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애증의 게임이다.
거진 30년에 가까운 시간을 디아블로와 함게 해 왔으니, 이 정도면 와이프보다 오래됐다. 물론, 중간에 누가 봐도 4편을 발표할 것처럼 징조를 보이길래 시원하게 기획 기사를 발사했다가 디아블로 이모탈이 나와 성지를 만든 적도 있고, 다음 해 내 결혼식 때 블리자드가 요걸로 한번 더 먹이긴 했지만, 그 쯤이야 괜찮다.

문제는 이거다.
"아아.... '빛'이 부족하다..."
전통적으로 악마 놈들은 빛으로 때려 잡아야 옳다. 10점 만점에 12점짜리 진짜 싸나이인 '둠가이'가 말했다. "힘은 빛을 만든다"라고 말이다. 진짜 악마를 잡는 힘은 빛을 동반하는 셈이다. 하지만 언제부터인지, 성역에는 경건함이 사라졌다. 아이언 메이든이 걸려도 차지를 박던 굳은 심지와 쏟아지는 악마 한복판에서 망치를 돌리던 용기가 보이지 않는다.

디아블로4의 첫 확장팩인 '증오의 그릇'이 다소 애매하게 다가왔던 이유 중 하나기도 하다. 무기만 4개를 차고 다니는 야만인이나 비열한 요술쟁이, 뼈다귀, 자연인 뚱보, 정의로운 척 하는 강도들이 설치기엔 성역의 이름이 너무 무겁다. '빛'이 있어야 옳건만, 헐벗고 다니는 재규어 전사들이 뜬금없이 등장하니 성역이 여전히 개판 5분 전인 건 다 이유가 있다. 디아블로3의 성역도 온갖 욕이란 욕은 다 먹다가 조쉬 모스케이라가 성전사를 데려오면서 '정상화'가 이뤄지지 않았나. '빛'의 도입은 곧 성역의 정상화를 의미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마침내 소식이 왔다. 뭣? 증오의 군주? 뭣? 성기사 얼리 억세스?
참을 수 없다. 힘은 빛을 만들고, 요즘 시대엔 구매력도 힘이다. 기적의 삼단 논리에 따르면 구매력이 곧 빛을 만들어내니 즉시 구매. 그렇게 내 첫 번째 성기사 정열이가 성역의 문턱을 밟았다. 하지만 그 전에 우리 '성기사'에 대해 조금 알아보는 시간을 가져 볼까?

우리 성기사, 정상 영업 합니다
먼저, 이것부터 짚고 가자. 디아블로의 세계관인 성역은 그 어느 세계보다도 망조가 심하게 들어 있는 공간이지만, 그 중에서도 성기사들, 그리고 여기서 파생된 성전사들은 이만큼 망조가 들 수 있나 싶을 정도로 취급이 좋지 않은 집단이다. 디아블로2의 성기사들은 원전인 자카룸 교단 자체가 타락해버려 탈주해 자신들만의 싸움을 이어가는 집단이며, 타락 전 분리되어 떨어져 나간 아크칸의 성전사들은 존재조차 희미하게 알려진 '한줌단'이다.
그리고 디아블로4의 성기사들은 거기서 한술 더 떠 망하고 또 망한 자카룸에서 떨어져 나와 이제는 자카룸 교단과 연결 고리조차 없어진 채 '빛의 파수꾼'이라는 이름으로 자신들만의 신념을 따라 싸우는 이들이다. 트레일러 영상에서 메피스토가 자카룸 교단의 창시자인 아카라트의 거죽을 뒤집어쓰고 있음에도 아무 거리낌 없이 방패를 내던진 이유가 있는 셈이다.

성장 빌드는 크게 네 종류로 나뉘는데, 디아블로2의 '질딘'의 뒤를 이어 잽싸게 달려가 전국구 칼부림을 선보이는 '광신도', 육중한 갑옷과 방패를 내세워 '응 안아파'를 시전하는 '거한', 망치와 방패를 던지며 중장거리 전투를 중심으로 풀어가는 '심판관', 그리고 반쯤 천사로 변신하는 '중재자'가 그것이다. 물론 빌드에 따라 두 컨셉이 섞이기도 하며, 일부만 따로 떼서 쓰기도 하는 등 빌드 자유도는 충분하다.
컨셉적으로 특이한 점은, 이들이 '드높은 천상'의 천사들과 상당히 깊이 연계되어 있다는 점이다. 디아블로4의 성기사들은 디아블로2의 성기사와 3의 성전사를 섞고, 거기에 '천사'를 양껏 끼얹은 모양새를 띄고 있는데, 성장 빌드 중 하나인 '중재자' 빌드에서 이를 제대로 느낄 수 있다. 과거 영상에서 이나리우스가 빛의 날개(촉수?)로 악마들을 쥐어패던 것처럼 날개가 주변 악마들을 사정없이 후려친다.

