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똑같은 느낌이었습니다. 소름끼칠 정도로요. 군 시절, 병영 도서관에 틀어박혀 보냈던 마지막 몇 개월이 너무 뚜렷하게 떠올라 저도 모르게 몸서리 치고 말았습니다.

기자가 복무했던 부대는 저~기 강원도 철원군 어디 쯤에 있는 구형 막사였습니다. 그 뒤편에 있는 낡은 도서관 건물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죠. 특별히 긴장할 일 없는 작대기 네 개 시절, 주로 그 곳에 '짱박힌' 채 뻔하디 뻔한 설정과 소재와 스토리로 무장한 판타지 소설들을 읽으며 지냈습니다. 가을 하늘의 해가 서서히 힘빠진 모습을 보일 시간이 되면 군복에 오래된 책 냄새와 낡은 건물에서 나는 퀴퀴한 냄새를 잔뜩 묻힌 채 도서관을 나서곤 했죠.

벌써 수 년이 지난 시절의 세세한 부분까지 떠오르게 만든 게임, 바로 네오위즈게임즈가 준비 중인 대작 MMORPG '블레스'였습니다. 16일(화)부터 시작된 일주일 간의 2차 CBT. 플레이하는 동안 든 생각이요? '장편 판타지물의 프롤로그를 읽는 느낌'이라고 요약할 수 있겠습니다.

판타지/무협 소설들을 보면 비슷한 류의 이야기가 많지만, 나름의 재미는 있습니다. 소재와 스토리는 같을지언정, 그것을 풀어내는 과정이나 표현에는 차이가 있거든요. '스토리'의 차이가 아닌 '스토리텔링'의 차이라고 할까요. 기자가 엇비슷해보이는 장르 소설들을 즐겨 읽는 이유입니다.

장르 소설을 꽤 많이 읽었다고 자부하는 입장에서 '블레스'의 두 번째 CBT를 바라봤습니다. 최종 콘텐츠였던 카스트라 공방전과 통치 계약에는 참여해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스토리텔링의 측면에서만 보더라도 하고 싶은 말은 충분히 쌓여있네요. 음, 제목은 뭐가 좋을까요.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만, 모든 것이 마지막 결론을 위한 포석임을 감안해 '스토리텔링의 측면에서 바라본 블레스' 정도면 무난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번 블레스의 2차 CBT에서 주목할 부분은 두 가지입니다. 새로운 진영 하이란과 그 안에 소속된 종족들의 공개, 그리고 RxR 콘텐츠인 카스트라 공방전과 수도 쟁탈전입니다. CBT 때는 당연히! 새로 공개된 것들을 최우선적으로 즐겨야죠. 새로운 진영, 신규 종족의 시각에서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본래 무난한 것부터 시작하는 성격인지라, 하이란 진영의 인간 종족인 하비히츠를 선택했습니다. 정말 거짓말 안 보태고 여캐를 선택하고 싶었지만, 기본 모델링이 너무 마음이 들지 않았습니다. 블레스가 자랑하는 이른바 '3세대 커스터마이징'은 아직 적용되지 않은 상태거든요.

'남캐보다 여캐 만드는 재미가 쏠쏠합니다'라고 당당히 말할 수도 있습니다만, 어쨌든 커스터마이징이 지원되지 않는 이상 꾸며도 그만, 생긴대로 살아도 그만인 남캐로 하리라 마음 먹었습니다. 사실 커스터마이징을 할 수 있었다 치더라도 어차피 초기화될테니 대충 했을 것 같긴 하네요.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절대 제 취향 아닙니다.

주인공의 첫 등장은 언제나 그렇듯 별로 낯설지 않은 흐름을 보여줍니다. 위기에 빠진 마을, 그 곳을 구하러 온 기사단, 그리고 그 와중에 한 이름 없는 실력자의 등장. 물론 그가 이야기의 주인공, 즉 유저 자신입니다.

