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여 흘러가라. 너는 참으로 잔혹하구나.”



그건… 내가 어렸을 적 일이다. 뭐든지 안 된다고 생각하던 시절이었다.

젊은 피에 휘둘려서 꽤 막 나가던 때기도 했고, 주변 말을 듣지도 않았고 오직 나만을 생각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상당히 억지스럽고 주장 또한 일관적이지 못했다. 그저 도망치고 있었던 것뿐이니까 말이다. 부모님과도 싸웠고 가출까지 시도했었는데 겁쟁이여서 결국 포기했다. 하지만 겁쟁이였기에 지금의 내가 여기 있다. 아직 나는 여기서 글을 쓰고 있지만, 종종 생각한다. “어쩌면 나에게도 아직 기회는 남지 않았을까.” 하고 말이다.

조금 추한 고백이다.

하지만, 이런 감성이 지금의 나를 이끌어주었다.

물론 지금도 젊다고 생각한다. 아직 30대도 아니니깐 말이다. 해보고 싶은 것도 아직 많고 욕심이 생길 때도 많다. 하지만 지금은 ‘돌이켜볼 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오늘 그날을 돌이키면서, 조금 감성에 젖어본다.

뭐, ‘난… ㄱ ㅏ끔… 눈물을 흘린 ㄷ ㅏ…..’ 급은 아닐 테니 조금 봐주었으면 좋겠다.


게임명: ATRI -My Dear Moments-
장르명: 비주얼 노벨
출시일 : 2020. 6. 18
개발사 : 프론트 윙, 마쿠라
서비스 : 애니플렉스.EXE
플랫폼 : PC (Steam) / NSW / iOS, Android

본 작품, ‘ATRI -My Dear Moments-’(이하, ATRI)는 특이하게도 ‘애니플렉스’에서 야심 차게 도전한 전연령 비주얼 노벨이다. 다만, 작품 자체를 애니플렉스에서 만든 것은 아니다. 산소 드립으로 유명한 ‘H2O’와 ‘사쿠라의 시’를 제작한 마쿠라, ‘그리자이아 시리즈’로 유명한 프론트윙이 협력하여 개발했다. 다른 제작사에서 제작한 ‘도화이담’이란 비주얼 노벨과 함께 동시 출시했고, 이후에는 애니플렉스.EXE 명의로 제작되는 비주얼 노벨 소식은 아직까진 없다.

게임을 클리어하고 뒤를 돌아보면서 생각해봤다. 아마… 이 게임은 나키게 게임에 속하지 않을까 싶다. ‘나키게’. 플레이하는 것으로 감동을 일으켜 울게 만드는 게임. ‘泣けるゲーム(나케루 게-무)’라는 의미로 시나리오, 스토리 중심으로 돌아가는 비주얼 노벨 계에서 감동적이고 슬픈 이야기를 갖춘 게임을 뜻한다.

비주얼 노벨에서 ‘전연령’이면 무엇이 남는지에 대해 비관적인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의외로 전연령 비주얼 노벨은 다양하고 많다. 우선 한국에서도 ‘테일즈샵’에서 제작하는 비주얼 노벨 들이 다양하게 있다. 최근 내놓은 작품이라 하면 ‘썸썸편의점’이라던지, ‘기적의 분식집’이 있겠다. 그 외에도 ‘마르코와 은하룡’이나 ‘베리드 스타즈’, ‘슈타인즈 게이트’ 등, 손에 꼽을 비주얼 노벨은 많다.

비주얼 노벨이란 장르는 게임보다 소설에 가까운 존재지만, ‘선택지를 골라 스토리를 분기시키는 요소’가 있기에 게임의 한 가지 장르로 보기도 한다. 머리를 굴리고 상호작용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는 측면에서 말이다. 글을 읽고, 성우들의 연기를 들으며 일러스트를 통해 시각화된 영상을 머리로 상상해내는 비주얼 노벨이란 장르는 비주얼 노벨이기에 할 수 있는 호소력이 존재한다.

