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렇게 된 거야. 미안해, 윈스턴. 잘 좀 부탁할게. 앞으로 얼마 안 남았어. 할 수 있지?]
 “하, 하핫! 괜찮습니다, 부사령관님. 물론이죠. 말씀하신 건은 제가 어떻게든 해보겠습니다.”

 윈스턴이 대강의 자초지종을 들은 건 앙겔라를 연구실로 데려온 후 30분 정도 지나서였다. 전화를 끊는 그의 표정은 빈말로라도 좋다고는 할 수 없었다. 거기엔 뭔가 속았다는 찝찝함, 별 일 아니었다는 안도감부터 골치 아픈 일에 휘말렸다는 난감함까지 다채로운 감정이 섞여 있었다.

 “아테나, 치글러 박사님은 좀 진정 되셨어?”
 [지금 상담 프로그램을 써서 안정시키고 있습니다. 하지만 좀 더 강한 안정책이 필요할 것 같은데요.]
 “보여줘.”

 삑

 [아나 씨 바보! 멍청이! 어떻게 사람의 단점만 그렇게 팍팍 찌를 수 있어요? 그깟 요리가 뭐라고! 그깟 부엌 하나 태운 게 뭐라고! 그깟…으아아아아앙!]
 “아냐, 그만 보여줘도 돼.”
 [원한다면요, 윈스턴.]

 삑

 “…….”

 윈스턴은 안경을 벗고 얼굴을 한 번 문질렀다. 앙겔라의 말 줄 마지막 부분이 맘에 좀 걸리긴 했지만, 어쨌든 그녀가 어떻게든 요리를 하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게 지금 그에게 닥친 과제였다. 

 [우선 간단한 전채 요리부터 시작해보는 건 어떨까요? 저지방 치즈를 곁들인 샐러드라던가, 뭐 그런 것들요.]
 그 말과 함께 화면 한구석에 아테나가 말한 ‘간단한 요리’의 목록이 촤르르르 펼쳐졌다. 윈스턴도 대충 눈으로 훑어보니 정말로 간단한 것들이었다. 우선 불을 쓰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애초에 불을 쓰지 않으면 어딜 태워먹을 일도 없을 테니 말이다. 윈스턴은 자기 연구실에 소화기가 뿌려지는 꼴을 보긴 싫었다.
 “그래, 우선 뭔가 하나를 완성시킨다는 성취감이 중요하니까 말이야. 그럼 보자, 재료가…….”
 [이미 준비되어 있습니다. 구태여 당신이 나설 것도 없어요. 물론 시식은 하셔야 합니다. 제겐 미각 센서는 없으니까요.]
 “아니, 굳이 먹어보지 않아도 나도 샐러드 맛 정도는 알아.”
 [그 무슨 소리를! 윈스턴, 치글러 박사님은 당신의 상상을 넘는 요리 실력의 소유자인걸 모르시나요? 잘못해서 소금을 너무 많이 친다거나, 드레싱을 한가득 부어버린다거나 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넌 그 실패작들을 내게 먹이겠다 이거냐?”
 [적어도 땅콩버터를 퍼먹는 것보다야 훨씬 건강에 좋겠지요.]
 “결국 그게 목적이었던 거냐! 저리 가, 이 망할 프로그램 같으니라고!”

 윈스턴은 신경질적으로 화면을 향해 빈 땅콩버터 통을 집어던졌으나, 그 시도는 어디선가 솟아나온 로봇 팔에 의해 막혀버렸다. 

 [이 연구실은 제 몸과도 같아요, 윈스턴.]
 “제길, 말을 말아야지.”

 그는 투덜거리며 의자로 쓰는 커다란 타이어에서 몸을 일으켰다.

 [어머, 어딜 가시나요?]

 “그래도 치글러 박사님은 만나 뵈어야 할 거 아니야.” 윈스턴이 어기적어기적 걸어가며 말했다. “그래도 부사령관님이 나한테 맡기셨단 건 분명 뭔가 생각이 있으시다는 거겠지.”

