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메르시

 “휴! 잘 참았어요, 지미. 이제 푹 쉬었다가 다음 임무부터 다시 날뛰시면 되겠네요. 수고했어요.”

 앙겔라 치글러 박사는 마취로 곯아떨어진 요원을 장난스럽게 툭 치고선 천막 밖으로 걸어 나왔다. 수술을 시작할 때는 해질녘이었건만, 어느새 한밤중이 다 되어 있었다. 

 그녀는 같이 온 의료팀 몇 명에게 다른 블랙워치 요원들을 봐달라고 부탁한 후 한숨을 푹 쉬었다. 물론 다른 의료팀들이야 그들이 블랙워치라는 건 몰랐다. 그저 특수 요원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을 뿐이었다. 앙겔라의 입장이 특이한 것일 뿐이지, 실제로 블랙워치라는 집단은 오버워치 내부에서도 가장 비밀스러운 집단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건 아무런 상관도 없었다. 환자는 환자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게 그녀의 지론이었다. 무언의 만족감을 느끼며 그녀는 물로 적신 수건을 목덜미에 문질렀다. 시원함과 함께 난데없는 피로감이 몰려왔다.

 “아.”
 톡

 따뜻한 것이 코 쪽에서 흐르는 느낌과 함께 땅으로 떨어졌다. 코피가 나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코뼈를 눌러 압박하더니, 휴지를 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휴지는 보이지 않았다. 떨어진 피가 그녀의 하얀 백의와 블라우스를 물들였다. 앙겔라의 얼굴에 난처하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심각한 표정이었지만, 적어도 지금 상황에서 지을 법한 표정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신의 몸을 걱정하는 표정이라기보다는 오물이라도 보는 듯한 표정이었기 때문이었다.

 “앙겔라.”
 “어머, 가브리엘. 그렇잖아도 찾아가려던 참이었는데. 수술은 잘 끝났어요. 빨리 데리고 와 준 덕분이에요. 고마워요.”

 뒤에서 레예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뒤돌아보지 않고 소매로 코를 훔쳤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양쪽 소매가 모두 새빨갛게 물든 걸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피가 너무 빠진 탓인지 가뜩이나 하얀 그녀의 얼굴이 백짓장 못지않을 정도로 창백해져 있었다. 하지만 목소리만큼은 놀랍도록 사무적이고, 청아했다. 그 불균형이 그녀의 모습을 더욱 더 처참하게 보이게끔 하고 있었다. 사실 그녀는 지금 자신의 등 뒤에서 들려온 소리가 환청인지 진실인지 구분할 여력조차 없었다.

 “…앙겔라.”
 “저기, 미안한데 다른 의료팀 사람들한테 가서 휴지 같은 거 좀 구해다 줄 수 있어요? 세상에, 나 좀 봐요. 이걸 할로윈 복장으로 입고 갔어야 했는데.” 그녀는 피에 젖은 소매는 힘없이 흔들며 말했다. “근데 가브리엘 당신 맞죠? 혹시 아닌가요? 이상하다, 말 없는 거 보니까 딱 가브리엘인데…어머나.”

 그녀는 농담조로 말하며 뒤를 보려 했지만, 그녀의 시선이 향한 곳은 뒤가 아니라 천장이었다. 그녀의 무릎이 꼭 수수깡 부러지듯 힘없이 꺾이고 있었다.

 “앙겔라!”
 어느 때보다도 다급하게, 그 목소리는 그녀의 이름을 세 번째로 불렀다. 누군가 그녀의 가녀린 어깨를 힘껏 껴안았다. 그것은 강철처럼 단단하면서도, 그녀가 마치 으스러지기 쉬운 케이크라도 되는 양 조심스러웠다. 앙겔라는 그렇게 누군가의 품에 안기고 나서 몇십 초가 지나서야 겨우 반응을 할 수 있었다. 그녀의 시선이 위로 향했다. 
 거기에, 있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표정으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가브리엘 레예스의 얼굴이.

