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과는 모든 과정을 보여주지 못합니다. 프로에게는 성적이 중요하지만, 최선을 다해도 만족할만한 결과를 얻지 못할 수도 있죠. 결과를 떠나서 그동안의 노력마저 인정받지 못한다면 더욱 지치기 마련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꾸준히 자신의 길을 걸어왔던 전 프로게이머가 있습니다. 힘들지만 웃음을 잃지 않고 꿋꿋하게 자신의 역할을 해왔고, 누군가를 탓하기보다 스스로 책임을 지려고 했습니다. 이제는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은퇴를 결심한 전 CJ 엔투스 원거리 딜러 '스페이스' 선호산. 1세대 리그 오브 레전드 프로게이머로 시작해 지금까지 쉬지 않고 달려왔던 그의 이야기를 들어봤습니다.


Q. 인벤 독자 여러분에게 간단한 소개와 인사 부탁드려요.

안녕하세요. 전 CJ 엔투스 원거리 딜러 '스페이스' 선호산입니다.


Q. 선호산 선수를 보면 항상 웃고 있어요. 원래 웃음이 많은 편인가요?

웃는 게 습관이 된 것 같아요. 특별히 재미있는 상황이 없어도 말하는 게 부끄러운지 웃음이 자주 나오네요.


Q. 밝은 모습이 보기 좋네요. 평소 주변 사람들과 모두 원만한 관계로 지내나요?

남한테 피해 주는 것을 안 좋아해요. 주변 사람들과 되도록 원만하게 지내고 싶어요. 정말 억울한 경우가 아니면 화를 잘 내지 않는 성격이에요. 화를 내본 지도 오래돼서 기억이 잘 안 나네요.


Q. ‘부르르’라는 재미있는 별명이 있는데, 어떻게 얻게 된 건가요?

참 오래된 기억이네요. 전 CJ 엔투스 시절에 얻은 별명이에요. 경기 중에 상대 이블린이 올 만한 경로를 생각하고 있었는데, 보이지 않는 곳에서 갑자기 나타나 깜짝 놀라서 '부르르' 떨었던 것 같아요. 평소에도 렝가나 이블린이 갑자기 나타나면 화들짝 놀라곤 하죠. 개인 방송에서 가끔 그런 모습을 보여줄 것 같네요(웃음).




Q. 오랫동안 활동했던 CJ 엔투스를 나가게 됐네요. 어떤 감정이 드나요?

막상 계약 종료됐다는 말을 들으니 씁쓸한 기분이 드네요. 오랫동안 프로게이머 활동을 했는데, 이제 많은 분 앞에서 경기를 못 한다고 생각하니 아쉬움이 남아요. 그래도 제가 선택한 길이라 후회는 없어요.


Q. 재계약하자는 의견이 있었다고 들었어요. 프로 생활을 그만두게 된 계기가 있나요?

이번 롤챔스 섬머 시즌부터 제 경기력이 많이 떨어졌다고 느꼈어요. 원인은 잘 모르겠지만, 제 솔로랭크 점수도 떨어지고 다시 올라가지 못하니까 자괴감이 들었어요. 제가 원하는 만큼 경기력이 나오지도 않고 플레이오프와 롤드컵 선발전에서 떨어졌죠. 그때부터 정신적으로 많이 힘들어서 은퇴를 결심하게 된 것 같아요. 그리고 그동안 프로게이머로 활동하면서 뭔가 이루었다고 생각이 안 들어요. 경력에 우승은 없고 대부분 3, 4위 정도 기록하면서 제 한계를 많이 느꼈어요. 롤챔스 섬머 마지막에 커뮤니티 반응을 봤는데 씁쓸하더라고요.


Q. CJ 엔투스의 상징과 같은 ‘매드라이프’ 홍민기 선수와 오랫동안 함께 활동했네요. 같은 라인에 서는 게 부담되지 않았나요?

그동안의 명성이 있어서 민기 형과 호흡을 맞추기 전에는 조금 부담됐죠. 그런데 연습할 때 실수도 하고 인간적인 면을 보여주더라고요. 신인 줄 알았는데, '민기 형도 사람이구나'라고 느꼈어요. 실제로는 엉뚱한 면이 많아요. 방송에서 '클템' (이)현우 형이 말하는 게 모두 사실이에요(웃음). 야한 이야기도 좋아하고 '4차원'이에요. 말 귀를 못 알아듣지만, 실력도 뛰어나고 좋은 형이었어요(웃음).




Q. 이번 해에 ‘화장실 퍼즈’ 사건이 있었어요. 당시 선호산 선수는 어떤 상황이었나요?

전날부터 제가 감기에 걸려서 물을 많이 마셨어요. 초반에는 괜찮았는데, 경기가 길어지다 보니 소변을 참지 못하겠더라고요. kt 롤스터 팀에게 정말 죄송하다는 말을 하고 싶어요. 이제는 은퇴했으니 추억이 됐네요.