판타지 세계관에서 '주인공은 선택받은 운명의 소유자'라는 설정은 너무 흔합니다. 블레스 세계관에서 유저는 '아나타바린'이라는 명칭으로 불립니다. 실제 플레이어가 종종 열어보게 될 퀘스트 일지도 '아나타바린의 서'라고 명명되어 있고, 게임 안에서 만나게 되는 '다이단 족'이라는 사람들이 자꾸 아나타바린이라고 부릅니다. 그거 말고 이름 좀 제대로 불러달라고...

판타지 소설의 주인공은 대개 해결사 노릇을 자주 합니다. 여느 RPG에서 그렇듯, 우리는 언제나 퀘스트라는 이름의 잡역(?)에 시달리죠. 위험 지역에서도 잘 살아나오고, 척 봐도 어려울 듯한 일들을 덥석덥석 받아서 해치우니 얼마나 쓸모있어 보이겠습니까.

현실에서도 그렇듯, 일 잘하는 사람한테는 더 많은 일, 더 어려운 일이 보상으로 주어집니다. 그렇게 우리는 게임만 켰다 하면 엘리트 심부름꾼으로 착실히 성장해 가죠. 어쩌면 주인공으로서 타고났다는 그 비범한 운명이 '심부름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초면이지만 왠지 심부름을 시키면 잘할 것 같다'고 생각한 듯하다

블레스에서의 심부름... 아니 퀘스트는 두 갈래로 구분됩니다. 하비히츠의 메인 스토리를 구성하는 퀘스트의 경우, 유저는 찬탈당한 황제 자리를 되찾으려 하는 황태자의 조력자로서 성장하게 됩니다. 그래도 제법 폼나는 역할이죠. 다른 종족은 오래 플레이해보지 못했습니다만, 그래도 각자 꽤 중요한 배역을 맡아 이야기를 이끌어가게 됩니다.

메인 퀘스트를 플레이하다 보면 중요한 순간순간 들어가는 이벤트 컷-신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다만 아직 사운드가 들어가 있지 않은 탓에 그닥 쏠쏠한 재미를 주지는 않습니다. 완성된 형태였다고 해도 적지 않은 유저들이 컷-신을 그냥 스킵하는 것이 사실이긴 합니다만, 개인적으로는 텍스트만 주욱 나열하는 것보다 훨씬 선호하는 방식입니다. 맛들이면 꽤 재밌거든요.

스토리텔링의 디테일을 위해 퀘스트 진행 중에도 많은 부분 음성이 입혀져 있습니다. 아직 인물들의 입모양 움직임이 적용되지 않아 어색하기 그지없습니다만, 이건 시간이 해결해줄 문제일테니 완성된 모습을 기대해봄직 합니다.



1차 CBT부터 블레스의 전투는 두 가지 굵직한 특징을 보여준 바 있습니다. 먼저, '스킬덱'이라 불리는 비교적 제한된 스킬 편성 시스템입니다. 다른 게임을 해보신 분이라면, 한 번에 꺼내놓을 수 있는 스킬 수가 확연히 적다는 것을 실감하실 수 있을 겁니다.

사실 이건 양날의 칼과 같습니다. 실제로 사용되는 스킬 수가 몇 개 되지 않더라도, 화면을 차지한 수많은 아이콘들은 때때로 시각적인 즐거움을 선사하기도 하거든요. '풍성 vs 난잡', '빈약 vs 깔끔'은 결국 바라보는 사람의 취향에 달린 문제입니다.

