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오크족은 전투능력이 뛰어난 종족은 아니다. 하지만 교묘한 술수를 사용하는 악랄함 덕분에 지금까지 세력을 지켜올 수 있었다. 그런 바오크족이 전투 능력이 뛰어난 모트롤에게 협력한다는 것은 나태의 소울 탈환 부대에게 매우 심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어떻게 해서든 바오크를 모트롤과 떼어놓아야 한다.

모트롤 진지와 약간 떨어져 있는 바오크 진지에 도착해서 보니 생각보다 병력의 수는 많지 않았다. 아무래도 모트롤을 상대하는 것만으로도 벅찼던 아르카나군이 바오크의 합류에 너무 위축된 나머지 제대로 정찰을 하지 못한 게 아닐까. 이 정도 병력이면 대장을 암살하기가 어려울 것 같지는 않다.

그보다 이상한 것은 진지 이곳저곳에 보관돼있는 수상한 물통들이었다. 지키고 있는 병력은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 양은 꽤 많아보였다. 혹시 지난 칼날 진지처럼 아르카나군을 끌어들여 진지와 함께 폭파시키려는 폭약이 아닐까?





이런저런 추측을 하고 있을 때, 모트롤 병사 둘이 와서 수레에 물통들을 실었다. 잠시 후 수레에는 엄청난 양의 물통이 실렸고 아무리 모트롤이라고 해도 끌고 가기 힘들어 보였다. 아니나 다를까, 모트롤 둘이서 수레를 끌고 밀고 별짓을 다해도 수레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때였다. 화가 난 모트롤들은 물통의 뚜껑을 뜯어내더니 안에 들어있던 액체를 한 사발씩 들이켰다. 그러더니 곧 두 모트롤은 괴성을 지르기 시작했고 온몸의 근육이 팽창하기 시작했다. 흥분을 가라앉히고 다시 수레를 끌고 가는 모드롤들에게서 아까와 같은 힘든 기색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아, 그리고 바오크들이 합류한 것도 문제이긴 하지만 모트롤들의 힘이 갑자기 강해지는 바람에 부상자들이 늘어나고 있어영. 뭔가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 같은데 알 수가 없네영.'


퓨엔님이 말했던 모트롤의 수상한 힘의 원인이 바로 저 약물인 듯했다. 저 약물의 공급을 끊으면 모트롤들을 상대하는 것이 더욱 수월하 질 것이다. 하지만 진지를 아무리 둘러봐도 보관 중인 약물은 많아도 생산하고 있는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조금 더 들어가 봐야겠어.

원래도 경계가 삼엄하지 않았지만, 아까 모트롤들이 약물을 싣고 간 뒤부터는 더욱 경계가 허술해져서 잠입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언덕을 돌아 진지 깊숙이 들어가 보니 다른 바오크보다 덩치도 훨씬 크고 특이한 투구를 쓰고 있는 것으로 보아 대장으로 보이는 한 바오크가 있었고 커다란 솥에 무언가를 끓이고 있는 게 보였다.




'저 바오크가 약물을 제조하고 있었군. 여기 외에는 제조 시설이 보이지 않는 걸 보니 저 많은 약물들은 모트롤들이 이곳에 도착하기 전부터 미리 준비해둔 것이 분명해. 그렇다면 저 녀석을 해치우고 저장된 물량을 제거한다면... 모트롤들은 더이상 약물을 공급받지 못하게 될 거야. 하지만 이미 운반된 것들은 어쩌지?'


일단은 눈앞의 문제부터 해결하고 이 문제에 대해서는 퓨엔님과 다시 논의해봐야겠다. 기회를 엿보던 나는 대장 바오크가 뒤로 돌아서는 순간 날파람으로 치고 들어갔다. 그러나 그 바오크는 날렵하게 뒤로 돌며 날파람을 튕겨냈다.


"키엑! 누구냐!"


나는 대답 없이 연격과 습격을 이어나가며 몰아붙였다. 그러나 대장 바오크는 여유롭게 내 공격을 막아냈다. 바오크치고는 매우 빠른 반사신경과 힘이 느껴졌다. 아무리 바오크의 한 수장이라고 해도 이 정도의 수준이라니...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혹시 이 녀석도 약물을 마신 건가? 점점 쌓여가는 정기의 힘을 느끼며 나는 회심의 일격으로 질풍의 창을 돌렸다.




"그 정도로는 어림도 없다. 키엑!"


나의 창은 채 한 바퀴도 돌기 전에 그 녀석의 갈고리에 막혀버렸고, 정기를 모두 소진한 나는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바오크라고 너무 얕잡아 본 게 화근이었다. 이대로는 이길 수 없다. 무언가 방법을 생각해 내지 않으면...


"크케케켁, 어리석은 녀석. 혼자 이곳까지 찾아온 용기는 가상하지만 그깟 실력으로는 날 이길 수 없...커헉, 컥!"


대장 바오크는 날 비웃다가 갑자기 비명을 지르며 한쪽 무릎을 꿇었다.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위아래로 들썩이던 어깨가 점점 작아지는 것이 보였다.


