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마일게이트의 CCG, '큐라레: 마법도서관'을 두고 흔히들 '약을 빤 게임'이라고 칭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일러스트부터 시작해 격주간 변하는 시즌의 테마, 기상천외한 시나리오 전개가 장난 없기 때문이죠.

큐라레의 시나리오에 대해서는 더 할 말이 많아요. 무슨 생각으로 이런 이야기를 진행하는지, 세상 어떤 사람이 이런 글을 쓰는지, 무슨 약을 하는지 궁금할 정도입니다. 아리따운 미소녀는 나오는데 이 아이들은 뭔가 나사가 하나씩 빠졌고, 상황 역시 온갖 개그코드와 패러디로 점철되어 도무지 한 치 앞의 상황을 예측하는 게 불가능하거든요.

하지만 이는 다 큐라레 제작진의 전략적인 선택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아니, 애초에 이런 선택을 할 수 밖에 없는 환경이었더군요. 어떤 환경에서, 왜 이런 선택을 하게 된 것일까요? 지금의 큐라레가 있기까지 한땀한땀 시나리오를 써내려 간 14년 차 경력의 이야기꾼, 스마일게이트 iO스튜디오양주영 시나리오 라이터의 NDC강연을 들어보시죠.

▲ 기상천외 큐라레 스토리 작가, 양주영 시나리오 라이터




■ 모바일게임 안에서 시나리오의 위치는?

일단 모바일게임의 현 주소부터 짚고 갈게요. 온라인게임이나 콘솔게임은 영화에 비견될 정도로 시나리오에 거대 자본과 긴 제작기간을 투자하지만, 모바일게임은 그렇지 않아요. 그도 그럴게 거의 한 달 이상 살아남는 게임은...음, 약 6%정도밖에 안되거든요.

이게 바로 상위 50권내의 게임 중 약 19개가 RPG인데도 시나리오의 비중이 낮은 이유입니다. 수명이 짧으니 그만큼 수익 신뢰도도 낮고, 소규모 인력의 힘으로만 단 시간 안에 손익분기점을 넘겨야 되기 때문에 시나리오에 투자하기 힘들어요.

그래서 상황은 악순환됩니다. 시나리오에 대한 투자가 축소됨에 따라 전문 인력에 대한 필요성도 낮아진 상태로 게임을 런칭하니, 당연히 평가가 좋지는 않겠죠. 이는 시나리오의 가치 하락으로 이어지며 다음 작품 역시 더 투자를 못하는, 데드 엔딩을 보게 됩니다.

▲ 악순환은 계속 되며 시나리오의 필요도는 점점 낮아지고 있다



그래도 조금씩 나아지고 있어요. RPG의 볼륨이 커지며 시나리오 시장도 넓어지고 있는데다, 이를 담아낼 수 있는 기술도 발전하고 수익 가치도 많이 확대되었죠. 투자되는 자본과 인력도 많아지고 있는 추세입니다. 지금 사례로 설명할 저희의 작품, '큐라레: 마법도서관'도 이 추세에 발맞춰 시나리오를 강화한 게임이죠.



■ 큐라레의 시나리오 설정은 어떻게 이뤄졌나?

저를 비롯해 큐라레 시나리오 라이터는 시나리오를 작성하고, 시즌 이벤트 테마를 기획하며 캐릭터를 만들어내고 IP를 관리하는 등 다양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콘텐츠 전반을 시나리오가 컨트롤하는 거죠.

큐라레는 2주마다 시즌이 변화하며 중편 분량의 시나리오가 업데이트됩니다. 현재까지 선보인 시나리오의 텍스트 분량은 약 30만 단어로, 여러분이 잘 아시는 '파이널판타지 13'이 40만 단어의 텍스트를 가졌다는 걸 감안했을 때 상당한 수준이라 할 수 있어요. 총 등장 캐릭터도 약 300명이나 될 정도입니다.

이처럼 큐라레는 시나리오의 비중이 매우 높은 모바일 게임입니다. 거기다 업데이트도 빨라요. 따라서 상품성 있는 캐릭터와 세계를 만들어내고, 꾸준한 이슈를 이끌어내는 걸 목표로 삼았습니다. 이 모든 걸 이룰 수 있는 특성은 바로 '바카게(바보게임의 일본어 줄임말)' 입니다. 의도적으로 상식에서 벗어난 전개를 지닌 시나리오를 택한거죠.


