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 장소인 현대백화점 앞은 저녁 시간이
라 퇴근하는 사람, 저녁 장 보는 주부들, 누군
가를 기다리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그들 하
나하나를 살펴 보았지만 아직 준수는 나와 있
지 않았다.
나는 담배를 물고 앉아 준수를 기다렸다. 거
의 육개월 만의 만남이었다. 요즘은 뭘하고 지
내는지 무척 궁금하기도 했다.
준수에게서 얼굴이나 한번 보자는 전화를
받은 것은 일주일 전이었다. 오랜 만에 걸려 온
그의 전화는 나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준수는 내가 2년 전에 필라델피아에서 처음
만난 친구이다. 그 당시 나는 어학 연수를 핑계
삼아 미국 여기저기를 기웃거리고 다녔었다.
그때 그는 기타리스트를 꿈꾸고 있었는데
영화를 무척 좋아해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아
금세 의기 투합할 수 있었다. 우리는 많은 논
쟁을 하면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음악과 영
화, 그리고 인생에 대해서 서로의 토로하면서
매일같이 술을 마시곤 했었다.
하지만 나는 준수와의 그런 많은 추억들 중
에서 가장 강렬한 것은 바로 여행이었다. 악몽
같던 여행.......
그 생각을 하자 갑자기 몸서리가 처졌다. 여
행에 대한 기억을 떨쳐 버리려고 머리를 젓고
있는데 저만치서 준수가 다가왔다. 나는 자리
에서 일어나며 번쩍 손을 들었다.
준수는 육 개월 전에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
와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그때의 그는 절망에
휩싸여 거의 인생을 포기한 폐인과도 같았다.
하지만 지금의 준수는 뭔가 활기에 넘쳐 보였
다. 눈빛도 처음 만났을 때처럼 정열로 불타
오르고 있었다.
하지만 왼손에는 예전과 다름없이 검은 장
갑을 끼고 있었다. 장갑낀 손을 보니 다시 그
생각이 떠올랐다. 준수는 이런 내 마음을 전혀
모르는지 밝은 표정으로 말을 걸었다.
“오랜만이다. 그 동안 뭐했니? 연락 좀 하
지.......”
나는 애써 그의 왼손을 외면하고 오른손을
힘껏 잡았다.
“그냥...... 좀 바뻤어. 그래 너는 요즘 뭐하
고 지내니? 뭐 좋은 일이도 있니? 얼굴이 좋아
보이는데.......”
“좋은 일은....... 나 다시 음악 시작했어. 이
번에는 컴퓨터 음악이야. 손을 많이 안 써도
되지.”
준수가 말하고는 환히 웃었다. 준수의 대답
은 약간은 의외였다. 어쨌든 이제는 손 얘기를
아무렇지 않게 할 정도로 정신적으로 회복되
었다고 생각하니 반가웠다. 거기다가 다시 음
악까지 시작하다니.......
준석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옛날 기분이
되살아났다. 우리는 이야기를 나누면서 술을
마실 수 있는 장소를 찾아 걸음을 옮겼다.
우리가 들어간 곳은 사람들이 그리 북적거
리지 않는 아주 조용한 노바다야끼였다. 우리
는 오랜 만에 만나는 사람들이 으레 나누곤 하
는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면서 술을 마셨다.
준수는 지난 날의 충격에서 회복되어 정상
적인 생활로 돌아온 것 같았다. 하긴 벌써 2년
전 일이니까 충격도 딛고 일어설 때도 되었으
리라.
준수는 컴퓨터 음악의 매력에 대해서 한동
안 떠벌였다. 나는 준수의 이야기에 간간이 장
단을 맞춰 주었다.
내가 보기에도 준수는 음악 없이는 못 살 것
같았다. 델라웨어 강변에서 기타를 치면서, 케
니 로긴스의‘The More We Try’를 부를 때
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 당시 준수는 정말로 멋있었다. 나는 나중
에 준수가 기타를 못 치게 되었을 때 많은 걱
정을 했고, 준수는 실제로 자살을 기도하기도
했었다.
그래도 참으로 다행이었다. 나는 준수가 이
렇게 다시 웃게 될 거라곤 전혀 예상하지 못했
었다.
우리는 예전처럼 음악과 영화에 대해 서로
의견을 나누었고 점점 취해 갔다. 술이 좀 들
어가자 우리는 서로의 아픈 과거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누었다. 내가 아직도 수민이하고
는 연락을 하고 있냐고 묻자 준수는 태연히 말
했다.
“수민이 미국에서 잘 지내고 있대. 이번 겨
울에는 바빠서 못 나올 것 같다던데. 헤야 할
일은 많은데 겨울 방학이 짧아서.......”
하지만 준수의 내면에 균열이 생긴 것을 느
낄 수 있었다.
“아직도 힘드니?”
“아니! 하지만 그 일 이후로 서로에게 벽이
생긴 것 같아. 하하핫! 세월이 지나면 괜찮아
지겠지.”
준수는 너털 웃음을 터뜨렸지만 아무래도
어색했다.
“참, 너는 이제 은영이 완전히 잊었니?”
내가 수민이 이야기를 꺼낸 것에 대한 복수
라도 하듯이 은영이 얘기를 꺼냈다.
“글쎄....... 잊을 수 없을 것 같아. 하지만 미
국에 있을 때보다는 많이 나아졌어.”
나는 애써 미소를 띄우면서 잔을 들었다. 그
때 등 뒤에서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려 왔다.
한떼의 젊은이들이 우르르 들어와 우리 옆자
리에 앉았다. 그들은 큰소리로 이야기를 나누
었는데, 근처에 있는 교회 또는 성당의 주일학
교 교사를 하고 있는 대학생들 같았다.
나나 준수나 꽤 취해 있었지만 정신이 퍼뜩
들었다. 나는 얼른 준수를 살폈다. 준수가 취
중에 무슨 일을 저지를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
문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준수는 옆 테이블로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그의 눈에서 한순간 살기 같은
것이 번뜩거렸다. 나는 긴장하며 준수의 어깨
에 손을 올렸다. 준수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나에게 시선을 돌렸다.
“걱정 마. 이제 이 정도는 참을 수 있으니까.”
준수는 검은 장갑을 낀 왼손으로 술병을 가
볍게 두드리다가 말을 이었다.
“이제 이 손가락들에 대한 미련 다 버렸어.
어차피 끝난 일이잖아.”
나는 굳어 가는 준수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술잔을 단숨에 비웠다. 빈 잔 위로 다시는 떠
올리기조차 싫은 지옥 같은 여행이 아른거렸
다. 준수의 인생을 파멸로 몰고 갔던 2년 전의
그 여행길이.......
그때 여행 계획을 세운 사람은 다름 아닌 준
수였다. 나는 당시 어학 연수 중이었지만 그것
은 어디까지나 말뿐이었다. 우린 주말말 되면
사람들을 모아 차를 끌고 여행을 다니곤 했다.
그런데 어느 날이었다. 준수가 인디아나에
서 공부하고 있는 여자친구 수민이를 만나러
가는데 같이 가자는 것이었다. 나는 처음에는
그런 자리에 끼기 싫다고 거절을 했다.
하지만 준수는 물러서지 않았다. 견우와 직
녀과 만나는데 까치가 되어 달라는 것이었다.
준수가 나하고 같이 가자고 한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장거리니까 혼자 가면 무료하
기도 하겠지만 그보다도 차 때문인 것 같았다.
준수는 국제 면허증이 없어서 운전뿐만 아
니라 카 렌트도 할 수 없는 처지였다. 그는 나
를 통해서 차도 렌트하고 운전까지도 부탁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한국 같으면 다른 대중 수단을 이용했겠지
만 미국이다 보니 그런 발상을 한 것이리라.
사실 미국에서는 렌트카가 대중 교통수단의
일부으로 인식되어 있다. 그만큼 싸고 편리하
게 때문이다.
기름값도 우리 나라의 반 값도 안되니 장거
리를 뛴다 해도 그리 부담이 없다. 실제로 기
차나 버스를 이용하는게 렌트카를 이용하는
것보다 비싼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아주 먼 거
리가 아니고, 혼자서 여행하지 않는 이상 렌트
카를 쓰는 쪽이 여러모로 유리하다.
망설이는 나에게 준수는 토요일에 렌트해서
뉴욕 브로드웨이로 가자는 것이었다. 저녁 공
연보다 싼 마티네(오후) 뮤지컬 한 편 보고 다
시 출발하자고 나를 유혹했다.
나는 수민이가 있다는 인디아나가 저 중부
에 있는 인디아나 주가 아니고, 같은 팬실베니
아 주에 있는 작은 도시 인디아나이라는 사실
에 흔들렸고, 뮤지컬 보자는 제의에 그만 승락
하고 말았다.
사실 인디아나라고 하면 뉴욕에서 자동차로
10시간 정도의 거리여서 별로 먼 거리는 아니
었다. 준수가 그토록 자랑하는 수민이라는 여
자 친구도 직접 볼 수 있는 기회였다.
여행을 가기로 한 토요일이 왔다. 우리는
‘만나 렌트카회사’로 향했다. 예약은 내가 전
화로 먼저 해 놓았기 때문에 차를 끌고 출발하
면 되었다.
미국이라고 해서 아무나 차를 렌트할 수 있
는 것은 아니다. 렌트카회사는 많지만 규정이
조금씩 달랐다. 특히‘헐츠’나‘어비스’같은
대형 렌트카회사는 규칙도 까다롭고 이용료도
비싼 편이다.
주마다 차이는 있지만 플로리다 같은 관광
지를 제외하고 동부에 있는 대부분의 주에서
는 렌트할 때 나이 제한이 있다. 대체적으로
만 25세를 넘지 않으면 회사의 보증이 없는 한
차를 렌트할 수 없다.
그 밖에도 신용카드가 있어야 하는 데다 비
싼 보험료를 내야 한다. 하지만 차를 빌리기만
한다면 지점망이 수없이 많아 서비스가 대
단히 잘 되어 있다. 차를 돌려줄 때도 상당히
편한 데다 다양한 차종을 선택할 수 있다. 또
한 보험료가 비싼 만큼 보상도 완벽한 편이다.
하지만 당시 우리는 만 25살을 넘지 않아서,
다른 작은 회사을 찾아야 했다. 물론‘알라모’
나‘엔터프라이즈’같은 큰 회사는 21세만 넘
어도 차를 빌려 주지만, 그 대신에 가산금을
붙였다. 가산금까지 주고서 렌트할 경우에는
비용이 만만치 않다.
그래서 우리는 늘 애용하던 도요다 렌트카
센터에서 렌트하기로 합의했다. 여기서는 21
세만 넘으면 아무런 가산금 없이 차를 빌려 준
다. 보험금도 싸고 렌트비도 싼 편이다. 차의
종류는 도요다 차로 한정되어 있지만, 사흘에
보험금과 세금 포함해서 8만원 정도니 우리로
서는 그리 불만이 없었다.
물론 보험금이 싼 만큼 사고가 났을 때 이용
자가 배상해야 하는 몫도 크지만, 그런 것까지
고려할 만큼 여유가 없었다. 우린 싼 데다 쉽
게 렌트가 가능하다는 장점만 보기로 했다.
렌트카 회사는 우리들의 기숙사에서 10블럭
정도 떨어져 있었다. 버스를 타고 갈까 하다가
기다리기도 지루해 그냥 걷기로 작정했다.
한참 걷다가 준수가 걸음을 멈추고 이상한
간판을 올려다보았다. 그 간판을 보니 미국식
점장이 집임을 알 수 잇었다.
“야, 우리 점 한번 보고 가자!”
준수가 불쑥 제안했다. 나는 점을 본다는 것
이 그리 내키지 않았지만, 시간도 남는 데다
미국에서는 점을 어떻게 보나 하는 호기심도
일고 해서 따라들어갔다.
“야, 미국 점은 어떻게 볼까? 미아리처럼 솔
잎이나, 쌀 같은 걸로 볼까?”
“교회도 다니는 자식이 점은 웬간히도 좋아
하네.”
나는 준수 뒤를 따라로 지하로 내려갔다. 손
잡이에 손을 대자 문이 스르르 열렸다. 문이
열리면서 딸랑거리는 소리가 났다.
실내는 몹시도 어두웠다. 환기가 잘 안 되는
지 쾌쾌한 냄새가 났다. 어둠이 다소 눈에 익
자 흐릿한 불빛 아래 앉아 있는 흑인이 보였
다. 그는 전혀 점장이 같아 보이지 않았다.
“잠깐 앉아서 기다리세요.”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소파를 가리켰다. 나
는 소파에 앉아서 실내를 둘러보았다. 특별한
장식은 없었다. 약간은 어두운 색깔의 벽지가
발라져 있었는데 그 위에‘당신의 운명과 미래
를 알 수 있습니다’라고 쓰여진 글귀가 적힌
종이가 붙어 있었다.
어딘지 모르게 음산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준수는 한국에서 점을 보았던 이야기를 했지
만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우리가 앉아 있는 왼쪽에서 문이 열리고 백
인 여자가 나왔다. 그녀는 우리를 힐끗 보고는
지하실을 나갔다. 흑인 조수가 안으로 들어갔
다가 나오더니 우리를 그 방으로 안내했다.
그 방 안은 더 침침했다. 가운데 알록달록한
테이블보를 뒤집어쓴 둥근 테이블이 놓여 있
었다. 그 중앙에는 영화에서나 볼 수 있었던
커다란 수정 구슬이 자리하고 있었다.
“어디서 왔지?”
어둠 속에서 불쑥 목소리가 들려 왔다. 잘
알아듣기 힘든 액센트였다. 목소리가 들려 온
곳을 보니 이상한 옷을 걸친 흑인 할머니가 앉
아 있었다. 그녀는 마치 대형 포스터 속의 마
귀 할멈처럼 미동도 하지 않았다. 빗자루만 쥐
어 주면 영락없는 동화 속의 마녀였다.
“한국에서 왔는데요.”
준수가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그녀는 한국
이라는 나라에 대해서 잘 아는 건지 건성으로
그러는 건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리곤 의미
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 뭘 알고 싶어서 왔나?”
“우리와 미래와 운명을 볼 수 있나요?”
준수가 다시 말했다.
“물론이지. 내 손을 잡게.”
할머니가 뼈가 드러나 앙상한 손을 테이블
위로 내밀었다. 우린 순간 누가 먼저 할까 눈
치를 보았다. 나는 이왕 하는 거라면 내가 먼
저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할머니의 손을 잡았다. 그녀의 손은 깜짝 놀
랄 정도로 차가웠다. 도저히 살아 있는 사람의
손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그녀는 눈
을 감고서 알아들을 수 없는 영어로 뭐라고 중
얼중얼 주문을 외웠다. 나는 그녀의 손을 잡은
채 그녀의 의식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한참을 중얼거리던 점장이가 주문을 멈추고
눈을 떴다. 그러더니 나의 미래와 운명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발음은 유독 알아듣
기 힘들었는데, 그녀는 우리가 이방인이라는
걸 감안해서인지 천천히 말했다.
“당신은 지금 과거의 일로 인해 고통받고 있
군요. 하지만 곧 과거의 아픔에서 회복될 겁니
다. 밤이 가고 나면 초원에 찬란한 태양이 떠
오르듯이....... 하지만 당신의 고통이 깨끗이
씻어지지는 않습니다. 현재의 고통을 씻는 데
는 좀더 많은 비가 필요합니다. 모든 것은 세
월이 현명하게 해결해 줄 겁니다. 고통은 끝이
없습니다. 생명을 지니고 있는 한....... 더 큰
고통이 몰려올 수 있습니다. 당신은 고통 속에
서 온 세상이 빛으로 가득 차 있음을 보게 될
겁니다. 지금은 온통 불신뿐이지만.......”
너무도 애매모호한 말이었다. 무슨 말을 한
건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물론 그가 한 말에
다 의미를 부여하려고 하면 충분히 할 수 있었
지만 나는 일부러 그러지 않았다.
“무슨 말씀이죠?”
“자네가 들은 그대로라네.”
점장이는 무뚝뚝하게 말했다. 나는 대단히
실망했다. 그 정도의 예언이라면 나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준수도 실망한 눈치였다. 준
수는 잠시 망설이다가 점장이의 손을 잡았다.
방법은 같았다. 그녀는 준수의 손을 꽉 잡더
니 예의 주문을 중얼거리는 것이었다. 그러데
조금 달랐다. 나를 할 때와는 달리 시간이 지
남에 따라, 그녀의 주문이 점점 빨라지고 커졌
다. 이마에서 땀방울이 흘러내렸고 그녀의 몸
이 격렬하게 흔들렸다.
준수가 당황하여 나를 보았다. 나 역시 겁이
덜컥 겁이 났다. 그것은 앞으로 있을 예언 때
문이 아니라 그녀가 어떤 사기를 치기 위해서
사전 공작을 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우려
때문이었다.
우리가 있는 곳은 흑인 거주지역 안이었다.
범죄가 잦은 곳이라 해가 지면 백인이나 유색
인종은 아무도 돌아다니지 않는 곳이었다. 우
리는 토요일 낮이고 해서 지나가던 길이었는
데, 꼭 뭔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안 좋은 예감
이 들었다.
준수가 손을 빼내려고 하는데 점장이가 갑
자기 눈을 떴다. 그리곤, 숨이 차는지 할딱거
렸다. 목울대 밑으로 닭처럼 살이 출렁거렸다.
혹시 강도라도 나타나지 않을까 걱정돼서
나는 방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이 점장이가 누
군가와 짜고 우리를 함정에 빠뜨릴 것만 같아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점장이는 아무 말 없이 수건으로 이마와 목
덜미의 땀을 닦았다. 그리고서는 테이블 위에
카드를 올려놓았다. 우리는 그냥 일어서려 하
다가 꺼내 놓은 카드에 끌려 다시 앉았다.
테이블 위의 카드는 포커할 때 쓰는 것이 아
니라 서양에서 점을 볼 때 쓰는 카드였다. 점
장이는 카드를 막 섞더니 피라밋형으로 카드
를 테이블 위에 배열해 놓았다.
“아무 거나 한 장 뽑아요.”
점장이가 준수에게 카드를 뽑으라고 권했
다. 왜 나한테는 안 하던 짓을 준수에게 하는
걸까, 하고 의아해하고 있는데 준수가 카드 한
장을 뽑아 뒤집었다.
순간 나는 소름이 끼치는 것을 느꼈다. 준수
가 뽑을 카드는 영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죽
음의 사자가 그려져 있는 카드였다. 해골로 된
유령이 망토를 두르고 긴 낫을 비스듬히 들고
있는.......
준수의 얼굴을 보았다. 준수는 떱떠름한 얼
굴이었다. 하긴 아무리 장난이라 하더라도 그
런 카드를 뽑고 나면 꺼림칙할 것 같았다.
당황한 사람은 우리뿐만이 아니었다. 카드
를 뽑으라고 한 점장이도 마찬가지였다. 그녀
는 몹시 당황해서 카드를 마구 섞었다. 그리곤
두 손으로 카드를 꽉 쥐고는 눈을 감은 채 주
문을 외웠다.
이번에는 주문이 그리 길지 않았다. 그녀는
다시 카드를 피라밋형으로 배열해 놓고, 맨 위
꼭지점 부분에다 남은 카드를 올려놓았다. 그
러더니 자기가 피라밋의 양 끝에 놓인 카드를
뒤집었다.
공교롭게도 두 장 다 아까 준수가 뒤집은 카
드와 같은 죽음의 사자가 그려져 있는 카드였
다. 준수의 표정은 심하게 일그러졌다. 나도
기분이 몹시 상했다. 점장이도 당황해서는 손
을 마구 떨기 시작했다.
“다시 한 장을 뽑으세요. 아주 신중하
게....... 주의해서.......”
점장이가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준수는
인상을 찌푸렸다. 기분이 몹시 상했는지 아무
렇게나 한 장을 뽑았다. 뒤집힌 카드를 보았더
니 역시 죽음의 사자가 그려져 있었다.
아무리 미신이나 사기라고 하지만 기분이
몹시 나빴다. 준수의 얼굴은 돌처럼 굳어져 있
었다. 점장이는 준수가 고른 카드를 한동안 내
려다보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곤 체념한
듯이 얘기를 꺼냈다.
“죽음의 사자가 당신을 보고 있습니다. 죽음
의 사자는 당신에게 재앙을 안겨 줄 겁니다.
사악한 믿음을 경계하십시오. 앞으로 한동안
은 아무 곳으로로 떠나지 마십시오. 죽음의 사
자는 먼 곳에서 당신이 다가오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내 말을 명심하시오, 젊은이.”
점장이의 말은 우리를 난처하게 했다. 지금
막 여행을 떠나려고 하는데 그런 재수없는 말
을 하다니.......
내 눈에는 정말로 그녀가 마녀처럼 보였다.
준수에게 저주를 내리는....... 나는 몹시도 언
짢았지만 그녀에게 화를 낼 수 없었다. 그녀의
표정은 너무나 진지했고 조심스러웠다.
“That’s okay......”
준수는 금세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오
히려 안절부절하는 쪽은 점장이였다. 점장이
는 조심하라는 얘기를 연발했다. 여행을 결코
떠나지 말라는 말과 함께.......
나는 준수와 함께 일어났다. 준수는 방을 나
와서 20불을 요금으로 조수에게 건네 주었다.
방 문 앞을 떠나려는데 점장이의 음성이 들려
왔다.
“저들에게 신의 가호가 있기를.......”
