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밍'.

모든 일에는 타이밍이 중요하다. 같은 일을 해도, 기막힌 타이밍에 이뤄져 빛을 보는가 하면, 소리소문없이 묻히기도 한다. 게임업계 또한 다르지 않다. 게임 시장에는 '이거다!'라고 말로 표현하긴 힘들지만, 모두가 공감하는 일종의 트렌드와 사이클이 존재한다. 마치 밤하늘에 떠있는 은하수의 흐름처럼 말이다. 그 트렌드에 맞춰 게임을 만들어내는 것. 그것이 게임업계에서의 황금 타이밍일 테다.

하지만 모든 경우가 그런 것은 아니다. 트렌드는 결국 새로운 유행을 따라 흘러간다. 그리고 그 유행을 만드는 건, 기존과는 다른,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는 게임이다. '스타크래프트'가 처음 나왔을 때 사람들은 불만을 표했다. 그간 익숙하던 UI가 아닌, 다른 방식의 인터페이스 때문에 불편하다는 의견이 대다수였다. 하지만 얼마 후, 사람들은 '스타크래프트'와 다른 UI를 불편하게 여겼다. 물론 그만큼 위험도 크다. 새로운 방식의 접근은 새로운 전기를 열 수도 있지만, 어떤 반향도 얻지 못할 수도 있다.

'슈퍼 이블 메가코프'의 '베인글로리'는 앞서 말한 트렌드를 꺾는, 기존과는 다른 게임이다. '모바일'을 지향하면서도, 굉장히 하드코어한 게임성을 갖추었다. '편리함', '자동화', '캐주얼'로 흐르는 모바일 게임 시장의 트렌드에 정면으로 반박하는 격이다. 놀라우면서 한편으론 걱정스러웠다. 트렌드를 따르지 않는 것은 모험이다. '베인글로리'가 자신만의 자리를 잡을지, 혹은 밀물과 같은 흐름에 꺾여 스러질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동시에 궁금했다. 그들은 굳이 왜 이런 도전을 하는 것인가.

그 와중 만나게 된 '슈퍼 이블 메가코프'의 윤태원 아시아태평양 총괄 대표는 이런 내 궁금함을 풀어주기에 제격인 사람이었다. EA, 블리자드, 워게이밍 등 굵직한 세계적 게임사들의 중역을 맡아왔고, '파이어폴'을 제작한 '레드5 스튜디오'의 설립자 중 한 명이기도 한 윤태원 대표. 첫 만남은 아니다. 작년 7월경, 워게이밍 아시아태평양 총괄 대표 및 한국 지사장을 역임할 당시 만난 후, 10개월여만의 만남이었다.

굵직한 대기업에서 편하게 일할 수 있었음에도 그는 왜 소규모 개발사인 '슈퍼 이블 메가코프'에 자리를 잡았을까? '베인글로리'라는 게임에서 그는 무엇을 느낀 것일까? 1시간의 시간 동안, 허심탄회한 이야기를 나눠 보았다.

관련 기사 바로가기 : [체험기] PC로 즐기는 AOS의 그 느낌, 온전히 모바일로! '베인글로리'

▲ '슈퍼 이블 메가코프' 윤태원 아시아 태평양 총괄 대표


Q. 워게이밍 재직 당시 이후 정말 오랜만의 만남이다. 현재 어떤 일을 맡고 있는가?

알다시피 '슈퍼 이블 메가코프'는 굉장히 작은 회사다. 아시아 태평양 총괄 대표라는 직함을 얻게 되었지만, 직원이 워낙 적다 보니 이것저것 다 하는 상황이다. 전 직원이 35명에 개발자가 30명인데, 그나마도 나를 뺀 다른 네 명은 개발 쪽에서 일한 적이 있어 종종 개발에 참여하곤 한다. 전 직원 중에 코딩을 못하는 인원은 나밖에 없다.


Q. 아무 이유 없이 '슈퍼 이블 메가코프'에 합류하진 않았을 텐데, 어떤 계기가 있는가?

2달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시작해야 할 것 같다. 당시만 해도 난 '슈퍼 이블 메가코프'와 '베인글로리'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집에서 할 일 없이 놀고 있는 백수다 보니 집에서 '월드오브탱크 블리츠'만 하면서 놀았다. 두 달 만에 13,000판 가까이 할 정도였으니 얼마나 놀았는지 알 수 있을 거다.(웃음) 수영을 배우는 딸들을 수영장에 데려다 주고 집에서 블리츠만 하면서 놀던 즈음, 지인에게 전화가 왔다. '베인글로리'라는 게임이 있으니 한번 해보라는 것이었다.

