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조 10년 (1810년) 4월

 

내년에 조정에서 일본 측으로 통신사를 보낸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내가 거기 함께 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나는 왜놈들에게 관심이 없다. 불과 이백 여 년 전에 조선을 침략하지 않았던가.

박제가의 북학의에서 그들이 사는 도시를 얼핏 들어본 바는 있다만

그것은 너무 과장되어 있는 것이고 그런 도시는 있을 수도 없다.

소북 계열인 그 놈이 무엇을 알겠으며 십여 년전 유배를 간 것도 다 그 이유가 있으리라 싶다.

중화를 멀리하고 왜놈을 높이 샀던 것은 반역의 음모도 아니었을까 짐작해본다.

 

순조 11년 (1811년) 10월

  

우리 통신사 일행은 일본에서 보내온 안내인을 따라서 부산을 떠나 쓰시마 북단에 있는 와니우라로 가는 중이다.

우리 일행의 배는 총 6척으로 일본인 선원들이 같이 타고 있다. 상사선과 부사선에는 각각 세 명, 3선과 4선에는 각각 두 명, 5선과 6선에는 각 한 명이 나누어 탔다.

바람이 부드럽다. 바닷새가 우리 주변에 몰려든다. 오랜만에 바다를 보니 참 좋다. 쓰시마로부터 작은 배 여섯 척이 환영차 마중을 나온 듯싶다.

우리 배를 둘러싸며 호위하며 선두에 섰다. 악기 연주하는 소리가 온 하늘에 울러 퍼지고 깊은 바다에 스며든다.

그 진동에 물속에 있는 물고기들이 마땅히 놀람직하다. 굉장히 인상적이다.

 

순조 11년 (1811년) 11월 7일

 

해가 돋았다. 선실을 나가 문설주를 잡고 섰다. 사면이 바다다. 굉장하다. 세상에 이런 구경이 또 있을까 싶다.

온 우주에 사방에 물결만이 있다니, 과연 신은 존재하는구나 싶다.

 

순조 11년 (1811년) 12월

 

오사카라는 도시는 정말 굉장하다. 수만 아니, 수십만이나 되는 집이 모두 기와집이다.

여기 부자라는 놈들의 집은 조선의 부자와는 비교할 수가 없다. 그 집의 규모는 마치 조선의 왕과 같이 넓고 그 집의 높이도 층층이 높다.

저렇게 높게 쌓아 올린다면 반드시 무너질 것이라 나는 올라가기를 꺼렸으나 탑처럼 생긴 집들은 그 견고함이 이루 말할 수 없다.

내부의 여러 곳이 황금을 장식되어 있다. 이러한 사치스러움이 조정에도 있었던가? 아니다.

조정도 흉내 내지 못할 것들이 여기 일개 왜인의 집에 이렇게나 많다. 도시의 크기는 한양만하다.

모두가 이다지 번영하고 풍족하게 살 수 있으려면 땅이 넓어야 되는데 그것도 아니다.

왜인들은 도대체 어떤 발전을 하고 있길레 한양의 발전의 수십 배에 달하는 이러한 풍요를 누리고 있는가?

이렇게 발전할 수 있었던 이유가 너무나도 궁금하다.

혹시나 조선통신사가 온다고 이 지역만 특별히 이렇게 꾸며놓은가 싶어 다른 지역도 가보았다.

아니다, 오사카의 모든 곳이 이렇다. 그래, 박제가가 옳았다. 그가 옳았다!

그의 기술은 모두 사실이었던 것이다. 조선은 대체 무엇을 하고 있었단 말인가..

 

순조 11년 (1811년) 12월 

 

여기는 교토이다. 이 도시는 오사카 정도는 아니지만, 왜왕이 사는 도시인지라 사치스럽긴 마찬가지이다. 왜왕의 성벽마저 사치스럽다.

아니다 사치보다는 아름답다. 나도 이 풍요에 길들여 져버린 것인가.. 더 이상 사치스럽다는 표현이 어울리지 않는다.

나는 왜국에 있고 왜국의 눈으로 이 풍요를 보기 시작했다. 강에 모인 아녀자들이 매우 아름답다. 여자들이 입고 있는 베가 고급스러워 보인다.

 

순조 13년 (1813년) 1월

 

나는 재작년 조선 통신사의 서기로 갔다. 온 이후 아직 그 풍요의 충격에 있다..

일본을 무로서 대하던 관점을 탈피하여 문의 일본을 바라보려고 하고 있다.

이러한 경향은 나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에게서 나타나고 있는 듯하다. 우리는 이를 ‘실사구시’ 라고 한다.

 

순조 13년 (1813년) 2월

  

날이 추워진다. 백성들은 가난에 굶주리고 먹을 걱정만 하고 있다. 왜인들은 겨울을 어떻게 나고 있는지 궁금하다.

다시 그곳으로 가서 구국의 길을 모색하고 싶다.

나같이 역사적 통신사로서 일본에 가지 않으면 사람들은 일본을 보고 배울 기회가 전혀 없다.

일본을 접해보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서 나는 오늘부터 내가 보고 배운 것을 철저하게 객관적으로 기록하고자 한다.

해사일기, 일본록, 승사록, 화국지 등 일본에 관련된 모든 자료를 읽고 수집하여 나의 관찰과 집대성하고 하고자 한다.

 

순조 13년 (1813년) 3월

 

대규모의 사절단을 일본에 파견하였고 방대한 견문록이 저술되긴 하였으나 이들의 기술력을 제대로 언급한 적은 없었다.

일본으로부터 도입한 것은 고작 물레방아나 고구마 재배 등에 국한되었다는 것이 난 믿기질 않는다.

이는 우리가 일본을 너무 성리학적 테두리에 가둬놓고 생각한 당연한 결과이며 한계일 것이다.

왜놈들의 일본 경제상에 대해서 내심 경탄하면서도 우리는 왜 화이사상에서 벗어나지 못했는가 대체 알 수 없다.

이들이 강력한 무기를 가져와 쳐들어온다면 우리는 막을 수 있을지 의문이다. 있는 그대로의 일본을 직시하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가 서로를 마음으로는 경멸하면서도 외교를 하고 있었다. 가면을 써가면서 까지 왜 거기서 배우지 못했냐는 말이다.

일본은 무에서 한국은 문에서 강세를 띠며 대등한 외교관계를 하고 있었다.

대일외교관계를 담당한 조엄이라는 작자는 어떻게 이러한 발전상을 보고도 혹평하였는지 궁금하다.

일본의 물레방아, 절구, 제방 공사 등을 견학하고 도입하려 했던 것은 높게 사나 그는 정말 현상을 볼 줄 모르는 인물이다.

왜인들이 만들어 논 사회를 봤어야 옳다. 조엄 이놈은 역사에 남을 죄인이다.

 

순조 13년 (1813년) 3월

 

박제가가 유배생활을 끝으로 어디선가 죽었다고 한다..

팔을 걷어 올리고 일본을 따라잡아야 할텐데 조선은 대체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가 모르겠다...




얼마나 부들부들했을까 ㄷ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