▲ 크리스마스 시즌에도 여지없이 보여준, 상식을 벗어난 패러디


자, 여기서 잠깐 멈춰야 되요. 모바일 시나리오를 기획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대전제를 상정해야 하거든요. 일단, 텍스트를 친숙하게 느끼는 유저는 많지 않으며, 시나리오에 친화적인 유저의 숫자는 극히 일부분에 불과합니다. 흥미와 관심도 금방 식는 휘발적인 요소에요. 여기에 모바일은 화면도 작고 단선적 플레이로 플레이 흐름이 자주 끊겨 많은 정보를 다 담기도 힘들고, 유저들도 몰입하기 쉽지 않은 환경이라 더더욱 시나리오의 매력을 어필하기 힘듭니다.

그래서 큐라레는 전략을 세웠습니다. 첫 번째 전략, 정보량을 줄였어요. 지문은 없애고 모든 시나리오는 대사로만 진행했습니다. 이야기가 길더라도 한 번에 노출되는 대사 분량은 줄여 읽기 편하게 했으며, 쉽게 읽을 수 있는 일상어로 친근함을 줬어요.

두 번째는 끊임없이 관심과 흥미를 유도하는 전략입니다. 지속적으로 업데이트되는 오픈형 콘텐츠를 끌고 갈 수 있는 구조를 확립하기 위해 '차원 우주'라는 개념을 도입하기로 했어요. 어딜 가든, 어떤 걸 하든 용인되는 버라이어티 쇼의 서사 구조인 '에피소딕'으로 이야기를 구성했습니다.

▲ 에피소딕에 대한 간략 설명 - 2014년 NDC 자료

▲ 에피소드마다 다른 차원을 여행하는 구성이라, 이런 것도 가능했다...


세 번째 전략, 텍스트 난이도를 쉽게 유지하는 겁니다. 가볍고 쉬워 부담 없는 시나리오로 중간에 읽더라도 재미있는데다, 흥미가 지속되게 만드는 것이 포인트죠. 이 모든 걸 다 갖춘 건 바로 '개그'뿐입니다. 그래서 큐라레도 이벤트 시나리오는 개그를 주력으로 작업했습니다.

근데, 사용할 수 있는 도구는 텍스트. 그리고 캐릭터 그림 뿐이었어요. 이 두 도구로 이야기를 전개할 수 있는 장르는 '비주얼 노벨'. CCG라는 게임 특성상, 캐릭터 그림은 풍족하게 마련되어 있으니 남은 건 시나리오 라이터가 어떻게든 하면 됩니다. 이렇게, 제한된 도구로 시나리오를 연출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었습니다.

▲ 그 '남은 것', 시나리오 라이터는 큐라레의 세계관을 어떻게 만들어냈을까?




■ 뭐든지 가능한 세상, 시나리오 라이터가 복용한 '약'은?


자, 그럼 시나리오 라이터가 어떻게든 하면 되는, '내용'을 살펴봅시다. 뭐든지 가능한 세계를 만드는 게 첫 번째 단계였어요. 비슷한 세계로 만화 '은혼'을 들 수 있겠네요. 하지만 저작권 문제가 걸려있기에 50년 이상 된 작품들만, 그것도 썩 유명하지 않은 작품들만 가져올 수 밖에 없었어요.

한계도 있었어요. 아무 거나 다 할 수 있는 세계지만, 일단 한국역사의 인물처럼 논란이 생길 위험이 있는 캐릭터는 피해야 합니다. 또한 모호한 개념이나 신이 의인화되는 큐라레에서는 꽤 좋은 콘텐츠인 최강자를 겨룰 수 있는 소년만화 식 인물관계 구성이 어렵다는 단점도 있었죠.

▲ 우주의 암흑물질과 죽음의 사탄 중 누가 더 강한지, 좀 알려줄 사람?...은 없다


그래서 그냥 주인공 캐릭터인 세 명의 사서들을 최강자로 만들어버렸어요. 서열 갈등을 만들어내긴 힘들지만, 개그니까 괜찮았어요. 다양한 성향의 캐릭터들을 등장시켜 개그 상황을 만들어 내면서 큐라레 특유의 세계관을 구성해냈어요.