"커헉, 헉, 컥... 하필 이런 때에 약효가 다한 건가...! 하지만 너 따위는 약물의 힘이 아니더라도 문제없다! 키에엑!"


덩치는 줄어들었지만 돌진해오는 기세는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나는 이를 악다물고 정기를 범람시키며 소울을 발동시켰다. 여기에 후유증 따위는 생각지도 않고 폭풍의 의지까지 발현시켰다. 내 양손에 황금빛 소울이 피어남과 동시에 번개가 이글거리기 시작했다. 한 번에 끝장내지 못하면 내가 죽는다.

창을 머리 위에서 돌리며 가속을 높였다. 손이 창의 회전을 따라 갈 수 없을 정도였지만 소울의 힘으로 겨우겨우 버텨냈다. 바오크 대장이 내 앞까지 도달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원심력이 실린 창을 그대로 내려쳤다.




[정령의 칼날!]


바오크 대장이 휘두르는 갈고리와 창이 부딪혔지만 그대로 갈고리가 부서져 나가며 바오크 대장의 가슴을 갈랐다. 바오크 대장의 함성은 그대로 비명이 되어버렸다.


"하아, 하아, 하아...."


브리 마을 습격 당시 네 가지 소울을 동시에 발동시키면서 몸에 이상이 생긴 것이 아직까지도 후유증이 남아 있었다. 그런 상태에서 또다시 큰 힘을 사용해버린 탓에 몸이 또 망가져 버린 느낌이었다. 하지만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바오크 진지에 남아 있는 약물을 다 파기해야 한다.




물통이 부서지면서 흘러나온 약물이 땅에 스며들자 주변에 자라고 있던 풀들이 순간 급격하게 자라나더니 이내 퍼석하게 말라비틀어지며 시들어 버렸다. 그런데 한 식물만이 아무런 영향도 없이 멀쩡하게 살아 있는 것이 보였다.

이곳에 남아 있는 약물을 파기한다 해도 이미 운반된 약물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이 식물로 어쩌면 해독약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 식물과 약간의 약물을 가지고 아르카나 진지로 돌아왔다.


●   ●   ●


"그래서 이 약초를 가져왔다는 말이군영."

"네. 물론 모트롤들의 약물이 떨어지길 기다리는 방법도 있겠지만, 이대로라면 지난 칼날 진지처럼 나태의 소울을 놓치게 될지도 몰라요. 서둘러 해독약을 만들어야 해요."

"후훗, 일단 저에게 맡겨두시구 유피님은 몸부터 챙기시는 게 좋을 것 같네영."

"그럼 부탁해요, 퓨엔님."



말을 마친 나는 그대로 잠이 들었다. 그러나 밖이 소란스러워서인지 깊게 잠이 들지는 못했다. 잠든 상태에서도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모험가 협회는 골렘을 퇴치하는 데 성공한 모양이다...... 립튼 그 사람이 골렘을 9마리나 처치했다니 말도 안 돼...... 퓨엔님은 해독제를 완성했다며 임상실험을 할 지원자를 찾는다고 소리치고 있다...... 아무도 호응해주지 않는 것 같다...... 레비나님이 다시 돌아온 것 같다...... 하지만 지금 눈을 뜨긴 싫어, 좀 더 자고 싶어......


[언제까지 잠만 잘 거니, 유피]

"우웅... 좀만 더 잘께, 언니..."





......응? 언니? 나도 모르게 눈을 번쩍 뜨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막사 안에는 나 혼자뿐이었다. 꿈이라도 꾼 건가. 얼마나 잠들었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몸 상태는 많이 회복되어 있었다. 막사 밖으로 나가보니 모험가 협회와 아르카나들의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이제 일어나셨군요, 유피님! 미녀는 잠꾸러기라더니, 하하핫!"

"제가 그렇게 오래 잤나요?"

"아뇨, 한 세 시간 정도? 그렇게 오래 잘 만큼 자신이 미녀라고 생각하신 겁니까? 이거 아무래도 공주병 진단을 한 번 받아보시는 게 좋을 것 같..."


[낙뢰!]


립튼 옆에 서 있던 나무가 순식간에 잿더미가 되어 사라지자 립튼은 "으악, 사람 살려!"라고 비명을 지르며 도망쳤다. 골렘을 9마리 잡았다느니 하는 말은 내가 잠결에 잘못 들은 것이 분명하다.

아르카나 부대와 모험가 협회는 양동작전을 통해 대장을 잃은 바오크 부대를 각개격파하는 데 성공했다.(립튼의 작전이었다는 말은 믿지 않기로 했다.)

해독약 역시 완성되어 있었다. 약효를 실험해볼 지원자를 찾지 못한 퓨엔님은 백설기한테 약물을 먹였다고 한다. 고삐를 끊고 폭주해 날뛰는 백설기에게 해독약을 먹일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나서야 해독약의 형태가 먹는 약에서 던지는 약으로 개조됐다고 했다. (결국 백설기에게 설탕 보급 상자를 약탈당했다고 한다.)




모든 준비는 끝났다. 나태의 소울을 되찾기 위한 여정은 모트롤 부대와의 최후의 결전만을 남겨두고 있었다.

"부디 프리그 여신님의 가호가 있기를..."


To be continu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