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픽게시판엔 처음이네요.

항상 에른와스 이야기는 써보고 싶었지만 발렌타인을 빌어 이제야 써본...

정작 발렌타인은 한참 지났다는게 함정

---

콜헨의 발렌타인

"어머, 벌써 날짜가...후훗."
"무슨 일이냐, 얘야?"
에른와스의 물음에 티이는 미소만 지었다.

힐더 숲 너머의 흉흉한 반란 소식에도 콜헨은 잠잠했고, 요상하리만치 평안했다.
여전히 신전에는 작은 새들이 모여들었고, 이그나흐 강은 물고기들이 비늘을 반짝이며 싱싱함을 과시했다.
따사로운 햇살이 콜헨을 비쳤다. 요상스레 춥던 날씨도 오늘따라 포근하게 풀린 터였다.

"음... 린 씨가 알려준 건데요, 할아버지."
"린? 용병단에 들어간 키 작은 아이 말이니?"
"네. 린 씨가 온 곳에서는 매년 오늘이 되면 서로에게 단 걸 나눠주며 기념한대요.
 발렌타인 데이라고 했나...?"

티이가 주방에서 냄비를 저으며 말했다.
아, 아까부터 퍼지던 달달한 냄새가 요 무녀님 때문이었군. 에른와스는 너털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무얼 만드는 게냐?"
"초콜릿이요. 단 거라면 초콜릿이 최고잖아요. 할아버지."

한참 냄비를 젓던 티이가 작은 스푼에 초콜릿을 묻혀 에른와스에게 내밀었다. 맛 좀 봐주실래요?

"호오... 너무 단 것 아니니? 티이, 난 너무 달면 못 먹는단다."
"할아버지 드리려고 만드는 것 아닌데요?"

베에- 티이가 혀를 쏙 내밀었다.
허허, 요녀석 좀 보게. 에른와스는 스푼을 쭉 내밀어 티이의 뺨에 초콜릿을 묻혔다.

"어머! 할아버지도 참..."
"핫핫, 나만 당할 순 없지 않느냐."

오늘따라 포근하게 풀린 날씨는 항상 우중충히 구름에 가려져 있던 해를 내보였다.

허헛, 날씨가 참으로 좋군. 에른와스는 생각했다. 할멈이 그립구만...
안사람이 살아 있을 땐 단걸 잘 먹었던 기억이 난다. 아마 살아있었다면 티이가 초콜릿을 다 만들기도 전에 
옆에서 살짝살짝 뺏어먹지 않았을까.

"어머!"

한참 옛 추억에 젖어있던 에른와스는 티이가 내는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무슨 일이니, 얘야?"
"어떡하죠, 할아버지? 거품기 손잡이가 떨어져 버렸어요."
"흐음, 내가 대장간의 퍼거스씨에게 가 보마."

거품기는 손잡이의 나사가 똑 부러져 있었다. 나사만 새로 돌려 끼우면 멀쩡히 쓰리라.

"아니에요 할아버지. 제가 다녀올게요."
"허허, 아니다. 초콜릿이나 마저 만들려무나. 대장간은 바로 요 앞이지 않니?"

알았어요. 다녀오세요- 티이의 배웅을 뒤로 하고 에른와스는 여관을 나섰다.

한산할 시간에도 대장간에는 사람이 넘쳤다.

"허허, 퍼거스. 왠일로 이렇게 바쁜 게요?"
"어이쿠, 영감님이 무슨 일이십니까? 기사단이 작전을 다녀온 모양입니다. 덕분에 힘좀 쓰는군요."

퍼거스는 연신 망치를 내려치며 말했다.
이가 나간 검을 다시 벼리고, 피묻은 갑옷에 가죽을 다시 덧대고. 망치는 모루 위에서 연신 춤을 추었다.
에른와스는 익숙한 뒷모습에게 말을 걸었다.

"음? 여기서 보는구나, 리시타."
"아, 에른와스 씨..."

항상 활기찼던 젊은 청년의 얼굴엔 그림자밖에 드리워져 있지 않았다.

"무슨 일인게냐?"
"..."

리시타는 말을 아꼈다.

"...기사단의 일입니다."

저 멀리 오르텔 성에서 일어났다는 반란 소문이 에른와스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기억하는 바 대로라면 오르텔 성의 영주는 지난번 콜헨에 며칠 묵었던 털털한 중년이리라.
기사임에도 어르신이라며 예의를 지키는 것이 마음에 들었었다.

"...힘 내거라."

분명 죽었을 것이다. 기사단이란 그런 자들이니까...

"...예."

리시타는 어두운 얼굴로 힘겹게 대답했다.

"영감님. 무슨 일로 오신 겁니까? 거의 다 끝나가니 급하지 않은 일이라면 먼저 보아드리겠습니다."

한참 망치를 두들기던 퍼거스가 말했다.

"아, 급한 일은 아닐세. 이 거품기에 나사가 빠져서..."
"나사만 다시 조여드리면 됩니까?"
"그렇다네. 금방 해 줄 수 있겠나?"
"나사를 좀 찾아오겠습니다."

