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의 교사 면직 사유 - 태극기 가르치다 불온교사로 찍히시다

 

분경에서 교필을 잡던 박정희가 1940년 2월 갑자기 면직된 사유는 불온교사였다


 

일본인들은 교사를 면직할 때 그 사유를 기록으로 남겨둔다.

 

박정희가 일본인 몰래 학생들에게 조선어를 가르치는 동안
한 학생이 천황의 눈을 연필로 까맣게 지웠다 (황실광의 증언).
천황에게 신사참배하는 것이 강요되던 시대에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이순희씨에 따르면 일어 상용(常用)으로 학교에서 조선말을 사용할 수 없게 되자
박정희는 수업시간에 몰래 조선어를 가르쳐주기도 했다.

 

한번은 둥근 원을 그려 그 속에 가로로 물결무늬를 그려 넣고는
“보기만 해! 이게 조선 국기다”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리곤 그림을 찢어버렸는데 한 학생이 다른 반에 가서 자랑한 것이
일본인 교사 귀에 들어가 ‘불온교사’로 찍혔다는 것이다.
(제자 이순희 증언· 정운현의 ''실록 군인 박정희'' 60쪽)

 

만약 만주국군이 일본군이었다면
이런 불온교사 경력의 박정희는 신원조회에 걸려 절대로 사관학교로 진학할 수 없었고,
입학 후에도 곧 입학이 취소되었을 것이다.

 

박정희가 만주군관학교로 진학할 수 있었던 이유는
만주국은 일본의 신원조회망을 벗어난 철저한 제3국이었기 때문에 가능할 수 있었다.

 

박정희각하 교사시절의 제자들의 증언



박정희 교사는 몸집이 작은 데다가 학창시절에 입던 허름한 옷을 입고 있었으며 교무실에서는 출입문에서 제일 가까운 말석에 앉아 있었기 때문에 손님들은 가끔 사환으로 오인하는 경우가 없지 않았다.

그러나 학생들은 엄격하면서도 다정다감하고 정열적으로 가르치는 박정희 교사를 좋아했다. 당시 제자들의 증언을 예로 들어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황실광의 말

박 선생님이 우리 학교에 오셨을 때 나는 6학년 반장을 했다. 선생님은 우리들에게 조선어를 가르쳤다. 역사, 시조도 가르치고 학생들의 사기를 돋우기 위하여 위인전을 많이 읽도록 하셨다.

박 선생님이 일제치하에서 우리글을 가르치기 위해 애쓰신 것은 분명하다. 학생 한 사람을 복도에 세워놓고 일본인 교장이나 교사가 오지 않나 망을 보게 했다.

그때 한 남학생이 천황의 사진에다 장난을 하고 교무실에 불려가 혼이 난 일이 있다. 천황의 눈을 연필로 까맣게 지우는 따위의 행동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인데 우리들에게 그런 생각을 갖도록 한 것은 박 선생님의 영향이 컸을 것이다. 선생님의 별명은<호랑이 선생님>이었으나 자주 부르지는 못했다. 나는 졸업 때 앨범을 선물로 받았다.

여러 사람들의 증언을 그대로 옮겨 실었다. 박정희 교사는 사랑과 정열로써 학생들을 가르쳐 왔다. 그것은 그의 마음속 밑바닥에 항상 조선인이기 때문에 겪어야 했던 민족적 울분이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이영태(李永泰)의 말
조선어 시간에는 우리 나라의 태극기와 역사를 가르쳐 주셨다. 음악시간에는 <황성옛터><심청의 노래> 등을 가르쳐 주시고 기타도 쳐주셨다. 지금 생각하면 조국이 없는 서러움 때문인지 일본인 교사들과는 자주 싸우는 광경을 보았다. 하루는 수석교사였던 일본이 야나자와(柳澤)와 말다툼 끝에 그가 <조선놈>이라고하자 의자를 집어던진 일도 있었다.

그 당시 일본인 순사 중에 오가와(小川)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와 자주 논쟁을 벌였다. 박 선생님이 만주군관학교에서 군도를 차고 문경에 왔을 때 오가와(小川)가 무어라 했다가 혼이 난 적도 있다.