'블레스'는 많은 부분에서 기존 관습들을 충실히 따르고 있습니다만, 이 스킬덱 시스템은 새로운 시도라 볼 수 있습니다. 한재갑 PD는 2차 CBT를 앞둔 인터뷰에서 '상황에 따른 스킬 세팅 자체를 하나의 콘텐츠로 녹이고 싶다'고 이야기한 바 있습니다. 최근 많이 볼 수 있는 카드 기반 게임에 빗대어 볼 때, 각각의 스킬을 '카드'라고 생각하고 이들을 활용해 덱을 짠다는 느낌으로 접근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 부족합니다. 스킬 다양성도 그리 보장되지 않은 편이고, 각 스킬들이 시너지를 내려면 어떻게 연결하면 좋을지도 잘 보이지 않습니다. '스킬 세팅의 전략화'라는 의도가 적중하기 위해서는 지금보다 다양한 전투 스타일을 녹여낼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하나의 클래스라도 어떤 스킬덱을 사용하느냐에 따라 눈에 띄는 차이를 보일 수 있어야 보다 다양한 재미를 보장할 수 있겠죠. 아, 1차 CBT에 비해 스킬 슬롯 수가 늘어난 점은 긍정적이네요.

다른 하나의 특징은 상대적으로 느린 전투 템포입니다. 일반적으로 RPG를 시작하면 초반 지역에서는 매우 수월한 진행이 가능합니다. 특급 해결사의 표적이 된 적대 인물(이라고 쓰고 '퀘몹'이라고 읽지요)들이 무슨 말 한 마디 하기도 전에 법보다 주먹이 가까운 우리는 두세 방 정도로 바닥을 기게 만들 수 있었죠.

하지만 블레스엔 그런 거 없습니다. 그들의 외마디 일갈은 물론, 왜 여기서 두들겨 맞고 있어야 하는지 사연까지 다 들어주고 남을 만큼 전투 한 번에 드는 시간이 여유(?)롭습니다. 레벨이 올라가더라도 이런 양상은 크게 달라지지 않죠. 나는! (퍽퍽!) 너희들의 체제에! (퍽!) 저항할 것이다! (아직도 안 죽습니다)

이런 환경에서는 소위 말하는 '애드'(싸우던 적 외의 다른 몬스터가 전투에 끼어드는 상황)가 무척 신경 쓰입니다. 위치 선정이 잘못되면 전투 중 애드, 혹은 전투 직후 애드가 이어지고, 어느새 회색 화면까지 펼쳐지는 나비효과를 심심찮게 경험하게 됩니다. 심지어 퀘스트 대상 네임드와 싸우는 도중에 같은 녀석이 리젠되는 경우도 봤습니다.(그림자 분신술!?)

회색 화면 앞에서 현자타임을 맛보고 나면 '전투 직전 주위를 먼저 살핍니다'라는 습관이 스펙에 추가됩니다. 파티 플레이에서 중요시되는 위치선정을 레벨링 시절부터 선행학습으로 마스터하게 되죠. 한 사람의 실수가 빚어낸 파티 전멸이 얼마나 많은 이의 정신건강에 스크래치를 내는지, MMORPG 좀 해봤다 싶은 분들은 잘 아실 겁니다.

앞으로 고레벨로 올라갈수록 파티 플레이는 점점 활성화될 수밖에 없을 겁니다. 위치선정을 미리 익히게 하는 건 좋지만, 잠깐 삐끗하면 전투 난이도에 차이가 커지는 이런 구조가 고레벨 구간에서의 난이도에 어떤 파장을 가져올지는 한 번 고려해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낯선 그 게임에게서 노가다의 향기가...



말을 타고 뛰어다니는 모습은 "와, 리얼하다"는 감탄이 절로 나옵니다. 말의 모델링이라든가 근육의 움직임이 잘 구현되어 있고, 승마 모션도 그리 어색하지 않습니다. 말의 투레질 소리만 주의 깊게 들어봐도 정말 디테일한 곳까지 녹아있는 장인정신을 엿볼 수 있습니다. 푸르르~ 하는 소리가 너무 자주 들린다는 생각이 '아주 가끔' 들기도 합니다만...

맵 상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곳은 말을 타고 가든 걸어가든 어떻게든 갈 수 있습니다. 게임만 켰다 하면 역마살 기질을 한껏 발휘하는 기자가 일주일 내내 돌아다녀본 결과, 유저가 접근할 수 없던 지형은 거의 없었습니다. 다만, 골목길 같은 좁은 곳에는 가끔 '탈출하기' 기능을 사용하도록 하는 부비트랩(?)들이 있기도 하니 주의하셔야 합니다. 뭐, 애초에 딱 봐서 사람이 들어갈만한 곳이 아니다 싶으면 그냥 지나치는 편이 제일 좋긴 하죠.

