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크는 마지막으로 남은 대장 ELID를 분자분해폭탄으로 없애는 대신 밀수용으로 쓰이는 창고에 나와 함께 들어가

 숨는것을 택했다. 폭탄을 대장ELID에게 가까이 가서 터뜨리려면 직접 들고 가서 자살공격을 하는수밖에 없었지만

 전장에선 용맹해도 몸은 잘 사리는 보크는 나중을 기약하며 우선은 숨기로 한것이다. 아마 나때문이라도 무리한

일은 벌이지 않는것 같다. 이곳에 남아있는 무기는 분자분해폭탄과 보크의 검밖에 없었고 더이상의 전투를 하기엔

 가망성이 없을것 같다. 한동안 할게없어서 그런지 보크는 자신의 검을 꺼내며 나에게 말을 건냈다.


"전에 얘기했는지 모르겠지만 이 검은 우리 기사단이 초창기때부터 써왔던 검이야. 부근 지역의 카바르틴인들이 직

접 여러번 제련한 검이지."


일체의 장식없이 실용적으로 생긴 보크의 검은 원래 롱소드정도의 크기였다고 한다. 기사단 초창기에 여러번 전투

를 겪으며 부러지거나 휘어지는 일이 많아지자 그때마다 다시 녹이고 제련하여 점차 견고해지고 검체도 커졌다고

한다. 그러면서 지금 시대에 얘기하는 희토류성분과 운석에 들어있는 철성분도 들어가 같은 강철검들보다 더욱 강

하다고 설명해 주었다.


"나의 스승은 기사단장겸 몇 안 남은 카바르딘인출신의 대장장이였지. 이미 대장장이기술로는 한계가 있음에도 현

대제련법과 단련법을 연구해 오직 인간의 힘으로 지금 시대 못지 않은 기술을 사용해 한번더 이 검을 강하게 만들

었단다."


보크의 스승은 이미 강철을 단련할수있는 한계치까지 검을 다시 만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까지의 전투에도 검

이 멀쩡했던 것이다.


"내가 타고 다니던 말도 카바르딘출신의 명마였지. 야생마처럼 강인하면서도 역사상 가장 빠른 말이라고 할수 있어."


보크의 말은 자랑으로 들리진 않았다. 표정이 어두워 보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말은 그보다 빠른 총탄때문에 죽었고 내 검술도 한계가 오고 있어. 사실 지금 시대까지 이런 방식으로 정의

를 지켜온것이 기적이야. 이제 기사는 나뿐이니. 진정으로 기사의 시대는 끝났다고 할수있어."


보크는 어릴적부터 고아여서 부모를 알지도 못한채 기사단에서 키워졌다고 한다. 그러면서 자신이 선택할 틈도 없이

 기사로서 살아야했고 검이외엔 다른 무기는 허락되지 않았다.


"기사로서의 삶은 나쁘지 않았지. 의외로 검술에 소질이 있어서 검을 휘두르는것도 싫지 않았고 덕분에 여러 위기도

넘겼지만.."


보크의 검을 들고 있는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사실 난 아무리 정당방위라도 사람을 죽이거나 하는건 싫었어. 하지만 기사가 된후엔 선택권이 없었지, 게다가 다들

 총을 들고 있어서 자비를 베풀 틈도 없었고.."


그는 그밖에도 기사단이 살아온 많은 이야기들을 해주었다. 여타 기사단과 다르게 기독교중심이 아닌 이유는 이념과

 신앙에 얽매이지 않고 제대로 신념을 지킬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과 기사도를 지킨다면서 이를 정치적으로 이

용하는 많은 기사단들을 봤기 때문에 이렇게 문명권에서 멀리 떨어진곳으로 옮겼다는등의 이야기도 해주었다. 그리고

 자신들의 존재는 이득의 유무나 정치적,법적으로 인해 소외된 사람들을 지키는것이 목적이었고 그래서 민간인들이

전란에 희생되는 참사를 여러번 막아왔다고 한다. 그러면서 많은 기사들이 떠나갔고 얻는것도 없었던데다 여러 사람

들로부터 시대착오적이라는 말을 들어왔지만 기사단을 창립한 사람의 신념만큼은 지켜온 것이 자랑스럽다고 했다.


