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1월 중순, '패스오브엑자일2(POE2)'가 처음 발표되었을 때, 모두가 이를 '과감한 출사표'로 인식했다. 지금이야 이미 출시된 게임이지만 2019년은 동종업계 선배이자, 이들이 공공연히 영감의 모델로 삼았음을 말했던 '디아블로' 시리즈의 최신작인 '디아블로4'가 발표된 해였고, 발표 시기도 고작 2주의 간격이 전부였다.

그리고 4년이 지난 지금, 7월 진행된 2023 엑자일콘에서 '패스오브엑자일2'소식이 다시 발표되었다. 전작을 그대로 승계하면서 숫자만 불어난 12개의 기본 직업과 36개의 어센던시. 그리고 훨씬 더 깊어진 스킬 노드와 콘텐츠까지. 최초 확장팩 개념으로 기획되었던 POE2는 개발이 거듭되면서 독립 타이틀로 오롯이 섰고, 기존 POE와는 다른 독립 타이틀로 자리매김했다.


그리고 엑자일콘 현장에서, 참여한 모든 유저들은 POE2의 개발 빌드를 직접 체험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12시간에 가까운 비행 끝에 뉴질랜드로 날아온 이유가 다 이것 때문이었다. 다른 소식은 방송을 통해 공개되지만, 무조건 와야지만 할 수 있는 경험이니 말이다.

최초 공개 당시 시연 빌드가 제공되긴 했지만 그건 말 그대로 극초기 빌드. CBT까지 1년의 시간이 남은 지금, 아마 이번 시연은 POE2가 그간 어떻게 만들어져왔는지, 그리고 새로운 타이틀로서 제대로 기능할 수 있을지를 가늠할 중간 점검의 기회일 것이다. 그렇게 약 40분 간 플레이한 '패스오브엑자일2'의 플레이 인상을 주요 키워드를 중심으로 정리해 보았다.


총 12종의 직업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건 무려 6종이나 늘어난 기본 직업이다. 사이온을 제외한 기존 직업인 치프틴, 레인저, 위치, 듀얼리스트, 템플러, 머라더 외에 추가 직업으로 소서리스, 헌트리스, 워리어, 몽크, 머셔너리, 드루이드가 새 직업으로 추가되었다.

체험 빌드에서는 이중 머셔너리와 드루이드를 제외한 네 종의 직업을 플레이할 수 있었는데, 각각 다른 레벨로 액트1~4에 하나씩 캐릭터가 배정되어 있었다. 다만, 체험 버전은 분량이 그리 길지 않았고, 스킬 노드는 아예 닫혀 있어 열 수가 없었기 때문에 각 직업의 세부 컨셉을 살피기는 어려웠다.


짧은 소감을 말하자면, 몽크는 디아블로2의 어쌔신과 같은 버블 시스템을 활용하면서 쿼터 스태프를 주력으로 쓰는 근접 딜러, 헌트리스는 디아블로2의 아마존 빌드 중 자벨린과 방패를 활용하는 빌드를 따로 떼와 만든 직업에 가까우며, 소서리스는 전작의 위치 기술 중 원소 마법만 분리해 특화시킨 직업,그리고 '워리어'는 양손 둔기에 특화된 근접 물리 직업인데, 대지 속성이 섞인 물리 공격을 주로 사용한다는 것 외에 머라더와의 차이점이 정확히 어떤지는 파악하기 어려웠다.




'골드'의 추가로 개변된 커런시 시스템


전작까지 존재하지 않던 '골드'가 새로운 기준 화폐가 되었다. 이제 더 이상 NPC와 아이템을 거래할 때 특정 화폐가 필요하지 않고 모두 '골드'를 매개체로 거래하게 되며, 때문에 기존 커런시들은 해당 커런시 본연의 역할에 더 충실하게 바뀔 것으로 보인다.

또한, 몇몇 아이템을 모으거나 특정 속성의 아이템을 판매해 특정 커런시를 얻던 이른바 '레시피'도 골드가 거래 수단이 되면서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될 것으로 보인다. 재미있는 건, 골드 또한 기존의 커런시 중 하나로 구분됨에 따라 인벤토리에서 자리를 차지한다는 것. 한 칸에 최대 5천 골드까지 쌓아둘 수 있다.

이에 따라, 기존 기축 화폐 역할을 하던 '카오스 오브'와 '엑잘티드 오브'의 역할 또한 골드가 가져갈 것으로 보인다. 골드는 몬스터 종류를 가리지 않고 대부분의 몬스터가 드랍하며, 바뀌게 될 커런시 창고의 모습은 창고 시스템을 확인할 수 없게 막아두어 정확한 모습을 알 수 없었다.