꼭 계시더라고요. GM님이 이ㄴ... 아니, '이님' 하십니다

그리폰 관리인에게 말을 걸어 비행 탈것을 타고 이동할 때의 연출에도 감탄사 한 마디를 더하고 싶습니다. 특히 배경 그래픽은 1차 CBT에 비해 한결 다듬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비행 탈것이 날아오르거나 활강할 때의 카메라 움직임이라든가 바람을 가르고 날아간다는 느낌을 주는 연출 등도 꽤 좋은 눈요깃거리였습니다.

기자의 경우 기본으로 설정되어 있는 중상 정도(4단계)의 그래픽 옵션으로 플레이했습니다만, 최고 품질로 설정하거나 개인 PC 사양에 맞춰 세부적으로 조절하면 더욱 멋진 광경을 볼 수도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현재로서 프레임 드랍은 그리 심하지 않은 편이라서, 향후 최적화를 좀 더 거치다보면 문제가 되지는 않을 듯합니다.

전 분명 '그리폰 관리인'을 찾아갔거든요? 근데 얘를 태워줍니다.
모로 봐도 그리폰은 아닌 거 같은데...



태세변환 좀 하겠습니다. 네, CBT입니다. 아직 미완성이라는 이야기죠.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눈에 보이는 단점들을 덮어놓고 갈 수는 없는 법이죠. 칭찬일색으로 채우려고 쓰는 리뷰는 아니니까요. 아직 테스트 버전인만큼, 개선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짚어보겠습니다.

튜토리얼로 제공되는 던전을 한 번 플레이해보면 별도의 가이드가 없어도 그리 어렵지 않게 적응할 수 있습니다. 전반적으로 게임이 쉽다는 이야깁니다. 기존까지 선보이던 MMORPG의 룰을 충실히 따르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그 반대급부로 따라오는 것이 바로 지나친 단순함과 획일화입니다. 우선 캐릭터 클래스에 따라 장비할 수 있는 아이템은 고정입니다. 게다가 옵션 종류도 그 밥에 그 나물이죠. 가디언은 검과 방패, 그리고 힘과 체력. 힘 6보다 힘 8이 더 좋다는 건 열 손가락 접어가며 숫자만 셀 줄 알아도 누구나 분간할 수 있습니다. 즉, 세팅에 있어서의 선택권이 없다는 이야기고, 좀 더 깊이 들어가면 그만큼의 자유도가 부족하다는 겁니다.

둘이든 셋이든 그 이상이든, "이 중에 하나를 선택해봐"라는 건 태곳적부터 인간이 흥미를 느끼던 상황 중 하나입니다. 기회비용, 즉 '이걸 가져가면 저걸 골랐을 때보다 뭐가 더 이득이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짐으로써 문제를 풀고 결정을 내린다는 작은 성취감을 제공하니까요.

여기에 위에서 언급했던 미완성 상태의 스킬덱 시스템이 더해져 있었죠. 네, 캐릭터 성장이 그리 재미있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MMORPG에는 퀘스트 스토리가 아닌 일반 사냥을 통한 레벨업이 더 익숙한 유저도 분명 있을 겁니다. 그런데 전투 템포도 빠르지 않아요. 열 마리 스무 마리 때려잡을 때 즈음이면 멍하니 손가락만 움직이는 유체이탈 현상이 느껴지는 건 당연한 수순입니다.

물론 보편적이고 넓은 유저풀을 확보하고자 한다면, '쉽다'는 건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장점입니다. 상당수의 게이머들이 '가장 좋은 장비'가 무엇인지, '가장 쓸만한 스킬 세팅'이 무엇인지를 물어보며 스스로를 획일화시키는 경향도 분명 무시할 수 없죠. 하지만 좀 더 크게 보면 그것 또한 그 게이머의 '선택'입니다.

