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전문 블로그 '데들리던전' 운영자 '껍질인간'




작년 말쯤인가? 팀장님의 소개로 나름 게임업계에서 유명한 개발자들과 술자리를 가진 적이 있었다. 기분좋은 취기 덕에 입술이 슬슬 부드러워질 때 쯤, 한 개발자가 말했다.

"데들리던전이라고... 게임 관련 블로그 있거든요? 근데 여기 운영자가 정말 독특해요. 게임 보는 시각이...참... 희귀하달까? 정말 재밌는 게 뭐냐면, 글이 엄청 재밌고 묘하게 설득력이 있어요. 한 번 인터뷰 하면 재미있을 것 같아요. 아니다! 이사람 정체를 밝혀줘요. 대체 어떤 사람인지"

이튿날 확인한 데들리던전은...

긴 스포일러 담지는 않겠다. 그저 인터뷰를 보면 지금까지 진행했던 어떤 대화보다도 참신하다는 것이 바로 보일테니까.





내용들이 하나같이 셀 것 같다. 이 기사 제목 세게 가도 되나. '모던워페어는 별볼일 없는 작품' 이라던가.

제목은 마음대로 붙이시라. 개의치 않는다.

좋다. 데들리던전 블로그 리뷰 탭을 보니, 대중과 전문가가 입을 모아 명작으로 꼽는 '콜 오브 듀티4: 모던워페어'가 무려 0점이다.

모던워페어 리뷰의 별 0개의 의미는 빵점이라기 보다는 '점수없음'의 의미에 가깝다. 제작자가 플레이어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의도가 '게임'이 아닌, 마치 게임을 하는 듯한 느낌을 주는 '영상 체험'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게임이 아닌 것에 게임으로서의 점수를 줄수는 없다는 의미라 생각하길 바란다. 물론 멀티플레이는 배제한 싱글플레이 캠페인에 대한 평가다.


현직 국내 게임업계 종사자 중 당신을 궁금해 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름까지는 밝히지 않아도 좋다. 나이와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무엇인지만 알려줄 수 있나.

왜 게임업계 종사자들이 날 궁금해 하는지 모르겠다. 난 극히 평범한 PC 게이머 중 1인에 불과하다. 단지 PC 게이머가 멸종위기라 내가 신기하게 보이는 건가. 어쨌든, 나이는 30대고 하는 일이 게임 쪽은 아니다. 이 이상 개인 정보는 공개하고 싶지 않다. PC 게임이란게 존재했는지조차 알지 못하는 요즘 게이머들 중에는 나같은 PC게이머를 낮선 존재로 여기고 자신들의 가치관을 붕괴시키는 불편한 불순물이나 삭제해야 할 에러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내 블로그의 댓글란을 보라. 어떻게든 시비를 걸고 날 욕보이고 싶어서 안달난 사람들이 매의 눈으로 24시간 대기 중이다. 내게 익명성은 하고 싶은 말을 하기 위한 최후의 방패다. 그 외 사회적 편견없이 다같이 평등하게 대화하자는 순기능적 의도도 있다.


지금까지 본 사람 중 게임을 보는 시각이 가장 독특하다. 대표적으로 기억나는 게, 'RPG는 발더스 게이트에 의해 쇠퇴하기 시작했다' 였다. 블로그에서는 굉장한 장문이었던 것 같은데, 조금 압축하여 의견을 말해줄 수 있나.

거기에 쓴 게 최대한 압축한 내용이라 더이상 압축하면 내용 전달이 제대로 되기 힘들다. 오해가 불가피하지만 더 요약하자면 이렇다. PC 운영체제가 DOS에서 윈도우로 바뀌면서 사용층의 특성이 갑작스럽게 변했고, 그동안 이어져오던 PC 게이머 집단이 시장에서 영향력을 잃어버렸다. 그 때 새로 유입된 기존 PC 게임 비경험자들을 노려 원래의 CRPG 발전 방향이 아닌 콘솔RPG(과거 PC 게이머들 사이에서 일본RPG라고 부르던)적 방향을 택한 '발더스 게이트'라는 RPG가 나타났는데, 이게 상업적으로 크게 성공했다. 덕분에 새로 유입된 게이머들은 그것이 전통적인 CRPG라고 오해하고 만다. 이후 '발더스 게이트'가 시장의 주류가 되면서 원래의 CRPG는 쇠퇴했고, CRPG의 개념까지 잊혀졌다는 얘기다. 플랫폼의 변화와 세대의 단절, 오해, 잊혀진 역사, 뭐 그런 얘기다.(울음)


블로그 내 리뷰 목록이 특히 눈에 띈다. '바이오쇼크'와 '듀크뉴켐포에버'가 동점이고, '콜오브듀티4: 모던워페어'는 아까도 언급했듯 0점이다. 게임을 볼 때 가장 큰 기준으로 꼽는 게 무엇인가?

