다.



파트너인 노엘과 이안은 각각의 목적을 위해 '실험체'를 구해낸다.
이들 실험체가 바로 플레이어가 됨으로써, '2인칭 스토리텔링'이 시작된다.

인게임 내 파트너 선택 화면

다른 또 한 가지 우려는, 캐릭터에 관한 것이다. 어떻게 보면 스토리텔링에 대한 우려의 연장선이라고도 할 수 있다. 뇌리에 깊숙히 박힌 개성 넘치는 캐릭터들이 더 이상 고유한 것이 아니게 된다면?

즉, 이런 것이다. 창세기전4의 플레이 목표는 '캐릭터 수집'으로 귀결된다. 기존 MMORPG가 더 좋은 성능의 아이템을 획득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면, 창세기전4에서는 보다 저명한 영웅, 보다 다양한 캐릭터들을 모으는데 그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여러 캐릭터를 조합하는 '군진 시스템'을 게임의 핵심 요소로 이미 표방한 상황. 여기서 발생한 딜레마 하나는 꽤 강력하다. 흑태자라는 캐릭터 하나만을 놓고 예를 들어보겠다.

내 군진에 속한 흑태자와 다른 유저의 군진에 속한 흑태자. 앞서 말한 수많은 유저가 뛰어다니는 환경에서 흑태자의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게이시르 제국을 넘어 대륙 전체를 호령하던 유일무이의 존재는 이미 심각한 모순에 직면하고 마는 것이다.

그렇다고 흑태자라는 캐릭터를 한 유저에게만 줄 수도 없다. 과거 '4Leaf'에서 제공했던 '주사위의 잔영'과 같은 시스템이라면 또 모르겠지만, MMORPG라는 환경과는 많은 부분에서 다르기 때문에 동일선상에 놓고 생각해보기도 어렵다.

이에 대해 소프트맥스는 '아르카나'를 해답으로 내놨다. '창세기전3 파트2'를 플레이한 사람이라면, 엠블라가 주력했던 연구 과제 '달(Doll)'에 대해 알고 있을 것이다. 특정 무기질에 인간의 영자(靈子), 즉 영혼을 주입해 탄생한 인공 생명체 말이다.

이와 유사한 원리로, 각 인물들의 기억을 형상화시킨 존재를 가리켜 '아르카나'라 칭한다. 창세기전4에서 유저들이 만나게 될 이전 시리즈의 인물들 모두는, 본인이 아니라 과학기술로 형상화된 아르카나들이다. 이 하나의 설정으로 창세기전4는 '하나의 캐릭터가 여러 명 존재할 수 있는가?'라는 의문과 '원작 설정상 서로 적인 인물들이 함께 다닐 수 있는가?'라는 두 가지 난제를 모두 해결한 셈이다.

'창세기전4'의 오리지널 캐릭터는 크로노너츠,
원작 시리즈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아르카나로 보면 된다.

'나선의 우주(Spiral Genesis)' 세계관의 중심이 될 '에스카토스'.


잡지 같은 온라인 게임. 최연규 이사가 말하는 창세기전4의 서비스 방향이다.

물론 새로운 달의 스토리가 나온다고 해서 기존 콘텐츠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애초에 '평행세계'를 기반으로 하고 있는 만큼, 유저들의 플레이로 나타난 결과는 또 하나의 새로운 세계를 형성하게 된다. 즉, 언제든지 과거의 스토리를 다시 플레이할 수 있고, 서비스 도중 게임을 시작하더라도 진입장벽은 보다 낮을 거라는 설명이다.

'잡지'와 같은 콘셉트로 서비스할 예정이라는 창세기전4.
명칭부터가 '월간 창세기전'이다.

"자, 수집을 시작하지."

일러스트의 화풍이 상당히 달라졌지만 전체적인 반응은 꽤 긍정적이다.
보이스 녹음에는 가급적 과거 원작의 성우들을 기용하려 애썼다고.

그간 정말 많은 일이 있었다. 메인 일러스트레이터가 바뀌면서 원작과 달라진 일러스트는 항상 고민덩어리였다. 다행히 FGT에 참여한 팬들의 반응이 생각보다 좋아서 다행이었다고, 최연규 이사는 말한다.

군진 편집과 같은 고유의 시스템으로 인해 UI를 구현하는 것도 골칫거리였다. 실제로 많은 지적을 받았고, 앞으로도 역량을 집중해 고쳐나갈 계획이라고 한다. 몇 년 전과 달리, "게임을 가급적 쉽게 만들어달라"는 요청도 많았다. '쉬운 창세기전'이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데만도 상당한 기간이 소요됐다.

4월 16일부터 18일까지 3일. 그렇게 첩첩산중 같던 시간을 넘어 소프트맥스의 작품은 이제 첫 CBT라는 기로 앞에 섰다.


인터뷰 도중 최연규 이사가 언급했던 인물 '시저'는, 루비콘 강을 건너 로마로 진격하면서 불후의 명언을 남긴 바 있다.


"주사위는 던져졌다."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시장이다. 하지만 부디, 그 시절 소소한 행복과 추억을 남겨준 작품이기에 어떤 시도든 의미있는 결과를 낼 수 있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