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진출.

예전에는 해외 시장으로 진출하는 일이 매우 어려운 프로젝트 중 하나였다. 언어도 문화도 전혀 다른 국가에서 비즈니스를 전개해야 하기 때문에 그들을 잘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무엇을 원하고 어떠한 마케팅과 홍보 전략을 선호하는지 등 말이다.

지금은 영어 및 제 2외국어 능통자도 많아졌고 해외 진출 사례가 축적되면서, 많은 이들이 해외 진출에 대한 노하우를 기반으로 손쉽게 진출하고 있다. 나아가 인터넷의 발전으로, 물리적으로 해외 지사를 설립하지 않더라도 해외 비즈니스를 전개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고민해야 할 부분은 남아 있다. 당장 내일부터 미국 시장에 진출한다고 생각해보자. 그 넓은 땅덩어리 어디에 사무실을 세울 건지, 어떤 멤버와 함께 진출해야 하는지, 적용되는 법은 한국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 등 많은 부분에서 생각해야 한다. 진출한다고 하더라도 성공하리란 보장도 없다.

그렇기에 반드시 미국 시장을 잘 알고 있거나 미국 진출 경험을 보유한 사람에게 조언을 구해야 한다. 하지만 대형 기업 외에 스타트업들이 법률 자문을 구하는 건 비용적인 측면에서 부담이 된다. 그렇다고 글로벌 진출 전문가를 따로 섭외하는 것도 어렵다.

이런 스타트업들을 도와주기 위한 사람이 있으니, 바로 경기창조경제혁신센터 임동욱 부장이다. 그는 경기혁신센터에서 미국으로의 진출을 희망하는 스타트업들에게 다방면으로 도움을 주고 있다. 물론 '공기관 소속 담당자가 도와줘봤자 형식적인 이야기에서 그치겠지'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임동욱 부장은 철저히 '실무 중심의 관계자'이다.

대학생 시절 그는 스코틀랜드의 게임 퍼블리셔인 '디지털 브릿지'의 한국 지사를 설립해 운영했다. 이후 IBM 신사업 팀에서 근무하다가 미국으로 넘어가 컴투스 미국 지사장으로 활동했다. 약 7년간 미국에서 생활하면서 엄청난 인적 네트워크를 구축했고, 현재 많은 기업의 한국 지사 설립 및 한국 시장 진출에 도움을 주고 있다. 실제로 블루스택스, 코차바, 닌자메트릭스, 캐시플레이 등 여러 게임과 IT 관련 기업의 한국 지사 설립에 자문위원으로 참여했다.

흥미가 생겼다. 과연 그는 어떠한 경험을 해왔고, 어떻게 7년간 미국 시장에서 활동하면서 컴투스를 이끌었을까? 경기창조경제혁신센터를 방문해 임동욱 부장을 만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2시간동안 이어진 그의 이야기는 흥미진진했다.

▲ 경기창조경제혁신센터 임동욱 부장


※질문/답변 형식의 인터뷰가 아닌, 한 사람의 경험담을 시간순으로 작성했으니 참고 부탁드립니다.



■ 1st: 게임업계로의 첫 발걸음


▲선발대 도전은 실패했지만 소중한 기회를 얻은 임동욱 부장(※ 해당 이미지는 참고용입니다)

대학생 시절, 임동욱 부장은 LG에서 주최한 이벤트 'LG 21세기 선발대(현 LG 글로벌 챌린저)'에 도전했다. '21세기 선발대'란 대학생들이 모여 조사하고 싶은 주제 및 탐방 국가를 정하고, 이를 위해 팀을 꾸려서 활동하는 프로젝트이다. 선발된 팀은 LG의 지원을 받아 원하는 국가를 탐방하면서 자유롭게 조사할 수 있는 것이다.

그가 선정한 프로젝트 주제는 '모바일 인터넷'이었다. 그가 대학생일 때는 스마트폰이 아닌 피처폰 시대였고, 인터넷도 매우 제한적으로 이루어졌다. '왑(WAP)'이라는 텍스트 기반의 서비스는 있었지만, 대중화되어 있지는 않았다. 하지만 해외에서는 모바일 인터넷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는 상태였다.