"초대는 순수하게 기사도를 지키고 싶은 기사로서 살아가고 싶어서 홀로 기사단을 만든후 이에 동조하는 사람들을 모

았지. 그리고 신의 뜻이었는지 우리들은 불가능하다고 여긴 많은 일들을 해왔어. "


기사단의 정점은 인류가 현대전으로 변모하기 시작한 2차대전까지였다. 그땐 괴물급들인 기사들이 많았고 역대 최다

인원인 300명 이상이었지만 독일군이 어느 유럽의 민간인들을 학살하려고 할때 전원이 나섰다가 수백명이 쓰러지면

서 그때부터 약화되기 시작했다.


"그때 선배들은 독일군의 전차든 장갑차든 모두 파괴하고 기관포세례와 수많은 독일군병사들까지 막아내며 주민들을

 대피시켰지. 이미 주민들을 지켜줄 군인들은 모두 도망가서 우리밖에 없었지."


그러나 냉병기로 무장된 기사단은 그것이 한계였다. 소규모 폭격기의 폭격에다 저격수,화염방사기등의 근대무기앞에

서 전멸되지 않는 것이 기적이었다고 했다.


"그나마 그 독일군의 사령관이 기사에 대한 로망을 가진 이라서 우리 기사단은 생존할수 있었지. 그 이후 점차 발달되

어가는 현대무기때문에 총으로 무장한 도적단과도 싸우기 버거워졌고, 상대적으로 문명권에서 멀어진 이곳까지 후퇴

할수밖에 없었어."


이야기를 모두 끝낸 보크의 손에 들린 검은 이야기를 하느라 손에 힘이 풀렸는지 스르륵 떨어지고 있었다. 그래서 내

가 다시 잡아서 건네주자 보크는 부상이 있었는지 우선 내가 갖고 있으라고 했다. 그때 갑자기 주변이 눈이 부실정도

로 환해지면서 엄청난 굉음과 충격파가 지하밖에서 터져나왔다.


"무슨 일이지?!"


마치 핵무기가 터진것 같았지만 방사능은 없었다. 이곳엔 만일을 위해 방사능측정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보크는 몰래

 밖을 내다보다 거대한 버섯구름이 멀리서 발생하는 것이 보였다.


"러시아놈들이 핵을 쓰다니! 혹시 그 ELID때문인가?"


방사능이 없는것으로 보아 레이저로 유폭시킨다는 신형 수소폭탄같았지만 여하튼 엄청난 파괴력때문에 주변엔 아무

것도 없었고 인근의 산까지 날아갔다. 이 정도면 그 대장 ELID도 날아갔겠지만 핵을 사용했다면 주변국에서 더욱 큰

혼란이 생길것이다. 지금까지 인간들끼리의 전쟁에서 핵을 사용한 적이 없었으니..


"지독한 방법이지만 어쨌든 우리들의 일은 끝난것 같아. 신형 수소폭탄이니까 방사능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테고."


앞으로 핵무기사용으로 인한 정치적혼란에 다시 근처 지역에서 여러 전쟁이 벌어질것 같지만 지금은 살았다는게 중

요했다. 하늘에선 러시아소속으로 보이는 전투기가 지나가고 있었는데, 탄도탄으로 쏜게 아니라 전투기에서 핵미사

일을 발사한것 같았다.


"오토바이도 핵폭발때문에 날아갔으니 한참 걸어가야겠네. 응?"


전투기는 지상의 상황을 보려고 하강하기 시작했다. 그때 건물의 잔해처럼 보였던 것이 갑자기 일어서기 시작했다.


"구워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


죽은줄 알았던 대장 ELID가 거의 반토막이 되었지만 살아움직이며 몇개의 촉수를 뻗기 시작한 것이다. 전투기는 급

히 상승했지만 총알보다 빠르고 긴 촉수에 구멍이 뚫리면서 격추당해 버렸다.


"움직여!"


보크는 엉겁결에 내 뒷목을 손으로 치고 말았다. 원랜 등을 밀려고 한것처럼 보였지만 보크는 왠지 모르게 나를 보

더니 소스라치게 놀라는것 같았다. 난 뒷목이 그리 아프거나 하지 않아서 왜 놀라는지 모르지만 아까 검을 잡을때

힘이 빠지는것으로 보아 손에 무슨 부상을 입은것 같다. 여하튼 우린 달리기 시작했고 보크는 분자분해폭탄을, 난

보크대신 검을 들고 뛰었다.


"사방이 탁 틔여버려서 숨을데도 없구먼!"


난 아까의 창고로 숨어있으면 안되겠냐고 물었지만 보크는 아까의 그 대장 ELID가 일어날때 등에 달린 인간머리가

 자신들을 발견했다고 말했다. 보통 똑똑한 놈이 아니니 지금쯤이면 그 지하창고로 갔을것이라 말했다.