이는, 그간 성기사와 성전사에게는 주어지지 않았던 새로운 가능성이다. 이전까지 이들은 어디까지나 '네팔렘'인 아카라트에 의해 만들어진 종교의 수행자로서, 혹은 그 종교의 타락을 느끼고 새로운 교파를 창설한 '네팔렘' 아크칸의 추종자로서 정체성을 지니고 있었다면, 빛의 파수꾼에 속하는 성기사들은 드높은 천상과 직접적으로 연결되고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앞으로의 서사 라인이나, 세계관에서도 성기사들이 드높은 천상과 성역을 중개하는 역할을 하게 될 수 있다는 뜻이다.
무엇보다, 그냥 멋있다.
정련된 갑옷을 입은 성기사는 아무리 중갑을 갖춰 입어도 야만인 그 이상은 못되던 야만 용사보다 훨씬 더 판타스틱한 비주얼을 자랑하며, 프레임이 보잘것없는 강령술사나 뭘 입혀도 폼이 안나는 드루이드, 입혀 봤자 헐벗기 일쑤인 혼령사나 원소술사와 비교해도 쿨함의 농도가 다르다. 차가운 성역 남자라면 이 정도는 되어야지.

3D 우리 성기사, 정상 영업 합니다
신규 클래스는 보통 강하다. 혼령사가 출시되었던 시기를 겪은 이들이라면 잘 알 텐데, 혼령사 한 명의 데미지가 야만 용사 수만명이 동시에 두들겨 패는 것과 맞먹던 시기가 있었다. 물론 이건 버그 수준이기에 잠깐의 헤프닝으로 끝나긴 했지만 말이다.
우리의 빛과 소금, 성기사도 당연히 신규 클래스에 걸맞는 강력함을 보여준다. 물론, 초기 혼령사가 보여주던 말도 안 되는 강력함을 보여주는 건 아니지만, 우리의 기대에 걸맞게 시간을 투자한 만큼은 분명 강해진다. 디아블로2 초기 성기사는 생긴 것과 달리 약골 그 자체였고, 디아블로3의 성전사도 초기에는 딴딴한 외형과 달리 근접 캐릭터용 데미지 감소가 없어 픽하면 죽는 약골이었지만, 디아블로4의 성기사는 이런 유약한 선배들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빌드의 경우 아직까지 빌드 개발이 많이 된 상황은 아니지만, 일단은 흔히 '질딘'이라 불리는 '열의'를 중심으로 하는 빌드와 중재자의 '날개 타격'을 핵심으로 삼는 빌드, 그리고 '심판'을 중심으로 운영하는 심판 빌드, 성기사 하면 딱 생각나는 해머 돌리기 등의 빌드가 현재는 가장 널리 쓰인다. 물론, 이 '널리'는 상대적일 뿐, 방패 돌진이나 신성한 방패, 기병창 등을 활용하는 빌드도 여러모로 실험이 이뤄지고 있다.
디아블로4를 플레이해본 이들이라면 알겠지만, 빌드를 어떻게 타느냐는 사실 상 다른 클래스를 하는 느낌이 들 정도로 플레이 감각이 상이한 편이지만, 이 많은 빌드들의 공통점이 있다.
바로 더럽게 튼튼하다는 점이다.

내가 키운 탄생 2일차 성기사 정열이는 중재자 날개타격 빌드를 탄 그냥 흔하디 흔한 성기사다. 아직 신화 고유까지는 파밍하지 못했고 고행 4단계 정도는 무리 없이 돌아다니는, 그냥저냥 흔한 성기사인데, 이 녀석 아직까지 죽음을 경험한 적이 없다. 일단 '방패'를 쓰는 클래스(질딘은 양손 무기를 쓰기도 한다)다. 기존 방패는 강령술사의 전유물이었는데, 강령술사조차 가시 소환수 등의 특정 빌드가 아니면 방패를 쓸 일이 없었기에 사실상 꽝이나 다름없던 부위였던 방패를 제대로 쓰는 클래스가 나온 셈이다.
거기에,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방어력과 방패 막기 확률을 올려주는 패시브인 '방비', 그냥 스킬창에 올려만 두어도 방어력과 모든 저항을 30% 올려주는 '저항 오라', 스택으로 쌓이며 피해를 20% 줄이고 소모되는 '결의' 중첩 등이 겹치다 보니 기존의 어떤 클래스와 비교해도 우월한 맷집을 자랑하는 단단한 클래스가 된다.
어느 정도 성장하고 나면 딱히 신경 쓰지 않아도 방패 막기 확률이 100%에 근접해 있기 때문에, 고난이도에서 간혹 겪는 '끔살'이 거의 일어나지 않고, 방패로 막을 때마다 보강을 얻는 패시브까지 존재해 웬만큼 높은 난이도를 억지로 가지 않는 이상 죽을 일이 없다.