기분 나쁜 예언을 듣고 점장이 집을 나온 우
리는 렌트카회사로 향했다. 점장이의 얘기가
마음에 계속 걸렸다. 준수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면서 도리어 나를 위로했다.
“미국에도 점 같은 걸로 사기치는 사람들이
있다니....... 불길하게 말하면 돈이라도 뭉터
기로 쥐어 주며 살려 달라고 매달릴 줄 알았나
보지. 사람 사는 데는 다 똑같다니까.......”
나는 준수의 말에 전적으로 동감했다. 이내
점장이에 대한 기억을 떨쳐 버리고 이번 여행
에 대한 얘기로 화제를 바꾸었다.
“12시에 출발하면 뉴욕에 도착하면 2시쯤
될 거야. 그럼 맨하탄 타임 스퀘어에서 반값으
로 파는 브로드웨이 무지컬 낮 공연을 보는 거
야. 그러고 나서 5시쯤에 인디아나로 출발하
는 거야. 잠은 가다가 모텔에서 자고.......”
준수가 다시 스케줄을 상기시켰다. 우리는
우리는 가져온 짐을 뒷좌석에 실고 그대로 출
발했다. 차를 몰고 렌트카회사를 나서자 준수
가 가져 온 가방에서 음악테이프를 꺼냈다. 나도
질세라 차를 한쪽에 세우고 테이프를 꺼냈다.
우리가 준비해 온 테이프를 합하니 족히 70
여 개는 되어 보였다. 차에서 다 들을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양이었다.
토요일 오전의 고속도로는 생각보다 막히지
않았다. 필라델피아에서 뉴욕까지는 이미 여
러 번 왔다갔다 했던 길이었기 때문에, 지도
없이도 갈 수 있었다. 하지만 나머지 길은 전
적으로 지도에 의존해야만 했다.
나는 항상 낯선 곳을 찾아갈 때는 떠나기 전
에 큰 지도를 준비했다. 미국 도로 지도는 크
면 클수록 비쌌지만 비싼만큼 자세했다. 그래
서 아무리 낯선 곳이라 해도 둘 이상 차에 타
면 지도를 보고 충분히 찾아갈 수 있었다.
뉴욕까지 가는 데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과
속으로 경찰에게 적발되지 않게끔 조심하면
되었다. 뉴욕에 도착할 때까지 우리는 번갈아
가며 자기가 좋아하는 음악을 틀었다.
내가 파코 데 루치아의 기타 연주곡을 틀면
준수는 알디 미올라를 틀었고, 동물원의‘말하
지 못한 내 사랑’을 틀면 준수는 김광석의‘사
랑했지만’을 틀고, 내가 모짜르트를 틀면 베
토벤을 틀고, 내가 페트릭 브뤼월의 노래를 틀
면 그는 루이스 미구엘의 노래를 틀고, 왕걸의
노래를 틀면 왕정문의 노래를, 파바로티를 틀
면 까레라스를, 데이빗 란츠를 틀면 조지 윈스
턴을, 루이 암스트롱을 틀면 빌리 할리데이를,
카펜터스를 틀면 에어 써플라이를, 프랭크 시
나트라를 틀면 헤리 코닉 주니어를, 안전지대
를 틀면 샤게 앤 아스카를, 존 윌리암스의 영
화 음악을 틀면 빌 콘티의 음악을, 데이빗 센
본을 틀면 키스 자렛을, 유재하를 틀면 김현식
을.......
우리는 지루한 고속도로를 달리면서 계속
이런 식으로 음악을 들었다. 우리는 예정한 시
간 안에 뉴욕에 도착할 수 있었다. 곧바로 타
임스퀘어에 가서 뮤지컬 표를 구했다.
타임 스퀘어에서는 당일 팔고 남은 티켓을
반값으로 팔고 있었다. 우리는 운 좋게 알랭
보빌리와 클로드 미쎌 숀버그 콤비의 유명한
뮤지컬 <미스 사이공>를 볼 수 있었다. 소문대
로 무대에 헬기가 나왔고 소문대로 재미있었
다. 동양 여자를 무시하는 듯한 내용이 기분을
조금 상하게 했지만 나머지는 그런 대로 볼 만
했다.
우리는 극장을 나서며 역시 불후의 걸작 <오
페라의 유령>보다는 약간 처지는 작품이라는
데 동의했다. 차에 오르면서 시계를 보니 4시
반이었다. 우리는 퇴근 시간을 피해 서둘러 맨
하탄을 빠져 나왔다.
이때부터는 처음 가는 길이었다. 옆자리의
준수가 지도를 꺼내 타야 할 도로를 살피기 시
작했다. 우리는 일단 80번 고속도로를 탔다.
가다가 휴게소에서 햄버거로 저녁을 때우고
나서 다시 출발했다.
6시간 정도 계속해서 80번 도로를 달렸다.
피곤하긴 했지만 준수가 운전을 못하니 계속
핸들을 잡아야만 했다.
우리는 모텔에서 잔다는 계획을 세웠지만
일단 가는 데까지 가 보기로 했다. 밤 열시 경
에 우리는 지방 국도로 접어들었다.
220번 도로를 타고 내려가다 보니 작은 마
을들이 보였다. 마을마다 교회 십자가가 서 있
었다. 나는 무심코 중얼거렸다.
“참 교회 많은 세상이야.”
“자식, 교회 많아서 불만이냐.”
교회를 열심히 다니는 준수가 나의 말을 걸
고넘어졌다. 나는 지루하던 터라 화제를 아예
그쪽으로 돌렸다.
“야, 너 아니? 우리 나라가 세계에서 단위
면적당 교회가 제일 많은 나라 중에 하나라는
걸....... 그런데 교회가 그렇게 많을 필요가 있
는 거냐?”
“그만큼 우리 나라 사람들의 신앙심이 깊다
는 얘기가 아니겠냐.”
“그만큼 장사가 잘 된다는 뜻도 되지.”
나는 별 신경 안 쓰고 말했다. 갑자기 옆자
리가 잠잠해져서 보니 준수가 나를 빤히 보고
있었다. 순간, 내가 실수했다는 것을 깨닫고는
재빨리 덧붙였다.
“내 얘기는 그렇게 많은 교회가 정말로 필요
하느냐 하는 거야. 난 솔직히 종교에 대해서
불신을 품고 있어. 물론 종교는 좋은 일도 많
이 했겠지만 나쁜 짓도 많이 했어. 너, 인류 역
사상 어떠한 재난이나 전쟁보다도 종교의 독
선에 의해서 희생된 사람이 더 많다는 것을 아
니?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생겨난 종교때문에
무수한 사람이 죽었다니 아이러니한 일 아니
냐?”
“종교가 뭘 어쨌는데?”
“역사를 봐봐. 수백년에 걸친 십자군 원정,
신 구교도간의 종교전쟁, 현대에 와서는 이스
라엘과 아랍 전쟁, 이란 이라크전 등등 종교가
원인이 되어 벌어진 전쟁은 끝도 없어. 이러한
전쟁이나 학살은 모두 상대방의 종교를 포용
하지 않고 파괴하려는 독선에서 나온 것 아니
겠어?”
“종교 전쟁은 근본 원인이 좀더 복잡한 경우
가 대부분이야. 종교 전쟁을 놓고 종교가 근본
적으로 나쁘다고 할 수는 없어.”
“그렇기는 하지. 하지만 십계명에‘살인하지
말라’라는 계명도 있을 텐데 왜들 이렇게 죽이
는지....... 다른 이교도을 죽이는 건 살인이 안
되는 거니? 이교도들도 분명 하나님의 창조물
일 텐데 말야.”
“이교도들을 처단한 건 과거의 일이야.”
“그래, 네 말대로 한낱 과거사였다고 치부해
버릴 수도 있어. 인간의 도덕성이 발달함에 따
라 종교도 합리적으로 발전했다고 볼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뒤집어서 생각해 봐. 십자군
원정이나 마녀 사냥이 자행되는 그때에는 그
당시의 교리가 절대 선이었잖아. 하지만 지금
은 그 당시의 교리가 옳다고 인정하는 사람은
없잖아.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최고로 믿고
따르는 지금의 교리도 수백 년이 지난 후에는
야만적인 교리였다고 밝혀질지도 모르는 일
아니야?”
“네 말도 일리는 있어. 처음부터 완벽한 것
은 없으니까. 죵교의 역사도 보면 오류를 수정
해 가는 과정이었어. 이러한 과정을 거쳐 신의
뜻에 가깝게 접근하는 거지. 인간은 너도 알다
시피 허점투성이잖아.”
“하지만 모든 오류가 시정되었다고 할 수 있
을까?
작년에 있던 휴거 소동 기억나니? 물론 사이
비나 이단일수는 있지만, 그것을 믿는 사
람들에게는 그것이 최고의 가치였어. 그들앞
에서 너희는 사이비다라고 말한다면, 말한 그
사람은 그 자리에서 맞아죽을 걸... 내가 혐오
하는 것은 종교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맹
목적으로 광신하는 사람들이야. 최소한의 이
성도 잃은 채로.... 그렇기 때문에 사악한 사이
비 종교가 그럴듯한 논리를 들어 번창하는 것
같아..
기독교나 불교, 그리고 이슬람교 같은 숭고
하고 거대한 종교들도, 지금은 많이 나아졌다
하더래도 서로를 포용하길 꺼려하는 것 같은
데...
정말로 자기의 종교가 유일한 진리라면은
다른 종교를 포용하고 설득하는 측면을 중요
시돼야 하는 것 아니니?
그런데 뭐하면 종교갈등으로 인한 전쟁이
고, 학살이니....
나는 신의 존재를 믿는다. 하지만 인간이 만
들어낸 종교의 논리에는 반감을 가지고 있어.
결국 인간사에서 종교는 자기 행위의 정당
화 논리로 쓰여졌잖아.. 종교의 순수한 목적을
망각하고, 인간의 탐욕과 아집에 이용되고, 나
아가서는 종교의 진정한 의미보다는 자기가
믿는 것이 옳다는 것에 더 큰 가치를 두어 수
많은 죄악을 저지르는....
나는 종교에 대해서는 환상을 가지고 있어..
가장 아름답고 숭고하며, 또 선하고 자기 희
생적인... 그런데 내가 보기엔 현실 종교는 가
장 탐욕스럽고 독선적이게 보여...
절에서 깡패가 동원되질 않나... 목사가 사
기를 치지 않나...
옛날에는 교황청에서 면죄부를 팔지 않나...”
“자식, 너무 급진적인데...
너 그런 말 함부로 했단 큰일난다.
네가 말한 것처럼 종교에 대한 비난은 곧 신
에 대한 불경으로 받아들여지니까...
여하튼 얘기 잘들었다.”
준수는 내 얘기를 끝까지 기분 상하지 않고
잘 들어주었다.
얘기를 마치고 준수가 지도에 신경을 쓰는
데, 다급한 목소리로 우리가 길을 잘 못 든 것
같다고 했다.
나는 그제서야 사방을 둘러 보았다. 지나가
는 차들도 없었다. 주위는 온통 숲이었다. 준
수의 손에서 지도를 뺏어 들었다. 계속 직진하
면 잃어버렸던 도로와 다시 만날 것 같았다.
준수가 돌아가자고 했지만 온 거리가 만만
치 않아서 앞으로 계속 달렸다. 나는 그때 결
정적인 실수를 저질렀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
다. 그때 차를 돌렸어야 했다.
도로에는 짙은 어둠이 내려앉기 시작했다.
앞쪽에 푯말이 보였다. 가까이 가 보니 이정표
가 아니라‘사슴주의’푯말이었다. 도로로 사
슴이 뛰어나오니 조심하라는 푯말이었다.
시계를 보니 밤 12였다. 어둠이 양편으로 갈
라지며 두 갈래 길이 나왔다. 어느 쪽으로 갈
까 고민하다 우린 왼쪽 길을 택했다. 그때는
전혀 몰랐지만 우리가 선택한 길은 악몽의 시
작이었다.
갈수록 길은 더욱 음침해졌다. 어디선가
물안개가 피어올랐다.도로 위로 구렁이처럼
물안개가 기어올랐다. 안개등을 켰지만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우리 차
에서 나오는 불빛 외에는 아무런 빛도 보이지
않았다.
차를 세우고 소변을 보면서 나는 장난으로
차의 불빛을 꺼 봤다. 세상은 순식간에 시꺼먼
어둠으로 뒤바뀌었다. 뒤에서 불쑥 뭔가 튀어
나올 것 같아 황급히 불을 켰다.
우리는 다시 차를 몰고 도로를 달렸다. 어
둠 속에서, 숲 안쪽 어딘가에서 누군가 우리를
쳐다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분위기 죽이는데.......”
준수가 긴장된 음성으로 말하며 테이프를
새로 꽂았다. 마이크 올드필드의‘ 티넬’이
흘러나왔다. 공포영화 <엑소시스트> 주제 음
악답게 음산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우리는 얼마 동안은 숨막히는 어둠이 끝나
고 불빛이 보일 거라는 기대를 품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의 기대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점점
숲은 깊어졌으나 길은 끝날 것 같지 않았다.
“일한아, 차를 돌려 돌아갈까?”
준수도 걱정되는지 끝없는 어둠 속을 들여
다보며 말했다.”
“글쎄....... 돌아가기엔 너무 늦은 것 같아.
두 시간은 넘게 들어온 것 같은데....... 가는
데까지 가 보자. 가다 보면 표지판이라든가 마
을이 나오겠지.”
나는 힘껏 액셀러레이터를 밟으며 말했다.
미국이 워낙 넓은 나라라는 것은 알지만 설마
하니 끝없이 숲길만 나오지는 않겠지, 하는 일
종의 오기 같은 것이 솟았다. 하지만 한편으로
는 만약 공원이나 산길로 완전히 잘못 들었다
면 큰일이라는 걱정도 없지 않았다.
준수는 지도를 열심히 보았지만 어느 도로
인지 찾질 못했다. 아무리 간선도로라고 하지
만 지도에 나와 있지 않을 수는 없는 일이었
다. 그래서 더욱 기분이 꺼림칙했지만 내친 걸
음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차 안의 분위기는 경직되
어 갔다. 10시간 가량 운전을 한 때문인지 피
로도 슬슬 몰려오기 시작했다.
“정 길이 안 나오면 길가에 차를 대고 자자.”
“그러다가 곰이라도 나타나면 어떡하려고?”
준수가 걱정 같지도 않은 걱정을 했다. 정말
곰이라도 나타나면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만
구데기 무서워서 장 못 담글 수는 없는 일이었
다.
새벽 한 시가 넘어서자 피곤이 급속도로 빠
르게 몰려 왔다. 머리도 아파오고 몸도 으실으
실 떨려 왔다. 밤안개는 더욱 짙어져서 이제는
10미터 전방을 보는 것조차도 불가능했다.
이역만리 타국에서 지도에 나와 있지도 않
은 길을 달린다는 것은 분명 유쾌한 일은 아니
었다. 잠깐 눈이라도 붙이고 나서 다시 돌아가
든지 앞으로 나가든지 해야겠다고 마음먹고
있는데 준수가 불쑥 소리쳤다.
“야! 저기, 무슨 불이 보이는데.......”
나는 깜짝 놀라 준수가 가리킨 쪽을 보았다.
앞쪽에 흐미한 불빛이 보였다. 서 있는 자동차
불빛 같았다. 정말로 정말 사막에서 오아시스
를 발견한 것처럼 반가웠다. 나는 속도를 내서
달렸다. 길을 물어 보기 위해서였다.
불빛이 점점 가까워졌다. 한참 달리다 보니
불빛치 허공에 떠 있음을 알 수있었다. 자세히
보니 자동차 불빛이 아니라 집에서 흘러나오
는 현관불이었다.
우리는 속도를 죽여 불빛을 향해 천천히 다
가갔다. 주변을 둘러보니 그 집뿐만 아니라 다
른 집도 드문드문 보였다. 아주 작은 마을인
모양이었다.
불 켜지 집 앞에 차를 세웠다. 문득,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아무리 늦은 시간이라지만 불
이 모조리 꺼져 있고 단 한 집만 켜 있다
니....... 마치 유령 마을에 들어온 듯한 기분이
었다.
하지만 우리에게 다른 선택은 없었다. 밤안
개가 유렁처럼 떠도는 대기 속을 헤치고 불 켜
진 집을 향해 다가갔다. 초인종을 눌렀다.
여기가 도대체 어딘인지, 모텔은 어디쯤에
있는지...... 물어 보고 싶은 것이 너무도 많았
다.
초인종 소리는 고요 속에서 깜짝 놀랄 만큼
크게 울렸다. 너무 소리가 커서 자욱한 안개
속에서 자고 있는 괴물을 깨어날 것만 같은 착
각이 일 정도였다. 작은 마을을 뒤흔든 초인종
소리가 사라지자 다시 고요함이 찾아왔다.
나는 심호흡을 하며 집안에서 사람이 나오
기를 기다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문이 삐거덕
하는 소리와 함께 열렸다.
문을 열고 나온 사람은 40세쯤으로 보이는
선량하게 생긴 백인이었다. 우리가 우려했던
것처럼 자고 있지는 않았는지 두 눈이 초롱초
롱 빛났다.
준수가 우리의 난처한 처지를 그에게 이야
기했다. 나는 옆에서 준수의 이야기를 듣고 있
다가 한 가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백인 사
내는 이상하게도 말쑥한 외출복을 입고 있는
것이었다.
그는 준수의 이야기를 끝까지 귀찮다거나
당황하는 빛 없이 친절하게 얘기를 들어 주었
다. 우리처럼 길을 잃은 사람들을 아주 많이
봐 온 듯한 태도였다. 그는 이 근처에는 호텔
이나 모텔이 없으니, 자기 집으로 들어와 묶었
다 가라는 것이었다.
준수와 나는 서로를 쳐다보았다. 우린 짧은
순간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음을 깨닫고 그
사람의 호의를 감사하게 받아들이기로 결정했
다.
그 사람은 친절하게 우리를 집안으로 안내
했다. 집안은 깔끔해 보였지만, 웬지 자연스럽
지가 못했다.
거실에는 아무도 없었지만, 마치 방금 전까
지 사람들이 모여 있었던 것처럼 의자들이 제
멋대로 배치돼 있었다. 또한, 테이블 위에 놓
인 재떨이에는 여러 종류의 담배 꽁초가 수북
히 쌓여 있었다.
난 낮에 손님을 맞았다가 치우지 않고 그대
로 둔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그의 호의에
감사하다는 인사를 다시 했다. 그는 우리를 맞
은편 소파에 앉으라고 권했다.
우리는 서로 인사를 교환했다. 우리가 영어
에 익숙하지 못해 더듬거리자 그는 천천히 쉬
운 단어를 골라 가면서 말했다.
그는 자신을 데이빗 윌링이라고 소개했다.
그리고 이 마을 이름은 앤센빌(Ansenvill)이라
는 것이었다. 그는 우리에게 어디서 왔냐고 물
었고 우리가 한국에서 온 학생이라고 하니, 놀
란 표정을 지으며 자기는 한국 사람을 처음 봤
다며 몹시 반가워했다.
“밤이 깊으니 우리 집에서 묶었다 가세요.
빈 방은 충분하니까.......”
데이빗은 우리의 목적지를 물은 뒤에 스스
럼없이 말했다. 우리는 그의 제의에 진심으로
감사했다.
“오랫동안 먼 길을 달려오느라고 피곤했겠
어요. 술 한잔 하세요. 여행자에게 있어 술은
노독을 풀어 주는 아주 좋은 친구죠.”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양주병을 들고
왔다. 몸이 몹시도 지쳐 있던 터라 그리 내키
지는 않았지만 성의를 무시할 수 없어 술잔을
받았다.
우리는 데이빗과 술을 마시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데이빗은 이 마을의 목사라
고 했다. 나는 선량해 보이는 그의 얼굴을 보
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가 가족들의 잠을 깨운 거나 아닌지 모
르겠네요.”
준수가 밤 늦은 방문에 대해서 사과를 했다.
“아녜요! 우리는 지끔껏 이야기를 나누고 있
었어요. 모두들 창문을 통해서 당신네들이 현
관 앞에 서 있는 것을 보았죠. 내가 문을 열려
가자, 동양인을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우리 식
구들은 몹시 부끄러워하며 각자 방으로 들어
갔어요.”
“네, 그랬군요.......”
나는 그의 말에 고개를 주억거리긴 했지만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여러 인종이 말 그대로
짬뽕이 되어 살고 있는 미국에서 동양인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사람이 있다니....... 아무리
시골이라지만 그럴 수 있나?
“두 분다 하나님을 믿죠?”
데이빗이 성직자다운 질문을 해 왔다. 나를
빤히 쳐다보길래 나는 사실 대로 말했다.
“죄송합니다만 저는 교회를 다니지 않습니다.”
“저는 독실한 크리스찬이죠!”
준수가 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재빨리
말했다. 나는 데이빗의 두 눈을 아무 생각없이
보고 있었는데 그의 반응이 이상한 것을 감지
할 수 있었다.
그는 내가 교회를 다니지 않는다고 했을 때
는 가만히 있다가 크리스찬이라는 준수의 대
답에 눈을 번뜩였는데, 내가 볼 때는 분명 그
눈빛은 호의적인 눈빛이 아니었다.
그는 이내 평상시의 눈빛으로 돌아왔고 준
수를 형제라고 부르며 가볍게 손을 잡았다. 하
나님에 대한 이야기가 지루하게 이어질 기미
였다.
