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길 전철 안. 여느 때처럼 아이폰을 꺼내 트위터 어플리케이션을 실행시켰다. 간밤에 무슨 소식이 없나 보던 중 강렬하게 꽂히는 기사 제목. "PS3용 파이널 판타지 13 한글화 발표". 헉? 이게 사실이야? 클릭해서 기사 내용을 읽어보니 SCEK(소니 컴퓨터 언테테인먼트 코리아)에서 발송한 보도자료가 맞다. 설마 설마 했는데 진짜다.


솔직히 PS3용 파이널 판타지13의 한글화에는 일말의 기대도 없었다. 이전부터 XBOX용에 대해서는 한국 마이크로소프트가 인터뷰 등을 통해 그 의지를 밝혀 왔지만, PS3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었고, 심지어는 일본판 그대로를 국내에 정식 발매해 판매하기도 했다. 게다가, PS3 한정판 본체와 파이널 판타지 소프트가 함께 구성된 라이트닝 에디션까지 팔았으니 '이번에도 파판의 한글화는 물 건너 갔구나'라고 생각하는 것이 당연했다.


돌아보면, 대한민국에 파이널 판타지가 정식으로 한글화되어 출시된 적은 한번도 없었다. 파이널판타지 X, 즉 10편의 확장팩 혹은 외전 개념인 파이널 판타지 X-2가 EA 코리아를 통해 한글화되어 발매되긴 했지만, 한참 떨어지는 게임성 덕분에 고전을 겪을 수 밖에 없었다.


여기에 불법 복사가 판을 치던 그 당시 PS2의 상황이 더 해지면서, 오히려 한글화로 인해 제작사인 스퀘어-에닉스의 국내 비디오 게임 시장에 대한 신뢰를 완전히 잃게 만들었다는 일부 악평까지 받게 된다. 실제로, 그 이후로 그 어떤 플랫폼이든 간에, 국내에서 이례적으로 300만대 판매를 달성한 닌텐도DSL에서 조차 스퀘어-에닉스의 게임이 한글화되어 판매된 적은 없다.



▲ 파이널 판타지 13




사실 파이널 판타지와 스퀘어-에닉스의 게임들 뿐 아니라, 외산 비디오 게임의 한글화는 규모가 협소한데다가 불법복사가 판을 치는 국내 시장에서는 요원한 일이었다. 한번 로컬라이징 작업을 하면 수십 개 이상의 나라에 그대로 판매할 수 있는 일본어에서 영어로의 작업과 오직 대한민국 게이머에게만 판매할 수 있는 한글화 작업은 개발사가 추구하는 효용성 면에 있어 비교할 대상이 아니다. 그런데도, 비용은 둘 다 동일하다는 사실은 해외 게임사들이 한글화를 기피하게 되는 절대적인 이유가 되었다.


그렇다면 SCEK는 왜 갑자기 불현듯 파이널 판타지13의 한글화를 결정하게 됐을까? 예상컨데, 불법복사로 인해 회생의 기미가 보이지 않던 국내 비디오 게임계의 시장성이 일정 수준까지 회복됐다는 판단을 내렸기 때문일 것이다.


SCEK가 최근 한글화해서 발표했던 언차티드2, 페르소나3 포터블, 헤비레인 등의 대작 게임들이 예약 판매에서의 매진은 기본에, 정식 출시 때도 온, 오프라인 매장에서 좀처럼 구하기 힘들 정도로 날개 돋친 듯이 판매 되었던 것을 생각해보면, 게임성이 어느 정도 입증된 작품에 '한글화'라는 날개를 달아준다면 충분히 국내 비디오게임 시장에서도 수지를 맞출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 분명하다.


특히, 아직까지는 불법복사가 전혀 불가능한 PS3 하드웨어의 특성도 한 몫 단단히 했을 터. 비디오 게임 유통업을 하는 지인의 얘기를 들어보면 같은 게임이라도 PS3용과 XBOX360용의 판매량 차이는 상당하다는 설명이다.