그래서 노키아나, 에릭슨, 모토로라와 같은 기업을 방문하고자 했고, 유럽 시장 중심으로 회사 탐방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결과는 '탈락'이었다. 프로젝트에 합격하지 못해 외국 기업 탐방은 물 건너 갔지만, 아쉬운 마음에 그는 탐방 후보였던 스코틀랜드 게임 퍼블리셔 '디지털 브릿지(Digital Bridges)'에 개별적으로 연락을 취해보았다.

"귀사를 방문하고 싶었지만 다른 일정과 겹치면서 방문이 어렵게 되었다"라고 메일을 보낸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한국 게임시장에 대한 간단한 소개와 더불어 컴투스와 게임빌 등이 수많은 모바일 게임을 출시하고 있음을 알렸다. 나아가 삼성과 LG 핸드폰의 스펙도 빠르게 발전하고 있다는 내용도 함께 소개했다. 그러면서 마무리 멘트로 "이런 한국에서 너희가 비즈니스를 해보는 건 어떻겠냐"라고 가볍게 제안했다.

이후 디지털 브릿지 대표로부터 "더 자세한 내용을 담은 보고서를 보내달라"고 답변을 받게 된다. LG 프로젝트는 탈락했지만 '까짓꺼 대학교 개인 리포트 하나 더 쓴다'라는 생각으로 그는 한국 게임시장 조사에 착수했다.

보고서를 보내고, 며칠 후,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발생했다. 스코틀랜드에 한 번 오라는 답변을 받은 것이다. 형식적인 인사말인지 진심인지 헷갈렸던 그는 여러 번 "농담하는거야?"라고 보냈지만, 돌아오는 답변은 'I'm serious(난 진심이야.)'였다.

스코틀랜드에 오라는 건 즉, 면접을 진행해보자는 이야기였던 것이다. 그렇게 그는 왕복 항공기 티켓과 호텔 숙박권을 들고 비행기에 올라탔다. 처음 가보는 유럽, 처음 경험해보는 비즈니스 미팅이었기에 떨렸지만, 양복도 까먹지 않고 캐리어에 잘 접어서 넣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일이 또 발생했다. 이번에는 부정적으로 말이다. 그의 캐리어를 담은 컨테이너가 영국이 아닌 프랑스로 향해버린 것이다.

그래서 정성스레 챙겨온 양복은 캐리어에 넣어두고 그는 청바지와 반팔 차림으로 비즈니스 미팅에 참석하게 된다. 성공적으로 발표를 마친 그는 대표로부터 질문을 받게 된다. "Do you want a job? (취업을 원합니까?)"라고 말이다. 한국에서 1인 지사가 되어, 사업 활동도 하고 한국 시장 분석도 해달라는 요청이었다. 그렇게 그는 디지털 브릿지 코리아(Digital Bridges Korea)를 설립하게 되었다.


■ 2nd: '디지털 브릿지' 한국 지사장으로서의 생활


그는 낮에는 대학교에서 수업을 듣고, 저녁에는 삼성동 무역센터 28층에 있던 비즈니스 센터에서 일했다.

"무역센터 28층에 비즈니스 센터가 있었어요. 저처럼 1인이 회사를 운영하거나 해외 기업들이 한국에 소규모로 지사를 설립할 때 활용되는 곳인데요. 일정 비용을 내면 명함을 만들어줘요. 센터에서 일하는 분이 비서가 되는 것이죠. 우리 회사를 찾는 전화가 오면 "지금 자리에 안계신다"라고 대신 말해주죠. 주소도 있고 비서도 있어서 외부에서 보기에는 어엿한 사무실로 보이거든요.

어찌되었든 간에 혼자서 지사를 운영해야 했기에 초반에는 대학교 생활을 정상적으로 할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한 학기 휴학을 했죠. 총 1년 반 동안 그 회사에서 일했는데요. 그 당시 100억 원 이상 투자를 받았었어요. 2002년에 제 월급이 300만 원 정도였습니다. 학생 때 300이면 굉장히 큰돈이었죠.