난 화장실이 어디 있느냐고 데이빗에게 물
었다. 꿰다 놓은 보릿자루마냥 앉아 있느니 집
안 구경이라도 할 속셈이었다. 데이빗이 복도
끝에 있다고 알려 주었다.
나는 화장실로 걸어가면서 천천히 집안을
살펴 보았다. 집안은 특별한 장식이나 가구도
없이 아주 검소하게 꾸며져 있었다. 거실에는
흔한 텔레비전도 없었으나 집 안은 생각보다
무척 넓었다.
여러 개의 방문을 지나서 복도 끝으로 갔다.
벽에 커다란 그림이 결려 있는 게 보였다. 성
경에서 따온 그림 같았다. 조잡하게 그려진
그림이었지만 이상하게 사람의 마음을 끄는
힘이 있었다.
화폭에는 이스라엘의 영웅 다윗이 거인 골
리앗을 쓰러뜨린 다음이 밟고 있는 장면이 담
겨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성경 구절과는
많이 달랐다.
먼저 그림 속의 다윗의 손에는 골리앗의 심
장인 것처럼 보이는 피묻은 것을 들고 있었다.
골리앗은 그런 다윗의 발 아래 가슴과 머리에
피를 흘린 채 쓰러져 있는 것이었다. 그 뒤로
다윗에게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 군중과 병사
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림이 섬뜩하게 느껴지는 그것 외에도 또
있었다. 바로 다윗의 눈빛이었다. 다윗의 눈에
서는 성경의 영웅의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사악하고 탐욕스런 빛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
다. 거기다가 한술 더 떠서 쓰러져 있는 골리
앗은 흑인으로, 다윗은 금발을 휘날리는 백인
으로 묘사되어 있었다.
흑인들이 보면 몹시 언짢아하겠는데.......
피 흘리고 쓰러진 골리앗을 보니 입안이 씁
쓰름했다. 돌아서려 했지만 그림 속의 다윗의
눈이 자꾸만 걸렸다. 뱀의 눈을 연상시키는,
마치 살아 있는 듯한 눈빛이었다.
그림을 보고 있는데, 갑자기 전신에 소름이
끼쳤다. 누군가가 나룰 주시하고 있는 듯한 기
분이 강하게 들었다. 재빨리 고개를 돌려보니,
여러 개의 방문 중의 한 곳에서 슬그머니 방문
이 닫히는 소리가 들려 왔다. 나는 호기심 많
은 데이빗의 가족이려니 생각하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용변을 보고 손을 싣다 보니 화장실 거울이
없음을 알 수 있었다. 나는 순간적으로 거울에
비치지 않는 드라큘라 백작의 얘기가 생각나
피식 웃었다.
화장실을 나오자 데이빗과 준수의 이야기
소리가 들렸다. 이제는 그만 자자고 해야겠다
고 생각하며 거실로 걸음을 옮겼다. 걷다 보니
방문이 비스듬히 열려 있는 것이 보였다. 순간
적으로 호기심이 발동한 나는 문 틈으로 방안
을 들여다보았다. 방안에는 희미한 등잔불이
밝혀져 있었다.
방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돌아서려는데 뭔
가 움직였다. 나는 깜짝 놀라 안을 자세히 주
시했다. 여러 사람이 있었다. 그들은 모두 검
은 옷을 입은 채 테이블 둘레에 앉아 있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나
는 처음에는 데이빗의 가족들이 예배를 보는
거라고 생각했다. 곧바로만 예배보기에는 너
무 늦은 시간이라는 생각이 이어졌다.
그들은 뭐라고 알아들을 수 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 중얼거림과 함께 모두들 어깨
를 들썩거리곤 했다. 음성도 음성이었지만 그
들의 몸짓이 너무도 기괴하게 보였다. 어디선
가‘쉬시식’하는 소름 끼치는 소리도 들려 왔
다.
도대체 이 사람들이 뭘하고 있는 거야?
나는 안을 더 자세히 보려고 바짝 들이댔다.
갑자기 고개를 숙이고 있던 한 사람이 고개를
벌떡 세우더니,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
사람은 어른이 아니라 열두셋쯤 돼 보이는 남
자아이였다.
금발이 인상적이었지만 나에게 충격을 준
것은 심장까지 꿰뚫을 듯한 날카로운 눈빛이
었다. 도저히 어린아이 눈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는, 차갑고 싸늘한 눈길로 나를 노려보았다.
마치 뱀의 눈과 마주쳐 움직일 수 없게 된
개추리처럼, 나는 순간적으로 몸이 얼어붙는
것을 느꼈다. 이어서 다른 사람들까지 눈치채
기 전에 달아나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황급히 물러나서 걸음을 옮겼다.
거실에서는 데이빗과 준수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훔쳐본 방안 풍경에 대해서는 언
급하지 않고, 다윗의 그림이 인상 깊다는 얘기
만 했다.
데이빗이 시간도 늦었으니 잠자리에 들자고
했다. 그는 우리를 이층으로 안내했다. 이층에
도 긴 복도를 따라 방이 여러 개 있었다. 우리
를 맨 끝방으로 안내했다.
침대 두개와 화장실이 딸려 있는 깔끔한 방
이었다. TV와 전화만 없어 그렇지, 웬만한 모
텔의 방에 비교해도 손색이 없었다. 자주 우리
같은 여행자가 묶어 갔는지 방안에 먼지도 없
었고, 금방 갈은 듯이 침대 시트나 베개도 깨
끗했다.
데이빗은 아침까지 푹 쉬라며 방을 나섰다.
우리는 데이빗의 호의에 감동해서 다시 한 번
감사를 표했다. 그가 나가고 나자 준수가 창밖
을 보면서 말했다.
“야, 여기 좀 봐. 이런 시골에도 도둑이 많나
보지?”
나는 다가가서 창을 살폈다. 창문에는 두꺼
운 쇠창살이 처 있었다. 순간적으로 쇠창살은
밖에서의 침입을 막기 위한 것이 아니라 밖으
로의 탈출을 막기 위한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
이 들었다.
“만약 불이라도 나면 어떡하려고 이렇게 쇠
창살을 처 놨을까?”
내가 중얼거리자 준수가 머리를 쥐어 박으
며 말했다.
“인마, 재수 없는 소리 그만해.......어, 저것
좀 봐! 불이 켜지고 있어.”
재빨리 창밖을 보았다. 정말로 쥐죽은 듯이
잠들었던 집집마다 하나, 둘씩 불이 켜지고 있
었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새벽 2시가 넘
은 시간에 일제히 불이 켜지다니.......
문득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거미줄에 희생
물이 걸리자, 자는 척하고 있던 거미가 눈을
뜨고 움직이는 듯한.......
생각을 너무 많이 해서인지 몸도 으실으실
떨리고 머리도 아파 왔다. 준수에게 감기약 같
은 것 없냐고 묻자 준수가 한국에서 비상 상비
약으로 준비해 왔다며 알약을 내밀었다. 나는
그걸 먹은 뒤 침대로 다가갔다. 침대에 누우려
는데 바닥에 검붉은 얼룩이 보였다.
“어, 이게 뭐지?”
나는 주저앉아 얼룩을 살폈다. 검붉은 얼룩
이 마치 핏자국처럼 보였다.
“야, 누가 포도주를 먹다 흘린 거겠지. 피곤
하다, 자자.”
준수가 길게 하품을 하며 말했다. 나는 불길
하게 느껴지는 얼굴을 보다가 침대에 누웠다.
준수가 불을 껐다.
창문 사이로 마을의 불빛이 새어들어왔다.
쇠창살이 천장에 괴기하게 비쳤다. 준수가 졸
음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내일은 수민이를 볼 수 있겠지....... 못 만
난 지 벌써 3개월이 넘었어. 그 동안 잘 지내
고 있는지....... 헤어질 때 눈물을 거렸는
데....... 만나면 잘해 줘.......”
준수는 금세 코를 골았다. 마치 마취제에 중
독된 사람처럼....... 준수의 코고는 소리를 들
으며 나도 금세 잠에 곯아떨어졌다.
처음엔 꿈이려니 했다. 어디선가 고통스런
비명소리가 들려 왔다. 귀에 너무도 거슬리는
소리였다. 곧 그쳐 주길 간절히 바랬지만 나의
기대와는 정반대로 비명소리는 계속 이어졌
다. 잔혹한 고문을 당할 때나 낼 수 있는, 폐부
깊은 곳에서 흘러나오는 쥐어짜는 듯한 신음
이었다.
나는 지독한 악몽을 꾸었다고 생각하고 눈
을 떴다. 희미한 신음소리가 현실까지 이어지
고 있었다. 가끔씩 몸서리가 쳐지는 비명소리
도 들려 왔다.
시계를 보았다. 새벽 4시를 조금 넘어서고
있었다. 밖은 아직도 깜깜했다. 나는 일단 어디
서 나는 소리인지 알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준수를 깨우기 위해 흔들었다. 하지만 준수
는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볼을 때리며
일어나라고 재촉했지만 준수는 마치 시체처럼
미동도 하지 않았다.
나는 준수를 깨우는 걸 포기하고 침대에서
내려섰다. 나 혼자서 소리가 어디에서 나는지
알아보는 수밖에 없었다. 대충 옷을 걸치고 방
문을 열었다.
삐꺽!
문 열리는 소리가 너무도 크게 들려 왔다.
복도는 깜깜하고 고요했다. 아무런 인기척도
느낄 수 없었다. 귀를 기울여보았다. 신음소리
는 여전히 어둠 속에서 들려 오고 있었다. 아
래쪽에서 나는 것 같았다.
조심스레 마루 위로 발을 내딛었다. 삐거덕
거리는 소리가 가슴을 철렁하게 했다. 복도 구
석에서 뭔가가 뿔쑥 튀어나올 것 같았다. 겁이
났다. 그냥 들어가 잠이나 잘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호기심이 날 부추겼다.
방에서 계단까지 10미터 남짓되는 거리가
마치 천리나 되는 것처럼 느껴졌다. 긴장한 때
문인지 손에 식은땀이 고였다.
계단에 서서 귀를 기울여 보았다. 소리는 이
집 지하에서 나는 것 같았다. 심호흡을 길게
하고 조심스럽게 계단을 내려갔다. 발을 내딛
을 때마다 귀에 거슬리게 삐거덕거리는 소리
가 났다. 거실로 내려서자마자 누가 보고 있다
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복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누군가 나를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나는 너무도 놀라서 손끝 하나 까딱할 수 없
었다. 한참 보고 있자 비로소 그 눈이 정체를
알 수 있었다. 바로 복도 저편에 걸려 있는 그
림, 다윗의 눈이었다. 비교적 먼 거리임에도
불구하고 그림에서 형형한 빛이 뿜어져 나옴
을 뚜렷히 볼 수 있었다.
눈은 마치 살아 있는 듯이 보였다. 형광 물
질 탓이겠지....... 나는 다윗의 눈에서 시선을
떼고 지하실로 통하는 길을 찾아 보았다.
일층으로 내려오자 신음소리가 더욱 명확하
게 들려 왔다. 귀에다 신경을 모은 채 조심스
레 걸음을 옮겼다. 소리를 따라가다 보면 지하
실로 향하는 출구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한참 걸음을 옮기다 보니 거실 끝에서 뭔가
시커먼 것이 움직이고 있었다. 언뜻 보기에는
사람 같았다. 물체는 네 발로 이리저리 기어다
니고 있었다. 그것은 하나가 아니고 둘이었다.
두 사람이 기어다닌다고 생각하니 등골이 오
싹해졌다.
나는 그것들을 꼼짝 않고 쳐다보았다. 그것
들은 나를 발견했는지, 나에게 다가왔다. 나는
얼떨결에 뒷걸음질 쳤다. 그것들은 점점 가까
이 다가왔다.
그것들이 사람이 아니라 개였다. 놈집이 사
람 크기만한 검은 사냥개들이었다. 개들은 날
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내고 으르릉거렸다. 등
줄기에 식은 땀이 흘러내렸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는데 사냥개가 앞을 가
로막자 당혹스러웠다. 데이빗은 개에 대해서
언급조차 하지 않았는데 난데없이 개라니...
개들은 일정한 거리를 두고 으르릉거렸다.
개들이 나를 공격할 것 같지 않았다. 용기를
내서 앞으로 한 발 내딛어 보았다.
개들이 갑자기 와락 달려들었다. 나는 기겁
을 해서 뒤로 물러섰다. 이빨을 드러낸 채 개
들이 다시 으르릉거렸다. 마치 한 발만 더 다
가오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듯이.......
나는 별 수 없이 뒷걸음질 쳤다. 그놈들에게
등을 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내가 천천히 물러
서자 개들은 드러냈던 적의를 거두었다.
마침내 계단 난간을 잡았다. 개들은 나를 노
려보면 제자리에 슬며시 앉았다. 마치 감옥
앞을 지키는 충실한 간수처럼.......
나는 다시 이층 방으로 돌아갔다. 잠자리에
누웠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이 집의 분위기로
보아서는 아무리 생각해도 평범한 가정집 같
아 보이지는 않았다. 한참 뒤척이다가 귀를 기
울여 보니 어느새 비명소리는 그쳐 있었다.
내일 아침 일찍 이곳을 떠나야겠어. 예감이
좋지 않아.......
나는 그림 속의 다윗, 늦은 밤의 이상한 예
배, 금발의 소년, 비명소리, 검은 개들.......
이 집에 들어서면서부터 부딪혔던 수많은 의
혹들을 더듬다가 나는 한순간에 잠이 들었다.
눈을 뜨니 눈부신 햇살이 내리쬐고 있었다.
데이빗과 마신 술 때문인지 지끈거렸다. 더군
다나 꿈자리까지 뒤숭숭해서 몸이 영 개운하
지 않았다.
준수는 아직도 시체처럼 자고 있었다. 시계
를 보니 11시였다. 나는 서둘러서 준수를 깨웠
다. 이번에는 몇 번 흔들자 눈을 떴다.
“야, 열한시야! 빨리 가자!”
“머리가 너무 아파! 약 탄 술을 마신 것 같아.”
준수가 인상을 찌푸리며 마지못해 몸을 일
으켰다. 나는 준수에게 어젯밤에 있었던 이야
기를 들려 주었다.
“네가 악몽을 꾼 걸 거야. 몸이 너무 피곤하
다 보면 그럴 수 있거든.”
준수는 침대에서 내려서며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하긴 내가 생각해도 너무 괴상한 일이
어서 준수의 말에 반론을 펼 수 없었다.
하지만 기분을 여전이 께림칙했다. 한시라
도 빨리 이 집을 나서고 싶었다.
준수를 재촉해서 간단히 씻은 뒤에 짐을 챙
겼다. 방을 정리하고 나서 문을 나섰다. 이층
에서 내려와 복도 저편을 보니, 어젯밤의 일이
생각났다. 그림 속의 다윗은 여전히 기분 나쁜
눈초리로 나를 보았다.
개들의 흔적을 찾아보았다. 하지만 개들은
어디에도 없었다. 데이빗은 거실에서 담배를
피우다가 우리를 맞았다.
“잘 잤어요?”
“아, 네.......”
“함께 식나나 하죠. 아침이라 하기에는 너무
늦었고 점심이라 하기에는 이르지만.......”
“됐습니다. 우린 이만 가 보겠습니다.”
“가실 때 가시더라고 식사는 하시고 가셔야
지요. 이미 다 준비해 놓았답니다.”
나는 한시 바삐 이 집과 이 마을에서 벗어나
고 싶었지만 데이빗이 끈덕지게잡아 어쩔 수
없이 부엌으로 갔다.
식탁에는 정말로 우리를 위한 아침이 준비
되어 있었다. 먹음직스런 토스트와 신선한 우
유와 커피, 그리고 스크램블 등이 차려져 있었
다.
“어서와요. 시장하시죠?”
데이빗의 부인이 친절하게 우리를 맞았다.
나이는 30대 후반쯤으로 보였다. 눈초리가 날
카로웠지만 목소리는 상냥하기 그지없었다.
우리는 식사를 하며 데이빗에게 인디아나로
가는 길을 물었다. 그는 식사 후에 밖에 나가
서 자세히 가르쳐 주겠노라고 대답했다.
준수는 식사 전에 기도를 했다. 그러자 데이
빗이 허둥대며 준수를 따라서 기도를 하기 시
작했다.
목사님도 식사 전에 기도하는 걸 잊어먹기
도 하나?
조금 이상한 기분이 들었지만 인간이니 그
럴 수 있겠지 하면서 토스트를 먹기 시작했다.
음식은 맛있었다. 우리는 서둘러서 식사를 끝
마쳤다.
“자, 나가죠. 내가 길을 가르쳐 줄 테니까.”
식사가 끝나고 나자 데이빗이 식탁에서 일
어섰다. 우리는 데이빗 부인에게 감사의 인사
를 한 뒤에 집을 나섰다.
밝은 대낮에 보는 마을은 그런 대로 정겹게
느껴졌다. 길을 양 편으로 비슷한 모양의 집들
이 사십여 채 가량 서 있었다. 데이빗은 앞으
로 쭉 달리다가 두 갈래 길에서 좌회전하면 잃어
버린 도로를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고 말했다.
우리는 차 앞에 서서 데이빗에게 다시 한번
고맙다고 인사를 했다. 데이빗은 언제든지 들
러달라며 미소를 띄웠다. 우리는 데이빗과 악
수를 하고 차로 다가갔다.
차 모습이 조슴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 바
퀴를 보았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자동차의 네 바퀴가 모두 펑크가 나 있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알 수 없지만 참
으로 난감했다.
이런 작은 마을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누구의 소행인지 알 수도 없는 상황에서 욕
만 퍼붓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스페어
타이어는 하나밖에 없었다.
“혹시 이 동네에 자동차 수리점이 있습니까?”
데이빗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우리의 처지
에 동정의 눈길을 보내면서.......
주저앉은 차를 보고 있으니 한숨만 나왔다.
렌터카라서 차를 버리고 갈 수는 없는 노릇이
었다.
나는 견인차나 타이어를 보내 달라고 하기
위해서 가장 가까운 마을이 어디냐고 물었다.
데이빗은 자동차 수리점이 있을 정도의 가장
가까운 마을은 여기서 60마일 정도 떨어져 있
다고 했다. 하지만 지금 공사 때문에 시외 전
화가 불통라는 것이었다.
엎친 데 덮친 격이었다. 나는 주저앉아서 펑
크 난 자국을 살폈다. 칼자국이 나 있는 걸로
봐서는 짐승들의 소행은 아니었다.
대상을 알 수 없는 누군가에게 다시 욕설을
퍼붓고 있는데 데이빗이 미안해하며 아마도
아이들의 소행일 거라고 말했다.
이 난국을 어떻게 대처해 나갈 것인가 고민
하고 있는데 데이빗이 새로운 제의를 해 왔다.
“시외전화는 오늘 저녁쯤이면 통화가 가능
할 거예요. 그러니 그때 가서 전화를 하는 게
어때요?”
나는 한시라도 빨리 이 기분 나쁜 마을을 벗
어나고 싶었지만 데이빗의 제안을 따르지 않
을 수 없었다. 그 방법만이 유일한 해결책이기
도 했다.
“저희 집에 가서 쉬는 건 어때요?”
“아, 아닙니다. 천천히 마을이나 둘러보죠,
뭐.”
“그러세요. 대신 저녁 식사는 우리 집에서
하셔야 해요. 아셨죠?”
“네, 그러죠.”
데이빗의 제안을 준수가 받아들였다. 우린
저녁 6시까지 데이빗의 집으로 가겠노라고 약
속을 했다. 데이빗은 6시에 보자며 돌아섰다.
나는 멀어져 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다가 불쑥
질문을 하나 던졌다.
“저, 혹시...... 집에서 검은 사냥개를 기르지
않습니까?”
데이빗은 내 질문에 순간적으로 움찔하며
놀랬다. 하지만 그는 이내 태연한 얼굴로 돌아
서서 고개를 저었다.
“아뇨. 저희는 개를 기르지 않아요. 그런데
왜 그러시죠?”
“아닙니다. 그냥...... 밤에 자는데 개 짖는
소리가 들려와서.......”
“이웃집에서 나는 소리였겠죠.”
데이빗은 의혹의 눈초리로 나를 보다가 미
소를 띄우고는 돌아섰다.
“이상해....... 분명 개를 봤는데 기르지 않는
다니...... 너도 봤어야 하는 건데.......”
“깨우지 그랬어?”
“뭐? 야, 내가 얼마나 흔들었는데 이제 와서
그런 소리를 하는 거야?”
“그랬어? 이상하네. 난 원래 잠귀가 밝아서
조금만 흔들어도 깨어나는데. 더군다나 난 그
리 피곤한 상태도 아니었는데....... 정작 피곤
해서 곯아떨어져야 할 사람은 너 아니었냐?
장시간 운전을 한 데다 감기 기운이 있다며 감
기약까지 먹었잖아?”
“감기약?”
퍼뜩 머리를 스쳐가는 것이 있었다. 감기약
이라.......
“혹시, 어젯밤에 마신 술에 수면제를 탔던
걸이 아닐까? 그래서 너는 잠에 곯아떨어졌던
거고...... 나는 감기약을 먹었기 때문에 수면
제가 약효를 발휘하지 못했던 거고.......”
“야, 너 영화 찍냐? 데이빗 씨가 우리를 잠
재워서 뭘하겠어?”
“글쎄.......”
“쓸데없는 상상하지 말고, 마을이나 돌아보자.”
준수가 한심하다는 듯이 나를 돌아보았다.
나 역시 간밤에 꿈을 꾼 건지도 모르는다는 생
각이 들어 더 이상 그 부분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았다.
