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널 판타지 XIV: 어 렐름 리본(이하 렐름 리본)'

솔직히 말하자면, 별로 흥미를 갖고 있던 게임은 아니다. 이유도 없었다. 아니, 아예 관심 자체가 없었다고 보면 될 것 같다. '파이널 판타지' 시리즈를 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다. 고등학생 시절, PS2를 통해 즐겼던 '파이널 판타지 X'는 깊은 충격을 안겨준 게임이었다.

그래 봐야 그게 전부였다. '파이널 판타지 시리즈'는 매 편 독자적인 시나리오 라인을 가지는 일종의 옴니버스형 게임이다. 그냥 뭉뚱그려 '파이널 판타지'라는 이름으로 묶고, 시리즈 전체를 관통하는 시스템만 존재할 뿐, 시리즈로서 가지는 이야기의 시너지는 나오지 않는다. 기껏 해봐야 초코보 정도이려나? 하지만 한국 정식 서비스 소식이 들리자, 호기심이 일었다. 할만하던 온라인 RPG는 너무 오래되었거나, 새로 나온 게임들은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 한국어 버전 인트로 영상

기회는 생각보다 빨리 왔다. 1차 CBT를 불과 2일 남긴 시점. 퍼블리셔인 액토즈 측에서 기자들을 대상으로 잠시나마 먼저 플레이할 수 있는 체험 기회를 만들어 주었다. 행사장에 마련된 PC 앞에 앉아 캐릭터 생성 화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런 생각이 들었다.



■ 무슨 캐릭터가 이렇게 이뻐...?


▲ 동료 기자가 만든 캐릭터는 참 뭐랄까 좀 그랬다. 그래 예쁘다.

고백하자면, 난 북미 성향을 진득하게 띄는 게이머다. 예쁜 캐릭터가 대검을 휘두르고, 방어도와 노출도가 비례하는 캐릭터 디자인을 본능적으로 거부한다. 이 사실을 미리 적는 이유는, 앞으로 이어질 글에서 나도 모르게 튀어나올지 모르는 주관적 성향에 따른 의견에 대한 보험이라 생각하면 될 것 같다.

하여튼 캐릭터 창에서 도도히 날 쳐다보는 고양이 귀 그녀의 얼굴은 지나치게 예뻤다. 괴물을 잡으려면 괴물같이 생겨야 한다고 생각하는 나다. 참을 수 없는 기분을 느끼며 캐릭터 창을 뒤적거렸다. 그래 이 정도는 되야 내 캐릭터지.

▲ 그가 눈을 떴다.

조금 이상한 기분을 느끼게 하는 캐릭터 인트로 영상(마치 프린세스 메이커의 여자아이가 된 기분이랄까...)을 보고 나자, 본격적인 모험이 시작되었다. 왜인지는 모르겠는데, 어떤 넉살 좋은 상인의 수레에 얻어타고 있고, 상인은 계속해서 내 신상을 캐낸다. 뭣 때문에 모험을 하는가 묻길래 쿨하게 돈 때문이라고 대답하고 일련의 사건을 겪은 후 대도시 '울다하'에 도착했다.


▲ 뭔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느낌을 주던 캐릭터 인트로 영상

다른 게임들과는 조금 다른 모습이었다. 보통 온라인 게임의 경우, 대도시는 게임 초반에 도착하게 되지만 시작과 동시에 도착하는 일은 드물었다. 대도시에서 게임의 본격적인 시스템을 파악하기 전에, 기본적인 기능과 인터페이스를 먼저 숙달시키기 위함이다.

▲ 아하하 대도시는 좋은 곳입니다. 여러분

그래서일까? 게임의 시스템은 생각보다 복잡하게 다가왔다. 하나하나 알게 되면 어려울 것도 없지만, 한번에 너무 많은 정보를 수용하다 보니 일어나는 일이었다. 할 수 없이 하나하나 차근차근 읽으면서 시스템을 파악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 짧은 시간 동안 최대한 많은 경험을 해야 하는 불쌍한 초보 모험가에게, 엉덩이가 무거운 녀석들이 말을 걸기 시작했다. 머리 위에 느낌표를 띄운 채로.

▲ 처음 발을 디딘 도시엔 직접 움직일 생각이 없는 금수저가 드글거린다.



■ 모험의 시작은 심부름이렷다.



▲ 초반부 플레이 영상

그렇다. 모험의 시작은 심부름이다. 통상적인 온라인 MMORPG도 처음부터 싸움을 강요하지 않는다. 어리둥절 서 있는 주인공에게 말을 걸고, 이것 좀 갖다 줘라, 저것 좀 가져오라 하면서 심부름을 시킨 이후에야 나가서 몸 좀 풀어보라며 전투 퀘스트를 준다. 그리고 보통 이 초반의 퀘스트 동선은 상당히 직선적인 형태를 보이기 마련이다.