Q. 이번 해에 다른 팀들이 롤드컵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줬어요. 롤드컵 선발전에서 떨어진 게 많이 아쉬울 것 같아요.

당시 한 세트 차이로 진에어 그린윙스에게 패배한 것보다, 정규 시즌에서 1승을 더 추가하지 못한 게 더 아쉬웠어요. 1승만 더했더라면 CJ 엔투스가 먼저 선발전 결승에 올라가 있을 수 있는 상황이었죠.


Q. CJ 엔투스에서 오랫동안 선수 생활을 하면서 아쉬운 점은 없었나요?

나름 프로게이머 생활을 꾸준히 열심히 했는데, 결과가 안 좋아서 아쉬웠어요. CJ 엔투스 성적이 잘 나오지 않으면 제가 섬머 시즌에 잠시 솔로랭크 떨어졌던 게 구설수에 오르더라고요. 그만큼 '그동안 인상적인 경기력을 보여주지 못해서 그런가?'라는 생각도 했고요. 제가 식스맨으로 시작했지만, 주말 반납하고 연습해서 어렵게 주전 자리까지 올라왔거든요. 그런 모습을 감독님과 코치님이 믿어주셨는데, 기대에 부응하지 못해서 죄송한 마음이 드네요.

원래는 라인전부터 상대를 찍어누르는 스타일이었는데, 어쩌다 보니 제 색깔이 사라지고 안정적으로 1인분 하는 역할을 맡게 됐네요. 뚜렷한 특징은 없지만, 꾸준히 노력하는 원거리 딜러로 기억해주면 좋겠어요.




Q. 프로게이머로 활동하면서 언제가 가장 기억에 남는지 궁금하네요.

구 CJ 엔투스 시절이 가장 기억에 남네요. 당시 이재훈 코치님 밑에서 (김)범석이 형, (배)어진이와 (최)인석이, (김)윤재 형과 함께 했죠. 개성이 강한 팀원들이었지만, 서로 잘 맞춰가며 즐겁게 게임을 했어요. 특히, 범석이 형은 당시 저를 잘 이해해줘서 고마웠어요. 요즘 연락하면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는 매몰찬 형이지만, 마음은 따뜻한 것 같아요. 윤재 형은 제 은퇴 소식이 전해지자 장난으로 축하 메시지를 보내더라고요. 한동안 잘 못 봤지만, 이재훈 코치님을 비롯해 전 CJ 엔투스 선수들에게 연락하려고 해요.

경기는 구 CJ 엔투스 시절에 아주부 프로스트와 만났을 때, 이번 롤챔스 스프링 시즌 플레이오프에서 SKT T1과 대결이 기억나네요. 그 경기에서 승리했으면 인생이 바뀌었을 거로 생각해요(웃음). 당시 장경환 선수의 마오카이를 무시하고 억제기와 넥서스를 파괴했으면 승리했을 것 같은 아쉬움이 드네요.


Q. 이제 많은 부담을 내려놓을 수 있어요. 앞으로의 계획은 무엇일지 궁금하네요.

리그 오브 레전드로 개인 방송을 시작할 거예요. 자리가 잡히면 다양한 게임에 도전하려고요. 팬들과 소통하는 게 아직 많이 쑥스럽지만, 댓글은 다 읽어드릴게요. '클린'방송, 열심히 하는 모습 보여주고 싶어요. 강력한 저녁 BJ들을 피해 22일부터 오후 2-3시 정도에 할 예정이에요(웃음).


Q.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지금까지 제 생활과 멘탈을 관리해주신 감독님과 (손)대영이 형, (정)제승이 형, 이재훈 전 코치님에게 감사드린다고 말하고 싶어요. 강현종 감독님이 저를 정말 많이 믿어주셨는 데, 보답하지 못해서 죄송하네요. 감독님이 열심히 연습하는 CJ 엔투스 팀원을 믿어준 것인데, 나쁜 말이 나와서 안타까워요. 대영이 형도 새벽까지 밴픽을 연구했어요. 제승이 형은 들어온지 얼마 안됐지만, 능력이 있어서 처음 시작하는 팀으로 갔으면 굉장히 잘 됐을 것 같아요. 이재훈 코치님은 제가 프로로 활동할 수 있도록 도와준 분이라 굉장히 감사해요. 2015 시즌에 CJ 엔투스에서 함께 활동했던 팀원들도 앞으로 잘 됐으면 좋겠어요.

마지막으로 프로게이머에게 악플은 달지말아줬으면 해요. 매판마다 평판이 바뀌는 데, 실수 한 번했다고 심한 말을 하는 것은 잘못됐다고 생각해요. 프로게이머로 활동하기 위해 정말 열심히 노력하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