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한 화면과 시끄러운 소리, 그리고 사람들이 북적대던 곳.

가장 처음 만나본 오락실에 대한 기억이다. 어렸을 적 가족과 함께 간 나들이에서 오락실에 들렀다. 화려한 불빛이 번쩍이는 거대한 네모 상자가 여러 개 있고, 언니 오빠, 아저씨 아줌마 모두 커다란 상자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소리가 적응되고, 조명 불빛이 적응될 때쯤 보이던 것은 사람들의 표정. 어떤 사람은 집중하고 있었고, 다른 사람은 화면을 보며 같이 웃고 있었다. 누군가는 기뻐 소리 지르고, 누군가는 아쉬움에 탄성을 내뱉었다.

낯설어하는 꼬마를 위해 지폐가 얼마 없는 주머니를 열어 동전을 교환해 온 아버지는 한 상자 앞에 서게 했다. '이걸 옆으로 기울이면 움직이고, 이걸 누르면 방울이 나갈 거야.' 초록색, 파란색의 귀여운 공룡이 방울을 내뿜던 게임. 난생처음 해 본 게임이라 손놀림도 서툴고, 조작법도 제대로 몰랐다. 시작한 지 불과 몇 초가 되지 않아 게임이 끝났지만 아버지와 함께한 그 짧은 순간이 아직도 가슴속에 남아서 오락실은 '추억이 서린' 장소가 되었다.

'오락실'에 대한 추억 한두 개 없는 게이머가 있을까? 학교 빼먹고 오락실에 놀러 가서 부모님께 혼난 사연, 친구와 게임대결을 펼쳐 떡볶이를 얻어먹은 추억. 그렇게 오락실은 우리 곁에 있었다.

[ ▲ 오락실에 대한 아련한 추억 (자료출처 : 깔깔 공주들의 네버랜드 블로그)]

오락실 하면 빠질 수 없는 게임이 있다. 바로 대결격투게임.

오락실마다 그 오락실을 대표하는 격투게임계 '지존'이 있을 정도로 격투게임은 빠질 수 없는 단골 소재다. 그중에서도 '철권'은 시리즈를 이어가며 사랑받을 정도로 애정이 남다른 게임이다.

어느 오락실의 누가 잘한다더라 하는 소문이 점점 퍼져, 나중에는 그 오락실로 사람들의 발걸음이 모였다. 잘하는 사람의 게임을 곁에서 지켜보고싶어서, 혹은 그 사람과 대결하고 싶어서 등 이유도 다양했다. 그야말로 '쩔게'잘하는 고수가 모이는 게임장이 생겼다. 그 중 한 곳이 '그린게임랜드'이다. 그린게임랜드는 '철권게임의 성지'라고 불릴 정도로 철권게임을 좋아하는 게이머라면 한 번쯤은 들려봐야 할 장소가 되었다.

철권의 인기를 반영하듯이 '태켄 크래쉬(TEKKEN CRASH)' 방송 프로그램도 만들어졌다. MBC게임과 반다이남코, 연세 어뮤즈먼트, 그리고 다수의 게임장이 이에 참여했다. 3시즌에서부터는 KeSPA에서 공인 대회로 인정해 4강 이상에 오른 선수에게 준 프로게이머의 자격을 부여하기도 했을 정도로 철권의 인기는 대단했다. 게임장에서 예선을 통해 선발된 선수들이 MBC 게임에서 16강을 치르게 되는 구조. 그린게임랜드는 그 예선 경기장 중 하나였다.

[ ▲ 그린게임랜드 윤경식 사장 ]

철권대회 초기에는 게임리그에 대한 인지도가 낮았다. 세계적인 철권대회가 열렸는데, 학생신분인 선수들은 부모님께 철권대회에 가겠으니 외국에 보내달라는 말 한마디 꺼내기가 어려웠다고한다. 기본적인 이해도 낮았고 게임으로 1등 한다는 것이 뭐 그리 대수냐고 생각하는 부모님도 있었다.

'한국의 실력을 보여주리라!' 외국으로 원정을 나선 학생들이 대견해 보여서일까. 윤경식 사장은 선수를 조금씩 지원해주기 시작했다. 어떻게 선수들을 도와주게 됐느냐는 질문에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오래전 이야기에요. 그런 시절도 있었죠. 크진 않지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생각에…" 라며 손사래를 쳤다.

"이렇게 아케이드 시장이 계속 가면 앞으로는 어떻게 될까.. 생각하게 됐습니다. 온라인게임이 이렇게 크지 않았던 때야 다들 아케이드 게임만 했는데, 온라인게임이 성장하면서 사람들이 그쪽으로 몰렸습니다. 온라인게임의 성장 이면에 아케이드 시장의 축소가 있는 것은 사실이에요.