애초에 다른 사람에게 물어볼 필요도 없이 한 길만을 가도록 설계되어 있다면... 글쎄요. 아무리 많은 유저풀이 갖춰진다한들 "재미있어서 한다"고 답할 유저가 그리 많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네요.

'공주'라기에 흔한 민폐 마스터 캐릭터를 떠올렸는데,
뭔가 다른 의미의 민폐를 끼칠 것처럼 생기셨어요..

블레스에서는 전투 편의성을 위해 두 가지 특징을 제공합니다. 하나는 카메라 방향만 맞추면 대상을 선택해주는 '반자동 타겟팅'(Tab 키를 이용해 바꿀 수 있으니 '반자동')이고, 다른 하나는 스킬 단축키를 눌렀을 때 사정거리까지 알아서 뛰어가는 자동 무빙입니다.

이미 여러 유저가 지적하기도 했는데, 이는 몇 가지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앞서 잠시 언급했습니다만, 블레스의 초반 구간에는 전투 한 번으로 인한 피해가 꽤 큰 편입니다. 전투 도중 다른 적 유닛이 애드되거나 했을 때의 변수가 크게 작용하고, 때문에 위치선정의 중요성이 높다고 이야기했었죠.

이런 상황에서 스킬 버튼을 눌렀을 때 대상이 사정거리 밖에 있다면 스스로 정한 위치를 자동으로 이탈하게 됩니다. 여기에 반자동 타겟팅으로 내가 원치 않은 대상이 잡혀있다? 그럼 100%죠. '찾아가는 서비스'는 분명 편리합니다만, 굳이 이런 곳에서까지 제공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요.

즉, 이 부분만큼은 보편적인 룰을 따랐던 것처럼 "사정거리가 닿지 않습니다"는 메시지를 출력해주는 편이 바람직해 보입니다. 이번 테스트에서 분명 이와 관련한 피드백이 많았을 거라 생각합니다. 부디 꼼꼼하게 살펴 유저들이 수긍할 수 있는 결정이 내려지길 바랍니다.

'허공 점프 중 돌진'은 이 동네에서도 유효합니다.

블레스의 월드는 상당한 완성도를 갖추고 있습니다. 개인적인 소견을 덧붙이자면, 여행하는 맛이 살아있다고 할까요. 제각각의 특징대로 생긴 도시와 마을들은 때때로 '이것이 정말 하나의 월드 안에 존재하는 것들인가' 하는 의문을 품도록 만들기도 합니다. 그 정도로 각각의 개성이 엿보인다는 뜻입니다.

몰입도 높은 MMORPG가 되기 위해 잘 만들어진 월드는 분명 필요한 조건입니다. 하지만 외관이 화려할수록 '빛 좋은 개살구'가 될 위험성도 높아진다는 걸 기억해야 합니다. 일종의 기대심리라는 걸 간과할 수 없으니까요. 특히 메인 퀘스트에 따른 레벨업 동선에 많은 빈틈이 보이는 현재로서는 위험수치가 제법 높아 보입니다.

대표적인 예를 하나 들어보죠. 하비히츠 종족의 경우, 유저는 메인 퀘스트에서 상당히 비중 있는 역할로 활동하게 됩니다. 메인 퀘스트 한 꼭지를 마치면서 상대방이 "ㅇㅇ 마을에서 만나자"고 하는군요. 냉큼 그리폰 관리인을 찾아가려다가 퀘스트 일지를 보니, 이게 웬걸. 레벨이 부족해 진행이 안 됩니다.

다시 잡일꾼으로 돌아가 몇 가지 심부름을 해줍니다. 그래요, 이 정도는 다들 익숙하잖아요? 그런데 이런! 아직도 레벨이 오르지 않았습니다. 답은 정해져 있죠. 이젠 영웅 대신 무뢰배의 길을 택할 때입니다. 주변에 보이는 녀석들에게 닥치는대로 시비를 걸어 경험치의 희생양으로 삼는 거죠. 초반부를 어느 정도 지나고 나면 계속 이런 구조입니다. 영웅과 심부름꾼, 깡패(혹은 사냥꾼)의 위치를 종잡을 수 없이 반복하게 됩니다.