 불행히도 윈스턴의 예상은 거하게 틀렸다. 아나는 그저 앙겔라더러 ‘유인원도 너보단 요리를 잘 한다’라는 뜻으로 윈스턴을 부른 것뿐이었다. 쉽게 말해 홧김에 불렀지 그 이상의 의미가 없었다. 하지만 꿈보다 해몽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었다.

 “그래, 박사님은 어때? 아직도 상담 중이야?”
 [상담은 끝났어요. 근데…어라? 이런, 그 로봇 단말이 또 고장인가보네요. 접속이 되질 않아요.]
 “그러니까 내가 뭔가 이상한 낌새 보이는 건 재깍재깍 수리하라고 했잖아.”

 윈스턴이 옆에서 졸졸 따라오는 유선형의 로봇을 향해 투덜거렸다. 하지만 아테나는 그런 윈스턴의 투덜거림 따위는 좁쌀만큼도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아, 됐다. 어머, 그런데 치글러 박사님이 상담실에 안 계시네요.]
 “카메라 동원해서 찾아 봐. 어디 계시는데?”
 [조리실에 계세요.]
 “그래. 조리실…뭐어?!”

 윈스턴은 그 큰 덩치로 펄쩍 뛰고선(비유가 아니라 정말로 뛰었다) 부리나케 조리실로 달려갔다. 사실 그가 달려가는 이유는 앙겔라가 조리실을 태워먹을까 걱정해서가 아니었다. 솔직히 그깟 조리실 좀 타면 어떻던가. 하지만 거기엔 아테나의 눈이 닿지 않는 사각지대가 있는 곳이었다. 그래, 하필이면 그가 땅콩버터를 고이고이 숨겨두는 비밀 장소였던 것이다.

 [윈스턴! 치글러 박사님께서 요리를 하고 계세요!]
 “뭣? 좀 말려! 거기에 로봇들 없어? 방송이라도 해!”
 [아, 근데…전부 수리중이네요. 그쪽은 거의 쓰질 않아서…….]
 “아테나아아아!”

 윈스턴은 체면이고 뭐고 육탄 전차처럼 우르르 뛰어가더니 조리실 문을 발칵 열었다. 그 모습은 뭐랄까 꼭 화재 신고를 받고 달려온 소방관과도 같은 모습이었다.

 “치글러 박사님!”
 “왜요오오!”

 치이이익

 아, 망했다.

 윈스턴의 머리에 처음으로 드는 생각은 그거였다. 치글러 박사가 프라이팬에 뭔가를 신나게 굽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고기 굽는 특유의 기분 좋은 냄새가 조리실에 진동하고 있었다. 삶고 볶은 야채는 깔끔하게 손질되어 있었고, 앙겔라는 어느새 두 번째 프라이팬 위로 뭔가를 힘차게 뿌리고 있었다. 와인이었다. 버터와 양파의 향내가 어우러져 와인은 팬 위에서 졸아들고 있었다. 윈스턴은 멍청한 표정으로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요리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앙겔라 치글러 박사가. 

 그런데 상태가 좀 이상했다.

 “딸꾹.”
 “…아테나? 치글러 박사님이 술에 강하시던가?”
 [일단 와인 반 잔 정도가 한계로 알고 있는데요.]

 윈스턴은 미간을 꾹꾹 누르며 식탁 위에 있는 와인 한 병을 바라봤다. 정황상 앙겔라가 홧김에 마셨을 그 술은 벌써 반 이상이 비어 있었다.

