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아블로3'는 참 이야깃거리가 많은 작품이었다.

독자적이라면 괜찮은 게임이었다. 하지만 '디아블로2' 특유의 느낌을 계승하길 바랐던 유저들에겐 여러모로 아쉬울 부분이 많았다. 분명 전투가 시원시원하긴 했는데, 뭔가 옛 느낌은 아니었다. 새로 도입된 스킬 시스템은 편리했지만 특유의 유동적인 느낌은 사라졌다. 아이템 파밍 역시 극도로 감소한 확률 때문에 '까는' 맛이 없었다. 좋은 아이템을 손에 넣으면 기쁜 것은 마찬가지였으나, 그 좋은 아이템을 얻기 위해 희생해야 하는 시간은 너무도 길었다. 진화보다 혁신을 선택한 블리자드가 '디아블로2'에서 가져온 것은 서비스 초반 서버 불안정 뿐이었고, 이는 결국 다수의 유저들에게 실망만 안겨주고 말았다.

그러던 중 디아블로 카피캣으로 화제를 모은 '패스 오브 엑자일'의 소식이 들려왔다. 뉴질랜드 개발사 '그라인딩기어 게임즈'에서 만들었다고. 원래 블리자드 게임은 뭐 하나 출시되면 카피캣들이 와르르 쏟아졌기에 대충 예상은 했다. 어중이떠중이 찍어낸 그렇고 그런 게임이겠거니 했다. 하지만 가만히 지켜보니 이 게임은 지금껏 공개된 어중이떠중이들과는 조금 다른 모습이었다. 뭐랄까. 영상만으로 판단하긴 어려웠으나 꽤 오래전부터 준비해온 듯 했다. 아니, 가장 크게 든 느낌은 특유의 손맛이 '디아블로2'와 굉장히 닮아 보였다는 것이었다. 딸도 못낸 어머니 장맛을 옆동네 새댁이 내고 있는 모습이었달까. 전세계 오픈베타를 시작한 이 게임을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기 위해 인스톨 버튼을 눌렀다.






■ 카피캣? 외모를 보면 이해가 된다


가장 먼저 흥미를 끌 만한 소재다. '패스 오브 엑자일'이 왜 '디아블로'의 카피캣이라는 소리를 들었는지에 대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스크린샷을 보고 대충 감 잡았다면 그 이유가 맞다. 전체적인 그래픽, 시점, 게임 진행방식이 거의 똑같다. 온라인 게임임에도 '디아블로' 특유의 액트형식 구성을 따른 것도 그렇고 맵 곳곳에 배치된 웨이포인트, 포탈 스크롤 및 미확인 아이템 확인하는 스크롤까지 같다. 단축키도 동일해 5분 전까지 디아블로하던 여자친구를 데려다 '패스 오브 엑자일' 레벨 노가다를 시켜도 전혀 지장이 없다. 더 부연설명할 것 없이 느낌 자체가 같다. 숙련된 게이머라면 '어 이거 무슨 게임 같은데' 라고 느낄 때가 있다. 이 게임은 '디아블로'다. '디아블로같네' 가 아니다. 그냥 '디아블로'다. 외형이.

물론 백 퍼센트 똑같다는 의미는 아니다. 전작에 비해 파스텔 톤 색감이 강화되어 시리즈 특유의 다크한 맛이 사라진 '디아블로3'와 달리 '패스 오브 엑자일'은 사실적이다. '저 어둠 속에 어떤 몬스터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라는 느낌이 생생하게 우러나온다. 이 부분은 동굴이나 폐허 같은 실내 던전에서 더욱 도드라진다.



■ 단순 카피캣 이상을 보여주는 세련된 차이점들

단순 외형으로 보자면, '패스 오브 엑자일'은 디아블로 카피캣의 선봉장으로써 흠잡을 데가 없다. 아주 그 역할에 딱이다. 하지만, 꽤 긴 개발 기간동안 나름 고심을 한 흔적이 많은 부분에서 드러나 단순 카피캣이라고 치부하기엔 무리가 있다. 물론 다른 '디아블로식' 게임들도 자신들만의 콘텐츠 및 시스템를 보여주긴 했다. 하지만 '패스 오브 엑자일'은 더욱 섬세한 체제 전환을 보여줬다. 가장 큰 차이점은 3가지로, 이는 다음과 같다.