 

정순옥(鄭順玉)의 말
어느 일요일, 동무들 몇 명과 함께 새로 오신 선생님(박정희)의 하숙 집을 찾아갔다. 호기심을 가지고 선생님의 방을 살펴봤더니 책상 위에 커다란 사진액자가 걸려 있는데 배가 불룩 나오고 앞가슴 양편에 단추가 죽 달려 있는 사람이었다. "저 사람이 누구냐"고 물었더니 선생님은"영웅 나폴레옹"이라고 하시며 나폴레옹에 대하여 자세히 이야기해 주셨다.

4월 어느날 소풍을 가게 되어 고운 옷으로 갈아 입고 여러 가지 음식을 가지고 떠났다. 선생님은 등산복 차림에 어깨엔 나팔을 메고 길다란 막대기를 가지고 우리들이 장난을 치거나 줄이 흐트러지면 한 대씩 때렸다. 목적지에 도착하여 점심을 먹고 놀고 있는데 한 아이가 깊은 물에 빠져 고함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 순간 박 선생님이 물속으로 뛰어들어 한참 만에 그 아이를 건져내어 인공호흡을 시키는 것이었다. 다른 선생님들은 그 동안 둑에서 발만 둥둥 구르고 계셨다.

그리고 언젠가 우리는 박 선생님과 일본인 선생님 두 분과 함께 놀게 되었다. 그때 일본이 선생 한 분이 조선 여성은 예의가 없다느니, 젖가슴을 다 드러내고 물동이를 이고 다니느니 하며 우리 나라 여자의 흉을 보았다. 이에 박 선생님은 우리들에게"너희들 저 말 잘 새겨 들어라. 가난하고 무지하면 남에게 멸시를 당하는 것이다. 우리들끼리 있을 때는 절대로 일본말을 쓰지 말고 조선말을 쓰자"고 했을 때 우리는 철없이"조선말 쓰면 퇴학 당하는데 왜 그러세요"하고 반박한 기억이난다.

그러나 우리는 선생님을 가장 존경하며 따랐다.

주영배(周永培)의 말
1939년, 내가 보통학교 5학년일 때 조선어 과목을 가르치며 박 선생님께서는 "이 글을 잘 배워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박 선생님은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는 분이었다. 가정실습 때는 문경에서 12킬로미터나 떨어져 있는 산골까지 자전거를 타고 오셨다.선생님이 돌아가시는 그 뒷모습이 산록으로 숨어들 때는 울고 싶도록 감사했다.

전경숙(全慶淑)의 말
박 선생님은 우리 집으로 하숙을 옮겼다. 그리하여 우리 어머니를"모친"이라고 불렀다. 식사는 가리는 것이 없었고 복장은 단정하였으며 출근은 빨랐다. 언제나 숙제를 내주시고 철저히 검사하여 평가를 해주셨다. 월요일마다 공책을 점검하시고 글씨를 바르게 쓰도록 지도해 주시고 일기와 편지쓰기를 장려하였다. 5학년 20명과 2학년40명을 한교실에서 복식수업(複式授業)을 하면서도 질서가 정연했다.

말은 간단명료하였으며 청소에 신경을 쓰고 유리창, 천정의 거미줄, 화장실 청소를 철저히 시켰다. 그리하여 청소도구를 완비하여 가지런히 정리 정돈되도록 하였으며 책상의 줄이 비뚤어지고 환경이 지저분한 것을 매우 싫어하셨다.

위인전 같은 이야기를 자주 해주시고 "너희들도 이와 같은 훌륭한 사람이 돼야 한다"고 하셨다. 노래와 나팔을 좋아하시는 선생님은 악대와 합창반도 조직하여 각종 행사에 참가하기도 했다.

가을운동회 때는 박 선생이 기마전, 기둥 넘기기, 공바구니 터뜨리기, 텀블링을 지도하여 관중들의 박수를 받던 기억이 생생하다.

가을소풍 때 문경새재를 갔을 적에는 제1관문의 이야기를 자세히 들려주시고 점심을 싸오지 못한 학생은 선생님이 도시락을 나누어 주시던일, 발목을 삐어 걸음이 곤란한 학생을 업고 산길을 내려오던 선생님의 모습이 생각난다.