 “이거 봐요오……. 나도 할 줄 안다고!” 앙겔라가 용케도 쓰러지지 않으며 프라이팬을 휙 저었다. “버터 녹이고, 딸꾹, 양파랑 양송이버섯 넣고, 와인 넣어서 레드 와인 소스 만들고!”
 “…….”
 “봐요, 윈스턴! 봐! 나도 요리 할 줄 알아요! 이 정도면, 딸꾹, 나도 스테이크 정도는, 손쉽게, 딸꾹, 만들, 수 있다고, 음냐…….”
 “…….”
 […….]
 “다른 것도 만들 줄 알아요……. 아나 씨 화내지 마요…무서워…….”

 그것은 일종의 곡예에 가까웠다.

 거의 춤추는 듯한 동작으로 앙겔라는 멋지게 스테이크를 접시에 담아내더니, 소스를 깔끔하게 뿌려 식탁 위에 턱 하니 놨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요리를 마치자 마치 실 끊어진 인형처럼 바닥에 털썩 주저앉는 것이 아닌가. 윈스턴이 급히 팔을 받쳐 주지 않았더라면 그대로 바닥에 머리를 박을 판이었다. 

 [그…….]
 “설마 술버릇이 요리라는 말을 하려고 하는 건 아니겠지, 아테나?”
 [설마 그 말을 하려고 했어요. 박사님 정말 요리 잘 하시네요.]

 ‘술에만 취하신다면요.’라는 환청이 들리는 것 같은 윈스턴이었지만, 애써 무시했다. 그는 치글러 박사를 조심스레 눕히고 식탁 위의 스테이크를 한 입 먹어봤다. 그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제길, 맛있잖아.”
 [그게 맛있다는 태도에요?]
 “이러면 술버릇이 요리라는 걸 인정하는 꼴밖에 안 되니까 그렇지.”
 “으응…….”

 앙겔라 박사가 그의 품 안에서 뒤척이자, 윈스턴은 난감한 표정으로 아테나를 바라봤다.
 “어떡하지? 박사님이 요리를 하는 방법을 찾긴 했는데…….”
 [사실대로 말씀드려야죠, 뭐. 별 수 있나요?]
 “이게 진짜…그럼 부사령관님이 퍽이나 잘했다고 칭찬하겠다.”
 [오히려 재밌어 하실 것 같은데요.]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윈스턴이 투덜거리며 아테나를 바라봤다. 표정 없는 로봇 단말기인데, 이상하게 그는 아테나가 웃는 것처럼 보였다.

 [알 수밖에요.]

 그래, 아테나의 목소리엔 분명 웃음기가 서려 있었다.

 [왜냐하면 제 인격 프로그램, 부사령관님을 베이스로 해서 만든 걸요.]

 아테나가 재밌어 죽겠다는 듯 킬킬거렸고, 윈스턴은 자기도 모르는 아테나 개발 비화에 안경이 흘러내리는 것도 모른 체 입을 쩍 벌릴 수밖에 없었다.


***


 후일담, 이라고 해야 할까. 그 다음의 이야기.
 
 “으음, 맛있네! 어때, 레예스? 괜찮지 않아?”
 “괜찮군.”
 “그냥 맛있다고 해, 이 멍청아!”
 “후후…….”

 오버워치 본부 휴게실 구석에서 작은 파티가 벌어졌다. 가브리엘 레예스의 무사 귀환 축하 파티 겸 (좀 늦은 감이 있는)앙겔라 박사의 무사 회복 파티였다. 테이블에는 가스파초(차가운 스페인식 토마토 수프)를 비롯해 주로 냉채 요리와 샐러드가 가득했다. 식후의 차도 훌륭했고, 테이블의 한쪽 귀퉁이를 차지하고 있는 아나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등받이에 등을 기대고 있었다.

 “입에 잘 맞으셨는지 모르겠어요. 사실, 요리는 서툴러서…….”
 “괜찮다. 먹을 만 했어.”

 앙겔라가 우물쭈물 대답하자 레예스가 얼른 말했다. 칭찬이 드문 그로서는 최고의 찬사였으나 아나는 맘에 안 드는 것처럼 입을 삐죽이며 밀크 티 한 잔을 마실 뿐이었다. 앙겔라는 이때가 기회다 싶어 재빨리 말했다.