물론, 나락 120단 이상의 초 고난이도로 가면 사정이 조금 달라지긴 하지만, 여기서도 다른 직업보다 월등히 단단한 건 마찬가지다. 때문에 완전히 똥망 빌드만 아니라면 100단 정도는 어떤 빌드를 타도 클리어하기 어렵지 않다. 거한 가시 빌드, 정점 빌드, 중재자 산책 빌드, 해머 돌리기 등등 여러 빌드가 100단 이상 클리어 인증을 올리고 있는 상황이니까.
하지만, 그 강함이 과하지는 않다. 다른 직업들도 비슷하게, 혹은 조금 더 빠르게 등반 단수를 올리고 있는데, 성기사가 아직 출시 초기로 충분한 연구가 이뤄지지 않았음을 감안하면 그럭저럭 균형을 맞추고 있는 수준이라 볼 수 있다. 보고 있나 혼령사? 성기사가 이렇게 공명정대하다.

성역 정상화는 역시 성기사
그리고, 성기사의 이 공명정대함을 세상이 알아줬다. 성기사의 등장과 함께 성역도 큰 폭으로 변화가 이뤄졌다. 가장 크게 달라진 점은 보상 시스템이 변경되면서 콘텐츠 순환의 유기성이 대폭 강화된 것. 엔드 콘텐츠가 하나만 남지 않도록 보상 시스템을 여기저기 나누는 건 지난 몇 시즌 동안 꾸준히 이뤄졌던 변화 중 하나인데, 이번 시즌에 이르러서는 이 과정이 보다 명확하게 분리되었다.
지옥불 군세와 지하도시, 악몽 던전과 속삭임, 우버 보스에 이르는 엔드 콘텐츠들이 순환 구조를 띄게 되어 하나만을 반복하기보단 여러 콘텐츠를 플레이할 이유가 생겼다. '옵두사이트'의 경우 지옥불 군세부터 지하도시(정련의 공물) 시대를 넘어 이제 악몽 던전의 시대가 되었다. '보물의 틈새' 버프가 달린 악몽 던전만 가도 한 번에 옵두사이트가 7천 이상 벌리니 재료가 모자라 명품화가 어려울 일은 없다.

도박과 다름없던 명품와 담금질도 훨씬 용이해졌다. 명품화는 니스아이언만 충분하면 얼마든지 원하는 옵션이 뜨도록 다시 돌릴 수 있고, 담금질도 옵션을 하나만 달게 되는 대신 원하는 옵션을 저격해 달 수 있기 때문에 복원의 두루마리를 다 쓰고도 쓸모없는 옵션이 붙어 아이템을 버릴 일이 없어졌다.
대신 유저들의 도파민을 터뜨리기 위해 준비된 콘텐츠가 신규 시즌 콘텐츠인 '축성'이다. 담금질과 명품화, 보석 작업까지 모두 끝낸 상태에서 시도하게 될 이 최후의 강화(중요하다!)는 아이템에 한 번 더 무작위적 강화가 붙는다.
새로운 속성이 붙을 수도, 전설 위상이 추가될 수도, 그냥 아이템의 전체적인 성능이 한 단계 더 올라갈 수도 있다. 다시 한 번 말했지만 모든 작업을 다 해두고 진행해야 한다. 축성이 한 번 적용된 아이템은 무슨 짓을 해도 가공이 불가능해지기 때문에 보석칸이 하나 덜 뚫렸거나, 명품화가 마무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진행하면 눈물이 난다.

과거 서비스 초기 난이도 조정을 위해 존재했던 '캡스톤 던전'도 부활했다. 재미있는 건, 과거와 달리 여전히 난이도 조절은 나락 클리어 단수에 맞춰지지만 캡스톤 던전을 클리어해야 시즌 진행도 조절이 가능하다는 것. 시즌 진행도는 꽤 큰 보상과 보상 관련 버프를 주기 때문에 난이도를 올릴 즈음에 캡스톤 던전도 깨면서 진행하는게 좋다.
정리하면, 디아블로4는 서비스 초기, 아니 '증오의 그릇' 초기와 비교해도 일취월장이라는 말이 어울릴 만큼 좋아졌다. 욕하면서도 애정으로 플레이하던 기존 게이머들도 '이번 시즌은 꽤 좋다'라는 평을 남기고 있는 상황. 현재 불거지고 있는 문제는 시즌 콘텐츠인 '천상의 선물'에 필요한 점수가 너무 조금씩 오르는(특히 아즈모단이 그렇다) 정도인데, 그 외에는 모든 면에서 딱히 문제가 될 부분이 없다.
다른 말로 하면, '정상화'가 되었다. 이 모든 건 다 누구 덕분? 당연히 공명정대하고 멋지고 쿨하며 또한 강력한 우리 빛의 아이돌 성기사 님 덕분 되시겠다. 성역 정상화는 역시 성기사다. 성역을 누비고 다니는 숙련 악마사냥꾼들도 인정한 바다. 이 새로운 소식에도 의심의 망집에 사로잡혀 '사? 말아?'를 고민하는 이들이여, 늦게 시작하면 손해다.
지금 당장 성역으로 Let's go.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