그럼 앞으로 어떤 사람이 남아서 게임을 할까 곰곰이 생각해보니 보편적인 사람들보다는 마니아 위주로 남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 됐어요."


"금전적인 값어치는 얼마 안 돼요. 그래도 학생들이 국제적인 무대에서 이기고 나면 자기 자신에게도 상당히 도움이 되거든. 국제적인 실력을 갖춘 사람이다는 자부심이 살아나가는 데 도움이 될 거에요. 적은 힘이지만 그 동기를 마련해 주고 싶었어요. 큰일은 아닙니다."

그린게임랜드의 벽면에는 선수들이 가져다준 트로피가 가득 전시되어 있다. 선수들이 노력이 깃든 자랑스러운 트로피를 집에 보관하는 것보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볼 수 있도록 게임장에 전시하기를 원했다는 것.

[ ▲ 벽면 가득한 영광의 트로피 ]



그렇게 3년이라는 세월이 지났다. 온라인 게임의 성장과 맞물려 아케이드 시장은 축소되었고, '바다이야기 사태'로 대두한 사행성 성인게임장의 단속으로 오락실에 대한 일반인의 인식이 안 좋아졌다. 주변 오락실도 점차 사라져 갔다. 그리고 MBC 게임의 폐지로 철권 리그도 잠정 폐지되었다.

"철권이 자기가 잘한다는 자기만족도 있지만, 내가 이만큼이나 멋진 놈이라는걸 보여주는 재미도 있거든요. 그게 본인한테도 도움이 되고..이 지역에서 유명한 누구, 전국적인 철권고수 누구, 이런식의 명성이 자부심을 줘요. 철권 대회로 방송에 나가고 한게 그런 부분을 만족시켰었는데, MBC게임이 폐지되버렸죠.

공식적인 대회도 없고, 지금은 매장별로 소규모 이벤트성 대회밖에는 없어요. 그 당시와 비교하면 맛이 떨어질 수 있죠. 대회를 연다는 내용은 오고가고 있는데 확정된 것이 없어요. 계획 중이라고 하는데 대회에 대한 소식도 적고.. 대회가 확정된다면 도움이 되리라고 봐요."


첩첩산중이다. 아케이드 게임이 재도약할 수 있는 발판이 되리라고 여겼던 '철권 태그토너먼트2'가 불공정한 유통과정으로 된서리를 맞았다. 한 세트에 1,980만 원이라는 고가의 가격 정책에, 그나마 업그레이드 킷은 수입할 수도 없고, 기계의 수리조차 업주가 부담해야 하는 구조. 아케이드 업주는 '게임사랑협의회'를 발족하고 철권 태그토너먼트2의 불매운동을 벌인 바 있다.

"불매운동은 다른 게 아니라 너무 불리한 구매조건 때문이었어요. 기계값도 비싼데다가 없던 과금도 지불해야하고. 그래서 이 가격이면 안 사겠다, 조건을 완화해줘라 하는 게 주장이었죠. 거의 모든 사장님들이 똑같은 생각이었어요.

그런데 일부 게임기를 사신분들도 있고.. 게임기라는 게 무한정 혜택이 있는 게 아니에요. 출시 이후부터 다음 출시까지만 인기가 있지. 한 달간 졸라봤는데 잘 안됐어요."


▶ 관련기사 바로가기 : 한 세트에 1980만원? 아케이드가 죽어가는 이유



[ ▲ 지금은 오락실에 다수 유통되었다. ]

요새 진통을 겪은 게임업계에 대해서도 의견을 물었다. 답변은 게임으로 일탈하는 학생들의 비율이 얼마나 되는지를 따져봐야 한다는 것이었다. 현재 우리가 사는 공간이나 시간이 게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고, PC방이나 콘솔, 아케이드, 혹은 개인 컴퓨터로도 얼마든지 게임을 접할 수 있다는 의견이었다.

"백 명 중 한 명이 그랬다면 그런 일도 있구나 하는건데, 만약 백 명의 학생 중 과반수가 학교를 안 가고 오락을 한다? 그건 문제가 될 수 있죠. 그런데 현실이 그렇지 않잖아요. 그러면 학교를 빼먹은 그 학생이 게임장이 없다면 학교를 갔겠는냐하면 그것도 아니라는 거죠.