무엇보다도 게임 플레이다. 유저가 게임의 룰 안에서 얼마나 자신의 창조성을 발휘할 수 있는지, 게임이 거기에 얼마나 잘 반응할 수 있는지가 최우선이다.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한 마지막에는 제작자가 유저에게 자신의 비전을 심어주는 게임을 좋은 게임이라고 생각한다. 중간 과정은 플레이어의 것이되, 시작과 끝은 제작자의 것이 되어야 한다고 본다. 유저는 제작자가 마련해놓은 먹음직스런 미끼를 물면서 게임을 시작하지만 이후에는 아무런 간섭없이 원하는대로 마음껏 놀다가 끝에가서는 그게 다 제작자의 손아귀에서 놀아난 것임을 깨닫는 것, 그래서 유저가 게임을 시작하기 전과는 약간 다른 사람이 되도록 만드는 것, 그런 게 싱글 플레이 게임의 매력이라고 생각한다.


소문으로만 들을 땐 RPG 관련 전문가인 줄 알았다. 그런데 블로그를 자세히 보니, 이 외 장르에도 관심이 많은 것 같다. 좋아하는 장르가 뭔가? 그 이유는?

PC 게임의 모든 장르를 좋아한다. 그리고 워게임, 어드벤쳐, RPG, 시뮬레이션, 이 4가지 장르를 PC 게임이 창조한 장르라고 생각한다. 실시간보다는 주로 턴제 게임을 좋아하고, 실시간이면 매우 사실적인 게임을 좋아한다. 그러나 시간상 모든 장르의 게임을 즐길 수가 없어 주로 RPG와 시뮬레이션으로 범위를 좁혔다. RPG를 좋아하는 이유는 바로 위의 답변 내용을 구현하기에 적절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실은 RPG를 하다보니 게임에 대해 그런 관념을 가지게 된 것 같다. 그러니까 RPG를 좋아하는 이유는 먼저 RPG를 접했기 때문이라고 할수 있다. 처음 RPG를 시작하게 된 계기는 시뮬레이션적 특성 때문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가상현실이라는 개념에 강한 매력을 느껴 PC 쪽 비행 시뮬레이션에 빠져들었고, 그 이후 우연히 울티마를 접하게 됐다. 이 게임은 마치 세계 전체를 가상으로 구현한듯한 느낌이었다. 그래서 빠져들었다가 시뮬레이션과는 다른 매력이 있다는걸 알게 됐다. FPS는 던전RPG의 파생 장르나 시뮬레이션의 관점으로 보기 때문에 '하프라이프'식 레일슈터는 좋아하지 않는다.


그럼 본인이 꼽는 최고의 게임은 무엇인가?

게임이란 게 각자 장단점이 존재한다. 그래서 최고의 게임으로 한 개를 꼽기는 힘들다. 뭔가 뛰어난 점이 있다면 그것때문에 다른 뭔가를 포기할수 밖에 없으니까. 그래서 조건을 한정시킬 때만 최고의 게임을 뽑을 수 있을 것이다. 개인적 이상향을 조건으로 최고의 게임을 하나 꼽자면 어드벤쳐 게임 '리븐'을 꼽겠다. 게임이 예술이 된다면 아마 이런 형식이 아닐까 싶다. 게임이라는 미디어에 아무런 지식이나 경험이 없는 사람에게도 진입장벽이 없을 정도로 간단한 조작과 명확한 룰을 가졌다. 동시에 하드코어 게이머도 강하게 몰입할 만큼 깊이있는 게임 플레이와 난이도도 갖췄다. 뿐만 아니다. 게임을 구성하는 모든 요소들의 품질이 확실한데 양적으로도 부족하거나 넘치지 부분없이 완전하게 한덩어리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아까도 언급했다시피 이 게임을 플레이하면 유저는 아무런 간섭을 받지 않고 자유롭게 플레이할 수 있다. 이윽고 엔딩에 가서는 제작자의 의도에 의해 강한 감동을 느끼게 된다.


그 반대로 최악의 게임은?