마을은 정말로 너무도 작았다. 데이빗이
200여 명이 사는 작은 마을이라고 했을 때도
그런가 보다 했는데, 돌아다녀 보니 마을이라
고 부르기도 뭐할 정도로 작은 마을임을 알 수
있었다.
도로 양편으로 비슷비슷하게 생긴 이층 가
옥이 늘어서 있었다. 베란다에 놓인 흔들의자
에 앉아 책을 읽거나 신문을 보는 사람들이 자
주 보였다.
그들은 힐끗힐끗 우리를 돌아보았는데 눈빛
이 심상치 않게 느껴졌다. 경계심과 경멸, 그
런 것들이 뒤섞인 듯한 눈빛이었다.
길거리에서 마추치는 사람들도 표정이 모두
굳어 있었다. 준수 역시 이상한 분위기를 느꼈
는지 흥얼거리던 노래를 멈췄다. 아마도 동양
인을 난생 처음 봐서 그럴 거라고 위안을 해
봤지만 기분은 그리 좋지 않았다.
앤센빌이라는 마을은 돌아다니면 돌아다닐
수록 이상한 점이 너무도 많음을 느낄 수 있었
다. 상점 같은 것은 아예 하나도 찾아볼 수 없
었다. 또한 생계 수단으로 삼을 만한 논밭이나
공장 같은 것도 보이지 않았다. 사방이 숲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이 곳에 사는 사람들은 도대
체 무얼 해서 먹고 사는지 궁금했다.
마을 어귀까지 걸어가면서 우리는 많은 사
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들은 모두 딴청을
피우고 있었지만 우리를 유심히 지켜보고 있
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천천히 걸어가다가
갑자기 고개를 돌리면 마을 사람들은 빤히 쳐
다보고 있다가 황급히 고개를 떨구곤 했다.
마을을 천천히 돌고 나니 어느새 1시가 넘어
있었다. 아침을 서둘러서 먹은 때문인지 허기
가 졌다.
우리는 식당을 찾아 마을을 돌다가 지나가
는 사십대의 남자에게 식당이 어디 있느냐고
물었다. 그는 퉁명스런 목소리로 저쪽 건물로
가 보라며 하얀 이층 건물을 가리켰다.
그가 가르쳐 준 건물로 가 보았다. 어디에도
식당이라는 표시가 없었다. 간판도 없었으며
그렇다고 해서 건물 자체가 좀 크다는 것 외에
는 특이하게 생긴 것도 아니었다. 어쨌든 우리
는 식사를 하기 위하여 집 안으로 들어갔다.
건물안에는 수십 명이 식사를 하고 있었다.
분명 우리가 들어가기 전에는 웅성거리고 있
었는데, 우리가 들어서자마자 그들은 이야기
를 갑자기 멈추고 우리를 빤히 쳐다보았다. 마
치 기분 나쁜 침입자를 보듯이 강한 적대감을
감추려 하지 않은 채.......
우리가 빈 자리를 찾아 움직이자 그들은 묵
묵히 우리의 동작을 좇았다. 아무래도 분위기
심상치 않았다. 준수가 나가자고 신호를 보냈
다. 나는 준수와 함께 천천히 밖으로 나갔다.
그들은 우리가 완전히 나갈 때까지 아무도 움
직이지 않았다.
“촌놈들...... 아무리 동양인을 처음 본다지
만 그렇게 기분 나쁜 눈길로 쳐다보다니.......
재수 없는 마을이야!”
준수가 침을 뱉으며 말했다. 우리는 기분 전
환을 하기 위해서 차로 돌아갔다. 차에서 기타
를 꺼내 가지고 우리는 마을 어귀 잔디밭에 앉
아 노래를 불렀다.
이십여 미터쯤 떨어진 벤치에서 마을 사람
들 서넛이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나
는 그들이 우리를 감시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저버릴 수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 마을이야. 데이빗
이 분명 자기가 목사라고 했잖아. 그런데 오늘
이 일요일인데도 예배 같은 걸 보는 것 같지
않아. 마을을 돌아다녀 봤지만 교회 같은 건물
도 보이지 않고.......”
“내가 생각해도 좀 수상해. 아까 식당에서
보니까 전부 백인들만 있더라고. 물론 그거야
시골 마을이다 보니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문제는 왜 아이들이 하나도
보이지 않느냐는 거야. 그렇다고 노인들만 있
는 것도 아닌데 말야.”
준수의 이야기를 들으니 어젯밤에 보았던
금발의 여자아이가 떠올랐다.
“수민이 많이 기다리고 있을 텐데....... 그나
저나 빨리 전화가 되야 할 텐데.......”
“자식, 온통 머릿속엔 수민 씨 생각밖에 없
구나. 수민 씨가 그렇게 좋냐?”
“수민인 자아가 무척 강한 애야. 거기에 내
가 끌린 건지도 모르지. 그 애는 내 음악을 이
해해 주는 몇 안 되는 사람 중의 한 명이야. 게
다가 그 애는 내 꿈이 이루어질 거라고 믿고
있어. 그래서 난 그애 앞에서 기타를 연주할
때, 가장 큰 행복을 느끼지.”
준수는 기타를 끌어안고 있다가 래드 제플
린의‘Stairway To Heaven’을 부르기 시작
했다. 나는 잔디 밭에 팔베개를 하고 누워 감
미로은 연주와 노래를 들었다.
천국으로 가는 계단이라...... 결국 죽음으로
가는 길이라는 얘기가 아닌가. 죽음으로 가는
길이 이토록 감미로울 수도 있구나.
나는 준수의 노래와 연주를 듣고 있으니 졸
음이 몰려 왔다. 어젯밤에 제대로 잠을 못 자
고 설친 때문인지 눈꺼풀이 점점 무겁게 내려
앉았다.
이제 그만 일어나라는 준수의 목소리에 눈
을 뜨니 숲 속에 다시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시계를 보니 벌써 오후 5시반이었다.
세 시간 넘게 잔 모양이었다.
준수는 이제 그만 데이빗의 집에 가서 전화
나 해 보자는 것이었다. 나는 잔디밭에서 몸을
일으켰다. 벤치를 보니 내가 잠들기 전에 보았던
사람들이 그대로 앉아서 이쪽을 보고 있었다.
참 별난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내
색하지 않고 우리는 천천히 데이빗의 집으로
갔다. 데이빗은 집 밖에 나와서 우리를 기다리
고 있었다. 밝은 표정으로 곧 통화가 될 것 같
으니, 집에 들어가 저녁이나 같이 하자고 잡아
끌었다.
점심도 걸러 배가 고프던 차라 우리들은 못
이기는 척하고 집안으로 들어갔다. 데이빗은
점심때 식당에서 있었던 작은 소동에 대해 마
을 사람들을 대신해 사과했다. 동양인을 처음
봐서 그랬다는 것이었다.
식탁에는 만찬이 준비되어 있었다. 아침에
본 미세스 데이빗이 식탁에 앉아 있다가 자기
아들이라며 간밤에 보았던 금발의 소년을 소
개시켜 주었다.
“우리는 이 아이를 그냥 다윗이라는 애칭으
로 부르죠.”
아이는 표정없이 우리를 주시했다. 마치 해
부하기 전의 개구리를 노려보듯이....... 유쾌
하지 않은 소년이었다.
소년이 앉은 자리는 식탁의 제일 상석이었
다. 소년은 부모들 위에서 군림하고 있는 듯한
인상을 주었다.
데이빗이 식사에 앞서 어제 마시던 술을 가
져와 한잔씩 하라고 권했다. 나는 운전을 핑계
로 사양했지만 입술만 대라고 바람에 마지못
해 잔을 잡았다.
건배하면서 나는 마시는 시늉만 했다. 준수
는 따라 주는 대로 다 받아 마셨지만, 나는 술
에 뭔가 탔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하나
도 마시지 않았다.
미세스 데이빗이 수프를 내 왔다. 나는 배가
고파 있던 차라 수프를 남김없이 다 먹었다.
수저를 내려놓으려는데 준수가 갑자기 옆으로
힘없이 쓰러졌다.
나는 당황해서 준수를 부축했다. 쓰러진 준
수를 일으켜세우려다가 다른 사람들의 반응이
냉담함을 깨달았다. 그들은 팔장을 끼고서 나
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었다. 기분 나쁜 미소
를 입가에 흘리면서.......
순간적으로 술에 뭔가 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술을 한모금을 마시지 않았으니 천만다
행이었다. 나를 의자를 박차고 벌떡 일어났다.
“도대체 이게 무슨 짓들입니.......”
데이빗 씨를 향해서 따지려드는 순간, 갑자
기 어지럼증이 일었다. 주방이 빙글빙글 돌았
다. 빈 수프 그릇이 눈에 들어왔다. 수프 안에
도 뭔가 탄 모양이었다.
다리에 힘이 빠져 나갔다. 나는 더 이상 버
티지 못하고 무너져 내렸다. 바닥에 쓰러져 있
으면서도 정신을 차리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역부족이었다. 의식을 잃기 전에 내가 마지막
으로 본 것은 우르르 몰려온 사람들과 싸늘한
눈빛으로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는 다윗의 눈
빛이었다.
소년은 마치 그림 속의 사악한 다윗처럼 냉
소어린 표정으로 내려다보았다. 나의 의식 속
으로 이내 어둠이 밀려들었다.
눈을 떴다. 전신이 욱신거렸다. 사방이 어둑
컴컴했다. 문득, 꿈을 꾸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머리가 지끈거려 세차게 흔들
었다. 점차 저녁 식사와 함께 다윗의 기분 나
쁜 시선이 떠올랐다..
밖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간간이 들려 왔
다. 사방을 둘러보았다. 정확한 용도는 모르겠
지만 무슨 창고 같았다.
나는 우선 준수부터 찾아보았다. 구석진 곳
에 시커먼 물체가 있어 자세히 보니 준수였다.
준수는 몸을 벽에 기댄 채로 앉아 있었다. 머
리가 무겁게 떨궈져 있는 걸로 봐서 아직까지
의식을 잃고 있는 모양이었다.
“준수야!”
목소리를 낮춰 불러 보았지만 준수는 미동
도 하지 않았다. 나는 일어나서 준수에게 다가
갔다. 무심코 발을 옮기는 순간, 뭔가가 다리
를 확 잡아당겼다. 앞으로 넘어지려는 몸의 중
심을 가까스로 잡았다.
정신이 확 들었다. 발 아래를 내려다보니 쇠
사슬이 발목에 채워져 있었다. 로마시대에 죄
수들의 발목에 채우던 쇠사슬과 흡사했다. 팔
로 힘을 줘 보았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주저앉아서 사방을 살펴보았다. 위쪽에 창
문이 있었다. 창문을 통해서 웅성거리는 소리
가 들려 왔다. 출입구를 찾아보았다. 철문은
계단 위쪽에 놓여 있었다.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나는 차분히 생각
을 정리해 보았다. 앤센빌에 들어와서 생긴 일
들을.......
아무리 생각해 봐도 자동차 타이어를 아이
들이 장난삼아 펑크낸 것 같지는 않았다. 모든
것이 계획적이었다는 의혹을 저버릴 수 없었다.
모든 계획은 데이빗이 꾸몄으리라. 그는 왜
우리에게 약을 먹인 것일까? 왜 우리를 잡아
놓은 것일까? 돈이 목적이었다면 우릴 좀더
손쉽게 해치울 수도 있었으리라. 그렇다면 그
는 다른 목적으로 우릴 잡아 놓았다는 이야긴
데...... 도대체 그 목적이 무었일까?
데이빗이 우리에게 약을 먹이고 가두어 둔
이상 순순히 풀어 주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이대로 앉아 있다가 당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일단 여기를 빠져 나가는
것이 최선이리라.
나는 다시 한 번 쇠사슬을 살펴보았다. 발목
을 결박하고 있는 쇠사슬은 3미터 가량 되었
다. 쇠사슬은 벽에 부착되어 있었다. 혹시나
해서 힘껏 잡아당겨 보았지만 꼼짝도 하지 않
았다.
창문으로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웅
성거리는 쇠는 이내 광기어린 환호성으로 변
했다. 잡음과 함께 석인 마이크 소리가 들려
왔으나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다.
무슨 집회나 의식이 있는 모양이었다. 환호
성은 파도처럼 낮아졌다가 다시 높게 솟구쳤
다. 마음은 점점 다급해졌다. 준수를 깨우기
위해서 다시금 불러 보았지만 아무 반응이 없
었다.
주변에 흩어져 있는 쇳조각이나 작은 콘크
리트 조각으로 던져 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나보다 많은 양의 약을 먹었기 때문인 것 같았다.
나는 준수를 깨우는 걸 미뤄 두고 다시 앉아
서 쇠사슬을 살펴 보았다. 내 오른 발목을 채
우고 있는 것은 마치 커다란 개 목에 채우는
쇠고리와 흡사해 보였다. 두 손으로 힘껏 벌려
보았지만 조금도 변화가 없었다.
뭔가 방법이 있을 거야...... 그래, 침착하게
잘 생각해 봐. 겁 먹지 말고.......
나는 손바닥을 비비며 지금까지 봐 왔던 수
많은 영화를 더듬어 보았다. 영화 속의 주인공
들이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탈출했는 지를.......
쇠고리를 내려보다가 무심코 손바닥으로 훑
어 보았다. 뭔가 이음새 같은 부분이 느껴졌
다. 자세히 살펴 보니 나사못이 박혀 있었다.
천천히 나사못 주변을 살펴 보았다. 나사못
만 풀면 자물쇠 부분이 떨어져 나갈지도 모른
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을 묶기 위해 만든
고리가 아니라, 개를 묶어 두기 위해서 만들었
다면 충분히 그럴 수도 있었다.
나는 나사못을 빼기 위해 손톱으로 쥐고 돌
려 보았다. 하지만 손톱만 부서질 뿐 나사못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도구...... 도구가 있어야 해!
사방을 둘러보았지만 드라이버나 칼날 같은
것은 눈에 띄지 않았다. 쇠톱 부러진 거라도
있으면 어떻게 해 볼 텐데 그런 것마저 보이지
않았다.
갑자기 밖에서 들리던 웅성거림이 일시에
뚝 멈췄다. 돌연한 고요가 나를 더욱 초조하게
했다. 일시적이 고요가 끝나면 엄청난 일이 벌
어질 것만 같았다.
나는 다시 한 번 주변을 둘러보다가 내 몸에
부착되어 있는 쇠붙이가 없을까 살펴 보았다.
혁대 버클이 보였다.
서둘러 혁대를 풀었다. 버클로 나사못을 돌
려 보았다. 나사못의 홈과 버클의 두께가 일치
하지 않아 여러 번 헛손질을 해야 했다.
나는 있는 힘껏 버클로 나사못을 누르며 천
천히 돌렸다. 조금씩 조금씩 돌아가는 기미가
보였다.
서서히 나사못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이마
에 땀방울이 맺혔다. 나사는 점점 헐거워져 가
다가 급기야는 손으로 돌릴수 있는 정도까지
되었다.
나사못은 빼자‘쨍그렁!’하는 소리와 함께
발목을 감싸고 있던 쇠사슬이 떨어져 나갔다.
가슴속이 환희로 차올랐다. 나는 뻐근한 발목
을 한 차례 문지른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
둘러서 기절해 있는 준수에게 다가갔다.
준수를 흔들어 깨우기 위해서 손을 가져 갔
다가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준수가 피를 흘
리며 죽어 있었다.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기 위
해 숨호흡을 한 뒤에 다시 한 번 살펴 보았다.
사내는 준수가 아닌 것 같았다. 옷차림도 달
랐고 몸집도 달랐다. 목덜미의 색깔로 보니 흑
인 같았다.
그는 완전히 죽어 있었다. 그의 앞가슴은 온
통 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나는 그의 얼굴
을 보기 위해 턱을 치켜세웠다가 놀라 엉덩방
아를 찧었다.
그의 얼굴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으며 한쪽 눈알은 빠져
있었다. 나머지 한쪽 눈을 커다랗게 뜬 채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고 밑을 내려다보
다가 나는 새로운 사실을 깨닫고 전신을 떨어
야 했다. 피범벅이 되어 있는 사내의 가슴에는
놀랍게도 커다란 구멍이 나 있었다.
누군가 심장을 파내기 위해서 오른쪽 가슴
을 예리한 흉기로 들어낸 모양이었다. 너덜거
리는 살점을 보고 있다 보니 토악질이 나왔다.
나는 토악질을 하면서 준수를 떠올렸다.
준수를 어디로 끌고 간 걸까? 이들은 분명
평범한 마을 사람들은 아니야. 이토록 잔혹한
살인을 할 정도라면 사악한 집단인 것만은 확
실해. 일단 이곳을 빠져 나가자!186
울렁거리는 뱃속을 어루만지며 창가 쪽으로
갔다. 한쪽에 부서진 의자와 빈 박스가 보였
다. 정신없이 의자와 박스를 창문 밑으로 날랐
다. 수북히 쌓아놓은 뒤에 조심스레 밟고 올라
갔다. 밑에 있는 것들이 일시에 무너져 내렸
다. 나는 가까스로 창틀을 잡고 매달렸다.
턱걸이 하듯이 몸을 끌어올려 밖을 보았다.
바로 눈앞은 화단이었다. 저 멀리서 여러 개의
햇불이 일렁거리고 있었다. 무슨 제단 같은 것
도 보였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 그곳에 모여
있었다.
한참을 내다보고 있으니 갑자기 뒷덜미가
서늘해져 왔다. 시체가 벌떡 일어나 내 뒷덜미
를 잡아챌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는 창
고 바닥으로 뛰어내려 사방을 살폈다.
내가 우려했던 그런 일들은 다행히도 벌어
지지 않았다. 시체를 외면하고 싶었지만 시선
은 자꾸만 시체 쪽으로 갔다. 시체가 불시에
벌떡 일어나 나를 덥칠 것만 같아 불안했다.
창문을 통해 나가려면 유리와 창틀을 부술
도구가 필요했다. 잡동사니를 쌓아둔 곳을 뒤
져 보었다. 야구 방망이 하나가 보였다. 두 손
에 쥐니 전신에 힘이 솟았다. 마치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이었다.
다시 잡동사니들을 창틀 아래 차근차근 쌓
았다. 그 위에 올라서서 야구방망이로 유리창
을 깼다. 창틀에 달라붙은 유리조각까지 떼어냈
지만 몸이 빠져 나가기에는 무리인 것 같았다.
창틀을 야구방망이로 쳐서 넓혀야 할 것 같
았다. 나는 다시 내려와서 헝겊조각을 야구방
망이에 감았다. 그리곤 다시 위로 올라가 야구
망망이를 힘껏 휘둘러 창틀을 넓혔다.
시체가 자꾸만 걸렸다. 시체가 벌떡 일어날
것만 같은 불길한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
았다.
창틀이 일그러지며 몸이 빠져나갈 정도의
공간이 생겼다. 창 밖을 주의깊게 살펴보았으
나, 화단 주변에는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모
두 집회 장소에 모여 있는 듯싶었다.
갑자기 집회장에서 음산한 음악이 흘러나왔
다. 사람들이 음악에 맞춰 노래인지는 주문인
지 분간할 없는 소리로 웅얼거리기 시작했다.
소름끼치는 음악과 합창이었다. 마치 악마의
제단에 희생물을 바치기 전에 부르는 악마 예
찬가 같았다.
나는 야구 방방이를 먼저 밖으로 던져 놓고,
창틀에 매달렸다. 그리곤 있는 힘을 다해 창틀
로 올라갔다. 흩어진 유리파편이 손바닥과 가
슴을 찔렀다.
가슴을 가까스로 창틀 밖으로 빼낸 순간, 갑
자기 누군가 내 발목을 잡아당겼다. 나는 필사
적으로 몸을 뒤틀어 뿌리치고서 창문을 빠져
나왔다.
야구방망이를 들고서 창고 안을 들여다보았
다. 시체가 따라온다면 머리통이라도 한 대 갈
길 생각이었는데 창고 안은 잠잠했다.
불쑥 손이라도 튀어 나와 내 목을 잡아챌 것
같았지만 기분뿐이었다. 나의 일시적인 착각
이었나 보았다. 시체는 처음 보았을 때와 같은
자세로 구석에 기대고 있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집회장을 돌아보았
다. 창고에서 일단 벗어는 났으나 이제부터 뭘
해야 할지 난감했다. 준수는 어디에 있는지조
차도 모르는데 차는 펑크가 나 있으니....... 일
단은 이 마을을 한시라도 빨리 빠져 나가 외부
에 도움을 청하는 게 최선일 것 같았다.
주위를 살피며 살금살금 자리를 옮겼다. 조
금 걷다 보니 내가 갇혀 있던 곳은 데이빗의
집 지하였음을 알 수 있었다.
사람들은 모두 집회에 참가했는지 인기척도
느낄 수 없었다. 문득, 내가 간밤에 들었던 비
명소리의 주인이 바로 시체가 된 흑인의 것이
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간밤의 그 끔찍한
비명소리를 떠올리며 몸서리를 쳤다.
도대체 이 마을은 어떤 마을이길래 사람을
감금하고 난도질하는지.......
데이빗의 집을 빠져 나가니 공터에 세워져
있는 펑크난 코로라가 보였다. 그 주변으로 마
을 사람들의 차들이 십여 대 가량 서 있었다.
조심스럽게 다가가서 안을 살펴 보았지만
키가 꽂혀 있는 자동차는 없었다. 영화에서라
면 쉽게 문을 따고 시동을 걸었겠지만 그런 기
술이 없는 나로서는 속수무책이었다.
