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블리자드 게임의 팬들의 한 해를 장식할 축제인 블리즈컨. 히어로즈 오브 더 스톰(이하 히어로즈) 역시 2016년의 마지막을 장식할 만한 최고의 경기가 나왔다. 우승을 차지한 발리스틱스의 흠잡을 곳 없는 경기력 외에도 특유의 유럽 스타일로 MVP 블랙을 꺾고 올라온 프나틱마저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그들만의 운영으로 세계를 놀라게 했다. 히어로즈는 스프링 시즌부터 한 단계씩 발전했고 어느새 생각지도 못한 수준의 경기 양상이 펼쳐지고 있었다.

작년 블리즈컨과 확실히 달라진 2016 히어로즈. 매 시즌 '역대급'이란 말을 갱신하며 최고의 경기력이 나오기까지 어떤 과정을 걸어왔을까.


■ 포지션 형식적인 것? '투잡' 이상 해내는 히어로즈 멀티플레이어들

▲ 영원할 줄 알았던 MVP 블랙의 시대


한국의 '축구 영웅'이라고 할 수 있는 박지성은 뛰어난 영국 프리미어리그를 비롯해 세계무대에서 인정받았다. 튼튼한 기본기를 바탕으로 다양한 포지션을 소화해낼 수 있는 멀티 플레이어였기 때문이다. 그라운드 위에 있는 박지성은 상대를 일대일 마크를 할 수도, 언제 침투할지 모르는 까다로운 '변수 그 자체'였다. 포지션을 넘나드는 제라드, 박지성과 같은 선수를 보유한 팀은 그만큼 다양한 전술과 스타일을 활용할 수 있기에 상대하는 입장에서 대비하기 까다로울 수밖에 없었다.

히어로즈 역시 많은 선수가 다양한 역할군을 소화해내며 예상을 뛰어넘는 경기 양상이 나오기 시작했다. 스프링 시즌만 하더라도 맡은 포지션에 전문성을 갖춘 MVP 블랙이 2016 시즌을 지배할 거라 생각했다. 다른 AOS 장르와 다를 바 없이 역할에 맞게 운영만 잘하면 승리하는 '뻔한 게임'이 될 것만 같았다. 하지만 MVP 블랙의 아성은 바로 다음 시즌 결승전에서 무너졌다. 그것도 슈퍼리그 시작부터 주 포지션을 정하지 못하고 패자전으로 떨어졌던 전 템포스톰 팀에게 4:0이라는 압도적인 스코어로 말이다.

▲ 형식적인 포지션을 버리고 시즌2 제패한 전 템포스톰

가장 큰 이유는 MVP 블랙의 예상을 뛰어넘은 템포스톰의 포지션 변경이었다. 이전까지 특정 한 두 영웅만 잘 다룰 것 같았던 템포스톰의 팀원들은 포지션 변경도 모자라 영웅 폭까지 넓혀 결승전에 임했다. 특히, 국내에서 손꼽히던 근접 딜러였던 '락다운' 진재훈이 많은 이들의 편견을 깨고 원거리 딜러로 자리 잡았고 동시에 '다미' 박주닮이 근접 딜러를 맡았다. 밴 카드 한두 개로 포지션까지 넘나드는 두 선수의 영웅 폭을 감당하지 못하고 그대로 무너진 것이다.

템포스톰이 제시한 변화는 히어로즈의 수준을 한 단계 더 끌어올렸다. MVP 블랙의 '리치' 이재원이 고정적이었던 근접 포지션 대신 전문가인 메디브로 슈퍼리그 시즌3와 글로벌 챔피언십 폴에서 각각 템포스톰과 프나틱을 상대로 승리를 따내는 모습을 보여줬다. 올라운더의 전유물과 같았던 지원가 태사다르는 어느새 근접 딜러와 탱커를 주로 맡는 선수들이 활용하고 있었다. 글로벌 챔피언십 폴 시즌 결승전에서 '정하' 이정하와 프나틱의 'Wubby'가 결승 무대에서 태사다르를 선택해 승리한 바 있을 정도로 포지션에 얽매이지 않았다.


포지션 변경 전후를 오가는 'sCsC' 김승철의 영웅 선택은 더욱 놀라웠다. 한 시즌 동안 원거리 암살자로 주로 활동했지만, 슈퍼리그 시즌3 결승전에서 대세 딜러인 발라를 내주고 김승철이 근접 전사인 티리엘을 꺼내 들었다. 상대는 당연히 안정적으로 딜하는 김승철의 모습을 떠올렸겠지만, '정하-노블레스'와 함께 달려드는 조합에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글로벌 챔피언십 폴 시즌 결승에서도 첸을 활용하며 녹슬지 않은 근접 영웅 활용을 이어갔다. 발리스틱스는 다양한 포지션을 넘나드는 김승철이 있기에 상대의 허를 찌를 만한 무기를 하나 더 보유한 셈이었다.