ATRI는 그런 호소력을 집중시킨 작품이다. 이미 다른 작품으로 시나리오 라이터로서의 능력을 인정받은 콘노 아스타가 집필한 본작은 마치 한 번밖에 겪을 수 없는 그 시절의 ‘여름방학’으로 돌려놓은 듯한 느낌을 자아낸다. 머지않은 미래, 디스토피아가 다가오는 세계에서 젊은 소년과 ‘휴머노이드’ 로봇 소녀는 인연을 자아내며 잊을 수 없는 여름을 맞는다.

▲ 비주얼적인 면에서도 매우 훌륭한 ATRI

▲ 언제나 나츠 군만 바라보는 미나모와

▲ 불량배처럼 보이지만 사실 제일 믿음직한 동료인 류지. 사실 나츠키와 제일 가까운 사이일지도

▲ 초등학생인 리리카의 학구열로 주인공은 다시 열의를 되찾기 시작한다

어릴 적 사고로 인해 한 다리를 잃어버려 의족으로 생활해야 하는 장애가 있는 소년, ‘이카루가 나츠키’. 그는 할머니가 남긴 빚을 받으러 왔다는 정체불명의 채권자, ‘캐서린’과 함께 그나마 보물이 될만한 것을 찾기 위해 할머니가 남긴 잠수정을 이용해 그녀의 유산을 찾으려 한다.

세상은 이미 원인 불명의 해수면 상승으로 인해 대부분이 바다에 가라앉아버렸고, 인류의 장래는 암담한 상황. 때문에 나츠키도 할머니가 남긴 배와 잠수정을 이용해 빈곤한 생활을 이어가고 있던 참이었다. 채권자인 캐서린과의 이해관계가 얽혀 유산을 팔아 빚을 해결하고 어느 정도 풍족한 삶을 누리려는 그에게 발견된 것은── 관 형태의 장치 속에서 잠자던 소녀, ‘아트리’였다.

해저에서 인양된 아트리는 사실 과거 인류가 남겼던 ‘휴머노이드’라는 기계. 인간의 지성의 집합체였지만 디스토피아가 되어가고 있는 이 세상에서 이제 휴머노이드는 거의 남지 않은 상황. 팔면 비싸게 팔릴만한 상황이지만, 아트리는 45일까지 팔지 말아달라고 나츠키에게 부탁한다. 이유는 바로 자신의 마스터에게 부탁받은 마지막 메시지를 수행하기 위해서.

──그리고 이어진 그 45일은 나츠키와 아트리에게 있어 잊지 못할 추억이 된다.

▲ 장애가 있는 주인공을 도와주는 믿음직한 A.I. (아닙니다)

▲ 하지만 나츠키는 그녀와 지내면서 점차 성장하고, 자신의 트라우마를 떨쳐낸다

ATRI는 단순히 장애인인 이카루가 나츠키와 무진장 귀여운 안드로이드 소녀를 내세운 작품이 아님을 보여주었다. 나츠키는 더욱 복잡한 과거를 안고 있으며, 실패와 좌절을 겪고 그 자리에서 나아가지 못한 상처 입은 한 사람의 인간이었다. 그가 항상 착용하고 다니는 ‘목발’은 장애를 가지고 있는 사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 나츠키의 심상심리를 비춰주는 요소로 작용하여 그저 한 사람의 인간, 이카루가 나츠키의 어둠을 집중 조명한다.

시종일관 귀여운 모습만 보여주는 아트리에게도 다양한 비중을 부여한다. 그저 등장하는 시간만 늘려놓는 것은 아니다. 학교에 다니고, 거기서 많은 인연을 쌓으면서 주인공의 마음을 열어젖힌다. 그리고 아트리에게 숨겨져 있는 불가사의한 존재에 대해 밝혀지면서 독자는 아트리를 더욱 입체적인 캐릭터로 인식하게 된다. 그저 사랑스러운 존재만이 아니게 되는 것이다.