차로 이 마을을 빠져 나갈 수 없다면 도보뿐
이 없었다. 하지만 데이빗의 말로는 가장 가까
운 마을이 60마일 밖이라고 했다. 60마일이라
면 하루종일 걸어도 안 되는 거리였다.
차 한 대 다니지 않는 도로를 돌아보며 잠시
망설였다. 혼자서 이 마을을 빠져 나간다면 빠
져 나갈 수도 있겠지만 준수 때문에 선뜻 실행
에 옮길 수 없었다. 준수를 버리고 간다면 평
생 마음의 짐을 안고 살아가야만 하리라.
나는 달아나고 싶은 생존 본능과 준수를 구
해야 한다는 이성 사이에서 망설이다가 야구
방망이를 힘껏 쥐고 집회장으로 접근했다. 죄
의식 속에서 평생을 허덕이느니 친구하고 같
이 죽는 게 차라리 마음 편할 것 같았다.
하늘에는 초생달이 떠 있었다. 벽에 바짝 붙
어서 집회장으로 다가갔다. 기이한 합창소리
가 점점 크게 들려 왔다. 햇불과 함께 사람들
의 그림자가 출렁거렸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 한 손에 횃불을 들고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들은 연단을 향해 서
있었는데 연단 위에는 나무로 만든 커다란 십
자가가 두 개 서 있었다.
천천히, 그리고 조심스럽게 집회 장소로 다
가갔다. 모두들 연단 쪽을 향해 서 있었기때문
에 나의 접근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나
는 집회장과 가까운 집 안으로 들어갔다. 집은
비어 있었다. 조심스럽게 테라스로 올라가 집
회장을 살펴 보았다.
사람들이 얼추 이백여 명 가량 되어 보였다.
연단에 십자가 세워져 있는 걸로 봐서는 무슨
종교 의식 같았다. 하지만 집회장 분위기나 광
기어린 사람들의 음성으로 봐서는 사이비 종
교 같았다.
갑자기 기괴한 노래가 일제히 멈추고, 환호
성이 들려 왔다. 연단 위에 사람들이 올라오고
있었다.
하얀 가운을 두른 데이빗이 제일 먼저 올라
왔고, 그 뒤를 다윗이라는 꼬마가 마치 교주라
도 된 듯 거만한 걸음걸이로 올라왔다. 얼마
간의 사이를 두고 네 사람이 강제로 피투성이
가 된 흑인을 끌고 왔다. 흑인이 얼굴을 보자
아까 창고에서 본 흑인의 시체가 떠올라 몸서
리가 처졌다.
혹시나 하고 있는데, 그 뒤로 준수가 꽁꽁
묶여 사람들의 손에 끌려서 연단 위로 올라오
는 것이었다. 준수의 얼굴은 공포로 일그러져
있었다.
호흡이 가빠 왔다. 이 미친놈들이 흑인과 준
수를 제물로 삼아 무슨 의식을 거행하려는 모
양이었다. 연단에 서 있는 십자가 두 개가 예
사롭게 보이지 않았다.
데이빗이 손을 들었다. 그러자 마을 사람들
이 일제히 조용해졌다. 데이빗은 빠른 어조와
강한 액센트로 연설을 하기 시작했다. 무슨 이
야기인지 듣고 싶었지만 이상한 단어들이 많
아서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대충 듣기로는
이런 뜻 같았다.
“......우리 다윗교는 종말 이후의 영생을 위
해, 우리의 종교를 믿지 않는 모든 이들을 죽
여야만 한다. 특히 하나님의 형상을 따르지 못
하고 태어난 유색인종에겐 고통스런 최후를
줘야 한다. 이것이 우리의 교주이자 구세주인
코레쉬님의 뜻이며, 그 분의 아들이자 미래의
지도자인 다윗님의 바램이다. 여기 두 명의 죄
지은 자들이 있다. 이들은 감히 유색 인종으로
써 우리의 성지를 침범했다. 더군다나 이들은
거짓과 악으로 똘똘 뭉친 기독교의 신봉자들
이다. 우리는 이들의 피로써 우리의 영생을 기
원해야 한다.......”
데이빗은 성경 구절을 섞어 가면서 긴 연설
을 했다. 나는 데이빗의 연설보다도 데이빗의
말투에서 공포를 느꼈다. 도저히 이성을 지닌
인간의 것이라고는 할 수 없는 묘한 분위기가
말투에서 풍겼다.
나는 그의 연설을 들으며 준수가 곧 희생될
거라는 걸 직감할 수 있었다. 의식이 본격적으
로 진행되기 전에 뭔가를 해야겠는데 이백여
명의 미친놈들 앞에서 뭘 어떻게 할지 암담했
다. 자칫하다가는 개죽음을 당하기 십상일 것
같았다.
데이빗의 연설이 끝나자 연단 위가 어수선
해졌다. 사람들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사
람들이 커다란 십자가를 눕히고 흑인을 십자
가에다 묶었다. 흑인은 살려달라고 몸부림 쳤
지만 역부족이었다.
욕설이 터져 나왔다가 이내 애원의 흐느낌
으로 뒤바뀌었다. 흑인의 입에 재갈이 물려졌
다. 검은 피부와 대조적으로 그의 커다란 눈동
자는 더욱 새하얗게 보였다.
준수의 표정이 하얗게 탈색되어 갔다. 온몸
을 부르르 떨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는
준수를 지켜보다가 계속 보고 있기가 죄스러
워 고개를 돌렸다.
사람들이 음산한 합창을 하기 시작했다. 연
단 위의 사람들이 콘 쇠못과 해머를 들고서 흑
인에게 다가갔다. 미친놈들이 정말로 산 사람
에게 못질을 해서 십자가에 매달 생각인 모먕
이었다.
설마설마 하는 사이에 흑인의 손바닥에 못
질을 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광기에 찬 환호
성을 지르자 순식간에 해머가 허공을 갈랐다.
손바닥에서 피가 튐과 동시에 흑인이 고통에
가득 찬 신음을 내뱉었다.
사람들의 환호성은 높아만 갔다. 흑인의 눈이 튀
어나올 것만 같이 커졌다. 그는 재갈을 물린
채 신음을 내뱉다가 이내 기절하고 말았다.
그 모습을 지켜본 준수가 흐느끼기 시작했
다. 얼굴을 흙빛으로 변한 채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오열을 했다.
뭔가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 가슴을 옥죄어
왔다. 준수가 십자가에 매달리는 것을 지켜보
고 있을 수는 없었다. 나는 테라스에서 내려갔
다. 사방을 둘러보며 적당한 무기를 찾아보았다.
그 흔한 엽총 한 자루 보이지 않았다. 집을
나와서 뒤뜰로 돌아갔다. 얼마 뒤에는 준수가
십자가에 매달릴 거라고 생각하니 머리가 돌
아버릴 것만 같았다.
도끼를 가지고 대항할까? 안 돼! 나 혼자서
는 미친놈들을 당해 낼 수 없어. 더 좋은 방
법...... 더 좋은 방법을 생각해야 해. 빨리 생
각해!
나는 미친 듯이 뒤뜰을 헤집고 다녔다. 순
간, 눈에 들어오는 것이 있었다. 바로 집 뒷벽
에 설치되어 있는 작은 슬래트 지붕이었다.
곧바로 달려갔다. 언젠가 인근 도시와 멀리
떨어진 작은 마을에서는 가스나 전기 공급이
안 돼 자체 발전기를 쓰고, 가스는 프로판 가
스를 쓴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서였다.
지붕 밑을 보니 정말로 두 개의 프로판 가스
통이 설치되어 있었다. 가스통은 작은 항아리
모양이었다.
좋아! 이걸로 도박을 한번 해 보는 거야!
나는 일단 가스통을 붙어 있는 밸브를 잠근
다음 연결 호수에서 분리했다. 가스통을 끌어
당기다 보니 쇠사슬과 자물쇠가 보였다. 가스
통을 움직이지 못하게끔 고정시켜 놓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어떡할까 망설이고 있는데 환호성이 다시금
올랐다. 합창소리가 드높아지고 있는 걸로 봐
서 십자가에 못 박는 작업이 거의 끝나가는 모
양이었다.
나는 야구망망이로 자물통을 내리치기 시작
했다. 자칫하면 가스통이 터질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집안에 뛰어들어가 어디다
숨겨 놓았는지도 모르는 열쇠를 찾고 있을 수
는 없는 노릇이었다.
쇠사슬이 출렁거리는 귓가에 커다랗게 들려
왔다. 나는 정신을 집중해서 자물통을 쳤다.
자물통은 이내 깨어지며 저절로 열렸다.
나는 서둘러 쇠사슬을 벗겨 내고 가스통을
들었다. 다시 환호성이 높아졌다. 준수가 벌써
당한 것은 아닐까 겁이 와락 났다.
한 손에는 자물통을 한 손에 야구방망이를
들고서 앞뜰로 나갔다. 연단 위를 보았다.
준수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서 있는 모습
이 보였다. 그 옆에 십자가에는 흑인이 매달려
있었다. 그는 손바닥와 발등에 굵은 쇠못이 박
힌 채로 피를 철철 흘리고 있었다.
나는 조심조심 집회장으로 다가갔다. 바짝
다가간 순간, 다윗이라는 소년이 정육점에서
쇠고기를 매달 때 쓰는 갈고리를 치켜올렸다.
마을 사람들이 일제히 환호했다.
다윗은 귓에 거슬리는 날카로운 목소리로
도저히 어린아이 입에서 나올 수 없는 말을 빠
르게 지껄였다. 집회장은 엄청난 광기가 뒤덮
고 있었다. 다윗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사람
들은 목이 터져라 함성을 내질렀다.
“이제 내가 이 검은 놈의 심장을 꺼낼 것입
니다. 이 놈의 검은 심장을 세상으로 꺼내 불
태움으로써, 우리는 종말 뒤에도 영생을 누릴
수 있습니다. 여러분, 경배하고 숭배하십시오!
코레쉬 님이 우리를 지켜보시고 계십니다!”
다윗은 잠깐의 머뭇거림도 없이 십자가에
못 박힌 흑인의 가슴을 향해 갈고리로 내리쳤
다. 그리곤 잡아당기자 가슴 살이 찢어지고 피
와 살점이 튀었다.
다윗은 자신의 얼굴에도 피가 튀기건만 표
정 하나 바꾸지 않고 갈고리를 휘둘렀다. 사람
들은 소년의 손동작에 맞춰 고함을 질렀다. 소
년의 손동작은 점점 빨라졌다.
갈비뼈가 으스러지고 살점이 너덜거리며 드
러났다. 나는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멍히
보고 있다가 끝내 울음을 터뜨렸다. 심장이 빠
져 죽은 흑인의 시체가 떠올랐다.
친구고 뭐고 간에 이 자리에서 벗어나고 싶
었다. 살인을 즐기는 이놈들은 모두 미친 놈들
이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종교라는 거룩
한 이름을 빌어서 살인을 즐기는.......
나는 가스통을 바닥에다 내려놓고 뒷걸음질
쳤다. 전신이 부들부들 떨려 왔다. 살고 싶었
다. 흑인처럼 심장을 드러낸 채 잔혹하게 죽고
싶지 않았다. 나는 뒤로 물러서다가 이를 사려
물었다.
준수의 환한 미소가 떠올랐다. 수민이를 만
나게 될 거라고 꿈에 젖어 있던 눈동자가 떠올
랐다.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친구를 지옥에 혼자 놔
두고 떠날 수는 없었다. 이들의 광기가 더없이
무서웠지만 달아나서 평생 받을 가책보다는
이 자리에서 죽는 게 마음 편할 것 같았다.
아니 이제는 준수를 위해서 준수를 구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평생 죄의식에 시달리지
않기 위해서, 나를 위해서 준수를 반드시 구해
내야겠다고 마음을 다졌다.
나는 다시 달려가서 가스통을 잡았다. 그리
고 연단을 향해서 다가갔다. 연단에서는 데이
빗이 칼을 들고 서 있었다. 그는 이미 만신창
이가 된 그 흑인의 가슴에 손을 집어 넣어, 심
장을 꺼내고 있었다.
그 옆에 서서 눈을 꼭 감고 부들부들 떨고
있는 준수의 모습이 보였다. 나는 질끈 눈을 감
았다가 떴다. 데이빗이 심장을 다윗의 손에 주
었다. 다윗이 방금 꺼낸 피가 뚝뚝 떨어지는
심장을 높이 처들었다.
문득, 데이빗에서 본 그림이 떠올랐다. 소년
의 모습은 골리앗의 가슴에서 심장을 꺼낸 다
윗, 바로 그 모습이었다.
다윗은 연단 앞에 마련된 모닥불에다 심장
을 휙 집어던졌다. 광신도들이 열광하기 시작
했다. 그들은 입을 모아 뭐라고 외쳤으나 무슨
소리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연단 위에 있는 모든 사람은 피범벅이 되어
있었다. 준수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광신도들
은 방금 치른 끔찍한 치른 피의 대제전도 불구
하고, 준수를 원했다. 그들은 한목소리로 준수
를 십자가에 매달으라고 외쳤다.
나는 길게 심호흡을 하고 광신자들에게 다
가갔다. 그들은 피에 취했는지 아무도 뒤를 돌
아보지 않았다. 너무 긴장한 때문인지 가스통
의 무게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야구
방망이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연단에는 준수가 서 있었다. 그 앞에 데이빗
이 서서 죄를 심판하고 있었다. 이성을 잃은
듯한 광신도들의 웅성거림에 묻혀 뭐라고 하
는지 앞 부분은 잘 들리지 않았다.
“......열등인종이며, 유색인종인 이 자는 우
리의 적인 기독교를 숭배하고 있다. 또한 우리
의 성스러운 땅에서 더러운 음악을 연주했다.
코래쉬 님이 가장 혐오하는 그런 음악을.......
이 자의 추악한 영혼을 이 세상에서 추방해야
한다.”
그들은 준수를 눕혔다. 이번에는 해머와 철
못이 아닌 칼을 데이빗이 번쩍 치켜들었다. 그
칼은 곧바로 다윗의 손에 옮겨졌다.
더 이상 주저하고 있을 수가 없었다. 나는
맨 뒷줄에 서서 횃불을 치켜들며 환호하고 있
는 한 사내의 어깨를 야구방망이로 내리쳤다.
신음소리와 함께 그 자리에서 맥없이 쓰러졌
다. 주위 사람들이 일제히 나를 돌아보았다.
연단 위를 보았다. 다윗이 준수의 손 위에
칼을 놓고, 그 칼을 밟으려 하고 있었다. 나는
야구방망이를 버리고 바닥에 나뒹굴고 있는
사내의 횃불을 집어들었다.
광신도들이 서서히 나에게 다가왔다. 나는
횃불을 얼른 가스통 위에 올려놓고 가스통 밸
브를 잡으며 연단을 향해 외쳤다. 목청이 터져
라고.......
“멈춰!”
내 외침에 연단 위에서 막 발에 힘을 줘 준
수의 손가락을 절단 내려는 다윗과 그의 추종
자들이 나를 돌아보았다. 400여 개의 광기어
린 눈동자가 나에게 꽂혔다. 짧은 순간, 그렇게
시끄럽던 이곳에 죽음과 같은 적막이 흘렀다.
“물러서!”
나는 한 손에 햇불을 들고 한 손으로는 사스
통 밸브를 움켜쥔 채 소리쳤다. 광신도들은 나
의 의중을 알아차렸는지 슬금슬금 뒷걸음질
쳤다. 나는 그들의 사이를 뚫고서 연단을 향해
다가갔다.
가슴은 쿵쾅거리고, 등에서는 식은땀이 흘
렀다. 너무 긴장한 때문인지 어지럽기까지 했
다. 사람들의 얼굴이 커다랗게 보였다가 작아
지곤 했다. 하지만 한치도 방심할 수 없었다.
누가 어디서 누가 덮쳐 올지 모르는 일이었다.
사실 가스통을 들고 집회장으로 올 때만 해
도 밸브를 열어 자폭할 자신은 없었다. 하지만
참혹한 죽음을 당하는 흑인을 보고 나니까 마
음이 바뀌었다. 어차피 죽을 목숨이라는 생각
이 들었고, 이내 누군가 섣부른 짓이라도 하려
든다면 정말로 터뜨려 버려야겠다는 오기가
치솟았다.
나는 모세의 바닷물처럼 갈라진 한가운데로
연단을 주시하며 천천히 걸어갔다. 연단 위의
데이빗과 다윗, 그리고 추종자들은 당황하는
빛 없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들의 눈빛
은 냉소로 가득 차 있었다. 준수는 분위기가
바뀐 걸 깨달았는지 돌아보려 했다. 하지만 손
위에 칼이 놓여 있어 고개를 돌리지 못하고 있
었다.
연단 바로 앞까지 갔다가 뒤를 돌아보았다.
내가 지나온 길은 다시 사람들이 메꾸고 있었
다. 순간적으로 나갈 생각을 하니 아찔했다.
나는 갈 때까지 가 보자는 심사로 연단 위로
올라갔다. 연단 위로 올라서자 그제서야 준수
가 나를 발견했는지‘일한아!’하고 불렀다. 준
수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우리를 보내 줘!”
나는 데이빗을 노려보며 소리쳤다. 데이빗
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도 마
찬가지였다. 나는 다시 한 번‘LET US GO!’
하고 위협적으로 외쳤다. 그러자 데이빗과 둘
러선 사람들이 준수의 손 위에 칼을 밟고 서
있는 다윗을 바라보았다. 마치 다윗의 허락을
구하는 것처럼.......
나는 집감적으로 다윗이라는 꼬마가 이 광
신도들이 섬기는 숭배 대상이라는 것을 눈치
챘다.
그렇다면 꼬마만 인질로 잡으면 탈출도 가
능하리라.......
나는 가스통과 횃불을 든 채로 다윗에게 다
가갔다.
“빨리 발을 떼! 그 나이에 죽고 싶지는 않겠
지?”
가스통을 열 것처럼 위협하면서 다윗을 향
해 외쳤다. 다른 사람들은 미동도 하지 않고
다윗과 나를 지켜보았다.
당연히 발을 뗄 거라고 예상했으나 아니었
다. 다윗은 나를 정면으로 쳐다보았다. 다윗의
눈에서 냉기가 뿜어져 나왔다. 인간이 그토록
싸늘한 눈빛으르 지닐 수 있다는 사실이 믿기
지 않을 정도로 차가운 눈빛이었다.
도저히 어린애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정
말로 악마와 마주하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
다. 어쩌면 다윗은 정말로 악마일지도 모른다
는 생각이 스쳤다. 한순간, 다윗이 나를 씨익
웃었다. 비웃음이담겨있는, 경멸어린미소였다.
나는 직감적으로 다윗이 가스통을 전혀 두
려워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갑자기
놈에 대한 두려움이 느껴졌다.
“물러서! 빨리!”
나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가스통 밸브
를 잡았다. 놈은 내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칼
을 밟았다. 칼날 위로 몸을 날리다시피 해
서.......
“아아악!”
준수의 처절한 비명과 함께 손가락들이 피
를 뿜어내며 잘라졌다. 손가락들이 꿈틀거리
며 연단 위로 굴렀다.
당황해서 어떻게 해야할 바를 모르고 있는
데 광신도들이 환호성을 올렸다. 그리곤 조심
스러운 음성으로 낮으막하게 다시 합창을 하
기 시작했다.
나는 내심 겁이 나기도 했지만,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준수의 손가락을 잘라 버린 다윗
에게 분노를 느꼈다.
놈은 여전히 칼날을 밝고 서서 나를 경멸의
눈으로 바라보았다. 몸부림 쳐 봤자 소용없다
는 식의 조소를 물고서....... 놈의 당당한 모습
에 용기를 얻었는지 다른 사람들이 가스통을
두려워하지 않고 점점 나에게 다가왔다.
다윗은 궁지에 몰린 내 모습이 재미있다는
듯이 입가를 일그러뜨리며 잔혹한 미소를 지
었다. 마치 사냥을 즐기는 포수처럼.......
놈들은 사방에서 압박해 들어왔다. 연단 밑
의 광신도들이 입을 맞춰‘죽여라! 죽여라!’하
며 괴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가까이 오면 너희들도 끝장이야!”
다시 한 번 횃불을 가스통에다 들이대며 협
박했지만 놈들은 더 이상 겁을 먹지 않았다.
어린 다윗의 행동에 용기를 얻은 건지, 종말
뒤에 올 영생을 믿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정말로 가스통을 폭파시키기 전까지는 아
무도 다가오는 발걸음을 멈출 것 같지 않았다.
“미친놈들!”
이를 갈아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이제 모
든 게 끝장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걸 체념한 채 힘없이 고개를 떨구었다. 한순
간, 준수의 잘리워진 손가락과 잘려진 손마디
에서 흐르는 핏줄기가 눈에 들어왔다.
고개를 쳐들었더니 다시 다윗의 경멸어린
미소가 보였다. 나는 다윗의 웃는 얼굴을 보면
서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 준수의 손가
락을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잘라 버린 저런
놈에게 당할 수만은 없다는 오기가 불끈 치솟
았다.
“이야앗!”
나는 쏜살같이 몸을 날려 준수 옆에 서 있는
다윗의 턱을 주먹으로 내질렀다. 놈은 악마 같
은 감정을 지닐고 있을 지라도 신체적으로는
아직 12살 어린아이였다. 불시에 날아온 나의
주먹을 맞은 다윗은 뒤로 벌렁 나자빠졌다.