하지만 저도 대학교 졸업을 해야 했고, 혼자서는 너무 벅찼어요. 낮에 영업을 뛰고 밤에 버그 테스트를 하다 보니 너무 힘들었거든요. 그래서 기술지원 1명을 추가 채용하고 법인을 설립해달라고 요청했어요. 그런데 본사에서는 투자받은 100억을 다 날렸고 더는 아시아에 투자할 돈이 없다고 하더라고요"


그렇게 디지털 브릿지 한국 지사는 끝이 났다. 이후 그는 IBM 신규 사업팀에 경력직으로 입사하게 된다. 제품으로 나오지 않은 것들을 개발하는 신사업 부서에서 여러 연구를 진행했다. 그러던 어느 날, 예전부터 알고 지냈던 컴투스 박지영 전 대표로부터 미국 지사장 자리를 제안받게 된다. 하지만 선뜻하겠다고 말하기에는 현실적으로 고민할 부분이 많았다.

▲현재 구글이나 애플과 마찬가지로 대학생들의 로망이었던 IBM

"아이가 태어난 지 얼마 안 됐을 때였어요. 대략 3~4개월 째였죠. 야간대학이긴 했지만 MBA 과정도 밟고 있었고요. 그리고 그 당시 IBM은 대학생들이 선호하는 기업 중 하나였어요. 회사 내에서의 제 평가도 좋은 편이었기에 이직을 하는데 있어 망설임이 있었어요"

하지만 그는 강영우 박사를 보고 이직을 결심하게 된다. 강영우 박사는 한국계 최초로 미국 백악관에서 차관보로 활동한 인물로, 미국에서 거주하는 한국인 중 가장 높은 상류층까지 올라간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시각장애가 있었지만, 이러한 역경을 딛고 정책차관보와 더불어 종교, 사회봉사부문 자문위원으로 지냈다.

그의 업적을 보며 임동욱 부장은 문득 자신이 부끄러웠다고. 단순히 IBM과 컴투스의 스펙만 놓고 비교하던 모습이 너무나 초라해보였다고 한다. 이후 그는 미국행 비행기에 올라타게 된다.


■ 3rd: 컴투스 미국 지사장 라이프


모든 일이 생각한 대로 풀리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미국에 가자마자 서브프라임 모기지(Subprime mortgage) 사태가 발생했고, 2007년부터 경기가 안 좋아지면서 여러 회사가 문을 닫았다. AT&T와 버라이즌도 이 시기에 관리 대상 게임사를 기존 50~100개에서 10개로 줄였다.

당시 컴투스는 15~20위 사이에 머물러 있었다. 그래서 통신사로부터 "게임은 재밌지만 안타깝게도 더 이상의 파트너 계약은 힘들다."는 답변과 함께 일방적으로 해지 통보를 받았다. 게임빌은 아직 해지 통보를 받지 않은 상태였다.

앞으로도 어쨌든 컴투스 게임을 퍼블리싱 해야 하는데, EA나 글루같은 외국 기업보다는 한국 기업에 제공하는 것이 더 낫다고 그는 판단했다. 그래서 AT&T 에 "아시아 개발사가 한 곳쯤은 남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그래야 한국의 좋은 게임들이 미국에 잘 소싱될 수 있다."라고 제안함으로써, 게임빌이 11번째 기업으로 리스트에 남을 수 있었다.

이후 컴투스는 게임빌에게 '미니게임천국' 등의 게임을 제공했고, 게임빌의 이름을 달고 미국시장에서 서비스될 수 있었다. 함께 했던 개발사들이 하나 둘씩 힘들다며 한국으로 돌아갔고, 컴투스 역시 사정이 좋지않아 힘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2008년에 GDC(게임개발자컨퍼런스)에 나가면서 컴투스는 다시 기사회생하게 된다. GDC 강연이 컴투스의 전환점이 될 줄은 그 누구도 몰랐을 터.


