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심하시오. 스트롬의 첩자는 어디에나 있으니까."


순간 나도 모르게 뒤를 돌아보려고 움찔거렸다면, 아무도 믿지 않겠지.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모르겠다. 그런데 그 일이 진짜로 일어났습니다? 녹음실에 들어가 잔뜩 힘을 주고 연기하는 성우를 마주하고 앉아있노라면 절로 그렇게 된다. 이건 말로 설명이 안된다.


타짜의 아귀는 상상력이 풍부하면 인생 고달프다고 했던가. 반대로 말하고 싶다. 상상력이야 말로 인간이 가진 축복이라고. 그리고 그 축복은 눈 앞에 펼쳐진 3D 게임화면이 없을 때, 오히려 더 생생한 현실이 된다. 에이지 오브 코난의 녹음 스튜디오에서 오히려 진짜 NPC가, 진짜 몬스터가 눈 앞에 있는 것 같은 체험을 했고, 그것은 한 명의 성우가 만들어낸 실제였다.



[ 녹음은 이런 식으로 진행된다. 짧은 현장 스케치 ]



이것이 성우의 힘인가 싶었다. 그날 기자는 회사로 돌아오는 내내 마법사와 트롤의 목소리를 흉내 내느라 여념이 없었고, 동료 기자의 핀잔도 끊이지 않았다.


마침 그 날은 에이지 오브 코난의 마지막 녹음이 진행되던 날. 에이지 오브 코난의 성우 녹음은 이미 확장팩 분량까지 작업이 끝났지만, 마지막으로 수정할 부분이 있었다고 한다. 물론 마지막이라는 것이 정말 마지막을 뜻하지는 않겠지만.


네오위즈의 코난 ‘한국화’ 스케일은 인상적인 부분이 있는데, 이를테면 아예 전용 폰트를 만들어 버렸다. 또 개발자들을 한국에 데리고 와서 민속촌이든 어디든 투어를 시킨 다음에 확장팩의 아시아 지역의 모델로 사용하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한국어 버전 음성 녹음도 최고수준이다. 외국 영화를 한국에 수입해 번역을 담당했던 전문가 집단이 네오위즈에 합류했다. 국내 웬만한 성우들이 총동원되어 6개월 째 음성 녹음이 진행되고 있다. 무엇보다 녹음이 진행되고 있는 곳이 무사이 스튜디오다.


못 들어 보셨다고? 간단히 이렇게 이야기해보자.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의 모든 한글 음성 녹음을 담당했던 사람이 바로 무사이 스튜디오의 이인욱 감독이다. 인터뷰 내내 스스로를 하수라 불렀던 그는 사실 게임 녹음계에서는 최고수의 반열에 오른 사람이 아니던가.



[ 무사이 스튜디오 이인욱 감독 ]



= 이제까지 어떤 작업들을 해오셨나요.

와우가 이 땅에 나올 때부터 제 손을 거쳤고요. 헤일로 시리즈, 로스트 오딧세이 등 많죠. 저희가 한글화만 하는 줄 아시는데, 프리스타일 같은 경우는 이펙트와 BGM까지 했죠. 제페토에서 만든 불카누스 같은 경우는 2005년 사운드 대상을 받기도 했습니다. 지금은 킹덤언더파이어2의 모든 걸 진행하고 있고요.


= 원래 게임 사운드를 공부하셨나요.

원래 전공은 해양선박공학과거든요. 전공이랑은 다르죠. 이전에는 광고 영상 쪽에 있었어요. 그런데 거기 있다 보니까 게임사운드 부분이 너무 열악하다고 할까요. 전문가가 없더라고요. 그렇다고 제가 전문가라는 건 아니지만요. 우연한 기회에 시작하게 되었는데 운이 좋았고 다들 좋아해주셔서 여기까지 오게 되었네요.


= 원래 게임을 좋아하시나 봐요.

다 좋아합니다. 레이싱만 빼고요. 제일 좋아하는 건 경영시뮬레이션이고요. RTS, RPG, 온라인, 콘솔 가리지 않고 다 좋아합니다.


= 게임 사운드 녹음을 하려면 게임에 대해서도 잘 알아야겠어요.