한번 봤는데, 내 취향은 아닌 것 같아 안 했다. 그러니 다음날 또 전화가 오더라. 결국, 호기심에 시작하게 되었는데, 한 판 딱 해보고 나서 바로 '헉!'했다. 올해가 내가 게임업계에서 종사한 지 20년이 되는 해다. 이 게임 저 게임 다 보았는데, 보자마자 이건 특별한 게임이라는 느낌이 딱 하고 왔다. 비슷한 느낌이 들었던 게임은 블리자드에서 일하던 시절 보았던 '월드오브워크래프트'정도밖에 없었다. 관심이 생겨 회사에 대해 알아보았고, 그간 모바일 게임에 내가 갖고 있던 철학이 '슈퍼 이블 메가코프'가 가진 이상과 굉장히 비슷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곧바로 이메일을 보냈고, 5분 만에 답장이 왔다. 이후 음성 채팅 프로그램을 통해 수 시간 동안 이야기한 후 비행기 표를 받아 본사로 가게 되었다.

당시가 4월 초였다. '슈퍼 이블 메가코프'가 한창 중국과 일본을 오가며 아시아 시장 진출을 엿보던 때였는데, 그 일행을 따라 한참 동안 중국과 일본을 오가는 일정을 반복했다. 한 달 동안 집에 고작 2일을 들어갈 정도로 정신없이 돌아다녔던 것 같다. 그 일정이 끝날 때쯤 나의 의견을 물어보았고, 집에 돌아온 직후 바로 사인을 했다.

▲ GDC2015 당시 방문했던 '슈퍼 이블 메가코프'. 분명 큰 규모는 아니다.


Q. 비슷하다고 느꼈던 '모바일 게임에 대한 철학'이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캐주얼'이 아닌 '코어' 게임. 그것이 베인글로리의 최대 장점이다. '베인글로리'는 애초에 캐주얼을 생각하고 만든 게임이 아니다. PC 게임과 비슷한 수준의 코어 게임을 지향했기에, 기존의 모바일 게임과 차이가 생겨난다. 게임업계에서 오래 지내다 보면 일종의 순환을 느낄 수 있다. 최근 모바일 게임 시장과 가장 비슷한 상황을 꼽아 보자면, 80년대 초, 북미 콘솔 게임 시장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그 당시 북미 콘솔 게임 시장은 굉장히 짧은 시간에 마구잡이로 만든 게임들이 성행했고, 결국 '아타리 쇼크'라는 게임업계 최고의 흑역사 중 하나만을 남긴 채 쪼개지고 말았다. 좋은 퀄리티의 게임과 저급한 퀄리티의 게임이 마구잡이로 나오고 있는 지금 모바일 게임의 난장판을 뚫고 나올 게임은 결국 차별화된 퀄리티로 경쟁하는 게임들이 될 거로 생각한다. 그것이 우리가 되었건, 다른 회사가 되었건 말이다.


Q. '베인글로리'라는 게임이 가진 매력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슈퍼 이블 메가코프'의 개발진은 굉장히 다양한 경력을 갖고 있다. 락스타 스튜디오, 블리자드, 플레이피쉬, 글루 모바일, 라이엇 게임즈, EA 등등 이름만 대도 알 법한 강력한 게임사들을 거쳐왔거나, 혹은 그 회사를 설립했던 이들이 모여 있다. PC 게임을 개발하던 이들과 모바일 게임을 개발하던 이들이 균형 있게 섞여 있기 때문에 '슈퍼 이블 메가코프'만의 장점도 뚜렷하게 드러난다.

현재 모바일 게임 시장을 보면, 상위 인기 게임들은 모조리 '캐주얼 게임'들이다. 반전은 캐주얼이 아닌 코어 게임이 전체 매출의 7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는 거다. 충분히 경쟁력이 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현재 공개된 빌드가 생각보다 사양이 높아 걱정하는 분들도 많다. 아이폰 5S 이상이 아니면 구동이 되지 않으니 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상당히 먼 기간을 보고 있다. 모바일 장치의 발전 속도는 상상을 초월한다. 당장 2년 후만 돼도, 지금의 최신 기기가 고물로 취급받을 거다. 그때쯤 되면, 모든 기기에서 '베인글로리'를 무리 없이 구동할 수 있을 거다.