'꽈광!'


보크의 말이 끝나자 마자 우리들이 숨어 있었던곳에 ELID의 신체일부같은것이 떨어지면서 입구를 막으며 파괴시켰

다. 분명 그 인간의 흔적이었던 ELID의 머리는 생전처럼 머리역할을 하고 있는게 분명했다.


"우린 어디로 가죠?!"


갈곳이 있다고 해도 추격을 따돌리기는 힘들것 같았다. 우리들은 여느 인간들치고는 빠르다지만 저 거대하고 빠른

덩치는 금새 우릴 잡아갈 것이다.


"이럴때 내 말이 아직 살아있었다면!"


ELID는 분명히 우리뒤에서 쫓아오고 있었다. 하지만 부상이 극심했는지 처음처럼 빠르게 움직이진 못했고 촉수도

아직 사용할수없는 이유가 있었는지 뿜어내지 못하고 있었다.


"카르르르르르륵!"


대장ELID는 자신의 느림을 한탄하는지 가래가 들끓는 소리를 내다가 정말로 가래같은것을 뱉어냈다.


"조심해! 저건 붕괴액이야! 방사능보다 더 지독한 물질이라고!"


다행인지 모르나 대장ELID는 목구멍을 다쳤는지 그 붕괴액이라는 것을 생각보다 멀리 뱉어내진 못했다. 그럼에도

 액체라서 땅에 튀는순간 붕괴액의 파편이 멀리 퍼져갔다.


'치이익,'


붕괴액 한방울이 보크의 부츠바로 옆에 떨어지면서 땅을 녹이고 유독한 가스를 내뿜었다. 간발의 차이로 피했지만

 붕괴액은 되도록 멀리 피해야 한다면서 이동을 계속하였다. 그러다 다시 붕괴액이 뿜어지자 바로 근처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어느새 난 홀로 뛰는것을 알아챘다.


"보크?"


급히 뒤돌아보니 붕괴액일부가 보크의 상의일부분에 묻어있었고 보크는 급히 자신의 가죽갑옷과 셔츠를 벗고 있었

다. 큰 위기를 넘긴것처럼 보였지만 붕괴액은 산성액같은것이 아니었다. 보크는 이미 오염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제

서야 보크는 나와 눈이 마주쳤다.


"보크.."


난 보크에게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몰랐다. 그리고 들고 있는 이 검은 어떻게 할것인지 몸은 괜찮은지 물어볼게 많았

지만 왜 지금까지 같이 살면서 날 기사로 만들지 않은것인지도 묻고 싶었다.


"가라! 뒤돌아보면 안돼!"


난 뒤돌아서서 도망가기 보단 보크를 구하려고 다가가려고 했다. 그런데 보크의 가슴에서 시커먼것이 튀어나오는 비

현실적인 광경이 나타났다.


"쿨러허억.."


대장ELID가 먹잇감을 놓치지 않으려는듯 아끼던 촉수하나를 쏘았던 것이다. 촉수를 아무때나 발사할수 없었는지 하

나만 쏘았지만 그 하나가 보크의 가슴을 뚫었던 것이다.


"보크!"


보크는 그 마지막 순간에 뭐라도 한마디할수 있었지만 아무런 말도 남겨주지 않았다. 그저 미소를 지은채 자신이 들

고 있는 분자분해폭탄을 보여주자 전에 얘기해 준것이 떠올랐다.


'기사는 자신이 선택한 무기를 바꿀때는 자신의 목숨을 걸 정도의 이유가 있어야 한다.'


보크는 마지막 순간에서야 검대신 다른 무기를 들게 되었다. 그 오래된 기사단의 역사속에서 처음으로 폭탄을 무기

로 바꾸게 되었고 그 모습은 항상 구세대 무기에서 벗어나지 않았던 기사단의 종말같은 모습으로 비쳐졌다. ELID의

 촉수가 보크를 끌어올리며 입으로 가져가자 보크는 마지막 남은 힘으로 폭탄을 작동시켰다.


"안돼에!"