전도인(錢道寅)의 말
하루는 박 선생님이 교무실에서 혼자 사무를 보고 있으면서 나를 불렀다. 그때 일본인 청부업자 한 명이 담배를 문 채 교무실 안으로 들어와 박 선생님에게 "오이! 교장 계신가?"하고 물었다.

선생님은 일본인을 한 번 힐끗 쳐다보고 아무 대꾸가 없었다. 그 사람이 재차 똑같이 묻자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 일본인들이 부르짖는 내선일체(內鮮一體)가 진실이라면 당신이 내게 그러한 언동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일등 국민으로 자처하고 싶거든 우선 교양 있는 국민이 돼야지, 담배를 물고 교무실에 들어온 것만 해도 무례하기 그지없는데 언동까지 몰상식한 인간이라면 나는 너같은 사람을 상대할 수가 없다. 어서 나가봐!"

하고 말한 적이 있다.

 

 출처 :  http://www.gumi.go.kr/presidentpark/pages/sub.jsp?menuIdx=46

 
 
박정희가 빨갱이? 배신자 라고?


동료를 밀고한 변절자라고?




그렇게 말하는 놈들은 김일성 입장에서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김일성 입장에서는 동료를 밀고한 변절자가 맞지...

변절자라고 욕하는 놈들은 김일성을 대변하는거냐?


아래 읽어봐라

 

▼=1954년 오클라호마州 포트실 미 포병학교에서 교육 받던 시절의 박정희 준장(왼쪽)

 
 
 
 

1948년 11월 박정희 대통령은 좌익혐의로 체포된다. 당시 박대통령은 구형에서는 사형을, 선고에서는 무기징역을 받게 된다. 아울러 소령에서 파면됨으로서 군복도 벗게 됐다. 그러나 박대통령을 구명하기 위한 각계의 노력이 이어졌고, 박대통령은 빨갱이가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짐으로서 후일 대한민국의 국부가 되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체포된 과정

<dd class="gisa_content" style="margin: 0px; padding: 15px 0px; list-style: none; width: 680px; line-height: 24px; float: left; font-size: 1.2em;">

박정희 대통령이 체포된 과정을 보면 김창룡 특무대장의 부하들이 서울 시내에서 남로당 이재복을 체포한 후 이재복이 소지한 명단에 박대통령의 이름이 적혀 있던 것이 문제가 된 것이다. 


인물포섭 전문 이재복의 접근

이재복은 남로당 군사총책으로 주임무는 인물포섭이었다. 이재복은 박대통령의 형인 박상희가 “대구 10.1 사건”에서 우익으로부터 피살 당하자 박대통령에게 그에 대한 복수심을 부추키며 접근한 기록이 남아 있다.


박대통령에게 전략적으로 접근한 이재복은 사망한 박상희의 가족을 돌봐주는 등 호의를 베풀면서 박대통령을 포섭명단에 올렸던 것이다. 박대통령을 수사한 실무책임자인 김안일 특무과장도 "박정희는 '대구 10.1사건'으로 형 박상희가 우익에 피살되자 그에 대한 복수심과 이재복의 권유로 남로당에 가입한 것 같다"고 확인해 준 사실이 있다.


박정희 대통령을 휘하 소대장으로 데리고 있었던 김점곤 평화연구원장은 “당시 박정희는 남로당 특수조직부에서 지명한 요인물이었으나 이데올로기 때문은 아닌 것 같으며, 활동도 미약했다", "박정희는 빈농 출신에다 형의 죽음 때문에 원한이 있었고, 특히 사범학교 때 조선공산당사건을 접했으며, 또 군관학교 수석 졸업 등 이른바 '최고의 성분'을 가지고 있어 남로당 측에서 탐낼만한 인물이었다"라고 회상하고 있다.


당시 고등군법회의의 재판장 김완룡은 "박정희 소령은 남로당 가입후 구체적으로 활동한 내용이 없는데다 군 내부에서 그를 죽이기 아깝다는 여론 때문에 살렸다"라고 증언했다. 더불어 당시의 숱한 증언에 의해 박대통령은 실질적으로 남로당 활동을 한 적이 없었던 것으로 최종 확인됐었다. 하물며 박대통령 두번 죽이기에 나선 좌파조차 지금까지 더 이상의 뚜렷한 이적행위를 입증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박대통령의 '남로당 총책' 운운은 역사적 사실이 아닌 음모론이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는 것이다. 