[ 스킬 시스템 ]


레벨 2만 되면 눈치챌 수 있는 가장 큰 차이점이다. 스크린샷으로 대충 보았지만 실제 마주한 스킬트리 시스템은 입을 다물 수 없을 정도. 캐릭터를 중심으로 거미줄처럼 얽힌 스킬트리는, 왜 '패스 오브 엑자일'에서 대중적인 캐릭터 육성 방식이 많지 않은지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재미있는 점은 이 스킬트리에 등록된 스킬들이 모두 '패시브'라는 부분이다. 즉, 스킬 창에 넣고 사용하는 액티브 스킬은 하나도 없다. '힘을 10 증가시켜줘요', '공격속도가 빨라집니다', '무기 양손에 하나씩 들면 데미지가 뻥튀기됩니다'와 같은 것으로 가득 차 있다. 극초반에 찍을 수 있는 스킬들은 위 예시처럼 단순하지만, 외곽에 있는 후반부 패시브 스킬들은 상당히 치밀한 구성을 보여준다.

그럼 '패스 오브 엑자일'의 액티브 스킬은 어디있는 걸까? 스킬트리 창은 아무리 뒤져봐도 없다. 인벤토리 창을 열어봐야 한다. 이 게임의 액티브 스킬은 우리가 흔히 '젬'이라고 인식하는, 소켓형 보석에 내장되어 있으니까.

좀 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패스 오브 엑자일'에는 그저 공격력을 올려주는 능력 증가 젬 외에도 스킬형 젬이 존재한다. 이 스킬형 젬은 퀘스트를 클리어하거나, 몬스터를 잡을 시 일정 확률로 획득 가능하다. 그리고 같은 색상의 소켓에 끼우면 해당 스킬이 활성화된다. 아울러 이 스킬형 보석은 몬스터를 제거할 때마다 별도의 경험치를 획득해 레벨업을 한다. 즉, 패시브 스킬트리와는 완전히 다른 체계로 이루어져 있다.

주의점은 각 스킬별로 사용할 수 있는 아이템 라인이 있다는 것. 예를 들어 양손 도끼나 망치로 사용할 수 있는 스킬이 활성화되어 있다면, 검이나 지팡이로는 이 스킬을 사용할 수 없다. 또한, 붉은 스킬은 대체로 힘 스탯이 중심인 경우가 많고, 녹색은 민첩, 청색은 지능형 스킬이 주를 이룬다.

[ 체력 회복 시스템 ]


'패스 오브 엑자일'에는 포션 개념이 없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포션이라는 게 있기는 있으나, 이게 고기덩어리나 빨간 물약처럼 구분되어 있지 않다. 정확히 말하자면 회복제를 담을 수 있는 '플라스크' 개념을 채용했다.

열심히 몬스터를 썰어넘기다 보면 가끔 플라스크가 떨어지는데, 이를 회복 단축키 슬롯에 지정해두고 사용하는 방식이다. 플라스크는 체력 회복 뿐 아니라 마나 회복 및 공격력 증가, 그리고 잠시 동안 캐릭터의 이동속도를 증가시켜 주는 기능을 갖췄다. 즉, 각 플라스크마다 담을 수 있는 용액이 구분되어 있다. 이 용액은 몬스터를 일정 수준 제거할 때마다 자동으로 차오른다. 마치 몬스터 피를 쪽 짜내 플라스크에 담아뒀다 마시는 찜찜한 느낌이 들긴 하지만, 다 살자고 하는 거니까 넘어가자.

여담으로 아이템 중에는 쉴드를 가진 것도 있다. 서양 FPS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시스템으로 데미지를 받지 않은 채 시간이 지나면 일정량의 쉴드가 차오른다.

[ 화폐 시스템 ]


처음에 튜토리얼 맵에서 사냥하고 얻은 전리품을 상인에게 팔았는데 아무것도 얻은 게 없어 당황한 기억이 있다. 아, 그보다는 UI 어디를 봐도 '골드'라는 글자가 안 보여 놀랐다는 게 정확한 표현이겠다.

'패스 오브 엑자일'은 화폐 개념이 따로 없다. 상인에게 아이템을 사기 위해서는 별도의 아이템을 줘야 한다. 즉, 물물교환에 가깝다. 무슨 선사시대 매머드 뿔 파는 느낌이겠지만, 막상 해보면 그리 복잡하진 않다. 가장 기본적인 거래 단위는 아이템 확인 스크롤이다. 싸구려 아이템을 상인에게 쥐어주면, 스크롤 조각을 주는데, 일정 양을 모으면 온전한 '아이템 확인 스크롤'로 자동 교환된다.

참고로 이 아이템 확인 스크롤은 상점에서 가장 기본적인 장비를 구입하는 데 사용할 수 있다. 이런 화폐 대체 물품은 레벨에 따라 몇 가지 종류로 나누어지며, 저마다 특별한 효과도 지녔다. 스킬트리 만큼이나 거미줄같은 구성이랄까.