 “…….”

 그 찰나의 순간,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앙겔라는 피가 덜 묻은 왼손을 들어 그의 뺨을 조심스럽게 만졌다. 거친 살결이 만져졌다. 그는 환상이 아니었다. 현실이었다. 그녀의 마음속에서 안도감이 물에 색소 한 방울 떨어트린 것처럼 조용히 번져나갔다. 

 “무사했군요, 가브리엘. 많이 걱정했어요.”

 그녀가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그는 웃지 않았다.

 “매번 이러는 건가? 매번 전쟁이 터질 때마다 이 꼴이 되는 거냔 말이다.”

 “이 꼴이라니 말이 좀 심하네요, 고작 코피 좀 터진 거 가지고.” 앙겔라의 눈매가 샐쭉해졌다. “걱정 마세요. 아무렴 옴닉들과 목숨 걸고 싸우는 현장 요원들만 할까요. 전 신경 쓰지 마시고 당신 몸 관리나 잘하세요.”

 레예스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이야기의 초점이 미묘하게 어긋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금 그는 코피 얘기를 하는 게 아니었다. 그녀의 상태 전체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녀의 모습은 심각했다. 너무나도. 언뜻 보면 그저 얼굴이 좀 창백하겠거니 하고 넘어가겠지만, 자세히 보면 그녀가 얼마나 심각한 상태인지 짐작하기엔 어렵지 않았다.

 얼굴에 핏기가 하나도 없었다.

 눈두덩에는 깊게 그늘이 져 있었고, 초롱초롱하던 눈동자는 총기를 잃은 지 오래였다. 지금 그녀의 모습은 마치 말라비틀어진 그루터기는 보는 것만 같았다. 무엇이 그렇게 그녀를 괴롭히는지, 레예스는 알 것만 같으면서도 몰랐다. 그는 앙겔라는 껴안았다. 조심스럽게, 하지만 단단하게.

 “숨 막혀요.”
 “미안하군.”

 그녀는 가느다란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저항은 하지 않았다. 그도 팔을 풀지 않았다. 

 “당신은 정말 이상한 남자야.” 
 “…….”
 “평소엔 그토록 무뚝뚝하면서, 정작 너무 필요하다고 생각할 때는 옆을 지켜줘.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안아주길 바라면, 아무 말도 없이 안아 줘. 조용하게. 내가 고맙다고 말할 때까지.”
 “…….”

 앙겔라는 조용히 말했다. 어느새 그녀의 눈은 편안하게 감겨 있었다. 며칠, 아니 몇 주나 제대로 감아보지도 못했던 눈꺼풀이 마침내 엷은 곡선을 그리며 닫힌 것이다. 그녀는 평소에 약간이나마 차리던 예의도 차리지 않고, 마치 친구에게 얘기하듯 거리낌 없이 말했다.

 “저번에 내가 감기 걸렸을 때, 당신이 와서 간호해준 적 기억나? 그때 나, 당신에게 내 비밀을 털어놨어. 지금껏 그 누구에게도 한 번도 말하지 않았던 비밀을. 어쩌면 그때 당신이 깨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 하지만, 그래도 말하고 싶었어. 뭔가 울컥 가슴에서 솟아서, 말하지 않으면 그만 터져버릴 것 같았거든.”
 “…….”

 안다, 왜 모르겠는가. 레예스는 조용히 그때를 회상했다. 그때 일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녀의 울먹이던 목소리도, 떨리던 목소리도.

 그리고 그의 뺨을 부드럽게 스치고 지나간, 그녀의 입술도. 그는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그녀의 머리를 상냥하게 쓰다듬을 뿐이었다.

 “난 모든 걸 잃었어. 부모님도, 고향도……. 다른 사람들이 위로해줬지만, 내겐 아무 감흥도 없었어. 오히려 ‘너희가 어떻게 알아?’라는 기분만 더러운 진흙처럼 가슴을 메웠지. 그리고 사람들의 동정을 당연하다는 듯이 받아들였어. 난 피해자고, 너희는 나보다 낫다고 되뇌면서. 그건 아주 야비한 자기위로였어.”