</dd><dd class="gisa_content" style="margin: 0px; padding: 15px 0px; list-style: none; width: 680px; line-height: 24px; float: left;">이재복의 접근-향우회 참석하라</dd><dd class="gisa_content" style="margin: 0px; padding: 15px 0px; list-style: none; width: 680px; line-height: 24px; float: left; font-size: 1.2em;">

박정희 대통령도 훗날 김종신에게 “육사 교관으로 있을 때 형님 친구되는 분(이재복)이 찾아와 다음 일요일 모 장소에서 향우회가 있다며 나더러 꼭 참석해 달라는 거야. 처음엔 거절했으나 그분이 자꾸 청하길래 거길 갔었지. 그런데 그게 화근이 될 줄이야. 그날 향우회에 참석한 사람들은 모두 빨갱이 였어."


"나는 거기서 사인하거나 도장을 찍은 적은 없지만 그 일로 김창룡 한테 끌려가 모진 고문을 받고, 재판도 받았지.”라고 술회했다. 박대통령이 체포 되었을 당시의 증언들과 훗날 박대통령이 술회한 내용이 정확하게 일치하고 있다. 박대통령이 제출한 명단도 당시 모인 향우회 빨갱이 명단을 제출한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서울헌병대에서 모진 고문을 받았지만 비굴해 하거나, 구명을 부탁하지 않고 의연하게 고문에 대처했다. 이러한 박대통령의 사정을 알게 된 김창룡과 김안일 특무과장은 조사과정에서 박대통령의 혐의가 잘못되었음을 인정하고 그들이 자진해서 구명요청서를 작성해 이를 백선엽 장군이 미 고문단에 제출했다.


그간 좌파는 박정희 대통령이 남로당 빨갱이 명단을 제출하고 변절했다고 변절자, 기회주의자 등 모진 누명을 씌우는데 혈안이 됐었다. 빨갱이 입장에서 본다면 변절자가 맞다. 그러나 공산주의자에 계략에 걸려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빨갱이들을 일망타진하게 만들고 나아가 자유민주주의자로 새삼 확인되고 정의된 것이 어떻게 기회주의자란 말인가.


그렇다면 과거 반정부운동에 앞장서면서 이념을 내세운 운동권 출신들은 지금도 대남적화에 나서야 변절자가 아니라는 것인가. 역사는 흐른다. 흐르는 역사속에 진실은 언제나 역사 곁을 지키며 산하를 내려다 보고 있다.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그 날, 우리는 故박정희 대통령의 참모습을 다시 한번 경건한 마음으로 지켜 보게 될 것이다.

</dd>


 

 출처 : http://www.frontiertimes.co.kr/news/htmls/2012/06/2012062086505.html

 

'박정희=오카모토 미노루’ 는 북한에서 시작된 네거티브

참고) 

국가기록원이 공개한 '임시육군군인속계'라는 1945년 일제시대 공문서에 따르면 박정희는 여전히 다카기 마사오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나와있다.

노무현 정권 시절 '친일반민족행위자진상조사위'에서도 "박정희 前대통령은 친일파가 아니었다"고 결론 내린 바 있다.

박정희가 만주군관학교에서 일제사관학교를 가기 위해 혈서를 썼다는 근거인 '만주신문' 또한 그런 주장은 있었으나 '증인'이라는 사람이 말한 신문은 실제 발간된 사실이 없고 박정희가 혈서를 썼다는 점도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났기 때문


 


‘박정희=오카모토 미노루’ 는 북한에서 시작된 네거티브

대선토론회에 등장한 박정희 대통령의 창씨개명 문제

이시완 자유기고가, leeshiwan@gmail.com  

등록일: 2012-12-05 오후 6:23:29

 
나는 박정희=오카모토 미노루라는 말을 퍼뜨리고 있는 그들에게 한번 물어보고 싶다. 박정희의 창씨개명이 ‘오카모토 미노루’ 라는 얘기를 도대체 어디에서 들었느냐고 말이다. 그들의 대답은 뻔하다. 최상천의 ‘알몸 박정희’(2001), 강준만의 ‘한국 현대사 산책’, 그리고 재미 언론인 문명자의 ‘내가 본 박정희와 김대중’(1999), ‘김형욱 회고록’(1985), 전 독립기념관장 김삼웅의 칼럼 및 저서 등이 바로 그들의 ‘근거’다. 