분자분열폭탄은 여타 폭탄들처럼 굉음을 내거나 섬광과 열을 일으키지도 않았다. 마치 물거품이 터지듯 보크의 주

변이 소멸되면서 거대한 ELID의 몸이 거의 날아갔다. ELID는 인간의 머리부분과 거기에 붙어있는 척수만 남긴채

쓰러졌다. 그것으로 그 대장ELID가 죽었는지 곧 재생을 하여 부활할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난 보크가 마지막으로

있었던곳에 갈수 없었다. 그저 머나먼 서쪽으로 길을 걷기만 했다. 전쟁때문인지 오염때문인지 사람이 살지 않는곳

임에도 자연환경은 남은게 없었고 오직 황량함만 남은 지역들만이 보였다. 난 보크의 마지막 유품인 검과 벨트를

갖고 먹지도 마시지도 못한채 나아가기만 했다. 그러다 초소가 보이면서 사람들이 사는곳까지 오게 되었다. 그곳에

서 보크가 구해낸 주민들이 모두 모여있는것을 발견한 것이다. 그중 한명이 나에게 물었다.


"오오.. 소년, 그 기사님은 어떻게 되었는가?"


난 아무말도 할수없었지만 보크가 항상 등에 메고 다닌 검과 벨트를 보자 어찌된 일인지 짐작할수 있었다.


"우린 긴시간동안 걸으며 이곳까지 오게 되었다네. 이곳 러시아초소에서 그 괴물에 대해 설명했더니 바로 핵공격을

 날리지 않았는가? 자네는 괜찮나?"


그는 그 수소폭탄이 방사능없게 만든 최신형이라고 정부에서 홍보하는것을 들었기 때문에 내 몸에 대한 피폭을 걱

정하진 않았다. 그저 소중한 사람을 잃은것에 대한 걱정을 할 뿐이었다. 하지만 난 아무말도 할수없었고 주민들의

배려로 오트밀과 물을 지급받을수 있었다.


"우리들은 연방국에서 더이상 살수가 없기 때문에 러시아본토에서 지내야 한다네. 그쪽에서도 일손이 모자라서 우

리들을 바로 일터에 투입할것 같아보이네. 사실 오갈데가 없는것보단 낫겠지."


주민들말고도 다른곳에서 온 피난민들은 몰래 '곧 러시아가 무너진다.'라는 말을 하면서 소근거렸다. 유언비어인지

 진짜인지는 모르지만 보초병들도 짐작은 하고 있어서 이들의 입을 다물게 하진 않는것 같다.


"자넨 어디에 갈것인가? 괜찮으면 우리와 같이 가보게."


난 최소한의 기력을 채운후 보크가 남긴 검을 등에 매었다. 보크는 오른손잡이라 왼손으로 검을 잡는 나에겐 사용

하기 불편했지만 검을 사용한다기보단 들고 다니기 편하려고 멘 것이다.


"전.. 다른곳으로 갈 것입니다."


어디로 갈것인지는 정하지 않았지만 혼란스런 러시아는 피하기로 했다. 운이 좋았는지 러시아는 핵공격과 경제,군

사력의 하락으로 나중에 전혀 다른 이름의 나라가 되었다.


"그럼 이거라도 가져가게나. 권총인데 난 아직 몇개 더 있으니.."


그 주민은 나에게 구식권총을 건네주었다. 군용소총만 아니라면 옛날 총기들정돈 상관하지 않았고 총기들이 사방

에 널리기 시작한 때라 총을 들지않은 사람이 없었다. 그리고 이에 대해 특별한 제재도 없었다. 그렇지만..


"전 이 검하나면 됩니다. 그럼 모두 안녕히 계시길.."


보크는 지하에 있을때도 나에게 기사단의 뒤를 이으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이 검도 잠시 맡겼을뿐 앞으로 계속

사용하라거나 검을 어떻게 하라고도 말하지 않았다. 마지막에도 그는 나에게 아무런 말도 남기지 않았다. 나에게

 검술을 가르쳐 준적도 없었고 말을 타는법도 스스로 익히게 해줬을 뿐이었다. 그는 나에게 기사도에 대한 신념이

라거나 앞으로 올바르게 살아라라는 말도 해주지 않았다. 그저 자신에 대한 과거와 기사단에 대한 이야기만 해주

었을 뿐이다. 그렇기때문에 보크가 속한 기사단은 이제 역사속으로 영원히 사라지고 만 것이다. 난 그렇더라도 굳

이 검하나에만 의지하며 살아갈 필요도 없었다. 보크의 제자인것도 아니라서 보크처럼 살 필요도 없었다. 안전한

곳으로 가서 나름 편하게 살아도 되었고 이 위험한 세상에 주민이 건네준 권총하나는 받아도 되었다. 그렇지만 내

가 그렇게까지 하지 않은 이유는 지금도 알지 못했다. 지금으로선 검하나에 의지하며 걸어갈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