이 과정 속에서 탄생한 엄청나게 많은 캐릭터를 관리하기 위해 기호화된 캐릭터성을 조합했죠. 왜 우리 김용하 총괄PD의 모에론에서 나온 것처럼 (사실 전 모에론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습니다만) 동생계나 친구계, 누님계 같은 개념 말이죠. 이런 개념들을 하나만 가져가는 게 아니라, 좋은 캐릭터성 다수에 결점 하나 정도 조합해 특유의 캐릭터성을 만들었습니다.

캐릭터마다 차별성도 만들어내야죠. 특히 큐라레처럼 같은 성향을 공유하더라도 세부적인 차별화를 만듭니다. 욕망과 공포는 같은 성향이더라도 확실히 차별점을 둘 수 있는 중요한 요소에요. 여기 보세요. 같은 변태 성향이라도 각각 다른 욕망으로 확실한 개성을 가지게 되잖아요.

▲ 변태라도 다 같진 않다구욧!

김용하 총괄 PD의 작년 NDC '모에론' 강연 에서 설명된 캐릭터 속성


이까지가 큐라레가 설정한 시나리오 컨셉입니다. 그럼 지금부터는 들이킨 약의 사례와 결과를 보도록 할까요?

1. 오토코노코

Feedback : 효과는 미미하더라고요. 오토코노코에 대한 인식 부족 문제도 있었지만, 거부감을 가지는 유저들이 상당히 많았어요. 그 이유는 큐라레는 주력 남성 캐릭터가 하나도 없기 때문이었어요. 남성 유저가 감정이입할만한 캐릭터가 없는 상황에서, 남성이라고 주장하는 캐릭터가 오토코노코만 있으니 되려 불편했던 겁니다. 후에 빈유 캐릭터라도 나오면 유저분들이 불안에 휩싸이더라고요.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오토코노코, 나르키소스의 비중은 줄게 되었습니다.

▲ 허나 최근 오토코노코를 다룬 매체가 많아지며 인식도 점점 좋아지고 있는 추세.
이에 맞춰 나르키소스도 머지않아 다시 게임 내에서 활약할 예정이다


2. TS (Trans Sexual)

FeedBack : 이 역시 애매했어요. 특히 플라톤이 여자아이로 변하는 사례에서는, 앞서 설명한 오토코노코 캐릭터인 나르키소스 때문인지 '남자 아냐?'라는 의문이 제기되면서 시끌시끌했어요. 오죽하면 총괄 PD가 직접 나서서 공식카페에다 '플라톤은 여자아이다!'라고 공식발표했겠어요....

▲ 지긋한 나이의 남성 학자로 기억된 장자(좌)와 플라톤을...


3. 마법소녀

FeedBack : 세상은 멸망했습니다. 바이럴(입소문)효과로 폭발적인 이슈가 일어났으나, 대부분은 부정적인 반응이었어요. 실제로 매출도 떨어졌고요... 유저 사이에서 호불호가 심하게 나뉘는 걸 보면서, 우리가 행한 방법은 재미있지만 큐라레가 가진 미소녀 게임의 본질에서는 벗어난 방법이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하지만 워낙 극단까지 간 터라, 후에 큐라레 테이스트라는 독특한 분위기를 낼 수 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 이 시즌 이후 "막장의 끝을 봤다"며 더 이상 두려울 것이 없었다


4. 엉덩국 콜라보레이션

FeedBack : 이미 선을 넘은 마당에 뭔들 못하겠습니까. 그 다음 시행했던 건 바로 '엉덩국 콜라보레이션'이었습니다. 원래 복용한 약으로 구축한 큐라레 테이스트의 확립과 바이럴 마케팅을 노린 큐라레 최초의 콜라보레이션이죠. 그것도 원작 캐릭터를 적극적으로 시나리오에 투입하는 형태로요. 원작의 캐릭터성이 이미 확립된 상태에다 큐라레의 자유도 높은 세계관이 있기에 가능한 콜라보였습니다.

캬, 효과는 굉장했습니다! 긍정적인 반응이 쏟아져나왔고, 인터뷰 등으로 언론에 노출되며 바이럴 효과도 톡톡히 누렸어요. 일별 접속 유저도, 매출도 쭉쭉 상승했습니다. 어찌보면 비슷한 컨셉의 마법소녀에 비해 아주 긍정적인 결과를 얻을 수 있었죠.

엉덩국 콜라보레이션(인터뷰) 당시 선보인 진짜 카드들...


