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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루가 밝았다.

어머니의 참담한 죽음을 눈 앞에서 본 애나는,

침대에서 베게에 얼굴을 묻고 울던 채로 잠이 들었기에

빨갛게 충혈되고 뻑뻑한 눈을 비비며 로브(처럼 형태를 갖춘 가죽)를 둘렀다.

식욕도 없었다. 씻기도 싫었다. 아니, 그냥 살아갈 의욕 자체를 잃어버린 것 같았다.

이대로 누군가에게 죽임을 당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아인스워드 가문의 마지막 생존자이자 직계후손이니, 정체를 발각당하면 바로 죽겠지.

그것도 나쁘지 않을지도 몰라...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몽롱한 채로 여관을 나섰다.

장이 선 거리를 잠시 걷다, 누군가와 부딪혔다.


「죄...죄송합니다」


사과를 하고 고개를 들자, 덩치가 우락부락한 남자 둘이 길을 막고 서서 애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넌 뭐야, 엉? 우린 바쁜 사람이라고. 우리 길을 막았으면 보상은 해야겠지?」


전형적인 불량배였지만, 애나는 여태껏 단 한 번도 이런 일을 겪어본 적이 없었기에

두려움에 다리가 후들거리며 결국 주저앉아 버렸다.

들고 있던 금화가 든 가죽 주머니가 돌바닥과 부딪히며 짤랑, 하고 소리를 내었다.

남자 둘은 서로를 보고 씨익 웃으며, 애나에게 얼굴을 가까이 하고 위협적으로 말했다.


「거적때기 하나 걸친 주제에 돈은 좀 있는 것 같은데, 그것만 순순히 넘겨 준다면 보내주지. 어때?」


애나는 오기가 생겼다. 어떻게 마련한 돈인가.

애나는 살짝 뒷걸음을 치는 척 하다가, 돌아서서 부리나케 도망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남자들의 동료인 듯 한 다른 남자가 옆에서 걸어오는 척 하며 일부러 다리를 걸었고,

애나는 볼썽 사납게 돌바닥에 엎어지고 말았다.

금화가 든 가죽 주머니를 고정해서 매달았던 손을, 다리를 건 남자가 짓밟았다.


「아아악!!」


손이 뭉개지는 것 같았다. 절로 애나의 입에서 비명이 나왔다.


「호오, 여자아이였나. 한 건 올렸는 걸, 어이」


남자 셋이 서로 하이파이브를 하는 듯한 소리가 들리고, 애나는 목 뒤를 치는 둔탁한 아픔에 정신을 잃었다.




 [......나]

「...?」

 [...애나, 애나? 일어나렴]

「...!」

 [우리 어머니에게, 가렴...]


어머니의 목소리였다!

애나가 눈을 번쩍 떴다.

어두컴컴한, 왜인지 말 냄새가 나는 방이었다. 마굿간인가?

꿈...이었구나. 목소리만 들려왔지만 너무나도 생생했다.

어머니의 어머니라면, 외할머니를 말하는 건가?

하지만 애나는 여태, 외할머니가 살아계시단 말은 단 한번도 들은 적이 없었다.

친할머니는 애나가 두 살 되던 해 돌아가셨다고 들었다.

일단 꿈이라는 걸 확인했으니 잠시 묻어두고 일어나려 했지만, 팔과 다리가 전부 의자에 묶여 있어서 할 수 없었다.

묶여있다는 건...아까 그 남자들이 데려와서 묶어놓은 건가.

밖에서 말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점점 가까워진다.


「에이, 나리~ 이번엔 상등품이라구요? 제가 보증한다니까요?」

「저번에 그 사내놈도 상등품이라 해서 많이 얹어줬네만, 이틀만에 자결했지 뭔가! 이러니 믿을 수가 있어야지」


아까 애나에게 시비를 건 사내와, 그 사내가 나리 라고 부르는 누군가가 같이 이리로 오고 있었다.

최대한 발버둥을 쳐 보았지만, 기껏해야 의자가 옆으로 쓰러졌을 뿐이었다.

끼익.

문이 열렸고, 역시나 아까 그 사내와 후덕해 보이는 인상의 어른 한 명이 들어왔다.

갑자기 쏟아지는 빛에 눈이 부셔서 제대로 쳐다볼 수 없었다. 후덕한 어른 쪽이 말했다.


「이건...꽤나 상등품이구만. 좋아. 3백 주지」

「오오? 나리, 엄청 쓰시는데요?」

「이 정도의 품질이면 그만한 가치가 있지. 여기 있네」


짤랑.

묵직한 소리가 들렸고, 사내가 히히덕대며 어딘가로 사라졌다.

아까는 눈이 부셔서 몰랐지만, 어른 쪽은 대머리였다.

그 대머리 어른은 애나에게 다가와, 그 턱을 잡으며 말했다. 


「아씨, 제가 누군지 기억하실런지요?」


이 사람은, 애나의 정체를 알고 있다.

등줄기에 오싹한 기운이 내달리며, 식은땀이 나기 시작했다.

도리도리.

애나가 고개를 저었고, 대머리는 히죽 웃으며 말했다.


「아씨의 아버지께는 신세를 많이 졌지요. 맞기도 많이 맞았고!」


퍽!

대머리의 발이 애나의 배를 강타했다.


「커헉!」

「너희 아버지, 그래. 아인스워드 후작 말이야. 그 자식, 내 눈 앞에서 내 노예를 전부 풀어줘 버렸지. 내 장사 수단을!」


퍼억!

한 번 더.


「커허억!」

「어제 단두대에서 그 자식의 모가지가 잘리는 걸 봤는데, 얼마나 후련하던지. 광장이 떠나갈 정도로 웃고 싶었다니까?」


퍽!

그리고 한 번 더.


「컥...쿨럭, 쿨럭! 허억, 허억...」

「넌 이제, 내 노예야. 퉤」


못을 박는 듯, 애나의 얼굴에 침을 뱉고 대머리가 유유히 사라졌다.

애나는 숨도 제대로 쉴 수 없는 아픔에 침과 피가 섞인 기침을 연신 하다가, 그대로 다시 기절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