 신부에게 고해성사를 하듯 그녀는 말했다. 말의 앞뒤를 다 잘라먹은 이야기였지만 그는 알아들었다.

 “그거 알아? 나, 장례식 때 관을 보면서 안 울었어. 그때 내가 뭘 생각했는지 알아? 나는 저 속에 들어있지 않아서 다행이다, 라고 생각했어. 정말 역겨워. 어떻게 가장 소중한 사람들이 죽었는데 그런 생각 따윌 할 수 있지? 나, 그때 나를 도저히 용서 못 해.”

 그는 아니라고 하고 싶었다. 살아남은 건 죄가 아니었다. 살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건 결코 죄가 아니었다. 하지만 입술이 움직이지 않았다. 공기가, 그녀의 말이, 그의 입술을 닫고 있었다.

 “나…그럴수록 스스로를 꽁꽁 더 감쌌어. 가면을 쓰고, 밝게 웃고, 역경을 딛고 일어서는 여자를 연기하면서. 내 등 뒤에 있었던 그 깊디깊은 구덩이를 잊으려고 노력했어. 하지만 이럴 때는 안 돼. 이렇게, 이렇게 누군가의 죽음이 너무 가깝게 느껴질 때는……. 도저히 안 돼.”
 “…….”
 “난 구해야 돼. 무조건 구해야 돼. 나만 살아남았단 말이야. 나만, 나만 운이 좋아서, 그때 나만 집에 없어서 살아남았단 말이야. 장례식 이후로 지금까지 한 번도 찾아가보지 못했어. 마주할 용기가 없어. 그때의 나를 떠올리는 게 무서워. 나만 살아남았다고 생각하는 게 무서워 견딜 수가 없어. 그러니까 죽게 두지 않을 거야. 아무도 죽게 하지 않아. 또 누군가의 시체 앞에 서서, 내가 저기 누워있는 게 아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면 어떡해? 그렇게 하지 않을 거야. 난 도망치지 않을 거야. 이건 속죄니까. 평생에 걸쳐, 그때 한순간이라도 그렇게 생각했던 나에 대한, 부모님에 대한, 난, 나는…….”

 그녀의 유려한 목소리는 바이올린 현이 걷잡을 수 없이 끊어지는 것처럼 엉망진창으로 변해갔다. 그녀는 눈물을 흘리며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그렇게 앙겔라는 비 맞은 작은 새처럼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엄마, 아빠, 미안해요. 미안해요, 용서해주세요. 저 정말 열심히 노력했어요. 많이 구했어요. 사람들 많이 구했어요. 그러니까 그런 눈으로 보지 말아 주세요. 한 번만 용서해줘요. 다시는 안 그럴 게요. 다시는 그런 생각 따윈 하지 않을 게요. 그러니 한 번만 용서해주세요. 한 번만, 단 한 번만…….”

 고장 난 태엽 인형처럼 용서해달라는 말만 반복하던 그녀는 갑자기 축 늘어졌다. 아마 정신만으로 지금껏 버텨 왔음이 분명했다. 그는 잠시 그렇게 그녀를 안고 있다가, 천막 안쪽에 있는 침대에 조심스럽게 눕혔다. 그렇게 그는 잠시 가만히 있었다.

 침묵이 내려앉았다. 