잠깐! 여기서 한 번 비교해보죠. 왜 마법소녀는 실패하고 엉덩국 콜라보는 성공했을까요? 둘 다 바이럴 효과는 일어났는데 말이죠. 마법소녀는 부정적, 엉덩국은 긍정적으로 반응이 갈린 이유는 무엇일까요?

전 긍정과 부정을 나누는 건 '익숙함'의 차이라고 봤습니다. 하지만 너무 익숙해지면 오히려 지겨워지거든요. 결국 약간의 파격을 행해야 하죠. 하지만 마법소녀처럼 너무 멀리 나가버리면, 이건 전혀 익숙하지 않은 영역으로 넘어가 공감대를 잃어버릴 수 밖에 없습니다. 엉덩국은 원작을 충실히 재현해 공감대를 형성하면서 딱 한 발자국만 더 나간, 적절한 파격이기에 성공했고요.

▲ 시나리오에서도 정체성을 잃지 않고 원본과 거의 흡사한 캐릭터를 선보인 엉덩국 콜라보
어디 견주어도 손색없을 파격적인 콜라보였지만, 고유의 개성은 그대로 간직해 익숙함을 살렸다


5. 흑역사 시즌과 님카규의 등장, 익숙한 걸 낯설게 하기,

FeedBack : 1년 3개월의 서비스 기간동안 일어났던 개발자의 버그, 운영진의 실수마저도 소재로 만들며 유저분들과 소통하는 콘텐츠가 될 수 있었어요. 당시 과거의 상황을 모르면 콘텐츠를 제대로 즐길 수 없다는 부작용은 있었지만, 자기 반성의 의미를 담고 있는데다 다소 유쾌해 부정적인 흑역사를 긍정적인 이미지로 바꿀 수 있기도 했죠.

▲ 엉덩국 시즌 발생한 스크립트 오류, 존슨 대신 조운이 나온 흑역사조차...

▲ 조운슨 더 마스터라는, 정체성을 찾게끔 만들어 준 흑역사 시즌


그밖에 다양한 방식으로 콘텐츠를 많이 만들었어요. 타로의 VI.연인 카드를 예상에서 약간 비튼 '낯설게 하기' 방법으로 다키마쿠라와 오타쿠라는 조합을 만들어냈고요. 항상 오류 해명 같은 걸로만 등장해 부정적인 이미지가 가득했던 기획팀장님의 아바타 님카규를 흑역사 시나리오에 직접 등장시켜 부정적 이미지를 친근함을 통해 상쇄했죠.

▲ 살짝 미묘하지만 타로와 비슷한 VI. 연인(...)과 기획팀장 '님카규'도 등장




■ 시나리오 담금질 1년 3개월 째, 시나리오 라이터의 충고


큐라레는 시나리오 측면에서 많은 성과를 거둔 편이에요. 적은 리소스로 큐라레 테이스트라는 고유한 영역을 확보하면서 어떻게든 성과를 냈죠. 모바일게임에서 시나리오와 콘텐츠 기획의 저변을 나름 확대하지 않았나 싶어요.

하지만 반성해야할 것도 많죠. 너무 흥미 위주였고, 패러디나 모에 요소 등으로 너무 매니악하지 않았나 싶어요. 거기에 가성비가 떨어질 수 밖에 없는 시나리오를 시즌이 변할 때마다 써내려가니 라이터들의 부담도 문제가 됐고요.



슬슬 마무리 단계네요. 정리를 하죠. 산업논리가 지배하는 게임업계에선 시나리오의 비중은 점점 줄어들 수 밖에 없습니다. 개인의 만족과 회사의 만족 중, 회사가 만족하는 수준 정도만 시나리오를 쳐내는 게 현실이죠. 하지만 가치있는 이야기는 나 자신도 만족시켜야 나옵니다.

시나리오의 중요도가 낮고, 업계의 상황이 썩 좋지 않지만 그래도 지금 노력해야 합니다. 지금이 아니면 영원히 하지 못해요. 게임은 새로운 서사매체로, 모바일로의 변환도 그 적응 과정의 일부입니다. 모바일에서도 가치 있는 이야기를 담을 수 있는 그 때까지,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큐라레가 그 방법을 찾기 위한 시도 중 하나로 기록되길 바랍니다. 긴 시간 이야기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