▲ 확실히 기존의 '모바일'과는 차별화되는 그래픽 퀄리티



Q. 두어 달 전, 직접 캘리포니아 본사를 방문해 게임을 즐겨 보았다. 확실히 '베인글로리'는 모바일이라 하기엔 너무 무거운 느낌이 없잖아 있었다. 배터리 문제도 심각했고, 한 판에 걸리는 플레이 타임도 길었다. '모바일 게임'의 장점인 '휴대성'을 포기하는 건가?

그게 '베인글로리'가 모바일 게임 시장에 던지는 화두가 될 거다. '모바일 게임' 하면 다들 생각하는 이미지는 비슷할 거다. 집에 가는 길에 지하철에서 짧게 할 수 있고, 밥을 먹으면서도 중간마다 만질 수 있는 게임. 근데 그게 모바일 게임의 '전부'인가? 하는 거다.

우리가 만드는 모바일 게임은 '들고 가서 할 수 있는 PC게임 수준의 게임'이다. 지하철을 타고 가거나, 버스를 타면서 할 수 없다는 건 우리도 잘 알고 있다. 다만, 애초에 그런 걸 노린 것이 아니니 아쉽지도 않다. 친구들과 함께 카페에 모여 할 수 있고, 집에서 침대에 누워 함께 할 수 있는 높은 수준의 게임. 우리가 노리는 건 그거다.

모바일 게임 시장을 분석하면서 흥미로운 결과를 얻었다. 모바일 게임을 하는 이들이 가장 많은 시간을 플레이하는 장소가 바로 '집'이라는 사실이다. 생각 외로 모바일 게임을 하는 이들이 무조건 밖에 나와서 돌아다니며 게임을 하는 것은 아니다. 와이파이 환경만 갖춰져 있다면, 컴퓨터를 들고 갈 수 없는 친척 집에서도 만족할 만한 수준의 게임을 즐길 수 있다는 것. 그것 역시 '모바일 게임'이 지향할 수 있는 방향이 아닐까 싶다.

▲ '랜 파티'에 적합한 게임 설계


Q. 한국에서도 정식 서비스를 한 지 1개월하고 보름 정도가 지났다. 현재 한국 시장에서 '베인글로리'의 상황은 어떤가?

현재까지 서비스 중인 시장 중 6-7번째 규모라고 볼 수 있다. 요즘 모바일 게임의 추세가 TV 광고 등을 통해 엄청난 양의 마케팅을 쏟아붓는 것을 고려해 보면, 홍보가 굉장히 적었던 것치곤 좋은 결과라고 생각하고 있다. 사실 대규모 광고를 하고 싶어도 아직 그 정도 여력이 안 된다.(웃음)


Q. 윤태원 대표 본인에게 가장 큰 목표 중 하나가 한국 시장에서의 성공적 행보가 아닐까 싶은데? 어떻게 생각하나

맞다. 다만, 다른 모바일 게임들처럼 TV 광고나 대규모의 홍보를 통해 유저를 끌어모으는 방식은 쓰지 않으려 한다. 우리는 당장 앞의 몇 개월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노리는 기간은 10년이다. 10년간 지속할 수 있는 프렌차이즈를 만드는 것. 그것이 우리의 최종 목적이고, 바람이다. 때문이 빠르게 유저가 들어왔다가 그만큼 빠르게 나가는 게임이 아닌, 한번 발을 붙이면 진득하게 플레이하게 되는 게임을 만들려고 한다.

'커뮤니티'에 힘을 주고 있는 이유도 그것이다. 스트리밍 플랫폼을 통해 게임을 방송하기도 하는데, 2월에 총 50만 뷰 정도가 나왔고, 3월에는 100만 뷰, 4월에 이르러 120만 뷰 정도가 나왔다. 점점 늘어가고 있으니 좋아지리라 예상한다. 기존 AOS 판에서 활동하던 유명인들 역시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자연스럽게 유저들이 생겨났으면 하는 바람이고, 기존의 마케팅 방법과는 상당히 다른 방향으로 가게 될 것이다.

한국 시장을 보면, 아직 '클로즈 베타'라고 생각해도 무방할 듯싶다. 한국 시장에서 IOS의 점유율은 크게 높은 편이 아니다. 여름 중으로 안드로이드 버전이 공개되겠지만, 그전까진 IOS를 이용하는 유저들에 한해 한정적으로 즐길 수 있는 상황이다. 그래서 지금은 수익에 집중하기보다는, 차분히 저변을 넓혀 안드로이드 버전이 나왔을 때 유저들이 모일 수 있도록 만들어가려고 한다.

▲ 공식 채널에는 다양한 영상이 올라온다.