 앙겔라의 고른 숨소리만이 이 정적을 깨우는 전부였다. 그는 서서 앙겔라를 내려다봤다. 맨 먼저 그의 가슴에 치밀어 오르는 것은 분노였다. 그것은 격렬하게 그의 심장을 뒤흔들었다. 하지만 어디로 향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그것은 매우 복합적인 심정이었으니까. 그 분노는 끝나지 않는 옴닉과의 전쟁을 향한, 그녀를 둘러싼 상황을 향한, 그리고 그녀가 괴로워함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손을 써 줄 수 없는 그 자신을 향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정말이지 뭘 어떻게 해 줘야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그냥 부수고 죽이는 것밖에 못 하는 총잡이에 불과했다. 그는 빌어먹을 심리 상담가도 아니고, 그녀의 일을 도와 줄 의학적 지식 따윈 거의 전무했다. 그렇다고 전능한 신 나부랭이처럼 모든 전쟁을 한 방에 종식시킬 힘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는 안타까운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볼에 붙은 머리카락 몇 가닥을 귀 뒤로 넘겨줬다. 우습게도 그가 지금 해 줄 수 있는 거라곤 그게 전부였다. 그는 천막 밖으로 나왔다.

 “치글러 박사는 안에서 쉬고 있나?”

 천막 밖에는 의외의 인물이 하얀 가운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서있었다. 늙은 생강이란 말이 어울릴 법한 노인네였다. 레예스는 그에게 고개를 까닥했다. 이름은 모르지만 앙겔라를 만날 때 몇 번 정도 지나친 사이라 면식은 있었다.

 “정식으로 인사하는 건 처음이군. 치글러 박사와 같은 의료팀 소속의 헤르만이라고 하네. 자넨?”
 “레예스.”

 그는 퉁명스럽게 이름을 내뱉었다. 예의라곤 구석에 처박은 태도였지만 헤르만 박사는 전혀 개의치 않는 눈치였다. 그는 슬쩍 다른 쪽으로 고갯짓을 했다. 잠시 걷자는 뜻인지 그는 고개도 안 돌리고 휘적휘적 걷기 시작했다. 레예스는 그를 따라갔다. 야영지의 소음은 그들의 등 뒤에서 아스라이 사라지고 있었다. 

 “치글러 박사를 멈춰줘서 고맙네, 레예스 요원. 덕분에 거친 수를 쓰지 않아도 되겠어.”
 “거친 수?”
 “저기서 더 일하려고 했으면, 이번에는 아예 마취약이라도 써서 강제로 재울 셈이었거든.”
 헤르만 박사는 진담 반 농담 반의 심정으로 말했다. 하지만 그의 무뚝뚝한 표정과 겹쳐 그의 말은 엄청난 시너지 효과를 내고 있었다.
 “매번 저러나? 매번 저렇게 될 때까지 놔두는 건가?”
 “그렇네. 유감스럽게도.”
 “왜지?”
 “차라리 내 눈 앞에 두는 게 나을 테니까.”
 “뭐?”
 “1년인가 전쯤에 이런 일이 처음 발생했었네. 처음엔 그저 좀 열정이 넘친다 싶었지. 지나치게 말이야. 하지만 그게 아니었네. 치글러 박사는 고도의 PTSD 환자였어.”

 레예스는 얼굴을 찌푸렸다. 처음 듣는 얘기였다. 몰랐다. 그 밝은 미소 뒤에 그런 처참한 흔적이 있을 줄은. 그저 좀 약한 부분이 있다고 생각했을 뿐인데. 그저 너무 열심히 일해서 스트레스를 받을 뿐이라 생각했는데.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를 지키겠다고 맹세했으면서 그런 간단한 것 하나 모르다니. 지독한 자괴감이 그의 전신을 뒤덮고 있었다.

 “바로 그만두게 했네. 싫다는 걸 억지로 짐까지 싸서 돌아갈 채비까지 갖추게 했지. 그랬더니 어떻게 됐는지 아나? 끔찍하더군. 물 한 모금, 식사 한 끼 입에 안 대고 미동도 안한 채 뜬눈으로 며칠 밤을 샜네. 자기 사무실에서 백랍으로 만든 인형처럼 말이야. 죽어도 자기는 오버워치에 있겠다더군. 자긴 군의관이라면서 말이야. 하지만 내겐 그녀의 말이 군의관의 책임 따위론 들리지 않았네. 그건 망집이었어. 타인을 위한 게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한 말이었네. 