'디아블로2'. 내 인생이 끝나기 전에 이것보다 더 무의미하고 지루한 게임을 찾을 수 있을지 의문이다. 개인적으로 이런 식의 단순 반복에 스트레스 낮은 게임을 무척 싫어한다. 수단이 되어야할 아이템이 목적이 되는 게임플레이도 싫고.


블로그를 통해 GOTY(Game Of The Year) 받은 게임 치고 제대로 된 게임이 없다고 언급했다. GOTY의 기준에서 무엇이 문제라 생각하는지.

GOTY는 원래 PC게임 잡지에서 뽑던 것이었다. 80년대부터 있었다. 당초 취지는 1년 동안 나온 게임 중에서 인기나 판매량을 따지지 말고 순수하게 가장 뛰어난 게임을 뽑자는 것이었다. 영화로 치자면 칸이나 베니스 시상식이라고 할까. 대중과 상관없이 철저한 소수정예 게임광들에 의해 뽑혔다. 그래서 좋은 게임이 상업적으로 실패해도 제대로 평가를 받거나 소개되는 등 순기능이 있었다. 이후 웹진체제로 바뀌면서 꽤 대중적인 게임들이 뽑히긴 했지만 이는 대중성을 의식한게 아니다. 뽑는 사람들의 자질이 그전보다 떨어졌을 뿐이다. 그래도 1998년엔 겨우 10만장 팔렸다는 '시스템쇼크2'가 게임스팟에서 GOTY로 뽑히기도 하는등 나름 노력하는 모습이 있었다.

그러나 XBOX가 등장한 후 PC 게임이 완전히 자취를 감췄는데, 이와 함께 그런 순수성도 완전히 사라진 것 같다. 전문가가 뽑는다는 느낌이 안들고, 그냥 지나가던 콘솔게이머A가 뽑았다는 느낌 뿐이다. 지금 모습을 보면 이해되지 않나. GOTY를 발표하기 전부터 어떤 게임이 받을지 누구나 예측이 가능하다. 제일 잘팔리거나 아주 유명한 게임이 아니면 GOTY 후보조차 오르지 못한다. GOTY의 의미가 완전히 변질된 것이다. 게임 언론이 돈 중심으로 돌아가는 게 첫째 문제고, 리뷰어의 자질이 그냥 지나가던 콘솔게이머A 수준이라는 것도 문제다.(울음)



'웨이스트랜드2'에 높은 기대를 하는 듯 하다. 온라인 게이머들은 잘 모를 만한 게임인데, 간단히 소개를 부탁해도 되나.

'웨이스트랜드2'는 '발더스 게이트'가 등장하기 이전의 전통 CRPG의 명맥을 잇기 위한 게임이다. 90년대 초반으로 돌아가 CRPG를 다시 시작하자는 의미인 것이다. 이 게임은 화려한 그래픽,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액션이 아닌, 표현이 자유로운 텍스트와 깊은 사고를 중심으로 다시 RPG의 중심으로 돌아가려는 시도를 한다.

'발더스 게이트'처럼 파티를 조종하고 위에서 바라보는 시점을 가졌지만, 게임의 스토리는 비선형적이고 주변환경이나 오브젝트와의 상호 작용도 각종 비전투 스킬을 통해 구현했다. 무엇보다 전투가 아닌 퀘스트 해결이 중심이 되는 게임이 될 것으로 본다. '웨이스트랜드2'는 CRPG를 다시 시작한다는 의미 외에도 킥스타터라는 크라우드펀딩 모델의 성패를 가늠할 매우 중요한 게임이다. PC게임 부활의 첨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첫단추가 잘 들어가야 되기에 관심이 많다.



블로그에선 '웨이스트랜드1'의 박스 디자인을 높게 평가했는데, 그 외 마음에 드는 게임 박스 디자인이 있다면?

사실 난 게임 박스 디자인에 크게 관심은 없다. 그냥 블로그에 쓸 게 없다 보니 가지고 있는 패키지나 찍어서 올렸는데, 뭐 할말도 없고 해서 박스 아트 품평이나 하는 거다. 하지만 좋은 게임이 박스까지 멋지면 더 즐거운 것은 틀림없다. 더군다나 요즘은 디지탈 배포 시대다. 이런 패키지에서 오는 즐거움을 더 이상 느낄 수도 없지 않은가.