어쩌다 한두 번이면 모를까, 이러한 상황이 반복되면 스토리 몰입도는 뚝뚝 떨어지기 십상입니다. 맨 처음, 소설 한 편의 프롤로그를 읽는 느낌이라고 전한 바 있습니다. 여기에 비유하자면, 책 첫 장을 열고 '서막' 한 페이지를 읽었더니 심부름 좀 해야하고, 두 번째 장 읽었더니 쓰레기 좀 내다버려야 하고, 또 다음 꼭지를 읽고 나니 첫 문장 내용마저 가물가물한 상황이라고 할까요.

나사가 군데군데 빠진 스토리텔링은 언제 터질지 모를 불안정한 뇌관이나 마찬가집니다. 몰입도와 당위성을 잃어버리는 순간, 아무리 잘 만들어진 배경이라도 해도 '닥사'를 위한 공간에 불과하게 되어버립니다. 블레스의 퀘스트 라인 전체에 걸친 개선이 반드시 필요한 이유입니다.

컷-신들의 완성된 모습도 꽤 기대가 됩니다



"세상의 모든 창조는 이미 존재하는 것들의 또다른 편집이다." 문화심리학자로 알려진 김정운 교수가 올해 10월 출간했던 새 저서 '에디톨로지: 창조는 편집이다'에서 거론한 표현이죠.

언제가 됐든 한 번을 나왔을 듯한, 누군가는 살면서 한 번쯤 봤을 법한, 그런 익숙함으로 점철된 세상. 현대인들은 그런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이런 환경에서 '블레스'는 기존의 익숙한 것들을 바탕에 두고 몇 가지 변칙을 넣는 길을 택했습니다. 그러한 시도 자체는 비난할 수 없을 겁니다. 오히려 모범적인 선례가 될 수 있길 바라야죠.

커다란 프레임 안에 배치된 수많은 조각들은 때때로 전혀 예측하지 못한 흐름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바둑판 위 흰 돌과 검은 돌의 첨예한 대립이 단 몇 수로 판가름나기도 하는 것처럼요. RPG를 볼 때 그 안의 스토리텔링에 많은 비중을 두는 한 유저의 입장에서, 블레스의 싸움을 결정지을 '몇 수'는 꾸준히 채워가야 할 디테일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이 이야기는 해야할지 말지 잠시 고민했었습니다. 하비히츠 종족 스토리에는 꽤 높은 수위의 베드신이 포함되어 있어 잠시 논란이 되기도 했었는데요. 이야기 전달 측면에서만 보면 컷-신에 등장하는 그 두 인물 사이의 관계를 이야기하기에는 가장 효과적인 장면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지금 분위기로서는 아무래도 오픈 때 다른 식으로 바뀔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지만요.

정서적인 측면에서, 게임이라는 콘텐츠의 접근성 측면에서 여러 반발이 있을 거라는 리스크는 개발진도 알고 있었을 겁니다. 그런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이런 장면을 넣은 것은 스토리텔링 측면에서의 연출에 그만큼 고심을 거듭했다는 반증이 아닐까요.

단순히 '레벨 얼마, 던전 몇 개, 퀘스트 몇 개를 갖췄다'라는 통계적인 콘텐츠는 식상합니다. 디테일한 부분 하나하나까지 고민한 게임을 원합니다. 뻔한 판타지 소설이 되면 어떤가요. 세밀하게 다듬어진 콘텐츠에 잠시나마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빠져들 수 있다면, 그걸로도 충분히 "재미있었어"라고 말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캬~ 경치 좋고



최종적으로 접하게 될 RxR 콘텐츠가 제대로 살아나기 위해서는
디테일한 스토리텔링이 뒷받침되어야 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