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메르시

 “안녕하세요! 날이 참 좋죠?”

 그것은 분명, 별 생각 없이 지나가는 사람도 한 번쯤은 고개를 돌릴 법한 매력적인 목소리였다.

 “안녕, 여러분! 어머, 안녕하세요?”
 “치글러 박사님, 몸은 좀 괜찮아요?”
 “그럼요! 아주 팔팔해요!”

 며칠 만에 복귀한 앙겔라 치글러 박사는 아침 햇살 저리가라 할 정도로 연신 방실방실 미소를 가득 짓고 있었다. 일의 피로까지 병과 함께 날려버린 모양인지 늘 보이던 약간 피곤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그녀의 머리카락은 햇살을 받아 황금처럼 빛나고 있었고, 반짝이는 눈동자는 꼭 보석을 박아놓은 것처럼 맑고 투명했다. 북유럽 신화 속, 황금의 머리카락으로 유명했던 여신 시프(Sif)의 모습이 저랬을까? 적어도 지금 그녀를 보는 사람들 중 몇몇은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앙겔라 박사! 몸은 좀 어때?”
 “벌써 그 인사만 열 번도 넘게 들었어요, 아마리 부사령관님!” 앙겔라가 장난스럽게 혀를 쏙 내밀며 말했다. “아주 멀쩡해요. 마음 같아선 발키리 슈트로 하루 종일 날 수도 있을 것만 같은 걸요?”
 “좋아. 며칠 쉰만큼 혹사시켜 줄 테니 그리 알라고.”
 “어머나, 그거 정말 기대되는 걸요?”
 “빈정거릴 줄도 알고. 레예스한테서 나쁜 것만 배워서 말야, 후후.”

 말은 그렇게 해도 아나 아마리의 얼굴엔 미소가 감돌았다. 둘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걷느라 눈치 채지 못했지만, 그 자리에 있던 거의 모든 직원의 시선이 그녀들을 따라가고 있었다. 생각해보라, 우열을 가리기 힘든 두 미녀가 나란히 걷고 있다니! 한쪽은 부드럽고 순수한 매력을 뿜어냈고, 다른 한쪽은 강인하면서도 날렵한 매력을 자랑하는 미인이었다. 서로 정반대의 매력을 가진 두 미녀가 주변 사람들의 가슴 속에 어떤 폭풍을 불러일으키는지, 그녀들이 알 리가 없었다.

 “미안해. 한 번 병문안이라도 갈까 했는데 짬이 나야 말이지.”

 아나가 쓴웃음을 지으며 사과하자 앙겔라는 손사래를 쳤다.

 “아니에요. 고작 감기 가지고 뭘요.”

 “후후, 레예스가 안절부절 못하는 모습을 네가 꼭 봤어야 하는데. 그 무뚝뚝한 표정으로 안절부절 어쩔 줄 몰라 하던 모습이 어찌나 재밌던지. 꼭 뒤뚱거리는 곰을 보는 것 같았다니까.”
 “아하하…….”

 과연 앙겔라는 오만상을 찌푸린 채로 왔다갔다 걷는 가브리엘의 모습을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가 병문안을 왔던 건 덮어두기로 했다. 그땐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지만, 으슥한 밤에 남녀가 단 둘이 있었다는 것은 남들에게 말하기엔 모양새가 좀 그랬으니 말이다.

 “그나저나 둘이 사귀는 거야, 아닌 거야?”
 “네, 네? 사, 사사 사귄다니요? 누구랑 누가요?”

 앙겔라는 펄쩍 뛰며 말까지 더듬었다. 당연히 수상한 낌새가 풀풀 나는 그 행동에 아나가 재차 말을 잇는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누구긴……. 당연히 너랑 레예스 얘기지.” 아나가 뭘 그것도 모르냐는 투로 말했다. “레예스 그 숙맥이 이렇게까지 남에게 마음을 연 적이 없었어. 그걸 네가 해낸 거라고.”
 “사귀는 거 아니에요. 우린 그저 친구…….”
 “친구 좋아하네. 정신 차려, 앙겔라! 보아하니 너도 아주 마음이 없는 건 아닌 것 같은데 계속 질질 끌 거야? 기회는 왔을 때 잡아야 하는 법이라고! 정말, 레예스도 그렇고 너도 그렇고 연애 젬병끼리 잘 한다, 잘 해. 보는 내가 속이 다 타버릴 것 같아.”
 “…….”

 앙겔라 치글러 박사는 아무런 변명도 못하고 고개를 푹 수그릴 수밖에 없었다. 사실 그녀 자신이 봐도 그녀와 레예스 사이의 관계는 뭐랄까, 애매했다. 분명 친구 이상의 친밀도이긴 한데 그게 연인의 선을 넘지는 못했다.

 “뭐, 설마 나이 차가 너무 난다거나 그런 거 때문이야?”
 “그런 거 아니에요…….”