박스아트중 최고의 디자인으로 꼽는건 '울티마7'이다. 이게 디자인이 어떠냐고? 그냥 검은색 박스다. 앞에 '울티마7' 써있고 그걸로 끝이다. 아무 그림도 없다. '울티마7'이라는 타이틀 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거지. 요즘 이 정도 자신감있는 게임 있나? 그당시 울티마였기에 가능한 박스 아트였다. 게다가 이게 그냥 호기였다면 그냥 괜찮은 정도였겠지만, 사실은 게임 내 등장하는 블랙게이트의 모습을 그대로 패키지 디자인으로 재현한 거다. 2중적 의미를 가지고 있달까. 게임의 부제도 블랙게이트니까 그야말로 완벽한 디자인이 아니겠나. 이런것만 봐도 요즘 게임들이 얼마나 상업적이고 작품성엔 관심도 없는지 알 수 있다.(울음)



'그나마' 대중성 가진 게임 중 추천할 만한 게임으로는 어떤 게 있을까?

최근에 나온 게임 중 '레전드 오브 그림락'이라는 던전RPG가 있다. 과거의 던전RPG 형식중 하나를 그대로 모방한 게임인데 PC 게임이 어떤 모습이었는지 약간 감을 잡기에 좋을 것이다. 난 아직 해보지는 않았지만, 어떤 게임인지는 대충 알고 있다. 왜냐면 그 형식으로는 던전 마스터 스타일에서 벗어날 수도, 뛰어넘을 수도 없기 때문에. 그리고 나온지는 좀 됐지만, '폴아웃 뉴베가스'도 추천한다. 요즘 RPG에서 보기 드문 비선형 플롯을 가진 게임이다. 게임의 리드 디자이너가 직접 만든 'Josh Sawyer's mod'는 반드시 깔고 할 것.





* Josh Sawyer's mod란?

프로젝트 감독인 Josh "J.E." Sawyer가 PC 버전 '폴아웃: 뉴 베가스'을 위해 공개한 비공식 모드. 이 모드에는...

■최대 레벨 제한을 35로 조정
■플레이어가 경험치를 받는 비율을 절반으로 감소
■플레이어 기본 체력을 감소
■플레이어가 기본으로 소지 가능한 무게도 감소
■특정한 캐릭터는 중립이 아닌 선 또는 악으로 정의
■다수의 다른 조정도 포함

이것들은 모두 소이어가 개인적으로 이 게임에 반영하고 싶어하던 것이고, 공식 패치로 출시되지는 않았다. 이 모드가 동작하기 위해서는 Mod Manager, 모든 애드온 패키지들과 모든 선주문 보너스 패키지(pre-order bonus packs)들을 필요로 한다. (출처 - 위키백과)




작성한 포스트를 보면 인벤에 기사로 올리기엔 다소 과격한 표현이 엿보인다. 근데 엄청 재밌다. 글을 따로 배웠나?

초중고를 제외하고 글쓰는 수업같은 건 한 번도 받아본 적이 없다. 사실 글쓰기를 굉장히 싫어한다. 원하지 않는 뭔가를 억지로 써야할 상황이면 나에게는 그것보다 더 큰 고문이 없다. 글을 워낙에 못써서 스스로 쓰길 원하는 글도 막상 써보려 하면 고통스럽다. 블로그에 글을 쓰는 이유도 보다보다 못해 부끄러움을 감수하고 억지로 쓰는 거다. 사실 정체를 밝히지 않는 이유도 부끄러움같다. 이런 글을 누군가 좀 써줬으면 하고 오랫동안 기다려왔는데 PC게임 다 망할때까지 아무도 안쓰더라.(울음)


혹시 자신과 비슷한 게임 시각을 가진 블로거를 본 적 있나? 있다면 소개 부탁한다.

국내엔 없는 것 같다. 있었으면 내가 이런 걸 쓰고 있을리가 없다. 외국에는 있을 것 같지만 찾아본 적은 없다. 내 블로그에 오는 사람들 중에는 호주의 아마추어 게이머 '제로 펑츄에이션'이 나랑 비슷한 거 같다는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난 별로 비슷하다고 못 느끼겠다. 방향성에서 조금 비슷한가 싶기도 하지만, 그건 개인 간 유사성이라기보단 PC 게이머로서의 유사성이라고 생각한다.


인터뷰에 응해줘서 고맙다. 마지막으로 하고싶은 말이 있다면?

옛날부터 무슨 인터뷰 같은것 보면 맨날 대답 뒤에 (웃음) <-이런거 붙어있는게 매우 신경쓰이고 싫었다. (하하)도 아니고 (웃음)이라니. 거기에 복수할수 있는 인터뷰 기회를 줘서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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