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미묘한 시기다. 스타크래프트로 오랫동안 e스포츠의 종주국을 자처했던 우리나라의 e스포츠협회는 저작권 문제에 부딪혀 리그가 파행으로 진행되고 있고, 우리를 열광케 했던 임요환, 이윤열 같은 e스포츠 스타들은 협회가 ‘이벤트 대회’로 칭하고 있는 GSL 대회에서 스타크래프트2를 플레이 하고 있다. 그래텍과 케스파의 협상은 연일 결렬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고, 블리자드는 소송이라는 마지막 카드를 꺼내들었다.


대기업들이 스폰서가 된 프로게임단들, 광안리를 가득 메웠던 결승전과 엄전김으로 불리는 해설진들의 ‘일부는 시즈모드, 일부는 퉁퉁퉁퉁’ 같은 주옥 같은 대사들. 어린 나이에 열심히 게임을 연습하며 최고의 자리를 위해 생의 순간들을 불태웠던 선수들. 그리고 게임은 몰랐지만 선수들의 열정과 승부에서 오는 감동만으로 팬을 자처했던 많은 사람들.


이 모든 것들이 흔들리고 뒤집히는 그대로 ‘대격변’의 한 가운데에 우리 e스포츠는 서 있다.





어쩌다 이런 상황이 되었는지 비판이 만만치 않다. 따지고 들어가면 스타크래프트에 90%이상 의존하고 있는 현재의 구도가 근본적인 원인일 수도 있을 것이다. 만약 스타크래프트만큼 인기가 있는 다른 e스포츠 종목이 육성되었다면, 이렇게 스타크래프트에 ‘목매어’ 저작권을 인정하네 마네 공공재네 아니네 하고 구차한 모습을 보일 필요는 없었을 지 않냐는 지적도 있다.


물론 스타크래프트와 같은 e스포츠 종목을 만들어 보겠다고 한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수많은 게임들이 e스포츠 종목이 되어 흥행성적을 끌어올리길 원했고, e스포츠 업계도 다양한 게임들의 e스포츠 종목화를 통해 e스포츠의 영역이 확대되길 원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보면 이런 시도는 대부분 실패했다. 현재 e스포츠협회의 주도로 열리고 있는 ‘프로’리그는 스타크래프트와 스페셜포스 둘 뿐. 나머지 공인종목들은 게임의 흥망성쇠와 함께 대회의 명맥도 끊어졌다. 스페셜포스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프로급 선수들은 스타크래프트 프로게이머. 이 정도면 과연 대회의 수준을 넘어서 ‘프로’로 활동할 수 있는 게임-스포츠가 과연 가능한가 하는 의문이 들 정도다.


어쩌면 스타크래프트가 워낙 특이한 케이스가 아니었을까?


그러므로 e스포츠 공인종목 중 유일하게 게임이 아니라 e스포츠를 최종목표로 두고 개발된 ‘바투’가 스타크래프트를 벤치마킹 한 것은, 어쩌면 전략적 선택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필연이었을지도 모른다.



▲ e스포츠 공인종목은 이렇게 많지만 스타크래프트 하나로 이 난리다.




ㅁ 스타크래프트가 되려 했던 바둑


바투는 바둑을 기반으로 했지만, 중요한 게임의 아이디어는 모두 스타크래프트에서 따왔다. 바둑과 RTS 사이의 넘을 수 없는 간극을 인정하는 한도 내에서 아마 바투의 개발자들은 스타크래프트의 경기에서 극적인 재미를 주는 요소들이 무엇인지를 하나하나 분석했으리라. 그리고 선택된 것들은 ‘하는’ 재미가 아니라 ‘보는’ 재미에 좀 더 무게를 둔 요소들이었다.


- 초반 빌드와 심리전


스타크래프트 경기는 초반 빌드와 그에 따른 심리전으로 시작한다. 상대방의 빌드와 나의 빌드가 무엇인지는 경기의 승패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특정 빌드에 유리한 빌드가 있지만 그렇다고 항상 유리함을 선점할 수 있는 무적빌드는 없다는 것이 특징. 초반 정찰을 통해 상대방의 빌드를 알게 되면 그 때부터 심리전이 시작된다. 상대방에게 들킨 빌드를 꼬아서 다른 빌드로 착각하게 만들기도 하고, 상대방이 무난하게 자신의 전략을 실현시킬 수 없도록 일꾼으로 끈질기게 괴롭히기도 한다. 일꾼의 일을 방해하거나 가스 러쉬를 해서 빌드를 꼬이게 만들 수도 있다.


바투는 이런 점을 베이스 빌드와 턴 베팅이라는 부분으로 받아들였다. 바둑처럼 한 수 한 수를 번갈아 두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수를 보지 않은 상태에서 처음에 3개의 바둑돌을 먼저 둘 수 있게 한 것이다. 베이스 빌드가 끝난 후에야 서로가 둔 바둑돌을 볼 수 있는데, 이 때 자신의 빌드가 상대보다 불리하다면 조금 더 무리해서 점수를 투자해야 하고, 이를 유리한 빌드를 선택한 선수가 역이용해 상대방에게 손해를 강제하는 심리전도 가능하게 했다.



