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 박정희가 빨갱이에 친일파라고?(1)   http://www.inven.co.kr/board/powerbbs.php?come_idx=2475&l=24157

 

 

 

뭐 박정희가 빨갱이에 친일파라고?(2)  http://www.inven.co.kr/board/powerbbs.php?come_idx=2475&l=24178

 

 

박정희가 빨갱이? 배신자 라고?


동료를 밀고한 변절자라고?




그렇게 말하는 놈들은 김일성 입장에서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김일성 입장에서는 동료를 밀고한 변절자가 맞지...

변절자라고 욕하는 놈들은 김일성을 대변하는거냐?


아래 읽어봐라


▼=1954년 오클라호마州 포트실 미 포병학교에서 교육 받던 시절의 박정희 준장(왼쪽)

 
 
 
 

1948년 11월 박정희 대통령은 좌익혐의로 체포된다. 당시 박대통령은 구형에서는 사형을, 선고에서는 무기징역을 받게 된다. 아울러 소령에서 파면됨으로서 군복도 벗게 됐다. 그러나 박대통령을 구명하기 위한 각계의 노력이 이어졌고, 박대통령은 빨갱이가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짐으로서 후일 대한민국의 국부가 되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체포된 과정

박정희 대통령이 체포된 과정을 보면 김창룡 특무대장의 부하들이 서울 시내에서 남로당 이재복을 체포한 후 이재복이 소지한 명단에 박대통령의 이름이 적혀 있던 것이 문제가 된 것이다. 


인물포섭 전문 이재복의 접근

이재복은 남로당 군사총책으로 주임무는 인물포섭이었다. 이재복은 박대통령의 형인 박상희가 “대구 10.1 사건”에서 우익으로부터 피살 당하자 박대통령에게 그에 대한 복수심을 부추키며 접근한 기록이 남아 있다.


박대통령에게 전략적으로 접근한 이재복은 사망한 박상희의 가족을 돌봐주는 등 호의를 베풀면서 박대통령을 포섭명단에 올렸던 것이다. 박대통령을 수사한 실무책임자인 김안일 특무과장도 "박정희는 '대구 10.1사건'으로 형 박상희가 우익에 피살되자 그에 대한 복수심과 이재복의 권유로 남로당에 가입한 것 같다"고 확인해 준 사실이 있다.


박정희 대통령을 휘하 소대장으로 데리고 있었던 김점곤 평화연구원장은 “당시 박정희는 남로당 특수조직부에서 지명한 요인물이었으나 이데올로기 때문은 아닌 것 같으며, 활동도 미약했다", "박정희는 빈농 출신에다 형의 죽음 때문에 원한이 있었고, 특히 사범학교 때 조선공산당사건을 접했으며, 또 군관학교 수석 졸업 등 이른바 '최고의 성분'을 가지고 있어 남로당 측에서 탐낼만한 인물이었다"라고 회상하고 있다.


당시 고등군법회의의 재판장 김완룡은 "박정희 소령은 남로당 가입후 구체적으로 활동한 내용이 없는데다 군 내부에서 그를 죽이기 아깝다는 여론 때문에 살렸다"라고 증언했다. 더불어 당시의 숱한 증언에 의해 박대통령은 실질적으로 남로당 활동을 한 적이 없었던 것으로 최종 확인됐었다. 하물며 박대통령 두번 죽이기에 나선 좌파조차 지금까지 더 이상의 뚜렷한 이적행위를 입증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박대통령의 '남로당 총책' 운운은 역사적 사실이 아닌 음모론이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는 것이다. 



이재복의 접근-향우회 참석하라

박정희 대통령도 훗날 김종신에게 “육사 교관으로 있을 때 형님 친구되는 분(이재복)이 찾아와 다음 일요일 모 장소에서 향우회가 있다며 나더러 꼭 참석해 달라는 거야. 처음엔 거절했으나 그분이 자꾸 청하길래 거길 갔었지. 그런데 그게 화근이 될 줄이야. 그날 향우회에 참석한 사람들은 모두 빨갱이 였어."


"나는 거기서 사인하거나 도장을 찍은 적은 없지만 그 일로 김창룡 한테 끌려가 모진 고문을 받고, 재판도 받았지.”라고 술회했다. 박대통령이 체포 되었을 당시의 증언들과 훗날 박대통령이 술회한 내용이 정확하게 일치하고 있다. 박대통령이 제출한 명단도 당시 모인 향우회 빨갱이 명단을 제출한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서울헌병대에서 모진 고문을 받았지만 비굴해 하거나, 구명을 부탁하지 않고 의연하게 고문에 대처했다. 이러한 박대통령의 사정을 알게 된 김창룡과 김안일 특무과장은 조사과정에서 박대통령의 혐의가 잘못되었음을 인정하고 그들이 자진해서 구명요청서를 작성해 이를 백선엽 장군이 미 고문단에 제출했다.