이 게임을 하면서 인상 깊었던 점을 꼽자면 바로 조연들이었다. 보통의 조연들이 극중극에 자연스럽게 녹아드는 것은 어려운 일이라고 지레짐작했으나 이 작품의 조연들은 각자 자신만의 비중을 가지고 있다. 버려지는 캐릭터는 없고 무조건 적인 ‘선과 악’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각자의 사연이 의미 있게 받아들여지고 마치 처음부터 옆에 있던 사람처럼 느껴지게 된다.

그렇지만 더욱더 놀라웠던 것은 바로 ‘정교한 플롯’이었다. 꼭 플롯을 지키고 그것에 따르는 것만이 좋은 이야기를 만드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ATRI는 이미 잘 만들어진 정교한 플롯을 따른다. 사건의 흐름을 무조건 따르지 않지만, 일관적인 배경과 흐름을 통해 독자들을 이야기 속의 세계로 빠뜨린다. 마치 주인공이 빠진 듯한 깊고 어두운 바닷속처럼, 독자는 이야기의 흐름 속을 파고들게 되는 셈이다.

과학의 고증도 상당히 훌륭하다. 엔딩 크레딧을 보면 과학 검증을 위해 고증 협력자를 데려오기도 했을 정도인데, 위치 에너지를 주인공이 설명하거나, 작중 학교 내의 갈등을 해소하기 위한 장치로 주인공이 ‘조력 발전’을 위해 터빈을 만드는 장면이 나온다. 물론 관련 지식이 빠삭해도 소년, 소녀가 나오는 만큼, 작품의 내용을 위해 데우스 엑스 마키나 같은 금속이 등장하기도 한다.

▲ 교실을 밝힌 전기는 작중 내에서 희망적인 요소로 사용되며

▲ 각자의 복잡한 감정들이 서로 얽혀 드라마를 자아낸다

▲ 물론 제일 변화한 것은 주인공 나츠키와 히로인 아트리

▲ 그가 쓰는 단순한 목발은 메시지를 전달하는 핵심 요소로 활용된다

사실 이런 소재는 진작에 많이 쓰이기도 한 소재다. 특히 이런 작품 중에서 제일 유명한 작품을 꼽자면 역시 소설,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주석: 일부 각색되어 있지만, 영화로는 ‘블레이드 러너’가 있다.)와 영화, ‘A.I.’가 있다. 둘 다 한없이 인간에 가까운 로봇이 가진 인간성을 다룬 작품으로 상당히 유명하고, 또 작품성을 갖춘 명작이다.

ATRI는 이러한 작품들 후에 태어난 게임이다. 그런 만큼 참신성에서는 떨어질 수밖에 없는 구조를 지녔다. 사실 SF, 디스토피아를 그려낸 세계에서 인공지능 로봇의 감정을 그려낸 작품은 서로가 비슷한 느낌을 자아내니 말이다. 무엇보다 로봇 3원칙의 기조가 들어간 아이작 아시모프의 ‘아이, 로봇’을 생각해보면 당연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어떻게 사랑받을 수 있었을까. 일단 조연의 비중을 놓치지 않으면서 오로지 로봇의 인간성에만 조명하지 않았던 점을 꼽을 수 있겠다. 물론 위에서 언급한 두 명작도 마찬가지다. ATRI 또한 잔잔히 꺼져가는 섬을 무대로 아트리와 보내는 일상을 담담하고 가슴 아프게 그려내 연애적인 면에서도, 주제로도 무너지지 않는 내용을 다뤘다.

그리고 일관적인 주제와 이를 철저하게 따르려는 부분도 좋았다. 나츠키가 잃어버린 것들은 그의 꿈과 의지, 미래로 향해 나아가려는 의지와 일관적으로 엮여 그가 극복하는 부분에서 큰 재미를 느낄 수 있고, 아트리 또한 이 작품의 핵심 요소로서 인간의 감정을 알고 싶은 욕심, 미련을 담아낸 채, 나츠키의 일부로서 다가온다. 그러면서 나츠키와 아트리는 서로서로 보완해주는 완벽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녀가 내뱉은 모든 대사는 작중 내에서 반복된다.