게임이 사람을 이상하게 만든다고 정부에서 말하는데, 게임을 한다고 몹쓸 사람도 아니고.. 사람이 24시간을 쓸 때 쉴 시간도 필요하거든요. 누구나 잠자고, 일만 하고 살 수는 없잖아요. 자기가 좋아하는 거에 시간을 투자하는 거고. 취미생활의 일부라고 생각해요. 예전에야 오락기고, 컴퓨터고 어디 있었나요. 그때야 몸으로 부딪치고 놀았는데 지금은 그런 공간도 없고.. 게임이 가지는 나쁜 영향도 부정할 수는 없죠. 그러나 나쁘다 혹은 좋다고 양 극단으로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에요."


"게임 하면 사회 적응못할 놈들이라고 보는데, 내가 여태 봐온 건 아냐. 정상적으로 하고, 연고대 다 가고 대학갈 데 다 갔죠. 그 사람의 사고가 똑바르다면 게임 때문에 걱정할 건 없는 것 같아요. 목적에 미달하는 건 있겠죠. 근데 그것도 개인의 의지라. 자기가 갈 길이 있고, 그것을 열심히 닦았다면 게임 때문에 인생이 망가지거나 하진 않아요."

[ ▲ 친구와 그린게임랜드를 찾은 학생. 무조건 비난 받아야 할까? ]

오락실을 오랜 기간 운영하며 가장 가까이에서 아케이드 산업을 바라본 윤경식 사장은 시장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을까? 윤 사장은 한국 아케이드 산업의 재도약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취했다. 국내에서 개발되는 아케이드가 있어야 재도약의 희망이라도 품어볼 수 있을 텐데, 국내에서 만들어지는 게임이 없다시피 하고 일본에서 수입 하는 상황.

"시장에 대중적으로 통할 수 있는 게임을 다섯 가지만 꼽아보라고 해도 사실 꼽을 게 별로 없어요. 철권, 유비트, 이니셜 D, 코나미쪽에서 나오는 몇 가지... 게임기가 주종인 시대는 지났죠. 큰 게임장 가보면 실제 게임은 별로 없고, 노래방이나 인형 뽑는 거, 농구 같은 거…. 실제 비디오게임과 관계 없는 것들이 성장해 갈 수밖에 없어요. 말이 게임장이지. 게임도 상당히 비싸고, 비용도 내야 하는 실정에서 뭘 가지고 이 시장을 활성화하기에는 상당히 부정적입니다."

"오랜기간 운영하셨는데.. 기분이 착잡하시겠어요."

"뭐 착잡할거까진 아니고.. 시대의 흐름 문제기 때문에 인정할 건 해야죠. 어느 분야든 부흥기가 있으면 쇠퇴기도 있으니. 온라인 게임은 따로 안 모여도 되는데, 철권은 특히 1:1 대전 격투라 한자리에 모여야 해요. 아직도 아날로그니까(웃음). 조건에서 상당히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죠.

사실 지금 어떤 업소든 어려운 시절인 건 확실해요. 소비자도 줄고, 업소도 줄고…. 부정적으로 접근하기보다는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야 하지 않나 합니다. 네, 인정할 건 인정하고…. 사람들이 줄고 수익감소가 생기는 그런 문제도 긍정적으로 바라봐야 하지 않을까요. 세태가 그렇게 변해가는데.."



[ ▲ 국내게임시장의 플랫폼별 비중 전망(클릭하면 사진이 크게 나타납니다.) ]

윤경식 사장은 아케이드 게임에서 유저와 유저 사이의 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오락실을 찾는 학생들을 수년간 지켜 보니, 서로 근거리에서 지나치면서 인사조차 주고받지 않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했다고. 그래서 생각한 것이 소규모 이벤트대회였다.

주말에 다섯 명씩 서로 모르는 사람끼리 팀을 구성한다.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 팀을 꾸려주는 것. 그렇게 주말이면 5:5 대결이 벌어지곤 했다.

"얼굴을 알고, 오래 봐도 서로 말을 안 하면 모르는 거거든요. 그렇게 5년을 살아도 사는 거에요. 그런데 어느 날 두 사람이 이야기할 환경을 만들어주면, 그다음부터 인사도 하고, 이야기하고 지내고 그렇게 인간관계가 발전한다고 봐요."

"하다못해 네가 먼저 할래 내가 먼저 할까 하는 대화라도 하는 거에요. 그 정도만 해도 다음에 보면 어 너 왔구나 하는 정도의 인사는 하더라구요. 그렇게 주말 몇 번 거치면 그 시간대 오는 학생들끼리는 다들 알아요. 인사도 하고 먹을 거 있으면 나눠 먹기도 하고.