■ 고심의 흔적이 느껴진다. 하지만 아직 더 고심해야 할 곳은 있다


'패스 오브 엑자일'을 직접 플레이 한 후, 한 발짝 물러나 바라본 소감을 말하자면 '큰 틀을 계승하되 세부 시스템에서 자기만의 색을 입힌 게임'이라는 것이다. 사람들이 왜 '디아블로' 시리즈에 열광했는지를 분석하고 그 프레임은 그대로 둔 후, 이 위에 그냥 그런 카피캣 소리를 벗어나기 위해 여러가지 시도를 한 게 눈에 띈다. 하지만 이 시도의 양날의 검이 됐다. 장점 못지 않은 단점도 꽤 많이 품었다.

'패스 오브 엑자일'의 가장 큰 특징인 '스킬트리'는 자신만의 캐릭터 스타일을 육성할 수 있도록 돕지만, 결국 시간이 지나면 효율이 뛰어난 정석 트리가 나올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현재는 연구 단계일 뿐이지, 남보다 강해지고 싶은 게이머 본연의 심리가 어디 간 것은 아니니까.

그보다 전에 넘어야 할 과제는 캐릭터 별 개성을 상실할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소켓 스킬은 그저 꽂기만 하면 되고, 패시브는 거미줄처럼 엮여 있다. 바로 이거다. 스킬트리가 '엮여' 있기에 어느 정도 고레벨이 된다면, 직업 구분이 희미해질 가능성을 내포하게 됐다. 바람 앞의 촛불이라 보는 게 맞겠다. 효율적인 스킬트리가 등장하는 순간 촛불은 꺼진다.

[ ▲ 맵을 켜는 순간 버그인 줄 알았다 ]

시스템을 제외한 외적인 아쉬움을 꼽으라면 타격감과 맵 UI다. 과장되지 않은 깔끔한 타격감을 좋아하는 유저라면 환영할 만한 일이겠지만, 액션 RPG 특유의 시원시원함이 부족하다는 것은 분명 아쉬운 부분이다. 한 마디로 '디아블로3'에 익숙한 유저라면 '패스 오브 엑자일'의 타격감은 다소 부족하게 느껴질 수 있다.

타격감은 개인마다 차이가 있으니 넘어갈 수 있지만, 맵 UI는 조금 더 큰 단점이 눈에 띈다.

TAB 키를 누르면 나오는 맵은 나름 '디아블로2'의 느낌을 잘 살려냈으나 단점까지 가져온 게 문제다. 일단 조잡하기도 하고, 가장 큰 문제는 갈 수 있는 곳과 없는 곳의 구분이 모호하다는 것. 같은 곳을 한참 동안 도는 자신을 심심찮게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동굴같이 어두운 맵에라도 들어서는 순간, 총체적 난국이라는 표현이 절로 떠오를지도 모른다.



■ 핵앤슬래쉬 액션 RPG의 '세인츠로우'가 되길 바라며


앞서 언급한 단점들은 현재 '패스 오브 엑자일'이 오픈 베타 테스트라는 것을 감안할 때 충분히 수정 가능한 사항이다. 아울러 이 게임의 특성에서 오는 재미에 비하자면 그리 큰 단점은 아니다. 플레이 당시 싱가폴 서버에 접속했음에도 별다른 렉이 없다는 깨알같은 장점이 있었으니 비긴 것으로 하자.

'세인츠로우'라는 게임이 있다. 'GTA3'의 전세계적인 흥행 후 등장한 전형적인 카피캣 게임이었다. 막장 콘셉트를 밀긴 했으나, 그래픽이나 시스템 부분이 너무도 흡사해 팬들의 외면을 받았다. 하지만 시리즈를 거듭할수록 더 막장이 되더니 3편 쯤 되니 '막장' 하면 떠오르는 게임 중 하나로까지 자리잡았다. 아울러 4편에 접어들어 전작들과는 다소 다른 노선을 걷기 시작한 GTA와는 다른 플레이 스타일도 이 때부터 서서히 주목받기 시작했다.

지금 해외에서는 '세인츠로우'에 전형적 카피캣이라는 표현을 잘 쓰지 않는다. 현재는 서로 다른 재미를 가진 샌드박스 액션 게임이라는 느낌이 강하니까.

'패스 오브 엑자일'도 그런 자질이 엿보인다. 다행인 사실은 '세인츠로우'보다는 초반 차별성이 훨씬 강하다는 것. 현재 작품은 '디아블로2의 계승자', 혹은 역시 '디아블로 카피캣'이라는 표현이 어울릴지 모르겠다. 하지만 온라인이라는 환경에 맞춰 특색을 강화하는 업데이트가 덧붙여진다면, 디아블로 못지 않은 프랜차이즈로 성장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만큼 기본기가 좋다.



■ 패스 오브 엑자일 플레이 영상 모음

[ ▲ 패스 오브 엑자일 캐릭터 생성 및 초반 플레이 영상 ]


[ ▲ 패스 오브 엑자일 던전 플레이 영상 ]


[ ▲ 패스 오브 엑자일 필드 플레이 영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