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카르타에서도 아침이 힘들기는 마찬가지다. 자기 전에 설정해놓은 알람이 귓구멍을 통해 열심히 내 고막을 때렸지만, 내 몸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겨우 눈을 뜨고 10분 타이머를 새로 맞춘 다음에 다시 잠을 청했다. 그러고도 지난 이틀 동안 자카르타에서 쌓인 피로는 쉽게 풀리지 않았다.

그래도 3일 차는 중요한 날이었다. 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 LoL 부문 결승전이 진행되는 날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대진도 대한민국 대표팀과 중국 대표팀의 매치업이다. 이보다 중요한 날이 또 어디 있겠는가. 이걸 위해 비행기를 타고 이토록 먼 인도네시아의 수도 자카르타에 온 것 아니겠나. 부푼 마음을 다잡고 이제는 익숙해진 마하카 스퀘어로 향했다.

대만과 사우디아라비아의 3, 4위전이 곧 시작할 시간이었는데 이 경기에는 다들 큰 관심이 없는지 미디어 룸은 한산했다. 그래서 1층 카페에 가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여유있게 사들고 미디어 룸으로 돌아가 커피를 홀짝홀짝 마시며 잠깐의 여유를 즐겼다.


다시 보게 된 사람들
그리고 깜짝 등장한 반가운 얼굴까지


그동안 마하카 스퀘어에서 참 다양한 사람들을 봤다. 매일 의사소통을 나누고 도움을 받았던 한국e스포츠협회의 김종성 홍보팀장과 유동구 대리, 라이엇게임즈 코리아 e스포츠팀의 이호민 대리와 어김없이 인사를 나눴다. 경기장 내부를 돌아다니다가 마주친 최우범 감독과 이재민 코치를 비롯한 선수단과는 혹시나 경기 준비에 방해가 될까 가벼운 목례만 주고 받았다.

현지에서 처음 봤던 사람들 역시 이번에도 경기장에 모습을 비췄다. LPL 아나운서 '캔디스'와 많은 수의 중국 응원단, 목이 쉰 상태에도 '대~한민국!'을 선창했던 태극기 사나이, 대규모 현지 응원단을 꾸린 한국게임산업협회 회원 게임사 사람들까지. '페이커' 이상혁을 응원하기 위해 먼 타지까지 날아온 '페이커'의 할머니와 아버지 등 가족들도 다시 만났다. 그리고 한국 지상파 방송국에서 e스포츠 경기를 직접 취재하러 왔던 기자들도 또 다시 마하카 스퀘어를 찾았다.

▲ 트페 장인으로 유명했던 '미사야'

3일 차 들어 처음 보는 얼굴들도 있었다. 중국의 트위스티드 페이트 장인으로 현역 시절에 캐리력을 뽐냈던 '미사야'가 경기장을 찾아 중국 응원단 무리에 합류했다. 나중에 알고보니 '미사야'는 첫 날부터 경기장을 방문했다고 한다. 그래도 난 3일 차에 그의 얼굴을 처음 봤다.

가장 반가웠던 인물은 대한민국 e스포츠 역사의 산증인이자 '갓'이라고 불리는 사나이, 전용준 캐스터였다. 그는 라이엇게임즈 코리아의 도움을 받아 현지에서 직접 선수들을 응원하기 위해 경기장을 찾았다고 밝혔다. 실제로 전용준 캐스터는 결승전이 진행되는 내내 대규모 현지 응원단과 함께 관객석에 앉아 응원 함성을 주도했다.

▲ 경기장을 찾은 전용준 캐스터

▲ 결승전 내내 집중해서 경기를 관람했다.


대한민국과 중국은 꽤 오래 전부터 LoL e스포츠에서 라이벌이었다. 대한민국이 중국을 상대로 내리 승리했던 적도 있었고, 최근 구도처럼 중국이 대한민국을 상대로 연거푸 대회를 제패하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마하카 스퀘어에는 뜨거운 응원전이 결승전 내내 이어졌다.

▲ '짜요!'와 '대~한민국!'이 계속 울려 퍼졌다.

수적으로는 중국 응원단이 대한민국 응원단을 압도했다. 중국 대표팀을 응원하기 위해 경기장을 찾은 일반 관객들은 물론, 현지 취재를 온 중국 기자들 대부분이 함께 응원을 펼쳤기 때문이다. 이들은 중국 국기를 손에 들고 연신 '짜요!'를 외쳤다.

대한민국 응원단도 목소리 크기로는 지지 않았다. 준비해온 대형 태극기나 응원용 수건을 손에 들고 이리저리 흔들면서 '대~한민국!'을 외쳤다. 비록, 현지 취재 업무 때문에 그 자리에 함께 앉아 대한민국 대표팀을 응원할 수는 없었지만, 마음만은 그들이 앉은 바로 옆자리에 놔둔 채 미디어 룸으로 돌아갔다.