▲ (삐빅!) “로봇을 고물이라 부르는 건 차별 발언이에요!”

▲ “꽃게! 대어예요!”

▲ “……학습했습니다!”

▲ “저는 전투 로봇이라 가사에 영 서툴러서……”

▲ “고성능 미각 센서가 딜리셔스라고 판단했어요. 별 3점 드릴게요!”

▲ “저는 고성능이니깐요!”

▲ “지구에 저도 포함되나요?”

그리고 반복되는 대사는 무의미하지 않기에, 더욱더 애달픈 감정이 든다.

“이 우주에 영원히 이어지는 것은 없어요. 그러니까 끝나는 걸 슬퍼해도 별 소용 없어요. 끝나기 전의 시간을 어떻게 보낼지가 중요한 게 아닐까…….하고 생각해요.”라는 그녀의 대사처럼 ATRI는 독자에게도 작중 등장인물에도 게임의 스토리가 끝나기 전의 ‘시간’을 정말 귀중하게 보낸다. 이걸 플레이한 나도 새벽을 지새워서 클리어했으니까 말이다. 물론 나키게 답게 눈물도 조금 흘려보냈다. 단순히 스토리뿐만 아니라 과거와 겹쳐 보게 된 것도 있어서 그렇지만 말이다.



ATRI -My Dear Moments-는 부제의 제목 그대로 읽고 있는 그 순간마다 ‘독자’들에게 소중한 순간을 안겨준다. 그냥 안겨주는 것이 아니다. 두 눈에 직접 똑똑히 새겨준다. 아트리와 함께 보낸 학창 생활, 청춘, 그리고 감정과 사랑까지. 하지만 가끔 눈에 띄는 복선으로 인해 눈치가 빠른 독자라면 앞으로 이어지는 이야기를 어림짐작할 수 있게 되어 감정선이 하락할 수도 있다.

최근, ‘클리셰’란 단어를 언급하면서 진부한 연출이라고 하는 사람을 종종 보았다. 물론 이해는 간다. 작품 매체 내내 시청자들을 몰입 시켜 ‘반전’이란 이름의 문고리를 틀어 전개를 신선하게 만들지 않으면 이야기의 흐름이 밋밋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작품은 ‘클리셰’가 왜 아직도 존재하는지를 깨닫게 해준다. 인터넷 대사를 따라 하자면 클리셰란 것은 성공했기 때문에 클리셰로 남아있는 것이라고.

아트리의 미래가 어떻게 되는지, 그리고 그것에 저항할 수 없는 주인공이 어떻게 되는지 독자들은 읽는 중간부터… 아니, 거의 초중반부터 깨닫게 되고 만다. 하지만 그들은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선택한다. 둘이 진실을 알고, 감정을 알고, 사랑을 알게 되는 그 순간까지. 주인공도, 아트리도 중간에 주저앉거나 마음에 상처를 입기도 한다. 그렇기에 다시 일어서는 그들을… 미래로 향해 나아가는 그들을, 그들이 남긴 감정을 ‘인간 찬가’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나 또한, 나 자신을 되돌아보고 다시 한번 자신을 안아주고, 믿고 사랑하기로 했다.

벽에 가로막힌 후부터 고민의 연속이었던 나에게, 구름투성이이었던 마음속을 웃는 얼굴로 지워버린 이 사랑스러운 이야기를… 나는 좋아할 수밖에 없었다. “누구라도 좋아하지 않을까.”하고 내 개인적으로도 생각해본다.

나는 오늘을 기회로, 온 힘껏 부끄러운 감정을 말할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내 마음의 전부일지 아닐지는 모르겠지만… 덕분에 속이 후련해졌다.


“고마워, 아트리.”
“내 마음속의 감정을… 다시 한번 녹여줘서.”



“시간이여 멈추어라. 너는 참으로 아름답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