"2008년도 GDC에서 부분유료화에 대해 발표를 한 적이 있었는데요. 한국에서는 피처폰 시절부터 있었지만, 미국에는 아직 부분유료화 모델이 없을 때였죠. GDC 강연에서 저희는 실제 데이터를 공개했어요. 저희가 서비스했던 3개의 게임에 대해 분석하고, 실제 앱에서의 매출과 인 앱 아이템 매출 등의 수치를 보여주었습니다.

아시겠지만 게임사들이 발표할 때 구체적인 매출액이나 금액에 대해서는 잘 공개하지 않아요. 하지만 저희는 다 공개했습니다. 이런 점이 참석자들에게 상당한 이슈가 됐어요. 많은 업계 관계자들이 강연을 들었고, 그 중에는 AT&T와 디즈니 담당자도 있었죠.

GDC 이후 디즈니 담당자로부터 "한국 회사랑 일하고 싶다"고 연락이 왔어요. 그래서 미팅차 미국 캘리포니아 주 버뱅크에 있는 월트 디즈니 회사를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형식적인 미팅이라고 생각했고, '다음날 한국 가야지'라는 생각으로 별 마음없이 발걸음을 향했어요.

그런데 놀랍게도 디즈니에서 사업 제안을 해오더라고요. 컴투스 게임을 디즈니 브랜드로 바꿔서 서비스하자고 말이죠. '템플런'에 디즈니 IP를 입혀서 미키마우스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식으로 말입니다. 피쳐폰 시절에 이런 식으로 기존의 게임 형태에 특정 IP 캐릭터만 입혀서 리브랜딩하는 형태는 컴투스가 최초였어요.

일반적으로는 디즈니의 라이센스를 게임사가 사서 게임을 만들고 이를 통신사에 파는 형태인데요. 저희는 계약을 거꾸로 했어요. 저희 게임을 디즈니에 주고 컴투스가 로열티를 받았죠. 아마 게임사가 디즈니한테 돈 받고 게임을 제공한 사례는 저희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을 거에요. 이 건으로 저희는 법인을 미국에서 빼지 않고 사업을 이어갈 수 있었습니다"


2008년 9월에 계약을 했고, 11월에 디즈니IP를 활용한 첫 게임으로 '디즈니 퍼즐 패밀리'가 출시됐다.

▲디즈니 퍼즐 패밀리

이후 그는 버라이즌에 다양한 게임을 제공하고 싶어서 담당자와 연락을 시도했지만 연결이 계속되지 않았다. 컨택이 안되는 이유가 따로 있었다. 2002년에 컴투스가 버라이즌 측에 게임 10여 개를 제공하기로 약속했는데, 컴투스가 유럽시장에 올인하면서 약속을 못 지킨 것이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연락을 할 수 있을까 그는 끊임없이 고민했고, 마침 버라이즌 소속 게임 담당자가 한 모바일 컨퍼런스를 방문한다는 이야기를 접하게 된다. 그래서 그는 컨퍼런스에 참여해, 그곳에서 선임 담당자와 직접 인사를 나누며 명함을 교환했다.

메일을 보내도 답변이 없던 담당자에게 다시 메일을 보냈다. "당신 매니저를 만났다"라고 말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담당자로부터 "내일 통화하자"라는 답변을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다음날 통화를 마치고 그는 곧바로 버라이즌과 3개의 게임을 계약했다.

지금은 개인이 스토어에 게임을 올릴 수 있지만, 당시에는 이동통신사 담당자가 게임을 시스템에 넣어야 스토어에 등록이 되었다. 같은 종류의 게임이라도 통신사가 올려주느냐 아니냐에 따라 매출은 천차만별이인 셈이다. 컨퍼런스에서 안면을 튼 이후, 컴투스는 버라이즌과의 업무도 원활하게 진행할 수 있었다.


■ 4th: 피쳐폰에서 스마트폰으로의 변화


▲생태계를 바꿔놓은 아이폰

아이폰이 2007년도에 등장했고, 2008년 7월에는 앱스토어가 열렸다. 당시에는 앱스토어에 대해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이들이 많았다. 심지어 디즈니 임원도 "콘텐츠 사업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애플은 실패할 거다"라고 언급했다고 한다.