은메달... 아쉽긴 하지만
태극전사여, 눈물을 닦고 고개를 들라

대한민국 LoL 대표팀의 경기를 두 눈에 담기 위해 현장을 찾았던 나 역시 전국민과 한마음으로 대한민국 대표팀의 우승을 바랐다. 대표팀 선수들이 시상대 한가운데 서서 금메달을 목에 걸고 애국가가 울려 퍼지는 곳을 향해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는 모습을 상상하면서 말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내 예상과는 다른 결과가 나왔다. 대한민국 대표팀은 중국 대표팀과의 결승전에서 분전했지만 세트 스코어 1:3으로 패배, 은메달에 만족해야 했다. 중국 대표팀은 예선전과 확연히 달라진 경기력을 보여줬고, 팀의 에이스인 '우지'를 필두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 중국 대표팀이 금메달의 주인공이 됐고

▲ 중국의 국기인 오성홍기가 대한민국의 태극기보다 위에 걸렸다.

▲ '아론' 감독은 선수들과 기쁨을 나눴고

▲ 중국 대표팀은 시상대에 오르기 전, 대만 대표팀과 대한민국 대표팀에게 악수를 청했다.

▲ 그리고 우승자의 특권인 세레머니를 즐겼다.

결승전에서 중국 대표팀에게 패배하긴 했지만, 대한민국 대표팀은 눈에 띄는 성과를 올렸다. 각자의 팀에 소속되어 있는 선수들이 처음으로 한데 모여 짧은 시간 안에 한 팀이 되기 위해 갖은 노력을 했다. 그리고 8강부터 4강까지 단 한 번도 패배하지 않으며 결승 진출에 성공했다. 전체 경기를 치른 횟수로 따지면 12전 9승 3패다. 8강에서 6전 전승, 4강에서 세트 스코어 2:0 완승, 결승전에서 세트 스코어 1:3 패배였다. 그리고 첫 국가 대항전에서 은메달을 차지했다.

그럼에도 대한민국 대표 선수단은 한 번도 웃지 않았다. 그들은 2위가 확정된 직후부터 그들의 마지막 공식 일정이었던 미디어 룸 매체 공동 인터뷰까지 내내 고개를 숙인 채 죄인처럼 행동했다. 경기장에서 그들을 향해 쏟아졌던 박수갈채에도, 믹스존을 지날 때 기자들과 관객들이 보낸 격려와 박수에도, 미디어 룸에서 각국 기자들의 위로와 박수를 받을 때조차도 그들은 웃지 않았다. 아니, 웃지 못했다.

▲ 그들은 죄인처럼 행동했다.

▲ 은메달을 목에 거는 순간에도

▲ 믹스존에서도, 미디어 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몇몇 선수들은 아쉬움과 죄송함에 눈물을 보였다. 특히, '룰러' 박재혁은 시상대에서도, 믹스존에서도 계속 울기만 했다. 목놓아 울지도 못하고 숨어서 눈물을 훔쳤다. 마치 자신이 우는 걸 누군가 발견하면 크게 혼이라도 나는 것처럼. 그런 그의 모습에 인터뷰를 이어가던 기자들이 먼저 위로와 격려의 말을 건낼 정도였다. 나도 '룰러'에게 "울지 마요, 잘했어요"라고 위로를 해줬는데 '룰러'는 울먹이느라 대답도 채 못하고 꾸벅 목인사만 깊게 하고 퇴장했다.

다들 누군가 질문을 던지면 "죄송하다"는 말 밖에 하지 않았다. 은메달을 목에 건 소감을 물어봐도 죄송하다는 답변이 돌아왔고, 힘든 점이 있었냐고 물어봐도 죄송하다는 말로 대답을 마쳤다. 그들은 처음 열린 아시안게임 e스포츠 LoL 부문에서 2위라는 성적을 거두고도 죄인처럼 굴었다.

▲ 우리보다 낮은 순위를 기록한 대만 대표팀은 죄인처럼 행동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은 죄인이 아니다. 그들은 우리에게 8강부터 4강까지 총 8전 전승이라는 놀라운 기록을 이미 보여줬다. 많은 국민이 지상파에서 LoL 대회가 중계되는 걸 지켜봤고, e스포츠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평소 e스포츠를 취재하지 않던 많은 매체에서 이번 아시안게임 LoL 경기를 직접 취재했다. 그들은 이미 우리에게 많은 선물을 안겨줬다. LoL 태극전사들이 부디 눈물을 닦고 고개를 들었으면 좋겠다.


자카르타 현지 취재 : 박범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