하지만, 그 어떤 자료도 정확한 근거를 제시하지 못하고, 단지 ‘카더라’ 라는 수준에 그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여기서 한번 생각해볼 점이 있다. 바로 위 인물들의 공통점에 대해서다. 박정희가 오카모토 미노루라고 열심히 주장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박정희와 대립했던 사람이거나, 김대중 전대통령의 측근, 혹은 친북 인사들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안티 박정희’의 요소를 가진 사람들이라는 말이다. 그들의 주장은 과연 얼마나 설득력이 있는 것일까?

안티박정희의 입장에 있는 사람들이 객관적인 근거라며 늘 가져오는 근거는 일본 측에서 발간한 ‘일본육해군 총합사전’이다. 실제 이 사전의 2판(2005)에 보면 박정희의 일본이름이 오카모토 미노루라고 분명히 나와 있다.

 
 
 
하지만, 명심해야할 것이 있다. 이 사전은 일본 정부의 공식적인 기록이 아니라, 도쿄대학 출판부에서 출판한 ‘개인출판물’이라는 것이다. 더욱 중요한 점은 이 사전의 초판(1991)에는 오카모토 미노루라는 이름이 없는데, 2005년 발간된 2판에 갑자기 이 이름이 추가되었다는 점이다.

필자는 도쿄대학 출판부를 통해 이 사전의 저자에게 ‘오카모토 미노루’라는 이름의 근거를 확인해 본 결과,
근거 확인이 안되니 3판을 출판할 때는 ‘오카모토 미노루’라는 이름을 삭제하겠다”라는 답변을 받았다. 한국의 ‘안티 박정희’ 세력이 금과옥조처럼 받들어 오던 ‘일본측 자료’ 의 설득력도 이것으로 없어진 셈이다.

 

그렇다면 대체 이 ‘박정희=오카모토 미노루’라는 주장은 어디서 시작되었을까?

현재까지 언급되고 있는 자료 중에 가장 오래된 것은 1985년에 나온 ‘김형욱 회고록’인데, 필자가 발견한 그 보다 더 오래된 기록을 소개하고자 한다. 그것은 놀랍게도 ‘북한’ 에서 시작되었다.

1973년 8월11일자 북한의 로동신문을 보면 김대중 납치사건 직후에 박정희에 대한 비판을 집중적으로 쏟아놓는데, 그때부터 ‘오카모토’가 등장하기 시작한다.

“남조선의 한 집권자는 우리 인민이 일제 침략자들에 항거하여 싸울 때 혈서를 써서 ‘천황’의 ‘적자’가 될 것을 맹세맹세한 후 ‘특등 일본인으로’ , ‘돌격대장’으로 ‘오까모도중위’로서 민족의 해방과 독립을 위하여 싸우는 애국적 인민들을 탄압하기 위한 이른바 ‘토벌’에 110여회나 참가하였으며 조선동포들이 살고 있는 마을에 불을 지르고 불속에서 기여나오는 동포 어린이들과 늙은이들을 총창으로 마구 찔러 죽이고 생매장하는 몸서리치는 만행을 손가락 하나 떨지않고 감행한 자이라는 것도 모르는 사람이 없다.“ (1973년 8월11일 로동신문)
여기서 ‘오까모도’가 박정희를 지칭한다는 것은 1987년 북한의 금성청년출판사에서 나온 ‘원쑤는 재침을 노린다’라는 책에서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 그 내용을 인용한다.

일본 군국주의 우두머리 한놈인 구모놈은 박정희 역적놈을 ‘가즈오료리점’에 특별히 불러내다 먹자판을 벌려놓았는데 이 자리에서 다음과 같은 말이 오갔다.
“자네 퍽 몰라보게 됐네” “각하, 절 알아보시겠습니까? 사랑 받던 오까모도입니다” “아무렴 알아보고 말구”“그떄 선생님은 저를 돌격대장이라고 불렀지요” “그랬지.암 돌격대장이야. 오까모도군이 지금 남조선의 실권자로 나타났지만 내 눈에는 옛날 자주빛깔 만주국군의 군관생으로밖엔 보이지 않네” “고맙습니다. 기억해 주셔서. 저 역시 그 때를 자주 추억하곤 합니다” (「원쑤는 재침을 노린다」금성청년출판사1987)
한일회담을 비판하기 위해 일본을 찾은 박정희를 악의적으로 ‘오까모도’ 라고 설정하여, 일본인에게 저자세로 일관하는 인물로 그려놓은 것이다. 단지 북한과 한국의 일본어 표기법이 달라 ‘오카모토’가 북에서는 ‘오까모도’로 표현되고 있을 뿐이다.