아이템 소켓의 삭제와 신설된 스킬 젬 시스템


아이템 관련 사안 중 가장 큰 변화는 모든 아이템에서 소켓이 제거됨에 따라 소켓 수와 링크(연결된 소켓 수)가 가치 평가의 큰 부분을 차지하던 전작과 달리 자체 옵션이 훨씬 중요해졌다. 대신 스킬 젬은 별도의 시스템으로 분리되었는데, 액티브 스킬 젬마다 보조 젬들을 붙일 칸들이 별도로 마련되어 있다. 스킬 젬마다 보조 젬 수가 정해져 있는지, 아니면 스킬 젬을 얻을 때마다 다른지는 확인할 수 없었다.

여기서 한 가지 더 생각할 수 있는 건, 스킬 젬 시스템이 분류됨에 따라 액티브 스킬 젬은 일단 얻기만 하면 언제든 스킬 칸에 장비할 수 있다는 점인데, 아마 직업 별로 사용할 스킬, 혹은 드랍되는 스킬 젬의 종류가 제한되지 않을까 싶다. 추정이지만 수없이 많은 스킬이 존재하는 POE에서 모든 스킬을 다 등록해두고 사용하는건 너무 난잡하며, 실제 게임 플레이 중에도 내 직업과 관계 없는 액티브 스킬 젬은 얻어 본 바가 없다.


머라우더와 워리어, 듀얼리스트와 머셔너리, 위치와 소서리스처럼 어느정도 역할이 겹치는 경우 공유할 수 있는 스킬이 존재할지는 모르겠으나, 머라더가 아크를 사용한다거나 소서리스가 사이클론을 도는 등 POE에서 아무도 안 하겠지만 억지로나마 가능했던 변태적인 빌드는 아마 어렵지 않을까 싶다. (젬 커팅은 체험이 불가능했는데, 공개 시연 중 보인 영상을 보면 아마 직업별 스킬 제한이 걸릴 확률이 높아 보인다.)

대신 덕분에 초반 장비 구성 난이도가 상당히 낮아질 것으로 보인다. 쓸만한 5~6링크 옷은 무자본으로 구하기엔 꽤 비싸기에 리그 초반은 '타뷸라 라사'를 얻어 주력 스킬을 만든 후 하나씩 장비를 바꿔나가거나 3~4링크 스킬로 레벨업하는게 꽤 일반적이었는데, 이제 부담없이 더 좋은 장비들로 바꿔가면서 게임을 진행할 수 있게 되었다. 개인적으로는 꽤 마음에 드는 변경점이라 생각한다.

몇몇 아이템의 경우 기본 스킬을 내장하고 있다. 주로 마법 위주의 클래스 전용 아이템들이 그런데, 소서리스가 쓰는 지팡이의 경우 아무도 안 쓰는 지팡이질 대신 쓰는 기본 공격기, 혹은 다른 스킬을 강화하는 기술이 따라온다.




애니메이션 강화와 구르기로 뒤바뀐 전투 템포


미리 공개된 영상에서 볼 수 있다시피 POE2에는 쿨다운 없는 '구르기'가 추가되었는데, 구르기 중 완전 무적은 아니며, 구르는 거리가 이동 속도에 비례하기 때문에 감속 디버프가 심하게 걸리면 거의 제자리에서 구르다 죽는다. 다만, 구르기는 발동이 매우 즉각적인 이동기에 속하기에 보스 몬스터 상대 시 패턴 회피용으로 유용하게 쓰인다.

기존에도 대부분 캐릭터가 이동기 하나쯤은 기본 소양으로 가져갔기에 굳이 쓸모가 있을까 싶지만, 이 구르기는 POE2의 전투 상황에서 반드시 필요한 요소다. 전작과 달리 기술 캐스팅 애니메이션이 굉장히 화려해지고, 동시에 길어졌기 때문이다.

휘적휘적하면 기술이 펑펑 나가던 POE와 달리, POE2는 강한 기술일수록 애니메이션이 크다. 가령 소서리스의 '혜성'스킬은 공중에서 한 바퀴 돌면서 캐스팅하는 애니메이션을 보여주고, 워리어는 3초 가량 힘을 모아 치는 기술을 가지고 있는데, 이 모든 기술들이 발동이 굉장히 느리기 때문에 그만큼 빈틈이 많이 노출된다. 하지만 구르기는 이 모든 것들을 캔슬하면서 잽싸게 이동할 수 있기 때문에 기술 시전 중 패턴에 노출될 때 회피기로 쓰게 된다.