다가오던 사람들이 뜻하지 않은 사태에 모
두들 발걸음을 우뚝 멈췄다. 나의 주먹 한 방
에 널부러진 다윗의 모습을 보자 자신감이 치
솟았다. 광신도들의 눈에게는 우상으로 비칠
지 모르지만 내 눈에는 아직 어린아이였다.
나는 틈을 주지 않고 일어서려는 다윗에게
다시 달려들었다. 데이빗이‘잡아!’라고 소리
쳤을 때는 내 발이 이미 다윗의 목을 짓누른
뒤였다. 다윗이 고통스러운지 내 다리를 잡았
다. 나는 다리에 힘을 줬다.
“다윗을 풀어 줘!”
데이빗이 잔뜩 화가나 다가오면서 소리쳤다.
“멈춰 서! 목뼈를 부러뜨려 버리기 전에!”
나의 기세에 눌린 데이빗이 주춤 멈춰 섰다.
나는 그들에게 생각할 틈을 주지 않기 위해서
계속해서 명령했다.
“내 친구를 풀어 줘! 빨리!”
오른발에 힘을 주면서 소리치자 다윗이 고
통스러운지 손을 허공으로 휘저었다. 데이빗
이 당황해서 시끄는 대로 하라고 말했다. 데이
빗 옆에 있던 사람들이 준수에게 달려가서 결
박을 풀었다.
준수는 결박이 풀리자 잘린 왼손을 잡고서
신음을 삼켰다. 고통스러워하는 준수의 모습
을 보자 다윗에 대한 분노가 치솟았다. 밟고
있는 발에 다시 힘을 주었다. 다윗은 신음을
삼키며 증오 가득한 눈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놈은 어린아이가 아니라 악마의 화신이 분명
한 것 같았다.
“준수야, 고통스럽겠지만 참아. 일단 미치광
이들이 소굴을 벗어나고 보자.”
“그래.......”
내가 한국말로 말하자 준수가 잘린 손마디
를 힘껏 쥐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준수야, 네 옆에 떨어져 있는 칼을 가지고
이리와.”
준수는 아직도 피가 흐르는 왼손을 오른손
겨드랑이에 꼈다. 그리곤 오른손으로 피가 채
응고되지 않은 채 묻어 있는 칼을 들고서 비틀
거리며 곁으로 다가왔다. 그의 티셔츠는 금세
피로 물들어 갔다. 붉은 피를 보자 흥분이 됐
다. 나는 횃불과 가스통으로 놈들을 위협했다.
“접근하지 마! 이 밸브를 돌리면 이 꼬마는
물론이고 너희들도 죽어!”
놈들은 어느 정도 이성을 되찾았는지 우리
를 빙 둘러싸고 기회를 노렸다.
“준수야! 악마새끼를 일으켜 세워!”
나는 횃불을 휘둘러 놈들이 접근하지 못하
도록 하면서 한국말로 말했다. 준수는 이를 앙
물고서 잘린 손으로 다윗을 잡았다. 그리곤 칼
을 든 오른손으로 다윗의 목에 겨눴다.
준수가 다윗을 일으켜세우자 광신도들이 술
렁대기 시작했다. 교주격인 다윗을 준수가 죽
일지도 모른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우리를 보내 줘! 다윗을 살리고 싶다면...”
나는 데이빗을 향해서 소리쳤다.
“그렇게는 안 될 걸. 우린 죽음따윈 두려워
하지 않아!”
데이빗은 우리를 노려보면서 말했다.
“비켜! 개자식들아!”
준수가 눈을 부릅뜨고 소리쳤다. 정말로 칼
로 다윗의 목을 찌를 태세였다. 내가 생각하기
에도 준수의 외침은 단순한 협박이 아니었다.
아끼는 손가락을 잘려 버린 준수이기에 충분
히 그러고도 남을 것 같았다.
데이빗과 그 추종자들이 주춤주춤 한쪽으로
물러섰다. 나는 가스통과 횃불을 들고서 피 묻
은 연단을 내려갔다. 준수가 다윗을 끌고서 따
라내려왔다.
앞에는 광신도들이 버티고 있었다. 내가 한
가운데를 향해서 걸음을 옮기자 그들은 순순
히 옆으로 길을 터 줬다. 내 뒤를 준수가 나에
게 등을 기대다시피 해서 사방 경계를 하며 따
라왔다.
놈들은 호시탐탐 다윗을 구할 기회를 노리
고 있었다. 한걸음 옮기기가 만만치 않았다.
광기와 증오어린 시선을 받으며 나는 인파 속
을 헤치고 나갔다.
무리 속을 빠져 나오는데 실제는 10분도 안
걸렸겠지만 서너 시간 이상이 걸린 것만 같았
다. 우리가 무리 속을 다 빠져 나오자 놈들은
일정한 거리를 두고 우리를 천천히 쫓아왔다.
걷다 보니 발에 걸리는 걸이 있었다. 내가
버리고 간 야구 방망이였다. 나는 가스통을 잠
깐 내려놓고 재빨리 야구 방망이를 주웠다. 방
망이를 재빨리 옆구리에 차고는 다시 가스통
을 잡았다. 걷기는 불편했지만 야구방망이가
있으니 마음이 다소 놓였다.
“따라오지 마!”
준수가 놈들에게 거듭 소리쳤지만 소리칠
때뿐이었다. 우리가 멈추면 놈들도 멈춰 섰고
우리가 걸으면 놈들도 걸었다.
그 놈들 등 뒤로 피의 향연이 자행되었던 제
단과 십자가가 보였다. 십자가에는 흑인이 심
장이 빠진 채로 피투성이가 되어 못박혀 있었
다. 피투성이의 십자가는 놈들이 지닌 광기와
함께 섬뜩한 공포를 느끼게 했다.
마음은 급했지만 놈들의 손아귀에서 쉽게
벗어날 수 없었다. 오랫동안 긴장한 때문인지
전신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정신력으로
버티던 준수도 피를 많이 흘린 때문인지 기력
이 눈에 띄게 많이 빠져 있었다. 정신을 차리
려고 힘겹게 눈꺼풀을 깜빡이곤 했는데 시간
이 지날수록 그 빈도수가 잦아졌다.
나는 일단 펑크가 난 차라도 타고서 놈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생각었다. 실질적으로는
얼마 되지 않는 거리였지만 참으로 아득하게
만 보였다.
놈들은 준수의 협박에 이십 미터 가량 뒤로
처져서 우리를 쫓아오고 있었다. 햇불을 들고
말없이 쫓아오는 놈들의 모습은 마치 공동묘
지에서 막 일어난 시체처럼 으시시했다.
이마의 땀방울이 흘러내려 손등으로 닦는
순간이었다. 준수가‘악!’하는 외마디 비명과
함께 쓰러졌다. 다윗이 자기 목에 대고 있는
칼을 맨손으로 잡은 다음, 준수의 다친 손을
팔꿈치로 내지르고 나서 칼을 뺏어 준수의 허
벅지를 찌른 것이었다.
순식간에 일어진 일이어서 눈을 뜨고 지켜
볼 수밖에 없었다. 열두 살짜리 아이의 행동으
로는 보이지 않는 아주 민첩한 동작이었다. 다
윗은 악마의 얼굴에서나 나올 듯한 미소를 지
으며 달아나려 했다.
나는 다윗에게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
이것저것 계산하고 생각할 겨를도 없이 나는
가스통을 번쩍 치켜들었다. 그리곤 달아나는
다윗의 머리를 향해 내던졌다.
정통으로 맞았다면 놈은 두개골이 박살났으
리라. 하지만 가스통은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
르겠지만 놈의 어깨에 맞았다. 둔탁한 소리가
나는 걸로 봐서 어깨뼈가 부러진 것 같았다.
나는 다시 달려가 가스통을 잡았다. 놈에게
최후의 일격을 가하려고 가스통을 높이 치켜
들었다. 그리곤 놈의 머리를 바라보았다. 놈의
눈동자에 일순간 공포가 어렸다.
이 놈을 죽이는 건 살인인가, 정당방위인가?
뜻하지 않았던 의문이 불쑥 들었다. 잠시 망
설이고 있는 사이에 다윗은 부서진 어깨를 감
싸고 일어났다. 나를 경멸어린 눈으로 쏘아보
더니 순식간에 마을 놈들 쪽으로 도망쳤다.
“야, 인마! 뭐하는 거야?”
준수의 외침에 제정신이 들어 고개를 들었
다. 다윗이 풀려나자 마을놈들이 함성을 지르
면서 우리를 잡으려고 달려오고 있었다.
나는 가스통을 내려놓고 밸브를 열었다. 횃
불을 들고 달려오던 놈들이 주춤 멈춰 섰다.
나는 재빨리 땅에 떨어져 있는 횃불을 들었다.
쓰러져 있는 준수를 부축해서 공터 쪽으로 달
렸다.
‘쉬익’하고 가스가 새어 나오는 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 왔다. 마을 놈들은 일제히 횃불을
던져 버리고 우리를 향해 달려왔다.
준수를 부축한 때문에 앞으로 나아가기가
힘들었다. 마을 놈들과의 거리는 점점 가까워
졌다. 이십미터 가량 가서 뒤를 돌아보니 마을놈
들이 가스통에 10미터 가까이 접근해 있었다.
어둠 속에서도 놈들의 눈빛은 광기로 번뜩
였다. 무수한 뱀눈들이 먹이를 향해 달려오고
있는 형상이었다.
“이 개새끼들아! 죽어라!”
나는 한국말로 힘차게 외친 다음에 손에 들
고 있던 횃불을 가스통을 향해 던졌다. 횃불은
허공을 가르고 밸브가 열려진 가스통을 향해
날아갔다. 횃불은 가스통을 넘어서 2미터 가
량 앞쪽에 떨어졌다.
몰려오던 놈들이 주춤 뒤로 물러섰다. 하지
만 뒷사람들에게 떠밀리다시피 해서 앞쪽의
사람들이 다시 전진했다. 맨 앞에 서 있던 사
람들이 땅에 납짝 엎드렸다.
가스통이 폭발하기를 기다렸지만 내가 기대
했던 폭발은 일어나지 않았다. 잠자코 숨을 죽
이고 있던 마을 놈들이 땅에 떨어진 횃불을 쳐
다보았다. 횃불은 점점 불길이 약해져 갔다.
나는 준수를 부축한 채 뒷걸음질 쳤다. 내
계획은 완전히 실패로 돌라간 셈이었다. 어쩌
면 여기서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가스가 폭발하지 않자 놈들이 다시 움직이
기 시작했다. 나는 옆구리에서 야구 방망이를
빼들었다. 몇 명이 될지 모르겠지만 죽기 전에
놈들의 골통을 최대한 대로 부숴 버려야겠다
는 각오를 하며 야구 방망이를 힘껏 휘둘렀다.
맨 앞쪽의 사람들이 횃불을 넘어서 다가왔
다. 그 순간이었다. ‘꽈과꽝!”’하는 거대한 폭
발음과 함께 가스통이 폭발했다. 시뻘건 불기
등이 허공으로 높이 치솟았다. 나는 준수와 함
께 폭발의 여파로 벌러덩 나자빠졌다.
거리가 순식간에 불바다로 뒤바뀌고 말았
다. 놈들과의 사이에 거대한 불의 장벽이 생긴
것이었다. 치솟는 불길을 통쾌한 승리감에 젖어
바라보다가 준수를 부축해 달리기 시작했다.
준수의 팔과 다리에서 출혈이 계속됐다. 몇
발짝 달리다가 거의 기절하다시피 한 준수를
등에 업고 펑크난 차로 달렸다. 준수를 차에
태워 놓고 뒤를 돌아보니 아직도 불길은 치솟
고 있었다.
펑크난 차로 달아나 봤자 놈들이 쫓아오는
것은 시간 문제일 것 같았다. 칼이라도 손에
쥐고 있다면 타이로를 모조리 펑크내 버리겠
는데 칼도 놓고 온 상태였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늘어선 차들의 헤드
라이트를 박살내기 시작했다. 칠흙 같은 밤에
가로등도 없는 산길을 헤트라이트도 없이 쫓
아온다는 건 자살 행위나 다름없었다.
헤드라이트를 모조리 박살내고 나서 우리
차의 미등을 깨뜨렸다. 펑크난 차로 쫓아온다
해도 우리가 탄 차의 뒤를 쫓아올 수 없게끔...
차에 오르려고 하는데 미처 발견하지 못한
차가 한쪽 구석에 움크리고 있었다. 낡은 정도
로 봐서는 폐차 같았지만 만약을 몰라 달려갔
다. 헤드라이트를 깨뜨리고 돌아서는데 불길을
뚫고 시꺼먼 물체가 무서운 속도로 달려왔다.
개였다. 어젯밤에 보았던 시커먼 두 마리 사
냥개였다. 그 놈들은 한시도 지체하지 않고 쏜
살같이 나에게 달려왔다. 하얗게 빛나는 송곳
니를 보니 등골이 오싹해지고 덜컥 겁이 났다.
하지만 놈의 먹이가 될 수는 없었다. 나는
입술을 꽉 깨물며 야구방망이를 검도할 때 죽
도를 잡듯이 양손으로 쥐었다.
훈련된 개들은 사냥감, 특히 인간을 공격할
때는 허공으로 뛰어올라서 체중을 실어 사람
을 쓰러뜨린 다음, 이빨로 공격한다는 구절을
어디선가 읽은 기억이 났다.
나는 놈이 허공으로 뛰어오르는 순간을 눈
을 부릅뜨고 기다렸다. 앞서 달려온 개 한 마
리가 커다란 입을 쩍 벌리고 내 앞에서 펄쩍
뛰었다. 나는 심호흡을 하고 체중을 실어 뛰어
오르는 개의 정수리를 내리쳐다.
둔탁한 파열음과 함께 개가 맥없이 허공으
로 떨어져 내렸다. 벌렁 누운 사냥개는 네 다
리를 한동안 부르르 떨다가 쭉 뻗었다.
이어서 다른 개 한 마리가 숨 돌릴 틈도 없
이 공격해 왔다. 미처 자세를 수습할 시간적인
여유도 주지 않은 기습적인 공격이었다. 나는
야구공을 치듯이 그대로 개의 얼굴을 향해 배
트를 힘껏 휘둘렀다.
팔목에 은은한 통증이 왔다. 턱뼈에 맞았는
지‘깡!’하는 소리가 났다. 족히 육십 킬로는
넘을 것 같은 개가 옆으로 풀썩 떨어졌다. 나
는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쓰러진 개들을 보았
다. 턱을 맞은 개의 늘어진 목덜미가 숨가쁘게
출렁거렸다.
한번에 힘을 너무 쓴 때문인지 극도의 피로
감이 느껴졌다. 땀을 닦으면서 보니 놈들이 손
에 각목을 들고 우르르 몰려 오고 있었다. 불
길 한 가운데에 서서 다윗이 한손으로 어깨뼈
를 감싼 채 나를 노려보았다.
나는 재빨리 차에 올라탔다. 서둘러 시동을
걸었지만 시동은 뜻대로 잘 걸려 주질 않았다.
놈들은 순식간에 차를 에워쌌다. 가까스로 시
동을 건 나는 힘차게 액셀러레이턱를 밟았다.
차는 앞으로 나가기는 나갔지만 타이어가
펑크가 난 때문에 속도가 제대로 나지 않았다.
차를 둘러싼 마을 사람들이 무자비하게 각목
을 휘둘렀다. 나는 핸들을 도로 쪽으로 꺾고
속력을 높였다. 각목에 맞아 차 옆유리창에 균
열이 갔다.
나는 둔탁한 소리를 들으면서 도로 쪽으로
차를 몰았다. 핸들은 심하게 흔들렸지만 놈들
을 떨궈 놓기 위해 속력을 높였다. 따라오면서
차를 향해 각목을 휘두르던 마을 사람들이 하
나, 둘 떨어져 나갔다.
대신 이번에는 차들이 따라왔다. 바퀴가 도
로 위에 부딪히면서 나는 둔탁한 소리가 났다.
사방은 먹물을 뿌려놓은 물 속처럼 깜깜했다.
허공에 떠 있던 초생달마저 구름 속에 가리워
져 있었다.
우리가 탄 차는 워낙 속도가 느렸지만 놈들
은 헤드라이트가 없어 우리 차를 따라잡지 못
했다. 둔탁한 소리가 들려 오는 걸로 봐서는
갓길로 차들이 처박히는 모양이었다.
조수석의 준수는 옆으로 길게 드러누워 있
었다. 잠시 의식을 읽은 모양이었다. 고통스러
운 신음소리가 차 안을 가득 메웠다.
백미러로 보니 저 멀리 마을이 보였다. 처음
마을에 들어서서 불빛을 발견하였을 때는 구
원의 불빛 같았는데 지금은 마치 악마의 불빛
같았다.
정말로 지옥에서 탈출하는 기분이었다. 마
을에서 보낸 이십사 시간이 마치 십 년이나 되
는 것처럼 느껴졌다.
숲에 가려 불빛이 사라지자 마음이 다소 놓
였다. 하지만 아직 안심할 수 있는 상황은 아
니었다. 놈들에게 다른 차량이 있을지도 모르
는 일이었다. 설령 공터에 놓여 있던 차가 전
부라 해도 놈들이 헤트라이트를 고치고 나면
쫓아오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만약을 대비해
서 최대한 멀리 도망가야 했다.
타이어가 펑크 나 있다 보니 속력을 낼 수
없었다. 작은 돌멩이에도 차가 덜컹거리며 튀
었다. 나는 차의 속력을 15마일 정도로 유지했
다. 시속 15마일이라면 가장 가까운 마을까지
의 거리가 60마일이니까 4시간은 가야 하는
셈이었다.
나는 일단 도로변에 차를 세웠다. 차의 진동
이 심해 이대로 4시간을 달렸다가는 준수의 출
혈이 너무 심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일단 여행 가방에서 속옷을 꺼내 준수의 팔
과 허벅지를 단단히 묶었다. 손에서는 피가 빠
져 나갈 만큼 빠져나갔는지 출혈이 금세 멎었
다. 하지만 준수는 피를 많이 흘렸기 때문에
혼수 상태에서 깨어나질 못했다.
빨리 병원으로 옮겨야겠는데 어디까지나 마
음뿐이었다. 자동차의 상태는 점점 악화되어
갔다. 바퀴가 심하게 덜덜거리기 시작했다. 금
세라도 주저앉아 버리거나 바퀴가 빠져 나가
버릴 것만 같았다. 조심해서 차를 몰았음에도
불구하고 차는 정말로‘쿵!’하는 소리와 함께
멈춰 서더니 꼼짝도 하지 않았다. 바퀴를 지탱
하는 축이라도 부러진 모양이었다.
트렁크에서 작은 손전등을 꺼냈다. 만약을
몰라 야구 방망이를 옆구리에 찾ㅆ다. 그리곤
신음하고 있는 준수를 업고서 걷기 시작했다.
정확한 거리는 모르겠지만 마을에서 멀리 벗
어난 것 같지는 않았다. 놈들이 이대로 우리를
놓아 준다면 좋겠지만 그들의 태도로 보아서
그럴 것 같지는 않았다.
플래쉬로 앞을 비추며 부지런히 걸어갔다.
혼수 상테에 빠져 있다가 잠깐 정신이 돌아왔
는지 준수가 힘없이 중얼거렸다.
“일한......아...... 나...... 놓고 가....... 나중
에...... 데...... 리러......오면...... 되......잖
아....... 나...... 틀렸어.......”
“미친놈! 헛소리 하지 말고 가만 있어. 너를
데려가야 나중에 술이라도 한잔 얻어먹을 거
아니냐!”
“바보...... 같은...... 자식.......”
준수의 욕설이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놈을
놔 두고서 도망가지 않은 나의 판단이 옳았다
는 생각이 들었다.
무거웠지만 내색하지 않고 천천히 걸었다.
초생달이 다시 구름 속에서 나와 앞이 희미하
게나마 보였다. 손전등을 끄고 걷기 시작했다.
만약 놈들이 쫓아오더라도 위치를 노출시키지
않기 위해서였다.
도로변으로 하늘을 찌를 듯한 나무가 서 있
었다. 차로 추격해 온다 해도 숲 속으로 숨으
면 도저히 못 찾을 것 같았다.
걷다 보니 가끔씩 부엉이 울음 소리가 들려
왔다. 숲에서 야생동물이라도 불쑥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준수는 다시 의식을 잃었는지 축
늘어졌다.
아무도 없는 어둠 속을 터덜터덜 걷다 보니
피로가 몰려 왔다. 숲 속에서 그냥 밤을 지새
고 싶었지만 피를 흘리고 있는 준수 때문에 그
럴 수도 없었다.
얼마쯤 걸었을까. 멀리 차 헤드라이트가 보
였다. 놈들의 마을과는 반대편 도로에서 오는
차였지만 나는 혹시 놈들이 다른 길로 돌아오
는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나무 뒤에
숨었다.
헤드라이트 불빛이 점점 다가왔다. 자세히
보니 자동차 지붕 위에서 빨갛고 파란불이 돌
아가고 있었다. 순찰차, 순찰차였다.
나는 손전등을 켜고 도로로 나갔다. 순찰차
가 우리 앞에 멈춰 섰다. 헤드라이트 불빛 때
문에 눈이 부셔서 차 안이 잘 보이지 않았다.
“도와 주세요!”
나의 외침을 들었는지 차 문이 열리고 정복
차림의 사내가 내렸다. 건장한 체구였다.