한국에서 1973년 이전에 박정희를 ‘오카모토 미노루’ 라고 주장한 책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그것은 다시 말하면 한국 사회에 퍼진 ‘박정희=오카모토 미노루’라는 설은 북한의 주장을 확인도 없이 그대로 받아들여 정적비판을 위해 퍼뜨렸다는 말이 된다. 그리고 다시 한번 말하지만 그 주체가 되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안티박정희’ 진영이다.

문명자씨는 김일성, 김정일 부자와 직접 면담을 할 정도로 친분이 있던 사람이었으며, 김형욱씨 역시 박정희의 미움을 사 미국으로 망명하여 박정희 정권 비판의 선봉에 섰고, 김삼웅씨는 박정희의 정적 김대중씨가 만든 평민당 당보의 주간을 맡을 정도로 친DJ의 성향이었다. 다른 사람들 역시 전형적인 ‘안티 박정희’ 성향의 인물들이다. 

나는 한국 사회에서 나름 중요한 위치에 서 있는 이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당신들이 본 ‘박정희=오카모토’라는 근거는 어디에서 보았느냐고. 북한자료가 아니라면 당당히 밝힐 수가 있을 것 아닌가. 

지금까지 박정희 친일설, 혈서설 등에 대한 갑론을박이 있었지만, 박정희=오카모토 미노루에 대한 제대로 된 근거제시는 단 한번도 없었다. 만약 근거가 있다면 진작에 나오고도 남았어야 한다. 

만약 그 출처가 차마 북한이라고 말하지 못하고, ‘카더라’ 라고 말을 하고 싶다면 한국 사회에 무분별하게 퍼진 그 ‘설’에 대한 책임을 과연 누가져야할까? 정적 비판도 좋지만 도를 넘어서는 인신공격은 정파, 시대를 떠나 어느쪽이건 자제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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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  http://www.bignews.co.kr/news/article.html?no=237865

 

 

김대중 졸개, 김삼웅-박정희 대통령이...오카모토 미노루라 고 조작



박정희대통령을...다카키 마사오 라며.. 친일파로 몰던 좌파놈들이 

왜 갑자기 박통이...오카모토 미노루라고  바꿔 주장했어야만 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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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정부 요인이였던 백강 조경환 선생에 관한 이기청 의병정신선양회 무총장의 회고에 따르면 이런 내용이 있다.


<5.16 쿠데타가 일어나고 얼마 안돼서 한 젊은이가 면목동 집으로 찾아왔는데, 큰절을 하더라는 것이다. 동행한 사람이 "대통령이십니다" 하길래 보니 박정희였다. 박 대통령은 "제가 만주에 있던 다카키 마사오입니다" 하는데, 조선인 병사들을 독립군으로 빼돌렸던 다카키의 이름을 익히 들었기 때문에 놀랍고도 반가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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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대통령이 오카모토 미노루(악명높은 왜놈)라고 주장하고 있는 사이비 사학자(史學者) 김상웅

 

* 다카키 마사오는?

박통의 일제시대의 이름으로... 김대중졸개들이 박통을 친일파로 욕하던 빌미로 사용되었으나,

다카키마사오는 독립군을 비밀리에 도와준 독립군사이에 유명한 이름임이 발견되자... 급히 박통의 일본 이름을 오카모토 미노루라고 조작


* 오카모토 미노루는?
1929년의 광주학생사건(光州學生事件)('학생의 날') 사건에서 공(?)을 세운
사이비교육자인 한 왜놈으로 악명이 높다.