2008년은 그야말로 과도기였다. 스마트폰용 콘텐츠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지던 시기였기에, 스마트폰 게임을 어떻게 만드는 것이 좋은지 아는 사람이 없었다. 유니티와 같은 엔진도 없었고, 애플이 제공하는 툴만 사용해서 제작해야 했기에 개발자들에게 있어 진입 장벽도 높았다. 나아가 스마트폰 보급률도 지금과는 달리 높지 않았기에, 게임을 만들어도 판매량에는 한계가 있었다.

당시 스마트폰 게임은 평균 10달러(한화 약 12,000원)였다. 부분유료화 게임이 많은 지금 시점에서 보면 다소 비싸게 느껴지기도 한다. 10달러나 하는걸 누가 많이 사겠나 싶겠지만, 한 번 공개된 게임은 상당히 높은 수익을 거뒀다고 한다. 가령 스티브 잡스가 발표에서 '슈퍼몽키볼'을 선보였는데, 이 게임은 하루 만에 수십 억 원을 기록했다고.

피쳐폰 게임으로도 높은 수익을 거둬들이던 때였지만, 컴투스 본사에서는 "지금이 오히려 기회다."라고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내부에서도 스마트폰 게임 개발을 나서서 하려는 PD가 없었어요. 담당 프로젝트가 잘 되면 인센티브를 받는데, 누가 불확실하고 위험 요소가 많은 분야로 선뜻 가려고 하겠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개발자들이 도전을 했는데요. 그 중 한 명이 싱타 임준석 이사님이에요. 컴투스에서 타이니팜, 이노티아 연대기 등을 개발한 분인데, 피쳐폰 게임을 스마트폰으로 포팅하는 작업을 했죠. 2008년 12월에 출시해 7.99달러로 판매를 했는데요. 별도의 마케팅을 하지 않고도 게임 카테고리에서 1등을 했어요"

이후 컴투스는 피쳐폰 게임이었던 '홈런배틀'을 3D로 구현해 스마트폰으로 포팅하기도 했다. 지금은 당연한 부분이겠지만, 안드로이드와 iOS 폰끼리 서로 연동하는 게임이 없던 때, 컴투스는 이를 연결하여 함께 게임을 할 수 있는 환경을 구축했다. 당시 구글플레이 스토어는 후발주자였고, 크로스 플랫폼 지원은 구글에게 있어 상당히 매력적이었다.

그래서 그 당시 컴투스와 구글의 관계는 상당히 좋았다고 한다. 이에 구글은 세계 최대 모바일 박람회인 'MWC(모바일월드콩그레스)'에서 자사의 부스 내 한편에 컴투스의 부스를 만들어주기도 했다고. 게임사 이름을 걸고 독립부스로 MWC에 들어간 건 컴투스가 처음이었다.

2011년에는 카카오 플랫폼이 급속도로 인기를 얻었고, '애니팡' 신화 때문에 게임사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카카오를 통해 게임을 서비스하려고 했다. 컴투스 역시 이에 대해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내부적으로 '골프스타'를 카카오로 내자는 의견이 제기됐다.

▲국내 시장 생태계를 바꿔놓은 카카오


그러나 임동욱 부장의 시각에서 카카오는 국내용 플랫폼의 느낌이 강했으며, 골프 시뮬레이션 게임에는 맞지 않는 것으로 다가왔다고 한다. 당시 해외 시장에서의 성적도 좋았고 말이다. 이러한 게임을 카카오로 출시하는 것이 과연 옳을까에 대해 그는 많은 고민을 했고, 카카오 출시를 반대했다. 컴투스의 독립성을 포기하는 꼴이 될 수 있기에 카카오 플랫폼을 채택하지 않는 것이 최선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몇 개의 게임은 카카오로 나오긴 했어요. 하지만 '골프스타' 게임을 계기로 해서 다시 유턴했죠. 회사에서는 정말 중요한 결정이었어요. 컴투스가 모바일게임 플랫폼 '하이브'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그걸 포기하고 카카오로 가는 것 같아 반대했어요. 미국 법인이 아니라 본사 차원에서도 굉장히 치명적이라고 생각했고요. 그래서 결국 카카오와의 계약을 파기하게 되었습니다"

'타이니팜'을 탈 카카오로 서비스했고, 카카오에서 벌 수 없었던 매출 그 이상을 벌었다고 한다. 수익도 올리고 자사 브랜드도 더 알릴 수 있었으며, DB도 컴투스 것이었기에 종합적인 성과는 만족스러웠다고. 이후 컴투스는 '컴투스 하이브'로 게임을 출시했고, 게임빌과 통합되면서 이는 더욱 시너지를 내고 있다고 그는 말했다.