 제길, 그러니 내가 뭘 어떻게 했겠나? 어쩔 수 없었네. 차라리 곁에 두고 조금씩 치료하는 게 낫지, 아무도 모르는 곳에 가서 죽기라도 하면 대체 어떻게 할지 감도 안 잡히더군. 더 골치 아픈 건 그녀가 너무 유능하다는 걸세. 게다가 내가 조금만 그녀의 병세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려고만 해도 금방 알아채버리고 말지. 그리고선 그냥 농담하는 투로 넘어가버리고 말아. 

 더 짜증나는 건 솔직히 의료팀은 그녀가 없으면 돌아가기가 많이 힘들 지경이라는 걸세. 그녀는 천재야. 나노 치료 기술을 보게. 그것 하나만으로도 그녀는 의학계의 미래를 몇 십 년은 앞당겼어. 치료해야 할 환자에게 오히려 의지를 하다니, 의사로서 이렇게 자존심 썩는 일도 없지.”
 “…….”

 헤르만 박사는 분을 삭이며 말했다. 그 분노는 자신을 향한 것이었다. 레예스는 그의 기분을 어렴풋이 알 것만 같았다. 도와주고 싶은데 스스로 아무런 도움이 안 되는 그 마음, 그도 잘 알았으니 말이다. 

 “그러니 자네가 좀 도와주게, 레예스 요원.”
 “뭘 어떻게 말인가?”
 “그냥 치글러 박사 곁에 있어 주게. 그걸로 충분해. 지금까지 박사가 누군가에게 그렇게 속내를 드러낸 적은 한 번도 없었네. 늘 군중 속에서 고독한 여자였지. 하지만 지금은 아니네. 자네가 옆에 있지 않는가. 내, 꼭 좀 부탁함세.”

 그는 레예스의 어깨를 툭툭 치고선 다시 발길을 돌려 돌아갔다. 그는 헤르만 박사의 등 뒤에 대고 소리쳤다. 그것은 의도적이었다기보다 일종의 무의식에서 불쑥 튀어나온 말이었다.

 “난 아무 것도 못하는 놈일세. 기껏해야 총질이나 좀 할 줄 알 뿐이지. 그런데도 내게 맡기겠나? 내가 그녀에게 어떤 영향을 끼칠 줄 알고?”
 “자신감을 가지게나, 레예스 요원. 자네는 지금 전 세계 최고의 의사들조차도 할 수 없는 치료를 하고 있으니 말일세. 내 보증해드리지.”

 헤르만 박사는 그렇게 말하며 뒤도 안 돌아보고 떠났다. 풀벌레 우는 황야에 남겨진 레예스는 잠시 서있었다. 조금 전부터 무전기에 그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지만, 무시했다. 지금은 생각할, 아니 혼자 있을 시간이 필요했다. 그는 지금 기쁜지, 아니면 슬픈지 알 수가 없었다. 치글러 박사의 비밀을 알아서 기뻤고, 그 비밀이 너무나도 상처투성이어서 슬펐다. 그의 피묻은 손으로 만지기에는, 너무나도 상처가 깊은 비밀이었다. 

 “내가 어떻게 하면 되겠나, 앙겔라?”

 그가 텅 빈 목소리로 힘없이 중얼거렸다. 대답은 있을 리가 없었다. 그는 오래도록 고민하며 서성였다. 그녀만 그에게 위로를 받는 게 아니었다. 그 역시 변하고 있었다. 지금껏 타인에 대해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그가, 처음으로 타인에 대해 정말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레예스는 그런 자신의 변화조차도 깨닫지 못한 채, 오래도록 서성이며 고민했다. 답이 안 나온다는 것을 알면서도, 지금 이래봤자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기다리다 못한 맥크리가 그를 찾아올 때까지.



 항상 합리성만 추구하던 그가, 이토록 비합리적으로 행동한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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