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 즉 '시나리오'가 게임에서 가지는 가치는 실로 평가하기 힘들다. 사실 과거, 시나리오는 게임에서 크게 필요 없는 요소로 평가받은 적도 있었다. 게임업계에서 전설로 통하는 개발자 중 한 명인 '존 카맥(John Carmack)'은 한때 이렇게 이야기했다. "게임에서의 시나리오는 '포르노'의 그것과 같다." 실로 적나라한 표현이 아닐 수 없다. 하긴 당시의 게임을 살펴보면 영 틀린 이야기도 아니었다. 기술적 발전이 한창 진행되던 시절, 사람들은 새로운 기술, 새로운 목적에 주력했을망정, 게임 자체가 전하는 '이야기'에는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으니까.

GDC2015의 첫 강연, 강단에 선 스티븐 후드(Stephen Hood)를 처음 보았을 때 든 생각은 '정말 개발자 같지 않게 생겼다.'였다. 그는 보통 게임 개발자 하면 생각나는 장대한 볼륨과 아무렇게나 기른 머리가 아닌, 깔끔한 핏과 다부진 몸매를 보여주었으며, 말끔하게 면도한 얼굴로 청중 앞에 섰다. 마치 영화 '아이언맨'의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가 생각난다고 할까?

그의 첫 마디는 상당히 자극적이었다. '매스 이펙트 트릴로지', '텔테일 게임즈'의 작품들, 그리고 '엘더스크롤5: 스카이림'까지. 모두 시나리오 하면 일가견이 있는 작품들의 이미지를 나열해둔 상태가 그가 내뱉은 말은 이러했다. "스토리텔러로서 컴퓨터 게임은 굉장히 끔찍합니다."

▲ '스토리움'의 스티븐 후드(Stephen Hood)

섣불리 공감할 수 없는 말임에도, 일단 들어보기로 했다. 그가 만든 회사인 '스토리움'은 유저의 참여로 만들어지는 방대한 분량의 단편적 시나리오들이 합쳐져, 하나의 큰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스토리 게임을 전문적으로 개발하는 회사이니까.

어째서 컴퓨터는 끔찍한 스토리텔러인가? 스티븐 후드의 주장은 이러했다. "인간의 감성은 굉장히 넓은 폭으로 나누어져 있으나, 이를 프로그램으로 입력하는 과정에서 상당 부분 축소되며, 컴퓨터 안에서 이를 정립하는 과정에서 더욱 축소된다. 게임이 완성될 때는 그래픽적 요소와 사운드를 통해 이를 강화시하만, 결국 원작자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내용을 제대로 전달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얼핏 수긍이 가는 이야기였다. 매스 이펙트 시리즈의 팬으로서 매스 이펙트를 논해보자면, 게임 자체는 굉장히 흥미로운 스토리 라인을 갖추고 있으며, 내 선택에 따라 조금씩 변화하는 게임 진행 역시 재미있다. 하지만 결국 화자, 즉 매스 이펙트 시리즈의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결과에서 크게 벗어날 수는 없다. 이 점만은 개발사인 바이오웨어가 컴퓨터에 제대로 입력한 내용이고, 곧 게임의 기저가 되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 인간의 감성은 넓지만, 컴퓨터를 통과하는 동안 상당부분 축소될 수 밖에 없다.
게임이 완성될 때 확대하더라도, 원작자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내용은 축소되는 것이다.

여기서 스티븐 후드는 한가지 예를 더 들었다. 반지의 제왕을 보면, 막바지에 이르러 독수리들의 왕이 프로도와 샘을 구해주는 이야기가 나온다. 애초에 모르도르의 어둠의 산으로 이동할 당시, 혹은 그 긴 여정 일부분이라도 그들이 나섰다면, 반지 원정대의 이야기가 한층 더 수월하게 풀리지 않았을까? 하는 내용이다.

물론 J.R.R 톨킨은 이에 대한 설정을 따로 했을 테고, 이야기적 관점에서 반지원정대는 고생을 할수록 돋보이기 때문에 청중들 역시 그저 한바탕 웃고 넘겼지만, 그는 이를 통해 '열린 이야기'의 가능성을 시사했다.