■ 5th: 미국 진출 경험에서 우러난 조언/팁


▲미국에 있는 한국회사가 아니라 미국 회사처럼 인식되게 만드는 것이 목표

미국에 가서 생활을 하는데는 적응 시간이 필요하다. 말도 배워야 하고 그 지역만의 문화를 익혀야 하기 때문이다. 개인이 특정 문화에 적응하는데도 상당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데, 하물며 회사는 어떨까. 하나의 기업이 해외로 진출하여 그곳의 문화에 적응하는데는 개인 단위 이상의 노력이 들 것이다. 단순히 물리적으로 해외에 거점을 두는 것에서 그치는게 아니라, 공동체를 형성해 가야 하기 때문이다.

"제가 미국에서 회사를 운영하며 추구했던 바는 '미국에 있는 한국회사'가 아니라, EA나 카밤처럼 '그냥 미국회사로 인식되는 것'이었습니다. 그게 제 꿈이기도 했고요. 그래서 PM이나 GM을 뽑을 때도 단순히 영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이 아니라, 현지인이 답변하는 듯한 수준으로 구사할 줄 아는 사람들 중심으로 보았어요"

나아가 그는 미국에서 사업을 전개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7년은 각오하고 와야 한다고 말했다. 1~2년 동안은 적응기이며, 3~4년부터 본격적으로 사업을 전개하고, 6~7년 정도는 되어야 미국 문화에도 적응하고 사업도 본궤도에 오른다는 것이다.

컴투스 미국 지사장 자리에서 물러나 한국으로 귀국한 그는 그동안 구축했던 인맥을 활용,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 원하는 사람들을 매칭시켜, 비즈니스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돕고 있다. 하지만 개인적인 입장에서 도움을 주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고. 그래서 그는 경기창조혁신센터 글로벌 코디네이터 제안을 받았을 때 선뜻 승낙을 했다고 한다.

두 시간에 걸쳐 그는 자신의 20대와 디지털 브릿지 한국 지사, IBM 그리고 컴투스 미국지사를 거치며 경험했던 바와 느꼈던 점에 대해 진솔하게 털어놓았다. 이야기를 끝맺으면서 그는 미국 시장 진출을 희망하는 사람들에게 있어 '인맥 네트워크'가 대단히 중요함을 강조했다.

"2007년 GDC에 갔을 때 징가에서 개최한 파티에 참석했어요. 미국에 넘어간 지 약 3개월 째 되던 시기였습니다. 나름 큰 규모의 파티였는데 아는 사람도 없고 아무것도 몰랐죠. 그래서 우리끼리만 뭉쳐서 술를 마셨어요. 그러니 분위기가 좋다고 느낄 수가 있겠습니까. 이건 아니다 싶었어요. 그래서 적극적으로 많은 사람들과 만났고, 링크드인을 활용해서 네트워크를 구축해갔어요. 지금은 1촌으로 등록된 사람이 2천 명가량 됩니다.

미국에 갔을 당시에는 많은 사람들을 빨리 아는 것에 중점을 두고 사람을 사귀었어요. 하지만 지금은 조금 다르게 생각하고 있어요. 많이 아는 것도 좋지만, 얼마나 그 사람과 깊이 아는가가 더욱 중요한 것 같아요. 한 명을 만나도 깊이 알고 만나는 것이 더 건설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깊이 알면 새로운 일이 발생할 가능성이 높아지니깐요"


※ 2부에서는 스타트업 전도사가 된 임동욱 경기창조경제혁신센터 부장의 이야기를 다룰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