 “사실 윈스턴이 많이 도와주지 않았더라면 전 이 정도는 커녕 아무 것도 못했을 거예요. 고마워요, 윈스턴.”
 “하하, 제가 뭘, 아닙니다.”
 “아니 앙겔라, 나는? 나도 많이 널 도와줬다고.”

 테이블 한쪽을 통째로 차지하고 있는 윈스턴이 쑥쓰럽다는 듯 허허 웃자 아나가 입을 삐죽이며 골난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 아나 씨도 물론 고맙…죠.”
 “이거 완전 엎드려 절 받기네. 하아, 이래서 사람은 은혜를 빨리 잊는다는 거야.”

 아나가 토라지자 앙겔라는 눈 딱 감고 그녀의 팔에 매달렸다.

 “아이 참, 아니라니까요, 정말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요, 아나 언니.”
 “뭐, 언니? 호호, 내가 아직 꽤 젊긴 하지.”

 언니…그 낯 간지러운 말에 레예스와 윈스턴의 팔엔 소름이 쫙 돋았다. 하지만 그 언니라는 말에 기분이 단숨에 좋아진 모양인지 아나는 앙겔라의 볼을 찌르며 장난을 쳤다. 미녀 두 명이 어린애처럼 노는 모습은 그야말로 여러 가지 의미로 그림이었다.

 “고맙다.”

 그 작은 소란을 뚫고 레예스는 윈스턴을 향해 말했다. 순간 윈스턴은 자기 귀를 의심했다. 고맙다고? 저 사람한테? 안타깝게도 레예스는 윈스턴을 포함해 주변인들에게 평판이 썩 좋은 편이 아니었다.

 “아, 음, 네. 별말씀을요.”
 “그래, 정말 고마워 윈스턴. 그런데 앙겔라, 왜 하필 다 차가운 음식이야? 뭐 맛이 나쁘진 않았는데, 좀 아쉽네.”
 “어머, 그러네요. 왜 그랬을까…….”
 앙겔라가 고개를 갸우뚱 하자 아나가 미심쩍다는 듯 말했다.
 “이거 네가 만든 거 아니었어?”
 “맞아요. 그런데 요리할 때가 잘 기억이 안 나서……. 에이, 맛만 좋으면 됐죠!”

 아나도 레예스도 별 말 않고 넘어갔고, 앙겔라는 농담을 하며 분위기를 돋웠다. 딱 한 명, 진실을 아는 윈스턴만이 말을 아끼며 그 큰 입으로 차만 홀짝일 뿐이었다. 그는 차마 말할 수 없었다. 

 어떻게 말하겠는가, 술에 취했을 때만 요리를 기가 막히게 잘 만든다는 걸, 그리고 그 이유 때문에 부득이하게 하루 전에 준비해 놓을 수 있는 음식, 다시 말해 차갑게 식히는 음식밖에 가르칠 게 없었다는 것을…….

 “어때요, 나 요리 잘 하죠?”

 앙겔라가 방글거리며 웃었다. 그리고 윈스턴은 침묵했다.



 진실은 때때로 밝혀지지 않아야 아름다운 법이기도 했으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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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담

0. 티 타임 편 끝!

1. 윈스턴과 아테나가 등장했습니다. 성격이 잘 정해졌는지 모르겠네요.

2. 플롯 안 정하고 써서 그런지 뭔가 맘에 들지가 않네요. 아쉽습니다.

3. 그럼 가로등과 별 쓰러 가겠습니다.

http://www.joara.com/literature/view/book_intro.html?book_code=1115600
(앙겔라 치글러 시리즈)

http://www.joara.com/literature/view/book_intro.html?book_code=865115
(가로등과 별 시리즈)

많이 봐주시면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