'스워이' 김승원 역시 전사에서 지원가로 포지션을 바꾸면서 많은 이들의 우려를 경기력으로 불식시켰다. 한때 좁은 영웅 폭이 약점이라고 지적받았지만, 어느새 메타에 맞는 최신 지원가를 가장 센스있게 다룰 줄 아는 선수가 됐다. 프나틱과 결승전 2세트는 김승원이 만들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말퓨리온으로 상대의 손발을 확실히 묶어버렸다. 한 명이 끊긴 위기 상황에서 도망치는 순간. 상대가 들어오는 타이밍을 정확히 예측해 '황혼의 꿈'으로 반격을 시작했다. 핵 앞에서의 마지막 교전에서 아껴뒀던 '휘감는 뿌리'를 침착하게 활용하는 모습에 국내 해설진들이 감탄을 금치 못했다.

다양한 역할을 소화해내거나 포지션을 변경하는 것은 분명 위험이 따른다. 성적으로 말하는 프로에게 포지션 변경은 핑곗거리가 될 수 없을뿐더러 다양한 플레이 스타일을 구사해야 하기에 더 많은 노력을 깃들어야 한다. 하지만 팀에 힘을 보태기 위해 맞지 않는 옷을 입고 경기에 나서는 그들이 있었기에 히어로즈의 수준은 한 걸음 더 나아갔다. 매번 새로운 조합과 그에 맞는 운영이 등장하면서 다양한 경기 양상을 기대할 수 있게 된 것이다.

▲ 영상이 끝날 때까지 지원가 '스워이' 캐리는 멈추지 않는다




■ 신입들 현장에 바로 투입시켜! 단조로움 깨뜨릴 신선한 신 영웅과 '핵전쟁'


초창기 히어로즈 e스포츠 경기의 밴픽 구도를 보면 단조로웠다. 'OP'라고 불리는 영웅을 먼저 가져오거나 밴하는 게 일상이었고, 매번 나오는 영웅만 나온다는 지적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맵 역시 교전에서 상대를 완파하고 중요한 오브젝트를 차지해 승리한다는 단조로운 공식을 잘 지키는 곳일 뿐이었다.

하지만 이번 글로벌 챔피언십 폴 시즌은 확실히 달랐다. 선픽으로 지원가부터 탱커-딜러까지 다양한 픽이 등장했고, 컨셉이 확실한 맵마다 색다른 조합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렉사르와 같았던 영웅은 새롭게 출시되고도 자신이 활약할 무대를 찾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최근 새롭게 추가된 영웅들은 최근 경기에 바로 투입돼 자신들의 존재감을 세계 히어로즈 팬들에게 알렸다.

게이머의 능력에 따라 천차만별이라는 알라라크는 슈퍼리그 시즌3 결승전부터 등장했다. '리치' 이재원이 첫 경기부터 꺼내 발리스틱스의 허를 찔렀고, 글로벌 챔피언십 폴 시즌 8강 승자전에서도 상대를 한 방에 '침묵' 시켜버리며 일방적인 학살을 이어갔다. 그동안 알라라크를 선보이지 않았던 발리스틱스의 이정하 역시 디그니타스를 상대로 4강전에서 꺼내 들었다. 디그니타스가 8강 최종전 같은 맵에서 활용한 바 있기에 상대 전략을 빼앗아오는 밴픽까지 나온 것이다.

▲ 프나틱의 메디브는 대량 학살 '전문가'?

메디브는 활용 방식까지 다양했다. MVP 블랙이 파멸의 탑의 운영으로 승승장구하며 나름 메디브 운영을 자부해왔지만, 프나틱의 기이한 활용에 오히려 당황하고 말았다. MVP 블랙을 상대로 메디브를 고른 프나틱은 한국에서 잘 볼 수 없었던 제이나까지 더 해 괴이한 연계 플레이를 선보였다. 메디브의 '봉인의 지맥'에 발 묶인 MVP 블랙은 단체로 제이나와 ETC의 광역 궁극기에 갇혀 '유럽산 지옥'을 맛본 것. 데하카와 메디브 같은 픽을 중심으로 MVP 블랙의 예상 범위를 완전히 벗어났다.