때로는 보안을 이유로 아무런 정보를 주지 않는 경우가 있어요. 예전에 하프라이프2를 녹음할 때가 그랬죠. 조금의 영상이라도 달라. 다행히 생각보다 잘 나왔어요. 또 게임이다 보니 개발단계에서는 이랬는데 게임이 완성되면서 바뀌는 경우가 있어요. 헤일로에 함장은 처음에는 50대 인물이었거든요. 그런데 게임이 완성되면서 70대가 되어버렸어요. 녹음을 다시 해야 한다고 무지 요구했는데 출시 일정 때문에 안 된다. 그러면, ‘야이 씨!’


= 그럼 못하고 나가는 경우도 있나요.

아니죠. 합니다. 어떻게 해서든 해야 되죠. 왜냐하면 유저 분들은 그런 내용을 모르고 ‘왜 이렇게 해놨을까’ 하니까요. 어떻게 해서든 저희가 책임져야 하는 부분이니까요. 콘솔은 한번 찍히면 끝이니까 악착같이 바꿔야죠.


= 그런 경우에 책임지고 하는 것도 있어요?

법적인 책임을 지는 건 아니지만 돈을 받고 하는 거니까. 우리의 이름이 걸린 부분이니까 목숨 걸고 해야죠. 타협은 별로 안 좋아해요. 제가 만족해야 유저들도 만족하는 거고.





= 코난 작업은 꽤 오래 한 걸로 알고 있어요.

분량 면으로도 정말 많고요. 성우 숫자도 역대 최고급이에요. 정말 많이 들어갔죠. 대한민국에서 활동하는 성우들이 다 왔다고 생각하면 될 정도죠.


= 그렇게 많은 성우 분들이 참가했으면 배역을 나누는 것도 일이었겠네요.

배역을 잘 잡으면 50% 성공은 먹고 들어가거든요. 배역을 잘못 잡으면 영 이상해져요. 이 캐릭터는 이 보이스로. 까부는 연기, 양아치 연기라던가 그런 연기를 잘하는 성우 분들이 있거든요. 그런 배치를 잘 해야죠. 배역을 잘못 맡으면 서로 힘들죠.


= 아무래도 게임이니까 성우 분이 어렵지 않을까 싶어요. 영상녹음과 달리.

영상은 영상 안에 답이 다 있기 때문에 그걸 그냥 보고 가면 되는데, 게임은 그렇지 않아요. 녹음 들어가기 전에 연출을 하는 사람이 모든 걸 다 밑그림을 그려야 됩니다. 어떤 캐릭터와 어떤 캐릭터가 지금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까 이 캐릭터는 어떤 톤으로 가고, 이 성우를 어떻게 이끌어야 하는 모든 계획이 짜여 있는 상태에서 녹음을 들어가죠. 그것 없이 녹음을 하게 되면 해놓고도 뭔가 이상하죠.


= 코난은 외국 사운드가 이미 있는 게임이잖아요.

외국에서 녹음을 해놓은 게 배역설정과 보이스가 다 안 맞았어요. 생김새는 4~50대인데 설정은 20대이고 보이스는 20대로 녹음해놨어요. 어떤 경로로 나이가 들게 되었는지 하는 걸 개발자들은 알겠지만 유저들은 모르죠. ‘야 왜 목소리가 이래?’ 그런 괴리감이 생기거든요. 저도 10년 전에 녹음할 때는 다 이유가 있겠지 하면서 그대로 따라갔는데, 그게 하수더라고요. 그래서 그런 부분은 비주얼에 맞춰서 배역을 바꿨죠. 클라이언트 분들도 동의를 해주셨고요. 영문으로 해보실 기회가 있으실지 모르겠는데 영문과 톤 차이가 많이 날 겁니다.


= 코난은 연령대가 높은 게임이라서 대사들도 과격하다고 할까 그런 부분이 있는데.

전 좋아요. 19세 게임인데요. 영화에서는 19세 영화면 뭐, 욕해야 할 때 쌍 욕 다 하는데, 왜 게임에서는 제일 심한 욕이 ‘야 임마’인지 이해가 안 되요. 게임은 가상체험이기 때문에 최대한 리얼리티를 살려야죠. 헤일로 할 때도 못 배운 전투병이 적들한테 ‘야 이 자식아’. 이건 말이 안 되는 거죠. X새끼들 하고 해줘야 되는데. 그래서 이번에 코난도 녹음하면서 번역 상에서 좀 쎈 말들, 정말 찬성해요. 어차피 19세인데. 욕이 남발하면 지저분해지지만 욕이 나와야 할 때 나오는 건 맛있습니다.





= 게임 외에 작업하시는 분야가 있어요?