어이쿠 이런, 한참 주머니를 뒤지던 퍼거스가 말했다.

"이런, 영감님. 나사가 다 떨어진 모양입니다. 미리 좀 가져다 놓았어야 할 텐데..."
"없다면 어쩔 수 없지. 허헛, 괜찮으니 신경쓰지 말게."
"아닙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아네스트, 나사 좀 가진 것 있소? 퍼거스가 구석에서 멍하니 창만 바라보던 여인에게 말을 걸었다.

"나사요? 마침 여기 하나 있군요. 무슨 일이에요?"
"허헛, 그 나사 좀 빌립시다. 내 잠시 후에 다시 드리리다."
"그렇게 하세요."

퍼거스는 아네스트에게 받은 나사를 거품기에 잘 돌려 꽂았다.

"다 됐습니다. 어르신. 이제 빠지지 않을 겁니다."
"허허, 고맙네. 그리고 그쪽 아가씨도 고맙네."
"괜찮아요 할아버지. 후훗, 아가씨 소리 들을 나이는 이미 지났는데 말예요."
"왠걸, 나같은 노인네 앞에선 다들 아가씨라네."

고마워요 할아버지. 아네스트가 가볍게 웃었다.

아 참, 티이가 알려준 것이 있었지,

"둘 다 여기서 잠깐만 기다리시게. 내가 답례로 줄 것이 있네."

아닙니다 어르신. 나사 하나 꽂은 것 가지고... 퍼거스가 손사래를 쳤다.

"어허, 잠시만 기다리래두."

에른와스는 나이든 몸을 이끌고 여관으로 돌아갔다.
달콤한 냄새가 이미 여관 문을 열기도 전에 풍겨왔다.

"티이, 초콜릿은 다 만들어졌느냐?"
"네, 할아버지. 다녀오셨어요?"

문을 열기도 전에 풍기던 향은 주방으로 올수록 진해졌다.

"티이, 미안하지만 그 초콜릿을 조금만 나눠줄 수 있겠니?"
"네 그럼요. 얼마든지 가져가세요. 많이 만들었거든요."
"그래? 고맙다. 그럼 조금만 덜어가마."

조심히 다녀오세요- 에른와스는 김이 모락모락 풍기는 초콜릿을 그릇에 담아 대장간으로 가져갔다.

"영감님, 괜찮대두 그러십니까."
"허허, 이 내가 고마워서 그러는 것이니 받게. 그쪽 아가씨도 와서 같이 들게나."

구석에 있던 아네스트가 살짝살짝 웃으며 다가왔다.

"어머, 제가 단 거 좋아하는 건 어떻게 아시구?"
"티이가 알려줬다네. 오늘은 서로간에 달콤한 것을 나누는 날이라던데?"
"하핫, 그래요? 그럼 잘 먹을게요."
"맛있게 들게나. 나는 이제 여관으로 돌아가 보겠네."
"살펴 들어가십시오 어르신."
"그래, 고마웠네. 퍼거스, 아가씨도."
"아가씨가 아니라 아네스트에요."
"허헛, 알겠네 아네스트."

딸랑- 에른와스가 대장간을 떠나자 아네스트는 초콜릿을 음미하며 다시 생각에 잠겼다.

얼마 전 리시타라는 용병 청년이 가져다 준 평원의 들풀...

비록 한참 전 이야기지만 기억에 생생했다. 그녀가 불러준 노래까지도...
아네스트는 눈을 감고 노래를 흥얼거렸다.

당신이 머물 세상을 위해, 난 이곳을 가꾸겠어요.
 
당신의 아이가 머물 세상을 위해, 난 이곳을 가꾸겠어요.
 
나의 아이가 머물 세상을 위해, 난 이곳을 가꾸겠어요.

...오늘 따라 그때가 그리웠다.

"오셨어요, 할아버지?"

여관으로 돌아온 에른와스를 티이가 반겼다.
시간은 어느새 황혼을 지나 어둑어둑해진 때였다.

"나는 좀 일찍 쉬마, 티이. 오늘따라 피곤하구나."
"네, 그러세요 할아버지. 편히 쉬세요."

간만에 밖에 좀 나갔기로서니 이리 피곤한 게냐, 이 늙은 몸아.
에른와스는 앞으론 좀 더 돌아다녀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침대에 누웠다.

"허허, 잘 지내고 있소. 할멈?"

오늘따라 안사람이 그리웠다. 세상을 뜬지 벌써 십년이나 흘렀나...
가끔 깜빡깜빡 한 것이 자신도 늙긴 늙었나 싶었다.

"할멈, 기억하오? 내가 지어준 노래 말이오. 마지막으로 불러본 지도 꽤나 오래 되었구려..."

노래를 부르며 평원에 꽃을 심던 그녀의 모습이 떠올라 어느새 눈시울이 촉촉해졌다.

"간만에 다시 불러보겠소. 목소리가 이상해도 놀리지 마시오, 허허."

조용한 여관 할아버지의 자장가와 함께 별이 뜨고, 평화로운 마을은 내일을 준비하며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