그간 좌파는 박정희 대통령이 남로당 빨갱이 명단을 제출하고 변절했다고 변절자, 기회주의자 등 모진 누명을 씌우는데 혈안이 됐었다. 빨갱이 입장에서 본다면 변절자가 맞다. 그러나 공산주의자에 계략에 걸려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빨갱이들을 일망타진하게 만들고 나아가 자유민주주의자로 새삼 확인되고 정의된 것이 어떻게 기회주의자란 말인가.


그렇다면 과거 반정부운동에 앞장서면서 이념을 내세운 운동권 출신들은 지금도 대남적화에 나서야 변절자가 아니라는 것인가. 역사는 흐른다. 흐르는 역사속에 진실은 언제나 역사 곁을 지키며 산하를 내려다 보고 있다.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그 날, 우리는 故박정희 대통령의 참모습을 다시 한번 경건한 마음으로 지켜 보게 될 것이다.



 

 출처 : http://www.frontiertimes.co.kr/news/htmls/2012/06/2012062086505.html

 
 

참고) 

국가기록원이 공개한 '임시육군군인속계'라는 1945년 일제시대 공문서에 따르면 박정희는 여전히 다카기 마사오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나와있다.

노무현 정권 시절 '친일반민족행위자진상조사위'에서도 "박정희 前대통령은 친일파가 아니었다"고 결론 내린 바 있다.

박정희가 만주군관학교에서 일제사관학교를 가기 위해 혈서를 썼다는 근거인 '만주신문' 또한 그런 주장은 있었으나 '증인'이라는 사람이 말한 신문은 실제 발간된 사실이 없고 박정희가 혈서를 썼다는 점도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났기 때문


 
 

‘박정희=오카모토 미노루’ 는 북한에서 시작된 네거티브

대선토론회에 등장한 박정희 대통령의 창씨개명 문제

이시완 자유기고가, leeshiwan@gmail.com  

등록일: 2012-12-05 오후 6:23:29

 
나는 박정희=오카모토 미노루라는 말을 퍼뜨리고 있는 그들에게 한번 물어보고 싶다. 박정희의 창씨개명이 ‘오카모토 미노루’ 라는 얘기를 도대체 어디에서 들었느냐고 말이다. 그들의 대답은 뻔하다. 최상천의 ‘알몸 박정희’(2001), 강준만의 ‘한국 현대사 산책’, 그리고 재미 언론인 문명자의 ‘내가 본 박정희와 김대중’(1999), ‘김형욱 회고록’(1985), 전 독립기념관장 김삼웅의 칼럼 및 저서 등이 바로 그들의 ‘근거’다. 

하지만, 그 어떤 자료도 정확한 근거를 제시하지 못하고, 단지 ‘카더라’ 라는 수준에 그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여기서 한번 생각해볼 점이 있다. 바로 위 인물들의 공통점에 대해서다. 박정희가 오카모토 미노루라고 열심히 주장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박정희와 대립했던 사람이거나, 김대중 전대통령의 측근, 혹은 친북 인사들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안티 박정희’의 요소를 가진 사람들이라는 말이다. 그들의 주장은 과연 얼마나 설득력이 있는 것일까?

안티박정희의 입장에 있는 사람들이 객관적인 근거라며 늘 가져오는 근거는 일본 측에서 발간한 ‘일본육해군 총합사전’이다. 실제 이 사전의 2판(2005)에 보면 박정희의 일본이름이 오카모토 미노루라고 분명히 나와 있다.

 
 
 
 
 
▲ '일본육해군 총합사전' 2판 (2005) 
 
하지만, 명심해야할 것이 있다. 이 사전은 일본 정부의 공식적인 기록이 아니라, 도쿄대학 출판부에서 출판한 ‘개인출판물’이라는 것이다. 더욱 중요한 점은 이 사전의 초판(1991)에는 오카모토 미노루라는 이름이 없는데, 2005년 발간된 2판에 갑자기 이 이름이 추가되었다는 점이다.

필자는 도쿄대학 출판부를 통해 이 사전의 저자에게 ‘오카모토 미노루’라는 이름의 근거를 확인해 본 결과,
근거 확인이 안되니 3판을 출판할 때는 ‘오카모토 미노루’라는 이름을 삭제하겠다”라는 답변을 받았다. 한국의 ‘안티 박정희’ 세력이 금과옥조처럼 받들어 오던 ‘일본측 자료’ 의 설득력도 이것으로 없어진 셈이다.

 

그렇다면 대체 이 ‘박정희=오카모토 미노루’라는 주장은 어디서 시작되었을까?

현재까지 언급되고 있는 자료 중에 가장 오래된 것은 1985년에 나온 ‘김형욱 회고록’인데, 필자가 발견한 그 보다 더 오래된 기록을 소개하고자 한다. 그것은 놀랍게도 ‘북한’ 에서 시작되었다.