 

* 김상웅은?
김대중 추종하는 사이비 사학자로서, 박통이 오카모토 미노루라고 주장, 그 공으로? 노무현 정권때 독립기념관 관장을 맡게됨

 

 

 

필자(김병희)는 홈페이지[http://home.megapass.co.kr/~gimbyngh/]를 가지고 있어서,
지구촌 사람이면 누구든지 마음대로 와서 구경도 하고 글도 쓸 수 있게 하고 있는데,

오늘 새벽에는 "이상유"라는 분이 오셔서 쓴 글에서 다음과 같은 사연을 보았다["…"은 수십 자씩 생략했음을 뜻함]:

 

"저는 서울에서 근무하는 교사 이상유입니다. …
저는 박정희 대통령에 대하여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

박 대통령에 대한 근거 없는 음해가 많았지만,  …
오카모토 미노루라는 다른 창씨 명도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너무도 악질적입니다. …

그러다가 인터넷을 검색하던 중 정말 우연치 않게
박사님과 고민철 씨가 게시판에서 주고 받은 글을 보게 되었는데,

그 곳에는 제가 그렇게도 오랫동안 찾아다니던 오카모토 미노루의 비밀이 상세히 설명되어 있었습니다.  …

순간 박대통령을 음해에 앞장서던 김삼웅이 떠올라 치를 떨었습니다.

 

김삼웅은 독립기념관장을 하던 중에도 신촌의 서점에서 가끔 만나기도 하였습니다. …
이제 박대통령이 오카모토 미노루라는 음해가 사실이 아니라는 확실한 근거를 가지게 되어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습니다.

모두가 박사님의 소중한 증언 덕분입니다. …

홈페이지 어딘가에 오카모토 미노루의 사진을 올려놓았다는 글이 있던데 찾을 수가 없군요. 알려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위의 이상유님 글을 요약하면

박정희 대통령의 창씨 명이 타카키 마사오(독립군을 비밀리에 도와준 사람으로 독립군사이에 유명) 와 오카모토 미노루(김상웅이 주장)라는 설이 있는데 있는데,


오카모토 미노루는 노무현 정권때 독립기념관장으로 임명된 김삼웅박정희를 음해하려고 조작한 것이라는 것이다.

 

참으로 기가 막힌다. 사이비사학자에게 독립기념관장이란 중책을 누가 천거해서 누가 임명(누구긴 누구야... 김대중아냐?)했는지는 모르지만,
꼴두기가 어물전 망신시키는 꼴이군. 필자는 다음과 같은 회답을 보냈다:


 

 

  이상유님 보세요

 

혜서 잘 읽었습니다. 교육 동지를 만났군, 반갑습니다.

 

더욱 박정희 대통령의 참모습을 아시려고 주야 분투하신다니,
전교조 무리들이 많다는 곳이라 진흙 속에서 구슬을 만난 느낌입니다.

 

박정희군은 저의 죽마고우인지라,
그가 오카모토(岡本) 운운의 일본식 이름을 가진 일이 없음을 잘 알고 있는데,
어느 엉터리 사학도가 그런 발설을 한 모양입니다.

 

오카모토라는 대구사범 교유는 광주학생사건 때 우리 조선인학생들을 때려잡아 수훈 갑인 자로서,
당시의 조선총독이 대구사범 학생감으로 특진시켰기에,
박군(박정희)이나 저를 포함한 우리 대구사범 조선인 학생들은 전원이 그를 개나 돼지처럼 악종으로 보았답니다.

 

사학자(김상웅-김대중 추종자), 그 자는 틀림없이 친북정권의 수하로서 박 대통령을 음해하려는 의도로,
악종의 성을 박군의 일본식 성으로 둔갑시킴으로써,

국민들의 박대통령에 대한 추모의 정을 말살 내지는 희석시키려는 음모의 발로로 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제가 자서전을 쓰면서 그 오카모토 학생감에 관해서 여러 번 언급은 했지만,
모두가 교육자다운 모습은 없고, 시종일관 조선인 학생의 사상동향에서 민족정신을 뽑아,
독립운동의 씨를 말리려는 그의 더러운 수작을 폭로했을 뿐이었고,

귀하께서 말씀하신 그의 사진을 올린 기억은 없습니다.

 

여불비례

 

2008. 11. 13        울산 일산진에서          김병희

 

 

동아토론방에서 펌


김병희 옹은 박정희 대통령의 대구사범 동기동창으로서 인하대 학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울산에 거주하시며 온라인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고 계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