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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나와 넬, 둘은 주로 서류의 정리라던가 돈 계산, 방 청소, 식사 배급 등의 잡무를 담당해 왔다.

별로 어렵지도 않은 일들 뿐이라서, 애나가 동료 노예들에게 미안함마저 느낄 정도였다.

애나는, 넬과 같은 방에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넬이 원래는 고원에서 사는 방랑 부족인 하이랜더였다는 것과, 

원래 옅은 금색이었던 머리가 12살이 지나면서부터 변하기 시작해서 완전한 백발이 되었다는 것.

백발은 하이랜더 부족의 풍습 상 재앙을 불러오는 악귀의 색이라 하며 부족에서 버려졌다는 것까지.

그런 이야기를 하며 조금 쓸쓸해 하는 넬을 애나가 달래주거나 하며, 둘은 아주 친해졌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인가, 넬이 밤에 불려가는 일이 잦아졌다.

애나와 넬은 항상 공동으로 일을 하고 있었는데, 밤에 불려갈 때는 항상 넬만 불려갔다.

애나는 그저, 넬 언니가 일을 잘 하나보다 라고만 생각하며 먼저 잠자리에 들었었지만

그 중 하루는 도저히 잠이 오지 않아 넬이 올 때까지 기다렸는데,

아침 즈음에 초췌한 몰골로 방에 들어와 쓰러지듯 잠이 드는 넬을 보게 되었다.

다음 날, 오후 즈음에 일어나 채석장 주인의 숙소로 들어서는 넬에게 애나가 물었다.


「언니, 무슨 일 있어요? 요즘 매일 밤마다 부르시던데...」


애나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넬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조심스레 다가간 애나가 넬을 끌어안았고, 넬이 6살이나 어린 애나의 품에서 오열했다.

애나는 아무것도 몰랐지만, 넬이 힘들어하는 건 보기 싫었기에 열심히 다독여 주었다.

넬이 조금 진정된 것 같아, 숙소에 데려다 주고 남은 일을 마저 끝낸 애나가 숙소로 내려갔을 때,

넬이 방에서 벽을 보고 앉아 있었다.


「언니, 왜 그래요? 정말 무슨 일 있어요?」

「애나...나, 이대로는 못 살 것 같아...여자로서, 정말 중요한 걸...잃어버렸어」


라는 말을 하고, 그대로 혓바닥을 내밀어 아랫니 위에 올려 놓고 혀를 깨물려는 듯 입을 벌렸다.

애나는 본능적으로 움직였다. 눈을 떠 보니, 넬의 입에 입을 맞추고 있었다. 넬의 혀를 자신의 혀로 밀어넣고.

넬이 눈치채는 게 늦어 조금 깨물려, 애나의 혀에서 피가 났다.

넬의 눈이 커지면서, 조금 당황했는지 입술을 떼고 말했다.


「애나...왜...」

「난 넬 언니가 죽는 거, 싫어요」

「애나, 난...」

「여자로서 중요한 게 뭔지는 아직 모르겠어요. 그렇다고 인간으로서 중요한 것마저 버릴 셈이예요, 언니는?」


여기까지 듣고 넬은 애나의 뜻을 이해했다. 생명의 존엄. 인간으로서 가장 중요한 것.

자기보다 한참 어린 아이가 자기를 나무라고 있는데, 이상하게도 그게 가슴에 와 닿았다.

자신의 몸은 이미 더럽혀졌지만, 이 아이마저 더러운 삶을 살게 하고 싶진 않았다.

진심으로, 지켜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넬이 애나를 꼬옥 껴안았고, 애나는 넬의 품에서 행복한 표정으로 노래를 불렀다.

이후, 이런 모습은 자주 목격되어 노예들 사이에서는 친자매 같다며 보기 좋다는 사람도 더러 생겨났다.


그 과정에서 애나가 한 가지 알게 된 것이 있는데, 애나가 노래를 할 때마다 아주 조금씩이지만

애나의 머리 색이 찬란한 금색에서 붉은색으로 변해간다는 것이었다.

물론 애나는 별로 신경쓰지 않았지만, 넬은 아름다운 애나의 금발이 조금씩 줄어드는 걸 아쉬워했다.

현재 애나의 머리는 무릎까지 내려왔는데, 무릎에서 허리부근까지 붉은색으로 변한 상태였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 약 1년 5개월이 지난 제논 력 107년 초하루, 사수자리의 1월 1일.


이번 겨울은 엄청나게 추웠는데, 딱딱한 나무 침상과 돌 벽이 그 추위를 배가시켰다.

애나는 항상 넬을 껴안고 함께 잤기에 따뜻했다지만, 다른 방은 그렇지 않은 듯 했다.

지급받은 두꺼운 모포로도 막을 수 없는 추위에, 처음으로 노예 중 사망자가 발생했다.

얼굴 반 쪽이 심하게 화상을 입은 자국이 있던 아저씨였는데,

그 때문인지 인상이 무서워서 오다가다 만나면 대충 인사하고 황급히 자리를 뜨는 일이 잦았기 때문에

이름은 알지 못했다.