스티븐 후드는 말했다. "한 명의 화자가 모두에게 이야기를 전달하는 구조의 네러티브는 태생적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완성되어 있는 컴퓨터 게임은 이런 방식의 전달만이 가능할 뿐이다. '선택지'는 그 길을 바꿀 뿐, 결국 한 명, 혹은 준비되어 있는 작가진이 만들어놓은 가능성을 뛰어넘는 '살아있는 전개'는 불가능하다."


동시에 그는 세 가지 예시를 들었다. 카드 게임인 '원스 어폰 어 타임', TRPG인 'FATE', 마지막으로 스토리 게임인 'FIASCO'가 그 세 가지 예시였다.

'원스 어폰 어 타임'은 카드 게임으로서는 드물게 상당히 구체적인 스토리 텔링 방법을 제시하는 게임이다. 아틀라스라는 개발사에서 제작한 이 카드 게임은, 각각의 카드마다 독립된 스토리 요소를 지니고 있다. 물건, 장소, 인물로 나뉘는 카드의 뒷장에는, 각각 독립된, 하지만 다른 요소들과 융합될 수 있는 스토리 요소들이 기재되어 있다.

결국, 게임에 참여하는 플레이어들은 다양한 카드들을 모으고 그 카드를 통해 이야기를 만들어 나간다. 물론 이 역시 한계는 있다. 카드의 종류는 무한대가 아니며, 준비된 스토리들의 복합적 결합으로 인해 만들어지는 내용이 결국 이 게임의 스토리가 되는 거니 말이다. 문득 생각나는 점이 바로 '보더랜드' 시리즈의 무기 체계였다.

다양한 특성을 가진 무기 제조사, 나아가 각각의 무기마다 붙는 차별화된 능력 덕분에 '보더랜드' 1편의 첫 캐치프레이즈 중 하나는 '어느 FPS보다 다양한 무기'였었다. 다양한 요소의 무작위적 융합은 엄청나게 많은 변수를 만들어낸다. 스티븐 후드는 이러한 구조를 '공유 네러티브(Shared Narrative)'라고 설명했다.


두 번째 예시였던 'FATE'는 독특한 경제 체계를 갖춘 TRPG(Table Top RPG)다. '코인'으로 이뤄지는 게임 내 경제 체계는 매 게임마다 상당히 유동적인 생명력을 부여한다. 이 역시 참여하는 게이머들의 행동에 따라, 복합적인 스토리 라인을 갖춰나가게 된다.

'FIASCO'는 스토리 게임이다. '스토리 게임'은 과거 국내 게이머들도 어렸을 적 한 번쯤 겪어봤음직 한 '책'을 통한 게임이다. 첫 페이지에서 선택이 나뉘고, 그 선택에 따라 다른 페이지로 이동하며 게임을 진행하는 방식이다.

물론 FIASCO는 조금 더 복잡하다. 각각의 게이머들은 주사위를 굴림으로써 게임의 세계를 설정하고, 등장인물들의 성격을 생성하며, 특이 사항들을 만들어낸다. 게임 시작 전부터 모든 요소들이 무작위적으로 결정된다. 이 역시 앞서 이야기했던 '공유 네러티브'와 무작위적 스토리 구성의 일환이다.



사실 스티븐 후드의 모든 발언에 적극적으로 공감할 수는 없었다. 잘 구현된 스토리 라인은 그 유동성과 관계없이 자체만으로도 큰 가치를 지닌다. 그가 예로 들었던 '반지의 제왕'이 어째서 지금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팬덤을 거느리고 있는지, 그리고 '매스 이펙트'의 시나리오를 내가 직접 만들어나갔다면, 과연 그 막바지에 큰 감동을 받을 수 있었겠는지에 대한 조금의 상상만으로도 가능했다.

하지만 달리 생각해보면, 이는 '컴퓨터 게임'에서의 스토리 텔링에 대한 새로운 전기를 가져올 수도 있는 내용이기도 했다. 물론 그 과정의 접목은 게임 개발사, 그리고 작가진의 역량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스토리'를 어떻게 짜야 유동적이고, 생명력을 갖추면서도, 어떻게 말하고자 하는 바를 시사할 것인가. 이는 앞으로 게임을 개발할 모든 회사가 갖고 가야 할 숙제일 것이다.

'게임'에서의 스토리가 포르노의 그것과 같던 시절은 이미 옛날에 끝났다. 작금에 이르러, 훌륭한 스토리와 그 전달은, 게임을 평가하는 부분에서 대단히 크게 작용하는 요소로 자리매김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