Q. 중국, 일본을 수차례 왕복했다고 말했다. 현재 아시아 시장에서 '베인글로리'의 상황은 어떤지 물어도 되나?

생각보다 일본 시장에서 강력한 인기를 얻고 있다. 지금까지 내가 보아온 모든 게임의 하루평균 사용량은 단연코 한국이 가장 높았다. 근데 베인글로리의 경우 이례적으로 일본 게이머들이 한국 게이머들을 앞질렀다. 다음 주부터는 대만에서도 서비스를 시작할 예정이고, 앞으로 시장은 더욱 넓어질 것이다.

중국 시장은 아직 논의 중이라 보는 게 맞을 듯싶다. 중국 시장은 네트워크 상황이 썩 좋지 않기 때문에 한국만큼 유연한 플레이는 힘들겠지만, 애초에 우리가 노리는 유저층이 '캐주얼한 다수'가 아닌, 코어 게이머 층이기 때문에 큰 괴리는 없을 듯싶다.


Q. 블루투스 키보드나 마우스를 이용하면 게임을 더 편히 즐길 수 있을 것도 같다. '베인글로리'는 특유의 터치 컨트롤만을 지원하는데, 조작의 폭을 넓힐 생각은 없나? 그리고 스마트폰 유저와 태블릿 유저의 경우 장치의 차이가 실력의 차이를 만들어낼 우려는 없는가?

어찌 보면 아까 말한 '새로운 트렌드'라는 상황에 대입할 수 있는 문제이기도 하다. 터치를 통한 조작은 일견 불편해 보이지만, 익숙해지면 굉장히 편하다. 실제로 키보드와 마우스를 쓸 수 있는 빌드를 만들어 실험해본 적이 있다. 비슷한 실력의 유저가 게임을 할 경우, 터치를 이용해 게임을 즐기는 유저가 무조건 이기더라.

언제나 새로운 시도나 발상은 기존의 반대에 부딪힌다. 키보드와 마우스를 논하는 질문 역시 그와 비슷한 상황이라 생각된다. 과거 EA에서 근무할 때,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인 'C&C 레드 얼럿2'를 발매하기 전 음성 한글화를 강력하게 주장했던 적이 있었다. 모든 이들이 반대했다. 한글 음성은 익숙지도 않고, 유치하게 받아들여질 수 있으니 음성 한글화는 안된다는 말이었다. 결국, 내가 강력히 주장해 두 버전 모두 발매되었고, 음성 비 한글화 버전은 악성 재고로 남았다.

'월드오브워크래프트'의 순 한글화 역시 내가 밀어붙인 프로젝트다. '파이어볼'을 '화염구'로 번역하는 그 과정을 모두가 반대했지만, 유저들은 '한글의 아름다움을 느낀 게임은 처음이다.'라는 반응을 보여 주었다. '스타크래프트'가 처음 나왔을 때, 게이머들은 'C&C'시리즈와 다른 조작에 불편함을 말했다. 나중에 'C&C'의 차기 시리즈가 나왔을 땐, '스타크래프트'와 조작감이 다르다는 이유로 또 불만이 나왔다.

'익숙함'의 문제일 뿐이다. 터치 컨트롤도 결국 다양한 이들에게 받아들여질 것이다.

장치 간 실력 차이 역시 자주 듣는 질문이다. 나 역시 태블릿으로 플레이할 때 더 편하다고 느끼곤 있지만, 일단 조사 결과로 장치 간 승률의 차이는 제로에 가깝다. 실제로 회사 내에는 스마트폰 플레이로 모든 이들을 이기는 직원도 있다. 현재 가장 최적화된 환경은 큰 화면을 가진 스마트폰인 '아이폰 6+'라고 하지만, 결과를 볼 때 큰 차이가 없는 걸 보면 문제가 없다고 봐도 될 듯싶다.

▲ '터치 컨트롤'도 언젠가 허들 없이 받아들여질 것이다.


Q. 인터뷰에 응해 주어 감사하다. 마지막으로 한국 시장, 나아가 아시아 태평양 시장을 총괄하면서 어떤 목표를 가지고, 어떤 마음가짐으로 임할 생각인지 말해줄 수 있는가?

게임업계에서 일하면서 가장 마음이 아플 때가 '게임업계'가 욕을 먹을 때다. 참 마음이 아프더라. 내가 하고 싶은 건, 게임이 가지고 있는 그 매력을 잘 드러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도의에서 벗어난 편법이나, '게임'이라는 미디어가 가진 가치가 상업적 현실에 묻히지 않고 드러날 수 있도록 하는 것. 나아가 거친 시장을 뚫고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그것이 나의 목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