단순한 거지만 인간관계가 다 그렇죠. 어느 한순간 크게 만들어지지 않잖아요. 서로 조금씩 좋은 감정이 커지다 보면 그렇게 끈끈해지는 게 인간관계인데…"


그린게임랜드가 철권과 함께 유명한 것은 바로 '주인아주머니'. 게임을 하는 학생에게 친근하게 말 한마디 걸고, 커피 한잔 타다 주는 부모님 같은 따뜻한 정이 있다는 것이다.

"내가 가서 친근하게 얘기하면 게임장을 찾는 사람들도 부담스러워 하는 것 같고. 나는 기술적인 문제를 주로 보고, 아내가 게임장 찾아주는 사람들과 이야기도 하고, 커피도 가져다주고 해요. 그게, 말 한마디 커피 한잔이지만 여기 찾는 분들은 좋아하시더라구요."

[ ▲ "나는 애들이 싫어할까봐 살갑게 못 해" "왜요 인상이 좋으신데요" " "애들은 그렇게 안 봐~" ]

오락실이면서도 고민상담소의 역할도 동시에 한다. 사회생활에서 어려운 일이나 고민이 있으면 게임장에 와서 털어놓을 정도로 게임장은 마음의 안식처가 되었다. 그만큼 엄하고 무뚝뚝한 아버지로 느껴서가 아니겠냐며 웃음 섞인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아들이 몇백 명 된다고 생각하고 살아요. 자기 가족들에게도 못 털어 놓는 속사정을 우리에게 털어놓고 고민상담을 해요. 물론 모든 고민을 해결해 주고, 도움을 줄 수 있는 건 아니지만. 그냥 나이 먹은 선배로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려줘요. 판단 잘해서 풀어지면 좋겠다는 마음에... 그런 관계가 우리식구와 아이들 관계가아닐까 싶어요.

꼭 한 해 벌어 얼마를 남겼냐 보다는 꾸준히 사람들을 지켜봐 오고 좋은 쪽으로 성장해 나가는 것을 보는 게, 그게 아직도 게임장이 남아있는 이유가 아닐까 싶어요. 학생들은 모르겠는데, 우리끼린 아들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웃음). 누구나 오면 어머니 아버지 그런 식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10대 20대에 게임장을 찾은 어린 손님들이 이제 게임장과 함께 나이를 먹었다. 갓 대학생이 된 학생부터, 사회에 적응해 나가기 시작한 30세 사회 초년생이 되어 다시 게임장을 찾는다. 어린 줄만 알았던 아이들이 결혼한다고 청첩장을 들고 나타나기도. 윤경식 사장이 기억에 남는 학생은 누가 있을까.

"MBC게임의 박현규 해설이 이 게임장을 자주 찾던 학생 중 하나죠. 게임을 좋아해서 20대에는 게임을 즐기던 친구가, 국제대회에서 평가도 받고, 방송국에서도 일하고.. 성장해 나가는 과정을 봐서는 그 친구가 아마 게임 관련된 분야에서는 잘된 사례가 아닐까 싶어요.

기억에 남는 사람이야 많지. 그 많은 사람을 어떻게 다 꼽아요(웃음). 공부하고, 졸업하고, 게임도 하고, 군대가고 또 갔다 와서는 사회로 가고. 만난 학생들이 그렇게 열심히 생활하는 사람이 대부분이죠. 게임이 사람을 나쁘게만 끌고 가지 않는다는 걸 그런 걸 보면서 느껴요."


"내가 이제 60이 넘었어요. 여기를 찾던 아이들이.. 어느샌가 훌쩍 자라서 사회로 성장해 나가는 거 보면, 내가 특별히 해준 것은 없지만 뿌듯하기도 하고, 또 청첩장 가지고 오면서 꼭 와달라고 하면 자부심도 들고 그래요."

찾아주는, 그리고 철권을 좋아하는 학생들이 있다면 계속 운영하고 싶다는 윤경식 사장. '남자라 그런지 잔정은 없어요.' 무던하게 말하는 입가에는 미소가 어렸다. 애정표현에 서투른 그 누군가의 평범한 아버지같은 모습이었지만 아이들에 대해 이야기를 할 때 추억 속 오락실처럼 따뜻한 웃음이 있었다.

▶ 관련기사 : [인터뷰] 다시 한 번 그들의 뜨거운 무대를 보고 싶다. 철권 프로팀 인터뷰



[ ▲ 곳곳에 대회와 관련된 상패가 걸려있었다. ]





[ ▲ 인터뷰가 진행된 때는 아직 방학.
낮이라 많지는 않았지만 오락실을 찾은 학생들을 만날 수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