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퓨터가 오자마자 말썽을 부리는 군요.
며칠이 그냥 날아가 버렸습니다.
시간은 금인데 말이죠.
핑계같은 상황에 죄송하기도, 부끄럽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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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소, 오프라인에서 취미 생활을 만끽하게 되었다.
늦은 오후와 저녁은 항상 게임을 위해 할당된 시간이었는데, 할당된 목적이 한순간에 '뻥' 비어버렸다.
때는 한창 더운 여름이라 바다를 찾아 놀러다녔고, 혹은 산과 계곡의 수풀 그늘속에 앉아 시원한 수박을 먹으며 무더위를 달랬다.
'그래 이게 바로 제대로 된 취미지, 한낱 게임 때문에...'

몇날 며칠을 사라지지않고 무언가 미증유의 것으로 남아, 마음 한구석을 짓누르던 답답함이 한때나마 사라지는듯 했다.

붙어있을땐 더 없을 인생의 동반자이지만, 헤어지고나면 남보단 못한 철천지 원수가 되버리는 연인사이 처럼
당시의 나에게 등돌린 리니지2란 마치 그런 느낌이었다.

'무엇때문에 그리도 열을 올렸던가.'
내가 믿고 바라보던 미라클 혈맹의 군주는 유약하지만 그래도 착하고 집념은 있던 남자라 생각했건만, 악재 속 갈피를 잡지 못하더니 결국 자신의 식구를 내팽게치고 달아나듯 혈맹을 해체 해버렸고.
그 언제까지고 끈끈한 우정으로 이어질 것 같던 많은 친구와 혈원들은 해체 후 당연하단듯 소식이 끊겨 버렸다.

'버림받은 건가...'
틈틈히 인게임의 친구목록을 보며, 로그인 할 친구들을 기다렸지만 그들은 내가 접는 그 순간까지도 끝끝내 회색글자로 남아 공허함을 안겨주었다.

이렇게도 쉬운건가?
모두가 이렇게도 쉽게 지워지는 건가?

아니다
누굴 원망할 자격도 없다, 나 역시 도망쳐 나왔으니.

다만, 떠나오기전 그나마 내가 잘한일은 나의 라인인 미라클 1라인의 식구들에게 최소한의 배려를 했다는것이다.
누적된 세금과, 몇푼 되지 않는 사비까지 모아 분배해주었고, 서버에 남아 '생사연합'과 계속 대립하길 원한 몇몇의 혈맹원을 다른 좋은 보금자리로 소개 시켜준 일이었다.

'그래 그거면 된거지'

허나,일상으로 돌아와 밤을 맞이하면 또 그건 아니었다.
고요한 동네를 거닐때든, 친구들과 하릴없이 노닥거릴 때도 게임에 대한 생각이 머리속에서 사라지기는 커녕 점점 증폭됐다. 
생각 할 수록 유치한 짓이었다.
결국은 이렇게 사라질 , 너무 초라해서 아무것도 아닌게 될 줄도 모르고 몇라인 군주니 어디 총군이니 성혈이니 뭐니 그러고 돌아다닌 그때가 너무도 부끄럽고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다.
생각의 고리가 자조와 회한으로 까지 진행되고 보니, 도망치듯 접은 그 사람들을 딱히 이해 못 할 일도 아니었다.

문득, 길섶형님이 언제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너거 신의쪽이랑 우리랑 쟁터질꺼 같다. 그 아무것도 아닌 라인군주 그런거에 목매지말고 이쪽으로 와서 가입해라.
신의연합이 우리한테 질꺼니깐 아마도 그 생활이 길어봐야 한달이다."

당시는 신의와 go혈맹 측이 서로 갈등이 점화되어 전쟁을 코앞에 둔 시점이었는데 연합측은 자신감으로 잔뜩 고무되었던 상황이었다.
뚜껑을 열어보기도 전에 이미 낙승을 예상하여, 전쟁을 피하지 않고 오히려 삭초제근 한다는 마음으로 무장된 상태였다.
당연히도 당시의 나에게 있어선 형님의 말이 우스웠다.

"여기 동고동락한 사람들도 있고, 연합 군주자리 버리고 우얄라고 거기 가겠습니까."
자존심이 상한듯한 늬앙스를 풍기며 대꾸하는 나에게 길섶형님은 침묵으로 대답했다.
더 말해봐야 소용없다.
기성세대의 관록이었을까.
자고로 수풀에 웅크린체 나직히 노려보는 맹수에겐 맞서도,털을 곤두세운체 가르릉 대는 고양이는 피해가는 법이다.


그때의 형님이 행한 침묵의 의미가 다시금 떠올랐다.
역시나, 한치 앞도 모르고 말을 내뱉은 내가 부끄러웠다.

당시의 어린 나에게 기성세대라 불리는 어른들은 마치 증오의 대상이었다.
어른들이란 그저 색과 돈밖에 모르는 주제에,
'인생이란 이런거다 임마' '원래 세상이 다 그런법이야'라는 진리명제식의 말들로 개똥철학을 강요하는 모습들.
자신보다 조금이라도 어리다고 생각하면 '니가 뭘알겠냐' 하는듯 냉소적인 태도.
그런 어른들을 상대로 내가 할 수 있는건,
그저 가시를 곤두세우고 웅크린 고슴도치 마냥 가슴 속 깊이 경멸하고 미워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하지만, 세대를 바라보는 성급하고 미숙한 나의 일반화로 곡해 해서 문제였지만 적어도 길섶형님은 나에게 최대한의 배려를 하려 하셨던게 틀림없다.

시간,돈,자기개발,비전설계 
현실과 타협 볼 수 있는 나이도 아니었고, 그래서 다시 돌아가기엔 너무 많은 시간을 버리게 될 것이 두려웠다.
여전히 시끄러운 내적 갈등의 나날들 중에 술 한잔 용기 삼아, 같은 라인의 식구였던 옛 동료에게 전화를 걸었다.
정말 기쁘게도, 반갑게 맞아주는 목소리에 재잘재잘 안부를 나누다가 서버 소식에 대한 얘기 때문에 대화는 차갑게 식었다.
생사가 미쳐 날뛰어, 중재 이후 조용히 내실을 다지고 있는 많은 혈맹들을 계속 못살게 굴어서 억지 시비로 어린아이 손목 비틀듯이 가지고 논다는 소식.
지금도 계속되는 압박에 조만간 쟁을 다시 하게 될 것 같다는 소식.
하지만, 접은 사람은 접은 사람이니 현실에 충실 하라는 조언.
마지막으로 언제 기회되면 술 한잔 하자는 의미없는 말을 끝으로 통화를 종료했다.

피가 끓어올랐다.
'까짓 다시 시작해서 한번 놀아볼까.'

도망자 처럼 돌아왔던 내모습이 다시 떠올랐다.
'아서라, 현실에나 충실해. 게임에 목숨 걸지 말고'
지난날 게임을 접기전 내가 그랬듯, 지금 남아있는 옛 동료들도 나를 도망자로 생각할까?

하루하루 시간은 흘러가고, 그럼에도 떨쳐지지 않고 오히려 더욱 또렷이 나를 괴롭히는 질문이 있었다.

"진짜 이대로 끝낼꺼야?"


에라 모르겠다 도저히 못참겠다. 죽이되든 밥이되든 내눈으로 직접 확인하자.


때는 기승을 부리던 늦더위도 모두 가신, 아침 저녁으로 쌀쌀한 늦가을의 문턱이었다.
긴팔의 옷 위에 외투를 입은 모습으로, 2달여만에 다시 컴퓨터 앞에 앉았다.


'이제 다시 정글로 돌아갈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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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