▲ 예약 판매부터 매진 사례를 이어간 어드벤쳐 게임, 헤비 레인




이 모든 것을 토대로 한, 한글화를 진했을 때의 판매량에 대한 긍정적인 데이터를 SCEK가 보유하지 못했더라면 파이널 판타지 13 한글화의 결정권을 가지고 있는 스퀘어-에닉스를 설득하지 못했을 것이다. 파이널 판타지급라면 최소 국내 시장에서 5만장 이상의 판매는 보장해야 협상이 가능했을 것이라는 것이 업계의 관측.


현재 비디오게임 커뮤니티인 루리웹의 관련 기사에 현재 시각 기준 댓글 1500개를 돌파한 할 정도로 파이널 판타지 13의 한글화에 대한 대한민국 게이머들의 관심은 뜨겁다. 하지만, 비판적인 시선도 적지 않다.


이미 83,000원이라는 높은 가격에 일본판을 정식 출시한 상태에서 이번의 갑작스러운 한글화 발표는 기존 유저들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오직 판매에만 치중한 비즈니스적인 접근법이라는 주장이다. 추후에 한글화 계획이 결정되어 어쩔 수 없었다는 SCEK의 답변이 있긴 하지만, 일반적인 한글화 작업 기간을 고려해 본다면 일본판을 출시한 당시에 이미 한글화가 결정되었던 것으로 밖에 생각할 수 없고, 그렇다면 일본판의 판매를 위해 일부러 숨긴 것은 아니냐는 지적도 있다.


오늘 발표 이후 파이널 판타지13의 일본판 신품 및 중고판의 판매 가격도 폭락하고 있어 유저들과 비디오게임 유통업자들은 함께 손해를 떠안을 수 밖에 없는 상황에 처했다. 벌써부터 유저 장터에서는 8만원이 넘는 파이널 판타지13을 반 토막난 4만원에 판매하겠다는 글이 올라오고 있고, 단돈 1만원에 사겠다는 구입글도 상당한 편이다. 지금까지 모은 폐품과 빈병으로 교환하고 싶다는 익살스런 글까지도 등장할 정도.


비슷한 사례로 한국마이크로소프트의 출시한 블루드래곤이 있지만, 블루드래곤의 경우 사전에 한글판이 추후 출시될 거라고 발표해서 유저들에게 선택권을 부여해 주었다. 파이널 판타지13과는 전혀 다른 정책이다. SECK는 일본판을 이미 구입한 유저들에게 추후 한글 패치 또는 교환 정책이 있냐는 질문에도 아직은 확인된 바가 없다고 밝혀 논란은 더욱 증폭되고 있는 중이다.



▲ 한글판에 앞서 일본판으로 정식 출시를 이미 했다는 게 문제




실, 파이널 판타지 시리즈처럼 한국인이 유독 열광하는 RPG도 찾기 힘들다. 기존에 비디오 게임을 즐겨 하던 유저들도 유저지만, 지금은 게임을 하지 않지만 파판을 통해 유년기의 꿈과 희망을 키워온 올드 팬들도 상당 수 존재하기 때문에, 사상 최초로 파이널 판타지의 정식 넘버링 타이틀이 한글화 됐을 때 국내 비디오 게임 시장에 상당한 파급력을 가져올 것으로 기대하는 이들이 많다.


한글화 관련 보도자료에 "대한민국 비디오게임계에 길이 남을 충격적인 사건이다"라는 댓글을 보면서 잠시나마 황홀환 감상에 빠져들었던 입장에서, SCEK의 다소 부적절한 처리 방식에는 두 손을 들어 응원을 보낼 수 없더라도, 부디 파이널 판타지 13 한글판이 침체된 국내 비디오 게임 시장에 활기를 불어 넣을 수 있을만큼 크게 잘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더불어, 파이널 판타지를 시작으로 다른 비디오 게임들도 힘을 내어 온라인 게임에 과도하게 집중된 국내 게임 시장의 불균형을 조금이나마 개선해, 성공한 모델을 따라가는 데만 급급해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지닌 게임이 좀처럼 나타나지 않는 국내 온라인 게임계에도 신선한 자극을 지속적으로 제공해줬으면 하는 바람도 있다.


다시 한번 왈칵 쏟아지는 눈물을 남몰래 훔쳐낼 생각을 하니, 그것도 한글을 통해 100% 즐길 수 있다는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가슴이 설렌다. 파이널 판타지 한글화 이건 정말 대박이다. 어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