[ 이런 식으로 3점을 먼너 놓는다. 베이스 빌드라고 한다 ]



[ 이런 경우는 턴베팅이 치열해진다. 먼저 둔 쪽이 많이 유리하기 때문 ]




- 맵에 따라 다른 경기양상, 주요 전략 거점의 존재


스타크래프트는 다양한 맵이 존재해, 전략적 거점을 누가 먼저 점령하고 상대방으로 하여금 불리한 전장에서 싸우게 만드느냐가 매우 중요하다. 특히 언덕 위쪽에서는 대미지를 다 받지 않는 규칙으로 인해 언덕을 두고 펼쳐지는 밀고 밀리는 싸움은 스타크래프트 경기의 재미요소 중 하나엿다.


바둑도 기본적으로는 자신의 세력과 거점을 착실하게 확보해나가는 것이 중요한 요소지만, 바투는 여기에서 더 나아가 바둑판의 모든 점이 같은 점수를 가진다는 규칙을 비틀면서 스타크래프트처럼 거점의 유불리를 심어두었다.


바투의 바둑판에는 + 점과 - 점이 존재해서 그 부분은 점수가 더 많거나 적거나 했다. 그래서 일반적인 바둑의 전투를 하면서도 누가 + 점을 먼저 차지하는지, 상대방에게 - 점에 돌을 놓을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전투의 기술들이 경기의 승패에 영향을 미쳤다.



[ +, - 표시가 된 곳에 돌을 놓으면 점수가 증감된다 ]



- 클로킹 유닛과 스캔의 활용


스타크래프트의 클로킹 유닛과 이를 감지할 수 있는 방법들도 바투는 받아들였다. 온라인 게임이라는 특성을 살려 상대방에게 보이지 않는 한 수를 둘 수 있게 한 것. 이를 ‘히든’이라 명명했다. 숨길 수 있으므로 찾아보는 기능도 있다. 스타크래프트 테란 종족의 ‘스캔’ 기능은 이름까지 따왔다. 상대방이 히든을 착수하면, 어디에 돌을 놓았는지 한 점을 골라 확인해 볼 수 있다.


바둑에서 중요한 순간에 두어야 하는 착수점은 몇 개로 제한되어 있는데 어디에 돌을 놓았는지 모르는 상태에서 돌을 놓아야 한다면 불리해도 이만 저만 불리한 것이 아니다. 그렇지만 바투의 고수들은 곧잘 상대방의 심리와 전황을 살펴 숨어있는 바둑돌을 예측하거나, 가장 놓음직한 곳에 스캔을 뿌려 히든돌을 찾아내곤 했으며 이렇게 히든과 스캔이 성공하는 장면은 바투에서 가장 극적인 승부처였다.


- 경기의 시간


바투는 스타크래프트의 경기 시간까지도 벤치마킹했다. 스타크래프트 한 판이 15분에서 20분 정도의 빠른 시간에 끝나는 것에 반해 바둑은 워낙 긴 시간을 필요로 했기 때문에 적당한 수준으로 경기가 속도감 있게 진행되는 것이 중요했다.


한 수를 두는데 제한 시간을 두고, 전체적인 경기의 시간이 15~20분 정도에 끝날 수 있도록 바둑판의 크기를 원래 19x19가 아닌 11x11로 설정한 것도 e스포츠를 염두에 둔 결과였다.



[ 일반 유저들도 물론 즐길 수 있었다 ]




- 스타급 선수와 방송 리그


e스포츠를 목적으로 개발된 바투는 게임 외적으로도 e스포츠가 되기 위해 필요한 요소들이 무엇인지도 알고 있었다. 이미 스타리그를 통해 e스포츠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경험한 온미디어는 게임 외에도 스타급 선수와 방송리그까지도 고려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선 바투의 인기를 끌기 위한 스타급 바둑 기사들이 바투에 힘을 실었다. ‘오래된’ 느낌이 나는 바둑에 신선한 바람을 불러일으키고 바둑인의 저변을 넓힌다는 기치아래 조훈현, 이창호, 유창혁, 박지은 같은 프로 기사들이 바투 대회에 나가기 시작했다.



[ 바투 인비테이셔널에는 중국 바둑 랭킹 1위인 '구리',
세계적인 바둑대회인 응씨배 우승자 '창하오'까지 참가했다 ]



대회와 방송은 모두 스타리그의 그것을 차용했다. 선수들은 타임머신이라고 불리는 전용 경기석에 들어가서 바투를 플레이했고, 이창호 9단은 생전 처음 써보기라도 하듯 헤드폰을 뒤짚어 쓰는 헤프닝을 연출하기도 했다. 바투의 해설 또한 급박하고 빠르게 진행되어 보는 사람을 흥분시켰던 그 느낌 그대로였다.


대회의 규모도 컸다. 요즘 임요환 선수의 전향 등으로 화제가 되고 있는 GSL의 우승 상금이 1억 원이라 상금이 쎄다는 이야기를 듣고 있는데, 바투 글로벌 리그는 우승상금이 1억 5천이었다. 바둑에 재능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노려봄직한 규모였다.


