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제: 영화, 현실을 창조하는 오래된 미래 - <레디 플레이어원>과 영화의 역사로 읽는 메타버스
  • 강연자 : 송경원 - 씨네21 / Cine21
  • 발표분야 : 메타버스, 비주얼아트, 사운드, 게임 기획
  • 권장 대상 : 게임과 영화에 관심이 있으신 분
  • 난이도 : 사전지식 불필요 : 관련 전공이나 경력이 전혀 없더라도 이해할 수 있는 내용


  • [강연 주제] 영화는 미래의 모습들을 미리 그립니다. '스타트렉' 속의 통신기가 실제 핸드폰으로 구현되는데 이렇게 짧은 시간이 걸릴 거라고는 다들 알지 못했을 겁니다. 이번 시간에는 '레디 플레이어 원'을 중심으로 이른바 메타버스의 미래에 대해 한번 이야기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더불어 게임의 즐거움에 대해서도 한번 이야기해볼 수 있을 겁니다. 게임원작의 영화는 왜 흥행이 쉽지 않을까요. 게임과 영화의 근본적인 차이, 서사의 다른 점에 대해서도 살펴보려 합니다.


    미디어믹스와 원 소스 멀티 유즈가 활발해지면서, 게임은 더 이상 'IP 유저'뿐만 아니라 'IP 홀더'로서 입지를 다지고 있다. 게임을 원작으로 삼는 소설은 이전부터 흔했으며, 이제는 영화와 드라마 산업에서도 게임 IP를 활용하는 상황. 하지만, 결과가 그리 좋지만은 않다. '게임 원작 영화는 망한다'라는 말이 사실상 정설로 굳어지는 상황이니까. 이유야 늘 비슷하다. 원작을 제대로 못 살렸고, 고증은 어색하며, 인물 성격도 판이하게 다르곤 하다. 이렇듯 '게임인'의 시선에서 게임 원작 영화의 문제점은 파악하기 쉽지만, 그 반대는 어떨까?

    NDC 2022에 연사로 참여한 씨네21의 송경원 기자는 기자이면서 동시에 영화평론가로 오랜 시간 활약하며 몇 편의 저서를 남긴 베테랑 '영화인'이다. 게임과 섞여 나온 영화 중 가장 큰 성공을 거둔 '레디 플레이어 원'의 메타버스에 대한 이야기부터, 게임 기반 영화의 흥행이 어려운 이유를 '영화인'의 시선에서 풀어 보았다.


    영화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월터의 환상은 상상이 된다'라는 영화가 있다. 벤 스틸러가 감독과 주연을 맡은 영화인데, 대략적인 스토리는 잡지사에서 일하는 평범한 직장인이 구조조정으로 실업을 겪고, 사무실에서 벗어나 세계를 마주하면서 겪는 수많은 모험을 담고 있다. 사실 스토리는 별 것이 없다. 사무실에 갇혀 있던 남자가 세계를 만나고 모험을 겪고 성장하는 이야기다.

    중요한 건, 월터의 망상을 연출하는 장면이 많다는 정도인데, 영화는 상영 시간 내내 월터가 방문하는 장소와 월터의 상상 속 공간이라는 두 가지 공간을 테마로 꾸며진다. 여기서 중요한 건, 월터의 상상일 뿐인 파트를 영상화해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이를 영화를 구성하는 두 축 중 하나로 삼았다는 것. 이는 곧 상상력을 구체적인 이미지와 사실적 재현으로 만들어낸다는 '영화'의 정체성을 보여준다.

    수십년 전 상영된 스타트랙의 통신 단말기는 오늘날의 핸드폰과 매우 닮아 있으며, '딕 트레이시'에 등장하는 손목 시계 또한 지금의 스마트 워치와 매우 닮아 있다. 영화는 이렇듯, 현실로 만들어질 수 있는 물건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영화라는 소재가 실제로 이뤄질 수 있는 상상을 이미지화하는 주된 수단이 된다는 거다.


    스필버그 감독의 '쥬라기 공원'은 수많은 관객에게 비주얼 쇼크를 주었다. '진짜 같았기 때문'이다. 이 진짜 같다는 건 매우 중요하다. 말 그대로 진짜 같이 느껴진다는 것, 그럼에도 진짜가 아니라는 두 가지 사실이 걸쳐 있는 명제이기 때문이다. 거짓인걸 뻔히 알면서도 진짜 같다고 느끼는 건 이 이미지를 구성하는 요소들, 공룡의 피부 질감이나 땅의 울림, 그리고 울음소리 등이 현실에 반쯤 걸쳐 있어 다들 어디서 본 듯한, 들어본 듯한 모양새를 띄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무엇이든 상상할 수 있다 여기지만, 한 번도 보지 못하고 존재하지 않는 것은 상상하지 못한다. 이렇듯, 인간이 알고 있는 시지각정보의 총합으로 만들어지는 사실적 상상을 '지각적 리얼리즘'이라 말한다. 이 '지각적 리얼리즘'이 상상을 현실로 만들어내는 힘이다. '쥬라기 공원'의 경우 지각적 리얼리즘의 정수라 할 수 있다.