전투 감각은 기존의 POE보다 더 어려워졌다. POE는 매우 빠른 속도감을 지닌 게임인 반면 POE2는 속도감이 대폭 줄어들면서 묵직한 움직임을 보여주고 적들의 공격도 굉장히 아프다. 세팅된 캐릭터들이 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시연 기준으로 잡몹들에게도 몰리면 2~3초 안에 사망하는 수준이다. 개인적으로는 보스전이 소울라이크의 감각과 유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역시 시연용으로 세팅된 캐릭터의 문제인지, 게임 전체의 방향성이 이 쪽으로 맞춰진 건지는 판단하기 어려웠다.

별개로, POE가 그렇듯 몬스터들이 대부분 극도로 공격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일반적인 핵앤슬래시 게임의 몬스터들이 플레이어에게 느릿느릿 걸어와 잠시 뜸을 들인 후 공격을 가한다면, POE2는 아예 칼을 휘두르면서 달려온다. 쉴 새 없이 이런 공격적인 몬스터들이 달려들기에 쿼터뷰 시점임도 전투 긴장감이 상당히 높은 편이다.



일신한 그래픽, 최강의 사운드 이펙트


그래픽은 영상만 보면 POE와 큰 차이가 없어 보이지만, 실제 플레이 시에는 꽤 큰 폭으로 바뀌었다는 걸 굉장히 강력하게 느낄 수 있다. 카메라가 조금 더 위로 빠지면서 캐릭터 크기가 줄어들고 주변을 보다 넓게 보게 되었는데, 전작 대비 디테일하게 바뀐 광원 효과 덕에 빛과 어둠의 대비가 크게 일어나 캐릭터가 돋보이고, 전체적인 게임 분위기는 어둡게 느껴지게끔 설계되어 있다. 시연 버전은 완벽히 최적화가 이뤄지진 않았기에 최종 버전은 또 다르겠지만, 전체적인 수준은 '디아블로4'보다 약간 모자란 정도다.

'사운드'는 시연 중 가장 좋게 느껴진 부분인데, 전투 중 특정 행위에 따라 캐릭터가 랜덤하게 뱉는 전투 함성이 매우 마음에 든다. 몽크가 적을 밀어내면서 '꺼져라!'라고 소리친다거나, 소서리스가 적을 얼리면서 '얼어라!'라고 소리지르는 식이다. 타격음은 일신한 애니메이션과 시너지를 내 지금까지 본 핵앤슬래시 게임 중 단언컨대 최고의 타격감을 보여준다. 워리어의 양손망치로 몬스터 뚝배기를 후려칠 때의 감각은 존재하지도 않는 진동이 느껴질 정도다.



자신감의 이유를 엿볼 수 있었던 체험


몇 가지 더 말하자면 '월드 맵'이 매우 깔끔한 삽화 형태로 바뀌었다. 또한 달리는 역마차나 항해 중인 배 등 기존에 볼 수 없었던 다양한 필드와 구조물들이 생기면서 비교적 단순한 형태를 띄던 필드 디자인도 보다 역동적이며 다양한 형태를 띄게 되었다.

전체적인 느낌은 개선도, 개악도 아닌 다른 무언가. POE2는 전작의 많은 부분을 공유하는 게임이지만, 별도의 타이틀로 분류할 만큼의 차이점 또한 갖추고 있다. 겉으로 보기엔 너무나 비슷해 보이지만 템포부터 플레이 감각이 모두 상이하며, 플레이를 하면 할 수록 차이점이 점점 더 크게 느껴진다. 그라인딩 기어 게임즈가 이를 단순히 확장팩으로 개발하지 않고 넘버링을 부여한 이유가 충분히 느껴진다는 뜻이다.

하지만, POE만의 고유한 색채 중 가장 중요한 건 그대로 남아 있다. 수백 시간을 플레이하고도 자신있게 '정복했다'라고 말하기 어려운 깊이. 빌드의 방향을 게임사가 제시하는 것이 아닌, 그저 수많은 변수를 던져주고 그 안에서 스스로 빌드를 찾아 나가는 구도자의 마음을 요구하는 POE의 고유한 DNA는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아직 CBT까지 1년이 남은, 정식 출시까지는 더 오랜 세월이 걸릴 게임이지만, 2019년에 던진 출사표가 근거 없는 자신감에서 비롯된 것은 아님을 확인하기엔 충분한 체험이었다고 할 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