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서대로 보시는 걸 추천드립니다

아래는 화 별 링크입니다














그렇게, 날이 밝았다.

애나는 후작령의 사유지 중 자주 놀러다니던 숲 속 언덕에서 하룻밤을 거의 새다시피 선잠을 들었다가,

새들이 짹짹대는 소리에 일어났다.


꿈이었으면 참 좋았겠지만...정말 아무도 없었다.

아침마다 깨우러 오던 유모도, 늦잠을 나무라던 아버지도, 그걸 웃으며 달래주던 어머니도.

볼에 묻은 풀을 떼어내며 애나는 약간 울적한 기분이 되었다.

하지만, 살아야 했다. 살아서 누군가에게 이 비극을 전하고 싶었다. 그 이유를 캐묻고 싶었다.


무엇인가에 생각이 미친 애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어딘가로 걷기 시작했다.

그곳은 하녀들이 자주 다니는 사유지의 빨래터로, 맑은 강이 시작되는 상류의 한 줄기였다.

물을 마시고, 로브 형태로 만든 가죽을 벗고, 속의 원피스까지 벗었다.

몸 여기저기를 꼼꼼히 씻고, 원피스는 입지 않고 다시 가죽을 둘러 지푸라기로 여몄다.

그 상태로 이젠 원피스를 빨기 시작했다. 꼼꼼하게.


이제 애나에게 돌아갈 곳은 없다. 앞으로 한 끼 식사를 걱정해야 한다.

그런 생각을 하다 애나는 원피스를 깨끗하게 만들어서 팔 결심을 했던 것이다.

빨래는 처음 해 보는 터라 꽤 시간이 걸렸지만, 얼룩은 모두 제거할 수 있었다.

옆의 널찍한 돌에 원피스를 올려두고, 큰 돌로 고정한 뒤,

그 옆에 앉아 원피스가 마를 때 까지 다시한번 선잠이 들었다.


...얼마나 잤을까. 문득 햇살이 강해진 느낌에 애나가 눈을 떴다.

원피스는 말끔하게 말라 있었고, 해는 이미 중천에 다다라 있었다.

애나는 원피스를 개어 소중하게 로브 안쪽에 넣고, 후드를 눌러쓴 채 길을 나섰다.

목적지로 한 건, 예전 어머니께서 데리고 간 옷가게.

후작령의 번잡한 시장도 제 집 드나들 듯 휘젓고 다녔던 애나였기에, 빠른 걸음으로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시큼한 염료의 냄새가 코를 찔렀다.

이 냄새는 몇 번을 맡아도 익숙해지지 않는다.

문에 달린 방울 소리를 듣고 옷가게 점원이 나와 반겼고,

애나는 내심 태연한 척, 점원에게 다가가서 말했다.


「옷을 팔고 싶어요」


잠을 별로 못 자서 그랬을까.

평소와는 다른 낮고 갈라진 듯한 목소리가 나와서 애나도 놀랐다.

점원은 로브를 두르고 후드를 눌러 쓴 애나의 모습을 유심히 보더니, 곧 주인을 부르러 갔다.

옷가게 주인이 곧 나오며 말했다.


「어서 오십시오. 옷을 팔고 싶으시다고요?」

「네」

「옷은 어디 있습니까?」

「여기요」


애나가 로브 속으로 손을 넣어 원피스를 꺼내어 보여주자, 옷가게 주인의 눈이 커졌다.


「이...이 옷은!」


애나도 내심 놀랐다. 정체가 들켜버린 걸까?

옷가게 주인의 대답 여하에 따라 옷가게를 지금 당장 나갈 준비를 하며 애나가 마른 침을 삼켰고,

곧 주인의 입이 열렸다.


「...꽤나 좋은 옷감이군요. 염료도 좋은 걸 썼어. 금화 열 닢 드리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금화 열 닢이 든 가죽 주머니가 잘그락 소리를 내며 애나의 손에 쥐어졌다.

그대로 목례를 하고 가게를 나서려 하자, 주인이 불러 세웠다.


「저기...」

「?」


애나가 의아한 듯 고개를 살짝 들자, 주인이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살펴 가십시오」


주인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웃으며 말했고, 애나는 서둘러 가게를 빠져나갔다.

돈은 생겼다. 이제 머물 곳을 찾아야 한다.

어제 딱 한 번이었지만, 풀벌레와 날벌레가 덤벼드는 밤의 풀밭에서 자는 건 고역과도 같았다.

그렇게 여관을 찾아 거리를 배회하는데, 저 멀리서 뭔가 웅성대는 소리가 들렸다.


「호외요, 호외! 아인스워드 후작가의 공개처형이 오늘 밤에 이 광장에서 이뤄진다 합니다!」


...애나는 잠깐 정신을 못 차렸다. 무슨...뭐?

공개처형. 단어는 알고 있었다. 나쁜 짓을 한 사람을 공개적으로 죽이는 행위.

하지만 왜? 우리 가문 사람들은 아무런 나쁜 짓을 하지 않았는데...어째서?

그 의문은 호외 소리를 들으며 웅성대던, 가장 애나와 가까운 곳에 있던 두 아낙네가 나누는 말에 의해 해소되었다.


「마녀와 연루된 집안이었다며? 무서워라...」

「후작 부인이 마녀의 직계 후손이었대. 힘은 나타나지 않은 것 같지만」


...우리 어머니가, 마녀...?

항상 자상하고, 항상 상냥하게 말을 걸고, 항상 내 이야기를 웃으며 들어주던 어머니가...마녀?

갑자기 현기증이 일었다. 그 자리에 풀썩 쓰러질 뻔 했지만 마음을 다잡고 근처의 여관으로 들어갔다.


「어서 오세요. 식사하실 건가요? 묵으실 건가요?」


싹싹하게 반기는 여관 종업원의 말에도 애나는 친절하게 대답하지 못하고, 금화 한 닢을 꺼내 카운터에 두며 말했다.


「이거면 얼마나 있을 수 있나요?」

「3끼 식사 포함해서 이틀은 계실 수 있습니다」

「그럼, 그렇게 해 주세요」


종업원은 특유의 미소로 화답하며 열쇠 꾸러미에서 열쇠를 하나 건넸다.


「네. 열쇠는 여기 있습니다. 2층 가장 끝 방이예요」

「고맙습니다」

「식사는 어떻게 하실 건가요? 방에서 드실 건가요?」

「네. 좀 생각할 게 있으니 문 밖에 두고 노크해 주시면 가지고 들어갈께요」

「알겠습니다」


열쇠를 받고, 그대로 종종걸음으로 2층 끝 방의 문을 열고 들어가, 안에서 잠궜다.

집에서 쓰던 침대보다 훨씬 딱딱한, 하지만 편안해 보이는 침대에 몸을 뉘이고 애나는 눈을 감았다.

생각하자. 생각하는 거다. 애나.

오늘 저녁에, 처형이 시작된다. 그 말은, 아직 어머니와 아버지는 살아계신다는 것.

어쩌면, 내가 구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지도 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