    레디 플레이어 원 속 메타버스의 풍경

    그렇다면, 메타버스라는 상상은 어떻게 현실이 되었을까? '메타버스'라는 용어는 지금으로부터 30년 전인 1992년, 닐 스티븐슨이 지은 '스노크래시'라는 작품에 등장하는 단어로, 현실과 가상 공간의 유기적인 결합을 통해 창조된 또 하나의 세계를 뜻한다. 개념적으로는 매트릭스에 등장한 전자적으로 구현된 가상 세계와 크게 다르지 않다.


    '매트릭스'는 대중문화의 짬뽕과 같은 영화다. 텍스트로만 존재하던 모든 아이콘들을 스크린을 통해 적절히 섞어 실감할 수 있는 영상으로 만들어냈고, 관객은 이 영상을 통해 개념적으로 알고 있던 것들이 실제로 가능할지도 모른다고 믿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믿게 되는 순간부터 허구는 더 이상 허구로 머물지 않게 된다. 실제로 메타버스라는 용어가 유행한 건 2020년 젠슨 황 대표가 '우리의 미래는 메타버스'에 있다라고 말하면서부터였다. 상상력이 현실이 되기 위해서는 유명인의 언급이나, 실체화된 영상과 같은 물질과 정보가 필요하다는 뜻이다.

    '레디 플레이어 원'은 매우 가까운 근미래를 그리고 있다. 여기서 미래의 핵심은 '오아시스'라는 가상 공간인데, 누구나 무엇이든 될 수 있는 공간이다. 영화를 한 줄로 요약하면 '스티븐 스필버그의 상상 현실화' 이다. 주제적으로는 친구와의 우정, 소통, 용기의 중요성을 깨닫는 소년의 성장기를 담은 익숙한 이야기지만 스티븐 스필버그는 이 진부한 스토리로도 감동을 느낄 수 있게끔 '대중문화'라는 마법을 부린다.


    '레디 플레이어 원'은 80년대 대중문화를 향유했던 이들의 심장을 자극하는 '20세기 팝컬쳐 베스트 컴필레이션'이다. 단순히 모아 두기만 하지도 않았고, 이를 업그레이드해 80년대 문화의 아이콘들이 새로운 그래픽으로 만들어져 실제로 뛰어다니고 활약한다. 이 모든 표현들은 현재라는 시대에 맞춰 갱신되었으며 덕분에 단순히 복고에 그치지 않았다.

    영화는 당연히 진짜가 아니다. 영화는 진짜가 아님을 전제로 즐기는 문화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짜'도 아니다. 엄연히 이야기 세계의 시공간은 존재하며, 우리는 이를 즐기기 때문이다. 이렇게 이야기 세계에 위치하는 시공간을 '디제시스'라고 부른다. 영화를 만드는 건 이 '디제시스'라는 '가상 현실 공간'을 만드는 것이다.




    스티븐 스필버그, 영원의 소년의 꿈

    이렇게 만들어진 '디제시스'는 현실과 이분법적으로 분류된다. 매트릭스에서 빨간 약과 파란 약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고, 레디 플레이어 원 속 인물들이 물리적 공간에서 벗어나 오아시스로 도피하며, 현실과 가상은 철저히 분리되어 있다. 현실 속 인물들은 오아시스에서 완전히 다른 위상을 지니며, 두 세계는 교류를 하긴 하지만 서로 큰 영향을 주지 않는다. 이렇게 스크린의 안과 밖 리얼과 가상이라는 이분법에 우리는 익숙해져 있다.


    메타버스가 이러한 기존의 가상 세계와 차별화되는 부분이 여기서 나온다. 메타버스는 현실과 적극적으로 교류한다. 가상의 세계이지만, 현실의 영향을 받는 과정에서 현실과는 또 다른 현실인 메타 현실이 만들어진다. 여기서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하게 된다. 이것이 진짜인지, 그리고 무엇이 진짜인지에 대해 말이다.

    '레디 플레이어 원'에는 주인공 웨이드가 자신의 아바타를 만드는 장면이 나온다. 일반적으로 극사실주의 그래픽은 기술의 발전을 의미하지만, 영화 속 아바타는 딱 봐도 인간과는 다른 질감으로 그려지는데, 이는 의도된 구분이다. 영화 내에서 현실과 가상을 나누는 기준이 되어야 하며, 이렇게 구분이 되어야 두 세상이 인정하고 양립되며 두 세계 간의 교류가 이뤄지기 때문이다.

