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으로서 타고난 재능에 기대어 시를 기다리지 마라. 그리고 재능이 없다고 펜을 내려놓고 한숨을 쉬지도 마라. 그렇게 하면 시는 절대로 운명의 조타수가 되어주지 않는다. 시인 역시 시의 길을 여는 조타수가 되려면 선천적인 재능보다 자신의 열정을 믿어야 한다. 일찍이 이광웅 시인은 "뭐든지 진짜가 되려거든 목숨을 걸고 해야 한다"고 했다. 열정의 노예가 되어 열정에 복무할 때 그 열정에 대한 신뢰를 가까스로 재능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 안도현 시인-


"노력하면 된다"는 말은 참 추상적이다. 듣는 사람 입장에서 무엇을 얼마나 해야 할지 모를 막연한 소리이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는 결과가 나오지 않으면, 누구나 금세 지치게 마련이다. 그렇다면 얼마나 노력해야 그 분야 최고의 자리에 다가갈 수 있을까. 이런 애매한 질문에 답을 제시하는 프로게이머가 있다. 시즌이 끝날 무렵에 무서운 미드 라이너로 성장해 있는 삼성 갤럭시의 '크라운' 이민호가 그 주인공이다. 많은 프로들 사이에서도 그가 보여준 노력과 결과는 단연 독보적이었다.

그런 '크라운'에게도 원하던 결과는 쉽게 다가오지 않았다. 승격 강등전까지 내려간 팀에서 시작했고, 2016 롤챔스 포스트 시즌에 진출해도 kt 롤스터라는 거대해 보이는 산을 넘지 못했다. 이번 스프링 스플릿 역시 1라운드만 하더라도 삼성 갤럭시가 SKT-kt에게 무너지며 '3강'에 들지 못한다는 말이 가득했다. '크라운' 역시 챔피언 폭에 대한 지적을 피해갈 수 없었다.

하지만 '크라운'과 삼성 갤럭시의 최종 성적표는 많은 이들을 놀라게 했다. 귀신같이 새로운 챔피언이 미드 라인에 등장하기 시작했고, 삼성 갤럭시도 함께 힘찬 날갯짓을 시작한 것. 작년 롤드컵 선발전에서 극적으로 kt 롤스터를 넘었을 때, 이번 정규 시즌을 2위로 마무리했을 때도 그랬다.

작년 섬머 포스트 시즌 당시. 자신의 좁은 챔피언 폭 때문에 패배했다고 생각한 '크라운'은 휴가마저 반납하고 새로운 카드를 준비했다고 한다. 첫선을 보인 탈리야 카드는 롤드컵 선발전에서 제대로 먹혀들었고,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는 점을 스스로 증명했다. 그리고 어느새 익숙하지 않은 탈리야와 신드라가 이민호에게 MVP라는 '왕관'을 씌어주고 있었다.


■ '크라운'과 함께 진화를 마친 '제 2의 빅토르'


▲ 정규 시즌 중 성장하는 '크라운'의 신드라-탈리야

많은 팀들에서 LoL 프로게이머에게 넓은 챔피언 폭을 요구한다. 빠른 메타 변화에 맞춰 따라가고 상대의 저격밴까지 대응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 스프링 스플릿 1라운드까지 유독 '크라운'은 다른 선수들이 잘 활용하지 않는 빅토르를 고수했다. 남들이 신선한 픽을 꺼내들며 주목을 받을 때도 꾸준히 빅토르 장인다운 면모를 보여줬다. 당시 OP로 불리는 코르키-르블랑을 상대로도 흔들리지 않을 정도로 한 챔피언에 대한 '크라운'의 이해도는 확실히 남달라 보였다.

그런 '크라운' 역시 빠른 경기 속도에 맞춰 중-후반을 바라봐야 했던 빅토르를 고집할 수만은 없었다. 2라운드부터 그 빈자리를 1라운드에서 단 한 번도 활용한 적 없었던 신드라로 채워야 했다. 지난 2016 LoL KeSPA 컵에서 패배한 뒤 공식 무대에서 볼 수 없었던 픽이었다.

하지만 '크라운'은 곧 신드라마저 '제 2의 빅토르'로 만들어버렸다. 2라운드 초반만 하더라도 뚜렷한 활약이 없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폭발적인 경기력이 나오기 시작했다. 신드라에 대한 이해도가 남다른 '폰' 허원석과 '페이커' 이상혁과 대결에서 신드라로 승리를 거두는 기염을 토했다. 특히, kt 롤스터전 첫 세트에서 0/4/1로 불안하게 출발했지만, 위축되지 않고 3세트에서 6/1/6을 기록하며 자신감을 표출했다. 경기마다 성장하는 '크라운' 신드라의 기세는 막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신드라 활용의 정점은 2라운드 MVP와 경기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그라가스의 술통을 맞고 날아가는 정신없는 교전 상황. '크라운'은 침착하게 상대 핵심 딜러인 코그모를 노렸다. 과감하게 들어오는 상대 앞라인에 전혀 위축되지 않고 정확하게 사거리를 잰 것이다. 신드라의 매서운 화력에 끊긴 코그모가 딜템이 아닌 수호천사를 3코어 아이템으로 선택할 수 밖에 없을 정도로 '크라운' 신드라의 위력은 어마어마했다.