애니메이션도 하죠.


= 게임과는 어떤 차이가 있나요.

애니메이션 녹음은 이게 뭔지 성우 분들이 다 알고 옵니다. 시사하고 입까지 맞춰보고 오시죠. 게임은 그런 게 없죠. 이게 무슨 게임인지도 모르고 오시니까요. 하기야 애니메이션이 편합니다.


= 요즘은 그래도 게임 녹음도 많아졌잖아요.

시대가 많이 바뀌어서, 전에는 ‘게임’하면 좀 치부하는 게 있었어요. 제가 90년대 중반 광고 일할 때, 뮤직비디오 찍어라 그러면 아이 쪽 팔리게 무슨 뮤직비디오야, 그런 시절이 있었거든요. 게임도 그런 시기가 있었죠.

지금은 그런 시대를 지나서 성우 분들도 스스로 연구하고 계세요. 게임이 우리나라의 중요한 문화산업이라고 하는데 그에 걸맞게 사운드 부분 기술도 발전해야 하고요. 성우들과 많이 이야기하고 있죠.

아까처럼 괴물들 목소리 내는 사람이 별로 없어요. 게임 쪽에는 이런 사람들이 많이 필요한데, 성우들은 꼭 방송국을 거쳐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방송국에 저런 괴물 목소리가 왜 필요합니까. 맑고 고운 꾀꼬리 같은 목소리가 필요하지. 그런 부분이 게임하는 입장에서는 좀 어렵죠.


= 앞으로는 활성화 되겠죠?

성우라는 직업이 많은 훈련이 필요한 직업이거든요. 실제로 연극하시는 분들과도 같이 작업을 해봤는데, 아무래도 연극하시는 분들은 행동이 목소리 연기에 앞서야 되는 분들이라 다르더라고요. 저희도 많이 고민하고 있습니다.


= 이제 국내 대부분의 성우 분들이 게임 녹음 경험을 가지고 있겠네요.

처음 해 본 사람도 있고요. 물론 게임에 관심이 별로 없는 분들은 녹음 끝나고 전화와서 내가 저번에 무슨 게임했니 그러는 분들도 있고요. 게임을 정말 좋아하는 분들도 있죠.

방금 최석필씨 같은 경우는 엑스박스가 처음 나왔을 때 차에다 달고 다녔어요. 거기서 영화보고 게임하고 그러고 다니셨죠. 얼리 어덥터에 게임 매니아라. 게임에 관심 많은 분들이랑 하게 되면 으쌰으쌰 하게 되죠.



[ 최석필 성우, 와우에서는 쓰랄의 목소리 연기를 맡았던 분이다 ]



= 게임 사운드에도 여러 가지가 있잖아요.

영화는 사운드 슈퍼 바이저가 있어서 전체적인 소리 믹싱이나 BG를 어떻게 할 지 다 설계하는 분들이 있어요. 게임계도 그런 분들이 계시긴 한데… 음악 만드는 분들, 보이스 하시는 분들, 이펙트를 묶어서 총괄하는 슈퍼바이저 분들이 많이 나와야겠죠.

물론 슈퍼바이저가 직접적으로 음악을 만들고 하는 건 아닙니다. 저보고 작곡을 하라 하면 이상하게 될 거에요. 하지만 이런 분위기에는 이런 것들이 요렇게 나오면 좋겠다 하는 걸 구성해나가는 거거든요. 거기에 맞춰서 곡 쓰는 분들이 맞춰 가는 거죠.

영화는 장면에 맞게 소리를 섞으면 되는데 게임은 그게 달라요. 여러 가지 음원을 불러와서 동시에 재생되는 것이기 때문에 정말 어려워요. 톤을 맞춘다거나 하는 것부터 해서.


= 게임이 다른 사운드 분야랑 많이 다른가봐요.

정말 다르죠. 제가 광고할 때는 ‘게임 거 뭐가 어려워’ 했는데 10년 했는데도 어려워요. 게임 사운드가 제가 지금까지 해온 일 중에 제일 어렵고, 사운드 부분에서 제일 어려운 게 게임 사운드에요.


= 골수게이머로서의 게임에 대한 철학이 있을 것 같은데.

그렇지 않습니다. 게임을 즐기는 유저일 뿐이에요.


= 그래도 게임 제작의 한 부분을 담당하고 있으시잖아요.