결과적으로 바투 글로벌 리그는 화제가 될만한 결승 매치가 성사되었다. 바둑랭킹 1위와 바투 랭킹 1위가 결승전에서 맞붙어 결국 바투 랭킹 1위 선수가 우승상금 1억 5천만 원을 가져갔던 것이다. 비유하자면 바둑팬들에게는 마치 SlayersBoxer 와 Fake Boxer 가 결승전에 만난 그런 느낌이었을 것이다.



[ 타임머신에 들어가 헤드폰을 쓰고 있는 이창호 9단 ]




ㅁ e스포츠 그리고 게임…


하지만 바투는 글로벌 리그를 정점으로 하향세를 타기 시작했다. 기능성 게임으로 선정되거나 하면서 몇 차례 언급되긴 했지만 그러다 결국은 더 이상 서비스를 지속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그리고 지난 10월 28일부로 서비스를 종료하고 만다.


처음부터 e스포츠를 염두에 두고 개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바투가 시장에서 실패한 원인은, 서비스가 종료된 지금은 말하기 쉽다.



[ 기본은 바둑게임. 바둑을 모르면 즐길 수 없었던... ]



애초에 수 천 년 전부터 게임의 룰이 완성된 바둑이라 바투가 도입한 새로운 룰들은 오히려 완성도를 떨어뜨렸다. 바투의 유저층은 결국 바둑의 유저층과 중복될 수밖에 없으며 바투가 바둑보다 더 나은 ‘하는 재미’를 가지고 있지 않은 이상 결국 잠깐의 흥미를 끌 수는 있겠지만 지속적인 서비스가 가능할 수는 애초에 없었던 것일 수도 있다.


서로의 시장을 잠식할 수 있는 위험을 가지고 있었던 바둑과 바투에서 이창호, 조훈현 같은 스타급 선수들은 바둑을 접고 바투로 전향한 것이 아니라, 바둑에 그대로 몸을 담고 있었다. 임요환 이윤열 선수가 스타크래프트를 접고 스타크래프트2로 완전히 투신하면서 스타크래프트의 팬들까지 스타크래프트2에 관심을 갖게 만들고 있는 상황과는 정반대다.


1억 5천만 원이라는 큰 상금도 세계 바둑 대회의 상금 규모에 비하면 적은 것이었다. 바투를 잘하려면 바둑을 잘 둬야 하는데, 바둑의 정점에 있는 선수들은 국내, 세계 바둑대회에 나가는 것만으로도 일정이 빠듯했다.


바둑이라는 원형을 유지하다보니, 일반 게이머의 진입이 배제되다시피 한 것도 하나의 원인이다. e스포츠가 주는 재미와 감동을 잘 알고 있으며, 경기장에 직접 참가해 응원을 하고, 치어풀을 만들고 팬 카페를 만드는 등 e스포츠의 팬 문화를 만들어왔던 e스포츠 팬들에게 바투는 너무 어려운 게임이었다.



▲ e스포츠는 팬을 먹고 자라야 한다. 사진은 GSL 시즌 1 결승전 현장



시장에 나왔던 하나의 게임이 서비스를 종료하는 일이야 일상다반사다. 바투도 더 이상 즐기는 유저가 없어 이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수익이 담보되지 못하는 상황이 지속되었기 때문에 서비스를 내리는 판단을 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일반적인 게임과 크게 다르다고 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바투에 ‘그래서 서비스가 종료되었습니다’로 마침표를 찍기는 아쉬움이 남는다. 게임의 흥행에 도움이 될까하고 방송 출연을 위해 대회를 만드는 다른 게임들과 달리, 바투는 적어도 스타크래프트를 잇는 포스트-e스포츠가 되려는 꿈을 품었던 게임이기 때문이다.


바투는 바둑의 역사에 기록될까 게임의 역사에 기록될까. 어느 쪽에도 포함될 수 있는, 그래서 어느 쪽에도 포함되기 어려운 바투는 그래도 e스포츠의 역사에는 기록해야 할 것이다.


지금은 스타크래프트-스포츠라고 해도 부정하기 어려운 e스포츠가 스포츠의 한 영역으로 자리 잡기 위해, 언젠가 스타크래프트가 아닌 다른 게임이 e스포츠의 주요 종목으로 활약하게 될 날이 온다면 분명히 바투가 가려 했던 길과, 실제로 걸었던 길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것이므로.


  • 게임명 : 바투 (BATOO)
  • 오픈베타 : 2008년 12월 22일
  • 바투 인비테이셔널 허영호 선수 우승, 누적상금 4천 2백만 원 : 2009년 2월 12일
  • 한게임 채널링 : 2009년 2월 24일
  • 연간 상금 12억의 월드 바투 리그 발표 : 2009년 3월 30일
  • 월드 바투 리그 이재웅 선수 우승, 우승상금 1억 5천만 원 : 2009년 11월 15일
  • 캠퍼스 대항전 성균관대 우승 : 2009년 12월 5일
  • 전국 기능성 게임 대회 종목 선정 : 2010년 6월 14일
  • 서비스 종료 : 2010년 10월 2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