1973년 8월11일자 북한의 로동신문을 보면 김대중 납치사건 직후에 박정희에 대한 비판을 집중적으로 쏟아놓는데, 그때부터 ‘오카모토’가 등장하기 시작한다.

“남조선의 한 집권자는 우리 인민이 일제 침략자들에 항거하여 싸울 때 혈서를 써서 ‘천황’의 ‘적자’가 될 것을 맹세맹세한 후 ‘특등 일본인으로’ , ‘돌격대장’으로 ‘오까모도중위’로서 민족의 해방과 독립을 위하여 싸우는 애국적 인민들을 탄압하기 위한 이른바 ‘토벌’에 110여회나 참가하였으며 조선동포들이 살고 있는 마을에 불을 지르고 불속에서 기여나오는 동포 어린이들과 늙은이들을 총창으로 마구 찔러 죽이고 생매장하는 몸서리치는 만행을 손가락 하나 떨지않고 감행한 자이라는 것도 모르는 사람이 없다.“ (1973년 8월11일 로동신문)
여기서 ‘오까모도’가 박정희를 지칭한다는 것은 1987년 북한의 금성청년출판사에서 나온 ‘원쑤는 재침을 노린다’라는 책에서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 그 내용을 인용한다.

일본 군국주의 우두머리 한놈인 구모놈은 박정희 역적놈을 ‘가즈오료리점’에 특별히 불러내다 먹자판을 벌려놓았는데 이 자리에서 다음과 같은 말이 오갔다.
“자네 퍽 몰라보게 됐네” “각하, 절 알아보시겠습니까? 사랑 받던 오까모도입니다” “아무렴 알아보고 말구”“그떄 선생님은 저를 돌격대장이라고 불렀지요” “그랬지.암 돌격대장이야. 오까모도군이 지금 남조선의 실권자로 나타났지만 내 눈에는 옛날 자주빛깔 만주국군의 군관생으로밖엔 보이지 않네” “고맙습니다. 기억해 주셔서. 저 역시 그 때를 자주 추억하곤 합니다” (「원쑤는 재침을 노린다」금성청년출판사1987)
한일회담을 비판하기 위해 일본을 찾은 박정희를 악의적으로 ‘오까모도’ 라고 설정하여, 일본인에게 저자세로 일관하는 인물로 그려놓은 것이다. 단지 북한과 한국의 일본어 표기법이 달라 ‘오카모토’가 북에서는 ‘오까모도’로 표현되고 있을 뿐이다.

한국에서 1973년 이전에 박정희를 ‘오카모토 미노루’ 라고 주장한 책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그것은 다시 말하면 한국 사회에 퍼진 ‘박정희=오카모토 미노루’라는 설은 북한의 주장을 확인도 없이 그대로 받아들여 정적비판을 위해 퍼뜨렸다는 말이 된다. 그리고 다시 한번 말하지만 그 주체가 되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안티박정희’ 진영이다.

문명자씨는 김일성, 김정일 부자와 직접 면담을 할 정도로 친분이 있던 사람이었으며, 김형욱씨 역시 박정희의 미움을 사 미국으로 망명하여 박정희 정권 비판의 선봉에 섰고, 김삼웅씨는 박정희의 정적 김대중씨가 만든 평민당 당보의 주간을 맡을 정도로 친DJ의 성향이었다. 다른 사람들 역시 전형적인 ‘안티 박정희’ 성향의 인물들이다. 

나는 한국 사회에서 나름 중요한 위치에 서 있는 이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당신들이 본 ‘박정희=오카모토’라는 근거는 어디에서 보았느냐고. 북한자료가 아니라면 당당히 밝힐 수가 있을 것 아닌가. 

지금까지 박정희 친일설, 혈서설 등에 대한 갑론을박이 있었지만, 박정희=오카모토 미노루에 대한 제대로 된 근거제시는 단 한번도 없었다. 만약 근거가 있다면 진작에 나오고도 남았어야 한다. 

만약 그 출처가 차마 북한이라고 말하지 못하고, ‘카더라’ 라고 말을 하고 싶다면 한국 사회에 무분별하게 퍼진 그 ‘설’에 대한 책임을 과연 누가져야할까? 정적 비판도 좋지만 도를 넘어서는 인신공격은 정파, 시대를 떠나 어느쪽이건 자제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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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  http://www.bignews.co.kr/news/article.html?no=237865

 
 

박정희가 생도대표로 천황답사를 읽었다고? - 김상웅(김대중 추종자) 조작

 

김상웅이라는 작자가 만주일보기사를 소개하면서 천황찬양 답사를 읽엇다고 하는데

실제 기사내용에서의 생도대표는 박정희(다까기 마사오)가 아닌 오카미 쇼히코 ㅋㅋㅋㅋ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