MVP 전에서 꺼낸 탈리야도 신드라와 마찬가지였다. 스프링 스플릿 1라운드만 하더라도 탈리야의 궁극기를 바탕으로 팀적으로 도움이 되는 역할을 주로 담당했다. 하지만 2라운드 MVP전에서 솔로킬부터 드래곤 스틸, 4:1 전투까지 홀로 게임 전반을 쥐락펴락하는 놀라운 탈리야를 볼 수 있었다. 약 2개월 간 프로 무대에서 꺼내지 않은 탈리야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완벽했다. 스크림, 연습만을 통해 갈고 닦은 무기는 무엇이든 베어버릴 만큼 예리하게 들어갔다.

그동안 '크라운'은 선뜻 새로운 챔피언을 꺼내 들지 않았다. 자신이 깊이 있는 챔피언 플레이를 선보일 수 있을 때 확실한 카드로 꺼내 드는 것이다. 새로운 챔피언을 꺼내겠다는 자신감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오랫동안 쌓아온 연습량이 그 자신감의 근원이 아닐까 싶다.



■ 랭크 승률 최하위 라이즈, 프로게이머 '크라운'이 쓰면 또 다르다

▲ 7.5 패치노트

▲ 3월 28일 기준 1주일 챔피언 승률 - 출처 fow.kr


최근 연이은 너프를 받은 라이즈는 새롭게 승률 최하위 챔피언이 되버렸다. 3월 28일 기준으로 1주일 간 랭크 게임 승률이 40%도 안 될 정도로 너프 후 심각하게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다.

하지만 답답해 보이는 이 챔피언은 프로 단계에서 여전히 강력했다. SKT T1을 상대로 롱주 게이밍과 삼성 갤럭시가 라이즈를 꺼내 세트 별 승리를 가져간 바 있을 정도로 그 위력을 아직 잃지 않았다. 특히, '크라운' 이민호의 라이즈는 너프라는 단어가 떠오르지 않을 정도로 라이즈로 극한의 기량을 뽐냈다.

최강 SKT T1을 상대로 초-중반 주도권을 잡은 팀은 많았지만, 승리한 팀은 드물었다. 아프리카 프릭스마저 SKT T1에게 무너진 상황에서 그들의 후반 역전 공식은 결점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럼블로 대변되는 탑 라이너들과 '뱅' 배준식의 트레이드 마크 이즈리얼의 엄청난 후반 화력, '페이커' 이상혁의 슈퍼 플레이 등 아무리 불리한 상황에서도 SKT T1은 역전할 변수를 만들곤 했다. 상대가 조금이라도 바론 지역에서 망설이는 순간. SKT T1은 이를 놓치지 않고 어느새 분위기를 자신의 쪽으로 돌려놓았다.




그런데 삼성 갤럭시는 2라운드에서 이 공식을 유일하게 깨버린 팀이다. 정확한 시야 장악과 판단에 라이즈 궁극기를 더 해 확실히 바론을 챙기며 역전의 변수를 허용하지 않았다. 삼성 갤럭시 역시 SKT T1이 이득을 챙기고 정비하는 타이밍, 정글 지역에 시야가 없는 짧은 순간에 바론으로 향한 것이다. 예상을 뛰어넘는 라이즈의 공간 왜곡 판단에 완벽한 후반을 자랑했던 SKT T1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라인전에서도 '크라운'의 라이즈는 너프를 자신의 손으로 메꾸는 놀라운 광경을 보여줬다. 이전이라면 순식간에 스킬을 퍼부어 라이즈가 딜을 넣었겠지만, 주문 전이(E)의 재사용 대기시간이 늘어나면서 예전처럼 활용하기 힘들어졌다. 하지만 미리 주문 전이를 묻혀 놓고 뒤늦게 룬 감옥(W)을 쓰는 방식으로 '크라운'은 여전히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딜을 넣었다. 많은 이들이 너프를 직감할 수 있는 시점에서 챔피언의 본질을 꿰뚫은 '크라운'의 플레이는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프로'가 무엇인지, 그들이 바라보는 남다른 시각을 많은 이들에게 알린 경기였다.

대규모 패치가 있었을 때 '크라운'은 SNS에 패치 노트를 한 시간이나 봤다는 말을 했던 적이 있다. 많은 이들이 쉽게 패치노트 내용을 지나치게 마련이지만, '크라운'은 '프로'로서 작은 변화마저 고민하고 있었다. 이번 라이즈 너프 역시 각 스킬 별로 0.25초~1초 정도 차이로 누군가 쉽게 흘릴 법한 내용이었다. '크라운'은 이 작은 차이마저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지를 고민한 흔적이 플레이를 통해 드러나고 있다.

노력은 결과가 아니다. 하지만 '크라운'을 보면 절실한 노력은 언젠가 결과로 나타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지 않은가. 그가 노력으로 만들어낼 새로운 '제 2의 빅토르'가 등장해 어떤 파란을 일으킬지가 궁금해진다.

▲ 출처 : '크라운' 이민호 개인 SN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