아직 멀었습니다. 아직 너무나 하수에요. 블리자드를 보면 사운드 팀이 본사에 4명 정도 있다 하더라고요. 그런데 그들은 정말 대단한 인간 같아요. 한 번 보고 싶어하고 있죠. 지난 번에 스튜디오에서 한 번 본사 분들이 왔을 때 그런 이야기를 하기도 했고요. 사실 한 게임을 가지고 3~4년씩 만들면 그 정도는 만들 수 있긴 하죠. 그런데 아직 우리나라는 조금 촉박하니까.


= 국내에 이렇게 게임 사운드를 담당하는 업체가 많은가요.

업체가 많지는 않고, 프리랜서로 활동하는 분들이 많으세요. 큰 회사들 같은 경우는 자체 사운드팀을 갖고 있고요. 중소업체는 외주를 주고 하는데 어렵기 때문에 제작단가가 좋지는 않습니다. 기술적인 부분, 기획부분, 그래픽 부분은 다들 올라가고 있는데 사운드 부분은 아직도 그렇게 많이 성장하지 못했어요. 기술적으로요. 사운드를 담당하고 계시는 분들이 정말 많이 노력해서, 영화사운드 좋지 않습니까? 그 정도의 수준으로 올라갈 수 있게 해야죠.





= 게임 지망생들이 많은데 프로그램, 디자인, 기획 쪽으로 많이 생각하지 사운드 쪽은 아직 많이들생각을 안하고 있는 것 같아요.

사운드 하지 마세요. 어려워요. (웃음)


= 그래도 보람과 성취감은 있으시잖아요.

제일 좋을 때는 출시가 되고 웹진에 유저들 반응이 올라올 때. 뿌듯하죠. 메일이 많이 와요. 고생했다. 정말 재미있다. 훌륭하다. 음성에 한글화까지 해놓으면 이렇게 재미있는 게임인데 자막보고 할 뻔 했다. 고맙다. 사실 저한테 고마워할 건 아니지만요. 그런 메일을 받았을 때 ‘좋다’, ‘좋다’. 또는 피시방 갔을 때 프리스타일 같이 사운드를 모두 담당했던 게임을 하는 걸 보면 좋죠.


= 그거 내가 한 거야! 이러면서.

절대 안 믿어요. 절대 안 믿습니다. 와우 같은 경우도 오픈 베타 할 때 제가 들어가서 테스트를 하고 다녔어요. 누가 파티 신청을 하더라고요. 그래서 ‘죄송합니다. 제가 지금 이 게임 사운드를 만든 사람인데 테스트를 하는 중이라서요.’ 했더니 병신, 이러더라고요. 안 믿죠.


= 사실 게이머들이 사운드를 크게 의식하면서 플레이 하지는 않으니까요.

그래도 유저 분들이 귀가 많이 올라오셔서 조금만 안 좋으면 바로 안 좋은 소리가 나와요. 올라가지 못할지라도 기본 가이드라인은 꼭 넘어서야 하죠. 그게 제일 어렵습니다. 정말 많은 시간과 비용이 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에. 저희는 클라이언트 분들이 이 사운드에 맞춰주세요 한다고 그대로 하는 게 아니고 ‘사운드를 전부다 맡기세요. 믹싱부터 리스팅까지’. 그 게임이 출시할 때까지 계속 사운드에 관여해서 같이 움직이는 스타일이라. 물론 저희 마음대로 하는 건 아니고 협의를 계속하면서 진행하지만요.


= 아까 보니까 성우 분께 이걸 이렇게 해달라고 가이드도 하시던데요.

제가 이렇게 이끌어가야겠다 하는 개념만 가지고 가는 거죠. 이렇게 했으면 좋겠어요 하고 제가 원하는 톤이나 느낌이 나올 때까지 잡고 나서 녹음을 하죠. 대사 하나를 몇 테이크 씩 계속 간다는 곳들도 있던데 저는 제가 오케이 하면 오케이죠.


= 가이드 하시는 걸 보니까 대사를 직접 하셔도 될 거 같아요.

저도 짐승의 기질이 있어서요. 제가 출시하는 게임에는 제 목소리가 꼭 하나씩 몰래 들어가있습니다. 코난에도 있고요.


= 앞으로의 꿈이 있으시다면.

대한민국 게임시장이 커져서 정말 훌륭한 사운드, 1년 동안 2년 동안 게임 개발하는 내내 그 게임을 위한 사운드만 만들 수 있는, 그래서 훌륭한 퀄리티를 한 번 내고 싶은 게 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