“무슨 일이요?”
그는 나에게 다가오며 물었다.
“친구가 많이 다쳤어요. 빨리 병원으로 옮겨
주세요!”
“그래요? 어디서 오는 길이어오.”
“앤센빌...... 앤센빌에서 도망쳐 오는 길입
니다. 하마터면 죽을 뻔했어요!”
“앤센빌?”
사내는 날카로운 눈으로 나와 준수를 쏘아
보더니 무겁게 입을 열었다.
“차에 타시오. 뒷자리에!”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뒤로 갔다. 미국 순찰
차의 뒷자리는 범인 호송용으로 만들어져 있
었다. 안에서는 문을 열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앞좌석과는 철망으로 단절되어 있었다.
뒷자리에 타라는 것이 약간 꺼림칙했지만
두 사람이라서 그런가 보다 생각하고 시키는
대로 뒤로 돌아갔다. 사내는 문을 닫아 줄 속
셈인지 따라왔다. 준수를 부축해서 태우는데
준수가 뭐하고 헛소리를 했다.
차 안에 귀에 익은 음악이 들려서 준수가 하
는 말을 제대로 들을 수가 없었다. 나는 헛소
리를 하는 건가 보다 생각하고 차에 오르려는
데 준수가 다시 한국말로 뭐라고 중얼거렸다.
“준수야, 뭐?”
“일...... 한...... 아..... 이...... 음악.......”
“음악? 음악이 뭐?”
내가 준수에게 다시 물었다. 뒤에 서 있던
경관이 빨리 올라타라고 재촉하더니 급기에는
나를 확 밀었다. 그 순간, 준수가 무엇을 말하
려고 하는지 비로소 이해가 되었다.
머리카락이 쭈삣하며 섰다. 차에서 흘러나
오던 그 음악은 바로 광신도들이 피의 의식에
서 쓰던 합창곡이 분명했다. 차에서 흘러나오
는 음악은 경음악으로 편곡되어 있지만, 분명 그
노래가 맞았다. 음악에 민감한 준수가 실신 상태
에서도 용케 그 곡을 알아들었던 것이었다.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경관의 눈동자가 기
이하게 빛났다. 그의 손이 허리춤의 권총으로
갔다. 나는 재빨리 상체를 차 안에서 빼냈다.
그는 총지갑에서 권총을 빼내려 했지만 잘 빠
지지 않았다.
나는 야구 방망이를 옆구리에서 빼들었다.
그가 총지갑에 있는 단추를 끌르고 총을 빼냈
지만 내가 한발 앞서서 그의 머리를 야구방망
이로 후려쳤다. 그가 바닥으로 굴렀다. 나는
달려가서 그의 얼굴을 힘껏 내질렀다. 얼굴에
서 피가 튀었다.
막상 쓰러뜨려 놓고 나니 진짜 경찰을 쓰러
뜨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플래쉬
를 들고 와서 놈의 소지품을 뒤져 보았다. 경
찰 뱃지가 나왔지만 다행히도 사진 속의 인물
과 생김새가 달랐다. 놈이 경찰 차를 탈취한
모양이었다.
놈은 데이빗의 전화를 받고 우리를 잡으러
온 다른 마을에 사는 그의 신도인 모양이었다.
광신도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구나, 하는 생
각을 하니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나는 순찰차로 돌아갔다. 차를 몰고 마을을
찾아 달렸다. 단조로운 도로를 달리다 보니 피
로와 함께 졸음이 몰려 왔다. 간간이 들려 오
는 준수의 신음소리가 이 모든 일들이 악몽이
아님을 일깨워 줬다.
몇 시간이나 달렸을까? 희부염한 먼동이 터
오고 있었다. 한참 달리다 보니 마을이 보였
다. 빠삐용이 마지막으로 탈출하기 위해 뗏목
에 올랐을 때의 기분이 이런 것이었을까.
“살았어! 준수야, 우리는 살았다고!”
나는 클랙슨을 요란하게 울리며 마을을 향
해 차의 속력을 높였다. 그런데 마을 입구에
들어서는 순간,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
았다. 마을은 어딘지 모르게 낯이 익었다. 나
는 마을을 천천히 돌아보았다.
아니, 이럴 수가.......
우리는 필사적으로 도망쳐 온 지옥 같은 그
마을로 되돌아온 것이었다. 나는 다급히 방향
을 돌렸다. 차는‘끼익!’하고 급정거하면서 회
전했다. 액셀레이터를 밟는 순간, 차는 중심을
잃고 옆가로수를 들이받았다.
나는 핸들에 머리를 심하게 부딪쳤다. 이마
에서 피가 흘러내리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사
람들이 몰려 오는 소리를 들으며 서서히 의식
을 잃어 갔다.
어떻게 된 거지? 분명 마을과는 반대 방향으
로 도망쳤는데....... 제기랄! 이제 다 끝났어!
누군가 차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아련하게
들려 왔다.
사람들이 두런거리는 소리에 눈을 떴다. 시
커먼 그림자가 눈앞에서 어른거리고 있었다.
의식을 잃기 전의 상황이 머릿속에 하나, 둘
떠올렸다.
“이제 정신이 드시나요?”
어느 남자의 목소리에 나는 깜짝 놀랐다. 나
는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사내는 놀랍게도
한국말로 물은 것이었다. 나는 목소리의 주인
을 쳐다보았다. 생김새도 한국 사람이었다.
“거의 40여 시간 혼수 상태였어요. 의사 말
로는 심한 외상은 없다고 하더군요. 도대체 무
슨 일을 당한 거죠?”
사내는 30대 중반 정도로 보였다. 그의 등
뒤로 의사와 간호원이 보였다. 나는 현재의 상
황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여기는 어디지? 지옥 같은 마을로 다시 돌아
왔는데.......
내가 기억을 되새기고 있자 사내가 내 눈동
자를 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겁 먹지 마세요. 저는 뉴욕의 한국 영사관
에서 연락을 받고 나온 영사관 직원입니다. 이
마을 보안관으로 부터 연락을 받았지요. 한국
학생 둘이 한 달 전에 도난당한 경찰차를 타고
서 마을로 들어왔다고...”
그의 이야기를 들으니 불쑥 준수가 걱정됐다.
“준수는 괜찮나요?”
“그 환자 이름이 준수인가요? 그래요. 피를
많이 흘렸지만 워낙 건장한 체구라 생명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대요. 커다란 부상을 입었던
데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이 마을 이름이 뭐죠? 앤센빌 아닌가요?”
“엔센빌? 아니에요!”
그의 단호한 음성을 듣는 순간, 살았구나 하
는 생각이 들었다. 새벽녘에 너무 피로한 상태
여서 내가 착각을 한 모양이었다.
“상황을 설명해 주지 않으면 곤란한 상황에
놓일 수도 있어요. 이 지역 보안관은 당신들의
이 마을 방문을 달갑게 여기지 않고 있어요.
도난당한 차량을 몰고 나타났으니 당연하겠지만...”
영사관 직원의 재촉에 나는 한국말로 그 동
안에 있었던 일들을 대략 설명해 주었다. 영사
관 직원은 주의깊에 내 말을 들었으나 그대로
믿는 눈치는 아니었다.
그는 내 말을 보안관에게 해 줬다. 보안관은
우리의 말을 전혀 믿지 않았다. 앤센빌이라는
마을은 이 근처에는 없다는 것이었다. 그는 도
난당한 차량을 몰고 나타난 우리를 구속할 뜻
을 비쳤다.
“나는 당신의 이야기를 믿어 주고 싶어요.
하지만 보안관은 그렇지 않군요. 아무래도 철
창 신세를 면하려면 당신의 말이 맞다는 걸 증
명하는 수밖에 없겠군요.”
영사관 직원이 유감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좋아요! 그럼 당장, 우리 차가 펑크난 채로
버려져 있는 곳으로 가 보죠.”
나는 의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병원을 나
섰다. 경찰 차 앞 좌석에는 영사관 직원과 보
안관이 탔고, 나는 뒷좌석에 경찰 두 명 틈 사
이에 타야만 했다. 나는 모든 사실을 증명해
내지 못하는 한 용의자 취급을 받을 수밖에 없
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영사관 직원이 건네 준 햄버거로 허기를 채
우며 온 길을 더듬어 갔다. 훤한 낮에 보니 도
로는 평화롭기 그지 없었다. 한참 달리다 보니
갈림길이 나왔는데 우리가 빠져 나왔던 길은
전혀 길처럼 보이지 않았다. 포장은 되어 있었
지만 나무에 가려 집입로가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길이었다. 낮에도 찾기 힘든 길을 어떻게
밤에 기어들어갔는지 신기할 정도였다.
보안관도 이런 곳에 길이 있었다는 것을 전
혀 몰랐는지 연신 사방을 살폈다. 그 길로 접
어들어 한참 올라가다 보니 경찰차를 탈취했
던 자리가 나왔다. 가짜 경찰은 보이지 않았지
만 도로에 피가 응고되어 있었다.
다시 이삼 킬로 정도 가다 보니 도로변에 우
리의 펑크난 코로라가 보였다. 코로라는 이틀
전과 그대로였다. 완전히 폐차 직전에 이른 차
안에서 우리가 여행용 가방을 꺼내자 그제서
야 보안관은 내 말이 사실일지도 모른다고 생
각하는 눈치였다.
시트에 묻은 준수의 피를 유심히 살펴보던
보안관은 무전기로 견인차를 불러서 차를 끌
고 가라고 지시했다. 보안관은 두 갈래 길에
대해서 한참이나 설명했다.
“자, 이제 그럼 앤센빌로 가 봅시다!”
보안관이 차에 오르면서 말했다. 나는 기겁
을 해서 단호하게‘NO!’라고 외쳤다. 내 목소
리가 너무 컸던지 다들 내 얼굴을 쳐다보았다.
보안관은 지원 병력을 부를 테니까 같이 가
보자고 설득했다. 영사관 직원도 그런 마을이 실
제로 존재한다는 걸 증명해야지만 우리에 대한
의심이 완전히 풀릴 거라며 가 보자고 했다.
다시는 그쪽으로 가고 싶지 않았지만 우리
에게 씌워진 혐의를 벗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
었다. 한참 뒤에 경찰차 한 대가 도착해 다시
금 지옥으로 들어가야만 했다.
“만일 마을에 접근하게 되면 당신들은 내 곁
은 떠나면 안 돼요? 알았죠?”
나는 달리는 차 안에서 옆에 앉은 두 명의
경찰관에게 신신당부했다. 마을이 가까워져
가자 데이빗과 다윗의 광기어린 눈빛이 떠올
랐다. 횃불을 들고 합창을 하던 광신도들의 모
습도 언뜻언뜻 차창을 스쳐 지나갔다.
한참 들어가자 저 멀리서 연기가 났다. 차가
점점 다가서자 매캐한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마을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 분명해지자
차안의 사람들은 모두 긴장하기 시작했다. 보
안관이 그냥 지나치는 것처럼 속력을 내서 마
을의 동태를 살펴보자고 제안했다.
우리는 그러기로 합의하고 빠른 속도로 달
렸다. 마을이 점점 다가왔다. 그런데 이게 웬
일인가? 40여 채 가량 서 있던 앤센빌이라는
마을은 모조리 타고 있었다.
보안관은 애초의 약속을 깨고 차의 속력을
줄였다. 집들은 앙상한 뼈대만 남은 채 연기를
피어 올리고 있었다.
차로 마을을 돌아보았지만 마을 사람들은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모조리 떠난 모양이었
다. 공터에는 아직도 깨어진 헤드라이트 조각
들이 널려 있었다.
피와 죽음의 향연이 열리던 제단으로 가 보
았다. 제단에는 두 개의 불 탄 십자가만 앙상
한 뼈대를 드러내고 있었다. 하지만 십자가에
매달렸던 흑인의 시체는 찾을 수 없었다.
잿더미를 헤집어 보았지만 뼈는 나오지 않
았다. 데이빗의 집 지하실에도 가 봤으나 마찬
가지였다. 숲 속 어딘가에다 모조리 묻고 떠난
건지 개들의 시체 역시 변견할 수 없었다.
보안관과 영사관 직원은 마을의 잔해를 보
고는 나의 말을 어느 정도 믿는 눈치였다. 하
지만 마을에 살던 이들이 두 명의 흑인을 죽이
고 준수의 손가락을 잘랐다는 마땅한 증거가
없었다.
보안관은 조용히 사건을 처리하고 싶어하는
눈치였다. 그는 차량 탈취 부분에 대해서는 무
혐의로 처리해 주었고, 또한 고철이 되다시피
한 렌트카에 대해서는 부득이한 피해였다고
보증을 서 줘 보험으로 처리할 수 있게끔 도와
줬다. 또한 병원비도 알아서 처리해 주겠노라
고 했다.
하지만 사건은 더 이상 파헤치려 하지 않았
다. 숲 속을 뒤져 보면 개와 두 흑인의 시체가
나올지도 모른다는 나의 제안도 숲이 너무 넓
다는 이유만으로 거절했다.
영사관 직원은 지방검사 선거가 임박해 있
어서, 시끄러운 스캔들을 피하고 싶은 모양이
라고 귀엣말을 했다. 결국 유리의 사건은 유야
무야 처리되고 말았다.
하지만 이 사건은 우리에게, 특히 준수에게
치유할 수 없는 상처를 남겨 주었다. 의식을
회복한 준수는 한동안 겁에 질린 정신병자처
럼 아무 말도 못 했다. 하긴 기타리스트를 꿈
꾸던 그의 손가락이 잘려 나갔으니 그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크리라.
준수는 충격에서 서서히 빠져 나왔다. 그는
고통스러운 기억에 몸부림 치다가 가끔씩 잘
려 나간 손가락을 보며 오열하곤 했다.
수민이 소식을 듣고 달려왔으나 수민이와의
관계도 점차 소원해지기 시작했다. 수민은 극
진하게 준수를 보살폈지만, 잘려나간 손가락
때문에 자포자기하는 준수의 모습에 실망했는
지 심한 말다툼을 한 끝에 다시 인디아나로 돌
아가고 말았다.
나는 준수의 치료 때문에 그 마을에 이 주
가량 머물러야 했다. 이 주가 지나자 허벅지의
상처는 어느 정도 아물었다.
약속대로 보안관이 와서 퇴원를 시켜 줘서
준수와 함께 병원을 나설 수 있었다. 손에 붕
대를 감은 준수와 함께 버스터미널에서 버스
를 기다리는데 인디언 노인이 다가오더니 말
을 걸었다. 옷차림을 보니 토착 인디언이었다.
“젊은이들이 앤센빌이란 마을에서 살아나왔
다는 두 젊은이인가?”
보안관은 쉬쉬 했지만 이미 마을에는 우리
에 대한 소문이 퍼질 대로 퍼져 있었다. 나는
노인이 단순한 호기심 때문에 그러는 줄 알고
내키지는 않았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준수가
자리를 옮기자고 잡아끌어 노인을 지나쳐 가
는데 등 뒤에서 노인이 다시 물었다.
“앤센빌, 앤센빌이 무슨 뜻인 줄 아나?”
나는 순간, 걸음을 우뚝 멈췄다.
“인디안 말로‘광신’이라는 뜻이라네. 그러
니까 앤센빌은‘광신의 마을’을 뜻하는 거지.
인디안 전설에도 그런 마을이 있었다고 전해
지고 있지. 그 마을에 들어서는 사람들은 의식
의 제물로 희생당하곤 한다고... 참으로 무
서운 일이지.”
인디안 노인은 말을 끊고서 먼 하늘을 올려
다보았다.
“노인장, 그건 어디까지나 전설이지 않소?”
노인의 이야기를 들었는지 백인 운전사가
커피잔을 들고 와서 물었다.
“모르는 소리....... 아주 오래 전부터 이 마
을을 지나간 사람 중에서 실종자들이 종종 있
었지. 가끔씩 실종자의 가족들이 마을로 들어
와서 사람을 찾다가 돌아가곤 했다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중에 백인은 한 사람도 없었지.
만약 백인 실종자도 있었더라면 보안관이 나
몰라라 하지는 않았을 텐데.......”
기다리던 필라델피아행 버스가 왔다. 나는
노인의 이야기를 더 듣고 싶었지만 돌아서야
만 했다. 등 뒤에서 노인이 또렷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젊은이들 웬만하면 고향으로 돌아들 가게
나. 그놈들은 자신들의 비밀을 아는 사람을 절
대로 그대로 놓아 두는 법이 없다네. 아마도
지구 끝까지라도 쫓아갈 걸세. 이 땅은 너무
위험해.......”
나는 준수 뒤를 따라서 버스에 올랐다. 인디
안 노인은 차가 완전히 멀어질 때까지 한 곳에
붙박인 듯이 서서 버스 뒤꽁무니를 쳐다보았다.
필라델피아로 돌아온 우리는 서둘러서 귀국
준비를 했다. 인디안 노인의 경고 때문이 아니
라 더 이상 이 저주받은 땅에 남아 있고 싶지
않아서였다.
귀국 준비를 하면서 준수는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 내가 무심코 음악을 틀면 준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음악 소리가 들리지 않는 곳을
찾아 자리를 옮겼다. 그의 얼굴은 석고상처럼
굳어 있어서 나는 준수가 자살이라도 하지 않
을까 내심 걱정하곤 했다.
우리는 한국행 비행기에 탑승했지만 가족을
만날 수 있다는 설레임도 미국을 떠나는 데서
오는 아쉬움도 느낄 수 없었다. 우린 착잡한
심정으로 창 밖만 바라보았다.
준수의 옆자리에는 교포 할머니가 앉았다.
비행기가 이륙하자 할머니는 준수에게 교회를
다니냐고 물었고 준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
다. 할머니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늘어놓
으면서 간간이 준수에게 교회에 다니라고 설
득했다.
준수는 할머니의 이야기를 듣지 않으려고
일부러 자리를 뜨기도 했다. 하지만 할머니는
죄인을 구제하라는 기독교인의 사명감을 게을
리 하지 않았다. 할머니가 도에 지나치게 준수
를 귀찮게군다 싶어 내가 나섰다. 준수는 다른
종교가 있으니 그만하시라고 할머니를 만류했
지만 그때 뿐이었다.
할머니는 성경 구절까지 인용해 가며, 사탄
의 꼬임에 넘어가지 않고서 영생을 얻으려면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고 침을 튀겨 가며 설교
했다. 한순간, 머리카락 속에 두 손을 파묻고
있던 준수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는 앞
에 놓여 있는 맥주캔과 책들을 던지며 고함을
질렀다.
“종교에 모든 것을 팔어 버린 것들아! 봐라.
네 놈들 때문에 내 한손이 날아갔단 말이다!
나의 인생과 꿈들이...... 흐...... 흐흑!”
비행기안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승무원들이 달려와 흐느끼는 준수를 만류했
다. 할머니는 너무도 놀랬는지 움직이지도 못
한 채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스튜어디스가
달려와서 할머니에게 진정제를 먹였다. 그리
고는 준수와 격리시키기 위해서 앞쪽으로 데
려갔다.
다른 승객들이 힐끔거리며 준수를 쳐다봤
다. 나는 준수의 오른손을 꽉 잡았다. 세상 모
든 사람들이 준수를 욕한다 해도 난 준수를 이
해할 수 있었다.
비행기가 서울에 다가갈수록 준수의 앞으로
의 생활이 걱정되었다. 종교에 대해 지독한 혐
오감과 증오심을 지니고 있는 준수가 서울에
서 잘 지낼 수 있을지 은근히 불안했다.
공항 출입구를 나서니 가족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준수 가족들은 애써 준수의 왼손을 외
면했다. 준수 아버지는 태연한 척 준수를 위로
했지만, 준수의 어머니와 여동생은 잘린 손을
붙잡고 주위의 시선도 아랑곳하지 않고 대성
통곡을 했다. 나는 준수네 가족을 뵐 면목도
없어 마중나온 동생 손을 붙잡고 서둘러 자리
를 떠났다.
그 뒤로 준수의 소식을 들을 수 없었다. 가
끔 연락을 시도해 보았지만 준수가 나를 피하
는 눈치여서 이내 포기하곤 했다.
얼마 뒤에 거리에서 우연히 준수 어머니를
만나 준수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준수는 정
신병원에 입원해 있다는 것이었다. 집으로 전
도하러 온 전도사와 집사를 테니스채로 폭행
하는 바람에 교회에서 몰려오는 등 한바탕 난
리가 났다고 했다. 다행히도 상처가 심하지 않
은 데다 피해자 쪽에서 쉽게 합의를 해 줘서
풀려 났으나, 그 뒤로도 크고 작은 사건이 끊
이질 않아 아예 입원을 시켰다는 것이었다.
나는 준수를 찾아가 볼까 하다가 그만두었
다. 나를 보게 되면 그때의 기억이 되살아나
치료에 나쁜 영향을 줄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
문이었다.
서울에 와서 나는 한동안 악몽에 시달렸으
나 생활이 바빠지자 그때 일도 차츰 잊혀져 갔
다. 복학을 하고 정상적인 사람들과 웃고 떠들
다 보니 앤센빌에서 있었던 일이 실제 일이 아니
라 꿈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뉴스를 보고 있다가
도저히 잊을 수 없는 이름과 다시 접해야만 했다.
“......한국 시간으로 28일 새벽, 미국 텍사스
주 웨이코의 집단 거주지에서 다윗파라는 사
이비 종교 집단과 경찰간의 무력 충돌이 발생
했습니다. 데이빗 코레시가 교주로 있는 다윗
파는 교주를 체포하러 온 경찰에 총격을 가해
사상자를 낳았으며 현재 경찰과 대치 중에 있
습니다.
