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지이미나
2013-03-22 20:31
조회: 1,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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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박정희가 빨갱이에 친일파라고?(2) http://www.inven.co.kr/board/powerbbs.php?come_idx=2475&l=24178
박정희가 빨갱이? 배신자 라고? 동료를 밀고한 변절자라고? 그렇게 말하는 놈들은 김일성 입장에서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김일성 입장에서는 동료를 밀고한 변절자가 맞지... 변절자라고 욕하는 놈들은 김일성을 대변하는거냐? 아래 읽어봐라 ▼=1954년 오클라호마州 포트실 미 포병학교에서 교육 받던 시절의 박정희 준장(왼쪽) 1948년 11월 박정희 대통령은 좌익혐의로 체포된다. 당시 박대통령은 구형에서는 사형을, 선고에서는 무기징역을 받게 된다. 아울러 소령에서 파면됨으로서 군복도 벗게 됐다. 그러나 박대통령을 구명하기 위한 각계의 노력이 이어졌고, 박대통령은 빨갱이가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짐으로서 후일 대한민국의 국부가 되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체포된 과정 박정희 대통령이 체포된 과정을 보면 김창룡 특무대장의 부하들이 서울 시내에서 남로당 이재복을 체포한 후 이재복이 소지한 명단에 박대통령의 이름이 적혀 있던 것이 문제가 된 것이다. 인물포섭 전문 이재복의 접근 이재복은 남로당 군사총책으로 주임무는 인물포섭이었다. 이재복은 박대통령의 형인 박상희가 “대구 10.1 사건”에서 우익으로부터 피살 당하자 박대통령에게 그에 대한 복수심을 부추키며 접근한 기록이 남아 있다. 박대통령에게 전략적으로 접근한 이재복은 사망한 박상희의 가족을 돌봐주는 등 호의를 베풀면서 박대통령을 포섭명단에 올렸던 것이다. 박대통령을 수사한 실무책임자인 김안일 특무과장도 "박정희는 '대구 10.1사건'으로 형 박상희가 우익에 피살되자 그에 대한 복수심과 이재복의 권유로 남로당에 가입한 것 같다"고 확인해 준 사실이 있다. 박정희 대통령을 휘하 소대장으로 데리고 있었던 김점곤 평화연구원장은 “당시 박정희는 남로당 특수조직부에서 지명한 요인물이었으나 이데올로기 때문은 아닌 것 같으며, 활동도 미약했다", "박정희는 빈농 출신에다 형의 죽음 때문에 원한이 있었고, 특히 사범학교 때 조선공산당사건을 접했으며, 또 군관학교 수석 졸업 등 이른바 '최고의 성분'을 가지고 있어 남로당 측에서 탐낼만한 인물이었다"라고 회상하고 있다. 당시 고등군법회의의 재판장 김완룡은 "박정희 소령은 남로당 가입후 구체적으로 활동한 내용이 없는데다 군 내부에서 그를 죽이기 아깝다는 여론 때문에 살렸다"라고 증언했다. 더불어 당시의 숱한 증언에 의해 박대통령은 실질적으로 남로당 활동을 한 적이 없었던 것으로 최종 확인됐었다. 하물며 박대통령 두번 죽이기에 나선 좌파조차 지금까지 더 이상의 뚜렷한 이적행위를 입증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박대통령의 '남로당 총책' 운운은 역사적 사실이 아닌 음모론이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는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도 훗날 김종신에게 “육사 교관으로 있을 때 형님 친구되는 분(이재복)이 찾아와 다음 일요일 모 장소에서 향우회가 있다며 나더러 꼭 참석해 달라는 거야. 처음엔 거절했으나 그분이 자꾸 청하길래 거길 갔었지. 그런데 그게 화근이 될 줄이야. 그날 향우회에 참석한 사람들은 모두 빨갱이 였어." "나는 거기서 사인하거나 도장을 찍은 적은 없지만 그 일로 김창룡 한테 끌려가 모진 고문을 받고, 재판도 받았지.”라고 술회했다. 박대통령이 체포 되었을 당시의 증언들과 훗날 박대통령이 술회한 내용이 정확하게 일치하고 있다. 박대통령이 제출한 명단도 당시 모인 향우회 빨갱이 명단을 제출한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서울헌병대에서 모진 고문을 받았지만 비굴해 하거나, 구명을 부탁하지 않고 의연하게 고문에 대처했다. 이러한 박대통령의 사정을 알게 된 김창룡과 김안일 특무과장은 조사과정에서 박대통령의 혐의가 잘못되었음을 인정하고 그들이 자진해서 구명요청서를 작성해 이를 백선엽 장군이 미 고문단에 제출했다. 그간 좌파는 박정희 대통령이 남로당 빨갱이 명단을 제출하고 변절했다고 변절자, 기회주의자 등 모진 누명을 씌우는데 혈안이 됐었다. 빨갱이 입장에서 본다면 변절자가 맞다. 그러나 공산주의자에 계략에 걸려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빨갱이들을 일망타진하게 만들고 나아가 자유민주주의자로 새삼 확인되고 정의된 것이 어떻게 기회주의자란 말인가. 그렇다면 과거 반정부운동에 앞장서면서 이념을 내세운 운동권 출신들은 지금도 대남적화에 나서야 변절자가 아니라는 것인가. 역사는 흐른다. 흐르는 역사속에 진실은 언제나 역사 곁을 지키며 산하를 내려다 보고 있다.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그 날, 우리는 故박정희 대통령의 참모습을 다시 한번 경건한 마음으로 지켜 보게 될 것이다.
출처 : http://www.frontiertimes.co.kr/news/htmls/2012/06/2012062086505.html 참고) 국가기록원이 공개한 '임시육군군인속계'라는 1945년 일제시대 공문서에 따르면 박정희는 여전히 다카기 마사오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나와있다. 박정희가 만주군관학교에서 일제사관학교를 가기 위해 혈서를 썼다는 근거인 '만주신문' 또한 그런 주장은 있었으나 '증인'이라는 사람이 말한 신문은 실제 발간된 사실이 없고 박정희가 혈서를 썼다는 점도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났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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