결승전은 시작 전부터 두 팀의 에이스라고 할 수 있는 탱커 대결이 주목되는 상황. 1세트부터 무라딘-ETC를 선점하고 상대 픽을 밴하는 구도가 이어졌다. 그런 가운데 거의 모습을 볼 수 없었던 자리야가 등장해 새로운 구도를 암시했다. 비록, 자리야를 꺼낸 프나틱은 패배했지만, 분명 활용할 만한 가능성이 보였기에 기용했을 것이다. 그 밖에도 브락시스 항전에서 밴 카드로 떠오르며 새로운 밴픽 구도를 형성한 '고인' 렉사르, 폴스타트-빛나래와 함께 합류전 구도의 새로운 장을 연 데하카까지 픽과 조합을 통해 다양한 경우의 수가 펼쳐지고 있다.

▲ 터미네이터 게임판? 핵속으로 뛰어들어가는 발리스틱스-프나틱

신규 맵 역시 전투 구도를 더욱 치열하게 만들었다. 핵탄두 격전지에서 열린 프나틱과 발리스틱스의 결승전 3세트는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전투가 이어졌다. 머리 위로 핵탄두가 쏟아지는데, 우두머리를 가져가기 위해 몸부터 들이밀어야 하는 아찔한 상황. 기술 활용 1초 차이로 격차가 벌어지는 와중에 끝까지 침착한 자가 승리했다. 오브젝트와 우두머리를 차지하기 위해 조금이라도 욕심을 부리면 순간 역전에 재역전이 나오는 전장이었다. 메인 딜러가 부족해보인 프나틱의 밴픽은 의아했지만, 기동성이 좋은 폴스타트와 트레이서가 핵 전쟁 속에서 살아나가며 밴픽의 이유를 몸소 설명해줬다.

그동안 히어로즈를 향한 시선들은 곱지 않았다. 맵과 영웅이 업데이트되더라도 비슷한 양상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인식이 팽배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 블리즈컨을 시작으로 히어로즈만이 보여줄 수 있는 양상이 확실히 드러나고 있다. 신규 맵과 영웅이 바로 등장해 새로운 그림을 완성했고 전 세계 프로게이머들이 자신들만의 스타일로 소화해내면서 예측하기 힘든 장면들이 속출했다.



■ 엇갈리는 중국-유럽의 분위기? 2017 해외 히어로즈 살아날 수 있을까


히어로즈는 2016년 한 해 동안 끊임없이 변해왔다. 매 시즌 변화의 흐름에 따라 최강자도 바뀌었다. 비록, 한국의 세 팀이 글로벌 챔피언십을 우승했지만, 마지막에 프나틱이 보여준 특유의 경기력은 해외팀의 기량도 만만치 않게 올라왔음을 시사했다. 특히, 유럽의 프나틱은 이번 블리즈컨을 통해 자신들의 기량을 제대로 알리는 기회를 잡았다.

준우승을 차지한 프나틱의 스타일은 쉽게 정의할 수 없을 정도로 변칙적이었다. 한국팀이 생각하지 못한 영웅을 활용할 뿐만 아니라 운영 방식마저 다양했다. 어떨 때는 포탑 뒤에 숨어서 기회만 엿보다가 먼저 교전을 열고, 안정적인 스타일을 유지하다 난전 속으로 뛰어들기도 했다. 스타일이 일관되지 않기 때문에 단기 대회에서 만난 상대에게 정말 까다로울 수밖에 없다. 게다가, 프나틱만의 무기로 4강 이상의 무대에서 예상을 뛰어넘는 플레이를 펼쳤다. 결승전 마지막 세트에서 김승철의 해머 상사를 빼앗고 트레이서를 열어주는 판단을 했지만, 오히려 영웅의 숙련도 차이가 나면서 준우승에 머물러야 했다. 하지만 영웅의 숙련도는 얼마든지 연습으로 극복할 수 있는 법. 한 단계 더 완벽해진 프나틱의 경기력은 절대 무시할 수 없다.

앞선 히어로즈 글로벌 챔피언십에서 활약했던 중국-미국은 아쉬웠다. 꾸준히 중국 리그에서 활약했던 EDG가 해체하고 1위를 자부하던 eStar까지 이번 글로벌 챔피언십 폴 시즌에서 몰락해버린 것. 미국 역시 대표팀이라고 할 수 있던 C9이 해체하면서 아쉬운 2016 시즌을 보냈다. 2017 HGC부터 팀 별 지원이 발표된 가운데, 글로벌 챔피언십 두 시즌 연속 4강인 중국과 2015 블리즈컨 우승으로 빛났던 미국 팀이 살아나 블리즈컨에서 되살아난다면 더 흥미진진한 양상이 열릴 것이다.

우리가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에 크게 변화해온 히어로즈는 2017 HGC를 통해 어떤 경기로 돌아올까. 2016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결승전을 보고 내년의 모습이 더욱 궁금해진다.

▲ 2017 '주모'의 영업은 계속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