코레쉬는 자신이 예수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다윗파는 제7일 안식교일 예수 재림교의
한 분파로 알려져 있습니다.
교주 코레쉬는 15명의 아내를 거느리고 마
약 밀매와 아동 학대를 자행하는등 종교를 압
세워 끔직한 만행을 저지른 것으로 밝혀져, 경
찰이 검거에 나서자 신도들을 이끌고 대항하
고 있습니다.
경찰은 요새화된 집단 거주지에는 대략 80
여 명의 신도들이 있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
며, 이들은 고레쉬의 명령에 따라 결사 항전
태세를 갖춘 것으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경찰
이 이들을 무력으로 제압할 경우 집단 자살 등
을 택할 가능성이 상당히 높아 대치 상태가 장
기화될 가능성이 높다고 경찰 고위 간부가 밝
혔습니다.”
‘다윗’과‘코레쉬’라는 단어는 나에게 잊혀
졌던 악몽을 다시 떠올리기에 충분했다. 하지
만 내가 갔던 지옥의 마을 앤센빌은 동부에 위
치했고, 텍사스 웨이코는 서부에 있어 비슷한
느낌은 들었지만, 내가 경험했던‘다윗교’와
같은 건지는 알 수 없었다.
나는 그 날부터 뉴스에 귀를 기울였다. 시간
별 라디오 뉴스를 들었고, 텔레비전의 정규 뉴
스는 물론이고 수시로 AFKN을 보았다.
결국 그 대치극은 코레시를 포함한 86명의
신도가 불을 질러 집단 자살하는 끔찍한 비극
으로 막을 내렸다. 사건이 어이없이 끝나자 매
스컴은 미 정부의 무능과 리노 법무장관의 성
급한 진입 지시를 비판했다.
결국 미 정부에 대한 비난으로 매스컴의 초
점이 맞추어졌고, 그 바람에 다윗파라는 종교
집단에 대해선 별다른 언급없이 넘어가고 말
았다.
나는 그 사건을 앤센빌 마을과 별개의 문제
로 정리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나는 내 의사와는 상관없이 다시 그 사건을 떠
올려야 했다.
난데없이 미국 대사관에서 전화가 걸려 온
것은 그로부터 일주일 뒤였다. 미국 대사관에
근무하는 한국인 이유직이라는 사람이 전화를
걸어와 잠깐 만날 수 없느냐는 거였다. 미국에
체류했던 대학생들에게 미국에 대한 인상과
생각을 알아 보기 위한 설문 조사를 하기 위한
거라고 했다. 나는 귀찮기도 한 데다 미국이라
는 나라에 대한 인상도 좋게 남아 있지 않아
바쁘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그러자 설문 조사에 응하지 않는다면 앞으로
미국 비자를 발급받거나 미국 관련 업무에
불이익을 당할 수도 있다며 은근히 협박을 해
왔다. 막상 협박을 당하고 나니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미국에 다녀 온 사람은 수만 명이 될
텐데 하필 그런 설문 조사에 나를 지목했을까
의아스러웠다.
나는 기분도 상하고 해서 완강히 거절한 뒤
에 전화를 끊었다. 수화기를 내려놓고 나서도
찜찜한 기분은 가시지 않았다. 나는 곧 장난
전화였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그 일을 잊어
버렸다.
다음날 학교에 가니 후배가 과사무실에 누가
나를 찾아왔다는 것이었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과사무실로 갔다. 그곳에는 두 명의 덩치
큰 외국인과 동양인 한 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일한아, 미국대사관에서 나온 분들이래. 급
하게 너를 만나야 할 일이 있어, 여기까지 찾
아왔대.”
조교 형이 들어가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나며
소개를 했다.
“저하고 어제 통화했었죠? 정식으로 인사하
죠. 저는 미국 대사관에서 근무하고 있는 이유
직이라고 합니다. 저희는 일한 씨에게 한 가지
도움을 청하기 위해서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왜 이렇게 나에게 집착하는 건지 한편으로는
호기심도 일었지만 한편으로는 불쾌하기도
했다.
“설문 조사 건이라면 어제 분명히 거절했을
텐데요.”
“잠깐 조용한 곳으로 가서 이야기나 좀 하죠.”
이유직 씨가 정중하게 말했다. 나는 두 미국
인을 바라보다가 설마 나를 해꼬지하겠냐 싶
어서 순순히 과사무실을 나섰다. 나는 그들을
데리고 학교 건문 옆뜰로 갔다.
자리에 앉자 두 미국인이 사방을 살폈다. 그
리곤 가방을 열어 녹음기와 여러 개의 파일을
꺼내 놓았다.
“도대체 무슨 일이죠?”
나는 이유직 씨에게 한국말로 물었다. 미국
인들도 간단한 한국말은 하는지 한 사내가 사
진을 한 장 건네 주며 아는 사람이냐고 영어로
물었다.
사진 속의 사내는 30대 중반의 서양인이었다.
인상이 그리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나는
기이하게 빛나는 눈빛을 지닌 사진 속의 사내
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그들은 시선을 교환하더니 다시 나에게 두
장의 사진을 건네 주었다. 나는 그 사진을 보
는 순간, 큰 충격을 받았다.
중반에 지저분한 인상이었다. 하지만 그 눈만은
기이하게 빛났다. 나는 모른다고 하면서,
누구냐고 반문했다. 그들은 시선을 교환하더
니 아무말 없이 다시나에게 두장의 사진을 건
네 주었다. 그 사진을 보는 순간, 큰 충격을 받
았다.
사진 속의 인물은 앤센빌에서 만났던 다윗
과 데이빗이었다. 다윗의 눈을 보자 그때의 악
몽이 떠올랐다. 내 표정을 유심히 살피던 이유
직이 말문을 열었다.
“역시 알고 계시는군요. 처음 본 사진의 주
인공은 데이빗 코레쉬입니다. 본명은 버논 하
웰. 얼마 전 텍사스에서 집단 자살한 다윗파의
교주입니다. 나이는 33세. 학력은 중졸. 자동
차 정비사, 막노동꾼, 가수 등을 전전하다 80
년대 중반 다윗교에 입교하여 87년에 총격전
을 통해 교주 자리에 올랐습니다.
그 후 종교 조직을 이용해 마약 밀매, 살인,
아동 학대 등을 일삼다가 얼마 전 뉴스에서 나
온 것처럼 비참한 최후를 맞았습니다. 가족은
84년에 14세였던 레이첼 존스와 결혼한 것을
비롯해서 15명의 부인과 7명의 자식을 거느리
고 있었습니다.
지금 보고 계신 사진 중 오른쪽 사내는 데이
빗 윌링. 본명은 조너단 케인입니다. 나이는
41세. 다윗교의 2인자로 코레쉬의 오른팔입니
다. 프린스턴에서 종교학 박사 학위를 받았을
정도로 뛰어난 수재입니다. 88년부터 다윗교
의 일을 맏게 되었는데 능력을 금세 인정받아
제2인자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코레쉬에게 종
교적 이론을 세워 준 인물이라고 할 수 있죠.
왼쪽 아이는 빅터 코레쉬. 데이빗 코레쉬의
큰아들로 11세입니다. 다윗교 내에서는 이 아
이를 구세주로 신봉하고 있습니다. 교단 내에
서는 다윗이라고 불리고 있죠. 데이빗 윌링이 이
아이의 교육을 전담한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도대체 알고 싶으신 게 뭐죠? 저는 이 두
미치광이에게 잡혀 처참하게 죽을 뻔했어요.
그것 때문에 저를 찾아왔나요?”
나는 한시라도 자리를 빨리 뜨고 싶어서 이
유직 씨에게 물었다. 흥분한 때문인지 내가 듣
기에도 커다란 음성이었다.
“그렇습니다. 코레쉬는 지난번 텍사스 사건
때 불에 타 죽었습니다. 경찰이 치열까지 검사
해서 그의 죽음을 확인했습니다. 하지만 86구
의 시체 중에 빅터 코레쉬와 데이빗 윌링의 시
체는 찾을 수 없었습니다.
경찰과 대치하고 있을 때는 그들의 존재를
확인했었죠. 결국 그들은 살아서 그곳을 탈출
했다는 이야기가 되는 셈이죠. 그런데 문제는
바로 이 두 사람들에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FBI의 조사에 따르면 미 전역에 퍼져 있는 다윗
교의 신자가 2만에서 3만 명 정도라는 겁니다.
이번 사건으로 다윗교도들은 미국 정부와
현 체제에 대해 광기에 가까운 증오심을 가지
고 있습니다. 코레쉬는 죽었지만 정작 구세주
로 양육되어 온 이 아이와 2인자인 데이빗 윌
링이 건재한 이상 언제 어떤 식으로 참혹한 일
이 발생할지 모르는 상황입니다.
우리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이 다윗교의 교
리에는 무시무시한 목적이 담겨져 있었습니
다. 유색 인종을 말살시키겠다는 것이 그중 하
나입니다. 이들은 백인들만이 신을 닮은 진정
한 인종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
른 유색 인종을 말살시키게 되면 천국의 완성
을 앞당길 수 있다는 거죠. 그들은 이러한 내
용을 교리에 명시하고 있습니다.
또한 신도들은 코레쉬와 부인들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이‘다윗 가족’을 구성, 코레쉬
와 함께 비신도들을 모두 죽인 뒤에 이 세상을
지배할 거라고 믿고 있습니다. 다윗교는 이처
럼 배타적이며 폭력 지향적인 사이비 종교의
전형적인 형태를 갖추고 있습니다.
일한 씨를 찾아온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
입니다. 우리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일한 씨는
지난번 미국 방문시 다윗교 신자들에게 수난
을 당한 것으로 나와 있습니다. 친구와 함
께....... 그 친구 이름이 박준수인가요?
그 분도 수소문해 보았지만 정신질환을 앓
고 있는 것 같아서 일한 씨에게 전적으로 매달
리게 된 겁니다. 미 정부에서는 집단 자살이
발생한 후, 비밀리에 다윗교에 대한 철저한 수
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조사 과정에서 앤센빌이라는 마을과 거기서
생존해 나온 두 명의 한국인 학생이 있다는 사
실을 발견했습니다. 조사를 해 보니 당시 경찰
서장이 사건을 축소 보고한 사실이 드러나 앤
센빌이라는 마을에 대해서 재수사를 하고 있
는 중입니다.”
나는 이윤직의 말을 듣고 잠시 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다. 우리가 앤센빌이라는 마을에서
탈출했을 때, 정밀한 수사를 했더라면 어쩌면
텍사스에서 발생한 집단 자살은 막을 수 있었
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이지만 지금이라
도 수사에 착수했다니 천만 다행이었다. 그들
은 앤센빌의 마을에 들어섰을 때부터 탈출하
기까지의 과정을 상세히 들려달라고 했다. 기
때의 기억을 되살린다는 것이 내키지 않았지
만 그들로 인한 또다른 희생자가 나오지 않기
를 바라며 끔찍한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그들은 가끔씩 질문을 던지기도 하면서 주
의깊게 들었다. 질문을 받다 보니 미국인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종교 전문가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의식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표명했다. 다른 한 사람은 눈초리나 절제된 몸
짓으로 봐서 FBI 같은 곳에 근무하는 수사관
같았다.
두 시간이 넘게 걸린 내 이야기가 끝나자 이
유직 씨가 준비해 온 설문지를 보며 질문을 던
졌다. 마을 사람들의 생활 형태, 남녀 비율, 아
이들의 수, 공동 예배, 식사 방식 등등에 대해
서 물었으나 절반 가량은 나로서도 대답할 수
없는 질문들이었다.
종교 전문가는 나에게 별도로 합창곡과 흑
인을 죽일 때의 의식, 데이빗의 집에서 본 다
윗의 그림에 대해서 물었다. 그는 가방에서 낡
은 책을 꺼내더니 나에게 그림을 하나 보여 주
었다.
색깔도 다르고 크기도 다른 그림이었지만,
흑인으로 묘사된 골리앗의 심장을 꺼내들고
서 있는 백인 아이 다윗의 모습은 내가 본 그
림과 정확히 일치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그림의 유래에 대해서 들려 주었다.
“이 고서(古書)는 구약성서에 외전에 해당한
다고 할까요? 약 600여 년 전 정통 성서와는
달리 유대교의 한 종파가 자기들 나름대로 새
로운 성서를 기록했는데 거기에 나오는 그림
입니다. 그런데 이 종교는 신과 악마와의 투쟁
을 혼란스럽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어느 쪽이
선하고 어느 쪽이 악한지 쉽게 구분이 안 가는
거죠.
다윗의 경우도 그렇습니다. 골리앗을 해치
운 이스라엘의 영웅으로 그리기 보다는, 정권
욕으로 인해 골리앗을 잔인하게 죽인 다음에
이스라엘을 폭압적으로 지배한 독재자로 묘
사했습니다.
이 종파는 또한 비신도는 전부 말살해야 한
다는 교리를 지니고 있습니다. 일부 종교 학자
들은 이 종파를 악마숭배교의 일종으로 보고
있습니다. 하여튼 이 그림이 데이빗의 집에 걸
려 있었다면, 이 종파와 다윗교는 뭔가 연관이
있겠죠.”
‘악마숭배교’라는 말을 듣고 나니 생각나는
것이 있어 종교 전문가에게 질문을 던졌다.
“저...... 웨이코에서 진압시에 불이 났을 때
연기에 악마의 얼굴이 보였다는 얘기가 있던데...”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만일 있다면
3류 사진작가가 조작한 사진에 의해서나 가능
하겠다죠. 하지만 사실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좀 끔찍한 일이 있었습니다. 불을 다 끈 후 거
기에 들어간 소방대원의 증언에 의하면 그곳
은 상상할 수도 없는 지옥이었답니다.
86구의 탄 시체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코레쉬를 가운데 두고 둥굴게 원을
이룬 채 가지런히 앉아 있었대요. 자세히 보니
앞사람을 등 뒤에서 꼭 껴안고 타 죽었더라는
거예요. 고통에 못 이겨 뛰쳐 나가고 싶어도
뒷사람에게 잡혀 어쩔 수 없이 타 죽을 수밖에
없게끔요. 정말 미친놈들이죠!”
종교 전문가는 몇 개의 질문을 더 던지고 나
서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수사관인 듯한 사내
가 오늘 이 자리에서 있었던 일을 절대 발설하
지 말아 달라고 당부했다.
이유직 씨는 준수가 당한 내상과 외상에 대
해서 위로의 말을 하고 나서 이렇게 덧붙였다.
“이제 이념 문제가 사라진 지구상에 종교가
가장 큰 갈등의 불씨로 남아 있습니다. 미국만
하더라도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종교 냉소주의
가 만연해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 빈 자리
를 사이비 종교가 자리잡아 가기 시작하고 있
습니다. 인간이 존재하는 한, 그리고 종교가
있는 한 사이비 종교도 분명 존재할 수밖에 없
습니다.
심각한 일이지요. 분명히 그 빅터라는 아이
와 윌링이라는 놈이 앤센빌 같은 마을에서 죽
음의 의식을 되풀이하면서, 뭔가 커다란 살륙
을 꿈꾸고 있을 겁니다. 그들의 교리를 실천하
기 위해서....... 그 놈들이 커다란 사건을 저지
르기 전에 잡아들인다는 게 미국 정부의 방침
이지만 제가 볼 때는 솔직히 가망 없어 보입니
다. 하여튼 협조해 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무슨 일이 생기면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그 뒤로 수사가 어떻게 진척되고 있는지 무
척 궁금했지만 더 이상 연락이 없었다. 외신에
보도가 되지 않고 있는 걸로 봐서는 아직 잡히
지 않았을 거라고 추측할 수 있을 뿐이었다.
다시 그 일을 잊을 만하니까 이번에는 오클
라호마 연방빌딩 폭탄 테러 사건이 터졌고 콜
로라도 기차 탈선 사건 등의 대규모 데러 사건
등이 터졌다.
미 정부는 극우 단체들의 소행이었다고 공
식 발표했지만 다윗파의 소행 같다는 의심을
지워 버릴 수 없었다. 그것이 단순한 나의 망
상이 아니라는 것을 타임지에 실린 폭탄 테러
용의자의 사진을 보고 이내 곧 확인할 수 있었다.
용의자의 왼쪽 팔에는 문신이 있었는데, 그
글자는 다름 아닌‘DAVID’였다. 바로, 다윗이
라는 것이다. 나는 그것을 보고 어느 정도 확
신할 수 있었다. 우연의 일치일 수도 있겠지만
그 미친 다윗교도들이 교주의 죽음에 대한 피
의 복수를 시작했다고.......
나는 타임지를 덮으며 어딘가에서 차갑게
웃고 있을 빅터라는 금발의 소년과 윌링을 떠
올렸다.
옆자리의 청년들은 술이 몇 순배 돌자 목소
리가 좀더 높아졌다. 술잔을 만지작거리며 생
각에 잠겨 있는데 준수가 불쑥 물었다.
“일한아, 종교가 뭘까?”
준수의 눈동자는 물기에 젖어 있었다.
“글쎄...... 불완전한 존재인 인간이 스스로
의지하고 위로받기 위해 만든 체계적인 논리
가 종교가 아닐까?”
“네 말대로라면 결국 인간은 자신들이 만든
논리에 의해서 지배를 받는 셈이군.”
“그렇지. 인간의 내면 속에는 지배당하고 싶
은 심리가 깔려 있으니까.”
“정말 신이 있어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면
신은 지금 어떤 심정일까? 자신들 편한 대로
논리를 세워 놓고 신의 뜻이라고 피 터지게 싸
우고 있는 우리의 모습을 본다면.......”
준수는 자조 섞인 미소를 띄우며 말했다. 그
는 검은 장갑을 낀 의수로 테이블을 툭툭 치다
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나의 잘린 손은 신의 뜻이었을까, 아니면
신의 뜻을 빙자한 인간의 만행이었을까? 가끔
궁금해질 때가 있어. 내가 지은 죄 때문에 신
이 나를 벌한 거라면, 창조할 때부터 내가 죄
를 못 짓게 만들었어야 하는 것 아니겠어? 죄
를 짓도록 창조해 놓고 이제 와서 벌을 내린다
는 건 말도 안 돼! 흐흑!”
술 기운 때문에 감정이 격앙되었는지 준수
가 고개를 묻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갑자기 옆
자리가 조용해졌다. 돌아보니 한 청년들이 곱
지 않은 눈길을 우리에게 보내고 있었다. 그
중에서 덩치 큰 사내가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
하고 테이블을 박차고 일어나더니 우리 쪽으
로 비틀거리며 다가왔다.
“당신들 뭐야? 아까부터 듣자듣자 하니까
말을 너무 심하게 하는구만.”
사내는 상당히 취해 있었다. 그는 우리의 대
화 때문이 아니라 취기 때문에 나선 것 같았
다.
“기분이상했다면죄송합니다. 이해하십시오.”
나는 엎드려 흐느끼고 있는 준수를 일으켜
세웠다. 술값을 계산하기 위해서 지갑을 꺼내
는데 이죽거리는 소리가 들려 왔다.
“술자리마다 꼭 저런 저런 놈들이 있단 말
야. 자신의 어설픈 지식을 뽐내기 위해서 꼭
종교를 도마에 올려놓고 씹으려 들지. 자기가
무슨 니체라도 되는 걸로 착각하고 있는 건지...”
준수가 그 소리에 불끈해서 돌아섰다. 나는
준수의 어깨를 잡아 만류했다. 준수가 숨을 고
르더니 돌아섰다. 우리는 가게 앞에서 악수를
나눴다. 준수의 뒷모습을 지켜보다가 돌아서
서 걷는데 준수가 불렀다.
“일한아, 나를 구해 줘서 정말 고마워! 살아
있다는 것은 참으로 좋은 거라는 걸 알았어.
이건 진심이야! 오늘 너에게 이 말을 해 주고
싶었어.”
준수가 미소를 띄운 채 검은 장갑을 낀 손을
흔들었다. 나는 준수를 마주 보고 서서 손을
흔들었다. 검은 장갑을 낀 키보드 주자로서 당
당히 살아가기를 빌며.......
화려한 도시의 불빛 속으로 준수의 모습은
이내 묻혀 버렸다. 지하철을 타기 위해서 역
쪽으로 가다 보니‘재림교’라고 쓰인 이상한
플랜카드가 보였다.
“예수님이 재림했습니다. 재림교를 믿으세
요! 세상의 종말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재림교
를 믿어야 영생할 수 있습니다!”
웬 때늦은 휴거인가 해서 나는 아무 생각 없
이 그 앞을 스쳐지나갔다. 젊은 여자가 찌라시
를 나누어 주었다. 나는 건성으로 찌라시를 훑
어 보았다. 조작한 사진 옆에 세상의 종말이
다가오고 있는 여러 가지 징후가 나열되어 있
었다.
쓰레기통을 찾아보았지만 보이지 않았다.
주머니에 넣고서 지하도로 내려갔다. 플랫폼
에서 전동차를 기다리다가 이상한 기분이 들
어서 좀전의 찌라시를 살펴 보았다.
‘재림한 예수님의 실제 모습’이라는 커다란
글씨 아래 한 장의 사진이 인쇄되어 있었다.
순간, 머리가 멍해지면서 전신에 전율이 왔다.
사진 안에는 빅터, 아니 다윗이라는 소년이
기분나쁜 미소를 띄운 채 나를 차가운 눈길로
바라보고 있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