 앙겔라는 맥 빠진 목소리로 고개를 저었다. 그녀와 레예스는 나이 차가 상당했지만 그것에 대해 불편하다거나 느낀 적은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니 가끔씩 레예스의 행동이 유치해서 그녀는 종종, 아니 꽤 자주 둘이 나이 차가 많이 난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곤 했다. 하지만 그녀가 그에게 더 다가가지 않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두려움.

 아나는 그녀가 레예스의 마음을 열었다고 했지만, 문제는 그가 아니라 앙겔라 자신에게 있었다. 그녀는 정신적으로 너무 연약했다. 기댈 곳이 있으면, 그대로 기대버려 안주해버릴 것만 같았다. 혼자 서는 법을 배우려고도, 해보지도 않은 채 계속해서 그녀를 감싸주는 그의 품 안에서 살아버리겠지. 그리고 어느 순간 그의 품을 떠나야 할 때, 그녀는 어린아이처럼 버둥댈 것이 뻔했다. 꼴사납게 말이다. 그건, 싫었다.

 “죄송해요. 아직은 좀…….”
 “그래? 그럼 그 문제는 접어두고, 축하 파티에 대해서나 얘기해보자.”
 “네, 축하 파티……. 네? 뭘 축하하는데요?”

 하마터면 별 생각 없이 분위기에 휩쓸릴 뻔한 앙겔라였다. 그런 앙겔라의 볼을 장난스럽게 쿡 찌르며 아나는 빙글빙글 미소를 지었다. 꼭 놀리는 것 같았다. 

 “뭐긴. 네 감기 나은 거 축하하는 파티지. 레예스가 얼마나 걱정했는데 이렇게 끝내면 섭섭하잖아. 게다가 레예스는 너 나은 것도 못 보고 지금 한창 임무에서 열심히 뛰고 있다고. 그것도 오랜만에 비번으로 된 날 새벽에 불려나가서 말이야.”
 “아, 저기…….”
 “많이도 안 불러. 나랑 모리슨 정도면 끝이야.” 아나가 갑자기 비밀 얘기라도 하듯 낮게 속삭였다. “한 번 상상해 봐. 힘들게 임무 마치고 왔는데 건강한 네가 앞치마를 두르고 해맑게 맞아주는 거지. 식탁에는 추수감사절처럼 한 상 푸짐하게 차려놓고 말이야. 그럼  그 녀석이 대체 어떤 표정을 지을…아니, 얼마나 기뻐할지 궁금한걸.”
 ‘속마음이 다 보이는데요, 아나 씨…….’

 앙겔라는 애써 하하 웃으며 그렇게 생각했다.

 “게다가 그 녀석 생각해보면 엄청 불쌍하다고. 부하들은 칼같이 챙기는 주제에 정작 자기는 조금도 안 챙긴다니까. 그놈 앞으로 밀린 휴가만 2개월이 넘어. 이렇게 밀리면 나중에 인선 꼬인다고 인사과장이 나랑 만날 때마다 날 갈아 마시려 한다니까. 그러니까 그렇게라도 그 녀석한테 휴식을 주고 싶어. 부탁이야, 앙겔라 박사. 아니, 앙겔라. 이건 상관으로서가 아니라 친구로서 부탁이야.”

 아나는 갑자기 앙겔라의 손을 덥석 잡고 제법 진지한 투로 얘기했다. 이렇게 되면 더 이상 거절할 명분이 없는 앙겔라 박사였다. 그녀는 전형적으로 부탁하는 태도에 마음이 한없이 허물어지는 유형의 사람이었다. 

 게다가 아나는 단순히 레예스가 걱정했다고만 알고 있지만, 실제로 그는 간병까지 와줬었다. 정황을 보니 간병을 와줬다가 그날 새벽에 바로 떠난 것 같았다.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그냥 넘어가기엔 앙겔라 박사의 여린 양심이 너무 아팠다. 결국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고야 말았다.

 “알겠어요. 제가 준비해 볼게요.”
 “좋아, 그렇게 알고 있을게. 고마워, 앙겔라. 그 녀석에게 큰 휴식이 될 거야. 그럼 오늘 하루도 열심히 일하자고!”

 아나는 기다렸다는 듯 그녀의 등을 툭 두드리고 반대편으로 경쾌하게 걸어갔다. 뭔가 휘둘린 느낌이 드는 앙겔라였지만, 이미 말해버린 것이니 별 수 없었다. 그녀는 어떻게 뭘 할지 곰곰이 생각하며 걷다가, 갑자기 얼굴이 딱딱해져서 걸음을 멈췄다. 안 그래도 하얀 그녀의 얼굴이 더더욱 하얗게 변하고 있었다.

 “어떡하지.”

 큰일이었다. 잊고 있었던 것이다.

 “나 요리 못하는데…….”



 유능한 여자 앙겔라 치글러의 유일한 약점. 그것은 바로 요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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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담

0. 요리치 속성 추가

1. 모에요소가 하나 더 추가됐군요.

2. 허헣 나중에 안경이랑 포니테일 같은 것도 좀 넣어봐야지

3. 허헣 심각한 얘기 안 쓰니까 술술 써지는구나!

4. 허헣! 그럼 이만 총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