    어떤 세계가 진짜이고, 반대로 가짜인지를 규정하지 않고 두 세계가 모두 진짜이면서 동시에 양립하는 상황. 송경원 기자는 이 개념이야말로 '메타버스'의 핵심'이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이렇게 서로 다른 두 가지를 가장 잘 양립시키는 사람이 바로 '스티븐 스필버그'라는 감독이라는 말을 덧붙였다.


    스티븐 스필버그가 영화계에서 가진 위상은 짧게 표현하기 매우 어렵지만, 그는 '쥬라기 공원'을 통해 당시 기술을 집대성한 흥행 영화를 만들었으며, 동시에 'AI'라는 완만한 호흡의 영화를 만들어 고전적 시네마의 호흡을 잇는 클래식의 수호자가 되었다. 사실주의와 표현주의라는 영화의 두 맥락 사이에서 그는 자신만의 입지를 만들었는데, 그 기준은 결국 이것이다. '어떻게 해야 재미있는가?'

    스티븐 스필버그는 대립항의 경계를 지우고, 그 합을 만들어내되 '즐거움'이라는 명확한 지향점을 지정하며 영화를 만들어왔다. 당시 최신 기술을 아낌없이 퍼부은 상업 영화 쥬라기 공원, 완만한 템포로 고전 시네마의 수호자로 거듭났던 'AI', 역사를 다룬 '더 포스트'와 정치를 투영한 '링컨' 그리고 반대로 시각적 엔터테인먼트에 중점을 둔 '레디 플레이어 원'까지.


    '현실(리얼)'과 '사실성(리얼리티)'는 다르다는 건 '영화'라는 미디어에 씌워진 명제다. 영화는 진짜도, 가짜도 아니지만 진짜이면서 동시에 가짜이기도 하니까. 그리고 '레디 플레이어 원'에서 게임 개발자는 주인공에게 이렇게 말한다. '리얼리티 이즈 리얼'. 사실적이면 그게 사실이 아닐 이유가 없다는 뜻이며, 영화는 모두 가짜이지만, 이 영화가 주는 즐거움은 진짜라는 현실과 맞닿은 문장이다.



    영화, 오래된 미래를 보다

    많은 이들은 영화 산업이 꾸준한 발전의 길을 걸었다 생각하지만, 이는 반쪽인 진실이다. 초창기 영화들은 훨씬 많은 갈래로 나뉘어 있었고, 또 다른 가능성을 품고 있었다. 예를 들어 오늘날 최초의 영화는 '시네마토그래프'라고 인식되고 있지만, 에디슨이 발명한 '키네토그래프'는 이보다 앞서 개발되었고 심지어 소리도 들을 수 있었다. 유일한 단점은 한 명만 볼 수 있다는 점이다.

    영화는 '많은 이들이 볼 수 있어야 한다'라는 관념이 생겼기에 벌어진 일이다. 하지만 달리 생각해 보면, 에디슨의 키네토그래프는 오늘날 1인 관람에 사용되는 HMD, 혹은 스마트폰용 영상 체계와 비슷한 개념을 가진 매체라 할 수 있다. 100년에 이르는 영화의 역사 속엔, 의외로 산업이 좁아지면서 탈락하거나 잠들어버린 새로운 가능성이 많다는 것이다.


    영화는 새로운 시공간을 창조하는 태양이다. 흔히 '영화적 시공간'이라 부르는 또 다른 현실들은 계속해서 만들어지고 있으며, 이 '영화적 시공간'을 만들기 위해 리얼을 뛰어넘는 또 다른 리얼을 만들고자 하는 시도는 지금도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다. 증강현실이나 VR을 이용한 영화 기술들이 이에 해당할 것이다.

    언리얼 엔진을 도입한 '더 만달로리안'은 VR 스튜디오에서 촬영된 영화이지만, 결과물을 보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영화와 큰 차이가 없다. 기술이 바뀌어도, 본질은 그대로라는 뜻이다. 영화의 미래가 어떻게 될 지, 그리고 미래의 영화가 어떤 모습일지는 어떠할지 알 수 없다. 레디 플레이어 원 처럼 기계 장치를 쓰고 메타버스라는 가상 공간에서 영화를 보게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어떤 세상이 와도 완전히 새로운 것은 없으며, 우리가 상상하는 모든 가능성은 이미 과거에 존재하고 있다. 송경원 기자는 이렇게 말했다. "영화는 올드 미디어이지만, 영화가 100년 간 갈고 닦아온 상상력과 지워진 미래들은 여전히 남아 있다."

    이어 송경원 기자는 "메타버스는 전혀 낯선 개념이 아니며, 너무 대단하다고 생각할 필요도 없다. 기술에 경도되면 기술만 바라보게 될 뿐, 핵심은 이 기술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에 달렸다"라고 말했다. 각 개인이 무엇을 진실로 느낄 것이며, 그것이 호기심을 자극하고 에너지를 쏟을 만큼 재미있는지. 상상력은 바로 거기서 출발해야 한다는 말로 송경원 기자는 발표를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