(나중에 넬 언니가 이름을 알려 주었다. 한스라는 이름이었다고 한다)


노예 중 힘을 가장 잘 쓰는 건장한 남자 두 명이 한스 아저씨의 시체를 운반했고,

채석장 주인의 지시에 따라 어딘가에 묻었다고 했다.

지금 시기에는 신전기사가 없다. 몬스터도 겨울잠을 자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고용하는 데 엄청난 돈이 드는 신전기사를 이럴 때 잠시라도 쉬게 해야 돈이 덜 든다고

채석장 주인이 궁시렁대는 걸 들은 기억이 있다.

그렇게 그 날도 오전 일과를 마치고, 점심을 배급받기 위해 방으로 이동할 때였다.


「크워어어어어───!!」


하는 괴성이 블랙 마운틴에 울려 퍼졌다. 

애나는 소름이 끼쳤다.

이 맘 때쯤이면 몬스터들은 한창 겨울잠을 자야 할 시기이다. 이 시기에 몬스터의 괴성이 울린다는 건...

무언가의 이유가 있다. 분명.

애나는 확신을 가지고, 자신이 모르는 하나의 사실을 확인하러 한 노예에게 뛰어갔다.

그 노예는, 아침에 한스 아저씨의 시체를 운반했던 건장한 두 노예 중 한 명이었다.

분명 이름이...아니, 기억나지 않는다. 기억해 낼 시간도 없다. 일단은 물어보는 게 먼저다.


「아저씨!」

「으, 응? 나 말이냐?」

「오늘 아침에, 한스 아저씨의 시체...어디다 묻으셨어요?」


노예 아저씨가 잠깐 머리를 긁다가 대답한다.


「주인 놈이 사람 눈에 띄지 않는 곳에 묻으라 했는데, 오전 작업에 늦을 것 같아서...」


애나가 재차 추궁했다.


「그래서요?」

「그래서...그냥 블랙 마운틴쪽 깊숙히에 버려두고 나왔어. 묻을 시간이 없어서...」


...이거다. 애나의 심적 확신에 물적 증거가 더해졌다.

몬스터는 피 냄새를 맡으면 흥분한다. 그게 사람의 것이라면 더욱 그렇다.

아마도 독수리나 새 떼들이 시체를 뜯어 먹었고, 그 과정에서 피냄새가 블랙 마운틴에 퍼지게 되면서

겨울잠을 자던 몬스터들을 자극한 것이겠지.

아무리 깊숙히에 버렸다고 해도, 사람이 들어갈 수 있는 곳은 한계가 있다.

시체를 놔둔 건 그 길목 어딘가일 테니, 피 냄새를 맡고 블랙 마운틴을 내려온 몬스터들이 시체를 발견한다면 그대로...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애나는 앞뒤 볼 것 없이 채석장 주인의 숙소를 향해 달렸다.

달려가는 도중, 넬을 만났다. 애나가 급하게 외쳤다.


「넬 언니! 도망쳐요!! 곧 몬스터가 몰려올 거예요!!」

「분명 몬스터의 포효 소리가 들리긴 했는데...설마?」


넬의 표정이 굳어지더니 이윽고 하얗게 질렸다.

그 표정 변화만 보고도 넬이 모든 걸 이해했다고 알 수 있었기에, 애나는 그게 맞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넬은 애나를 보며 마주 끄덕이고는 말했다.


「내가 다른 노예들을 대피시키겠어. 애나는 채석장 주인에게 보고를!」

「알겠어요!」


서로 의견이 일치하였고, 서로 엇갈려 뛰어나갔다.

지하 숙소 쪽은 넬에게 맡긴 채, 애나는 열심히 달려 채석장 주인의 숙소에 도착함과 동시에 문을 쾅쾅 두들겼다.


「...누구냐」

「애나예요. 큰일이예요!」


삐걱.

낡은 나무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채석장 주인이 얼굴을 내밀었고,

애나가 자초지종을 열심히 설명했다. 하지만 도중부터 채석장 주인의 눈은 못박힌 듯 먼 곳을 보고 있었다.

애나는 주인의 시선을 읽고, 뒤를 돌아 보았다.

저 멀리서부터, 몬스터들이 번들거리는 초록색 피부와 터질 듯한 근육을 과시하며 산을 내려오고 있었다.

그 수는 약 4~50 정도.

애나의 생각보다 몬스터들의 진군속도가 엄청나게 빨랐다.

아직도 그 곳에 시선이 못박혀 있는 채석장 주인의 주위를 돌리기 위해, 애나는 따귀를 날렸다.

짜악!


「도망치셔야 해요, 아시겠죠?」


볼을 부여잡으며 끄덕이는 주인을 뒤로하고, 애나는 넬과 합류하기 위해 지하 숙소로 향했다.

마침 넬이 숙소에서 지상으로 올라왔는데, 반가워 하는 애나의 눈빛을 뒤로하고 넬이 애나에게 몸을 날렸다.

넬이 지상에 올라온 시점에 이미 거대한 검을 짊어진 선두의 오크 한 마리가 애나를 공격해 들어가고 있었고,

넬은 그 광경을 보았기에 바로 애나에게 몸을 날린 것이다.

부우웅! 쿵!

거검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바닥에 박히는 소리가 거의 동시에 울렸고,


「꺄아아아악!!」


애나의 비명소리 또한 채석장에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