▲ 1레벨부터 쏟아지는 심부름

하지만 이 게임은 좀 다르다. 도시 광장에 들어서자마자 수없이 많은 느낌표가 나를 반긴다. 길을 가다 보면 느낌표를 띄운 친구들이 너무 많아 몇 걸음 가기도 전에 발을 멈추어야 한다. 무슨 놈의 도시에 자기 일도 제대로 처리 못 하는 녀석들이 이렇게 많단 말인가.

그렇게 온갖 잡일을 시작했다. 편지, 물건 배달은 물론이요, 일일 헤드헌터가 되어 아르바이트생을 모집하고, 벽보를 붙이는가 하면 거리 앙케이트까지 하며 일용직의 설움을 마음껏 느꼈다. 그리고 마침내, 전투 명령이 떨어졌다. "자네 가서, 무당벌레 좀 잡아보게."

▲ 오만 일을 다 했다.

게임 시작 이후 30분간 도시 내에서 빙글빙글 돌며 잡일만을 반복하던 내 분신이 드디어 성 밖으로 나간다. 격투가로서의 면모를 보여줄 기회다. 비록 상대가 무당벌레라는 게 조금 걸리긴 하지만 어쩔 수 없지.

전투 시스템은 다른 온라인 게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논타겟이 아닌, 마우스 클릭을 통한 타겟팅과, 스킬 버튼을 이용한 전투다. 조금 다른 점이라면, '블레이드앤소울'에서 보았던 '콤보 시스템'이 보인다는 점일까? 그래 봐야 스킬이 두 개뿐이지만. 다만, 스킬 사용시의 캐릭터 애니메이션이 상, 하체를 나누지 않은 통짜인 것이 조금 거슬렸다. 무슨 말이냐면, 스킬 사용 중 캐릭터를 수평이동 시키면 캐릭터가 슬라이딩한다. 마치 얼음 위를 미끄러지듯 말이다.

▲ 물 흐르듯 미끄러지는 스텝



■ 오 이건... 나쁘지 않아


초반 시연은 생각보다 짧게 끝났다. 50분의 시간 제한은 게임을 알기에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었다. 사실 다른 게임의 시연회에 비하면 긴 시간이었지만, 온라인 게임이란게 어디 간단한 장르던가. 하지만 끝은 아니었다. 아쉽게도 내가 만든 캐릭터는 아니지만, 오는 1차 CBT의 최종 단계인 20레벨 콘텐츠를 플레이해볼 기회가 왔다.

▲ 생각보다 말이 많은 녀석

내 직업은 검투사. 투사 계열에서도 탱킹에 특화되어 있으며, 후에 '잡 시스템(서브 클래스 레벨을 올려 직업을 조합하는 시스템)'을 통해 강력한 탱커인 '나이트'가 될 수 있는 직업이기도 하다. 파티는 4인을 기본으로 8인까지 가능하지만, 아쉽게도 8인 파티는 할 수가 없었다. 게임에 숙달된 스텝 조교의 인솔 하에 출발한 기자들은 곧 적수를 만나게 되었다. '이프리트'. 우리가 처치해야 할 녀석이다.

사실 여기서 말하지만, '이프리트'와의 전투는 단순하기 그지없었다. 탱커는 넉백을 당하지 않도록 벽을 등지고 서서 시선만 끌어주면 그만. 딜러들은 MMORPG의 전통인 바닥 피하기와 딜링만 하면 그만이다. 가끔 가다 이프리트가 소환하는 말뚝을 깨주면 만사 OK, 솔직히 말하자면 게임 좀 해본 사람이라면 단박에 클리어할 보스다.

▲ 사실 별로 어렵지는 않으나 박력 하나는 수준급

눈에 띄는 것은 바로 '그래픽'. 이프리트가 뿜어내는 불길의 묘사나, 요동치는 바닥의 모습은 굉장히 훌륭하면서도, 직관적이었다. 보스의 기술이 너무 화려해 오히려 가시성이 떨어지는 게임이 있는가 하면,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2015년에 어울리지 않는 이펙트를 보여주는 게임들이 존재하는 시기다. 사실 뛰어나다고는 할 수 없는 2013년작에 걸맞는 수준이지만, 가시성만큼은 확실히 뛰어났다. 처음 도전하는 보스임에도 기자들이 능숙하게 바닥 1cm 회피를 하는 것을 보니 알 수 있었다.

동시에 공략을 파악하면서 조금씩 전해지는 쾌감은 한참 전에나 느껴본 감정을 다시 한번 일깨웠다. '네놈은 이미 파악되었다. 얌전히 죽어라.'라는 마인드를 바닥에 깔고 보스를 공략할때의 쾌감. 비록 이프리트는 20레벨에 가장 처음으로 만나는 보스이니 당연히 쉬울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정식 서버 만레벨인 50레벨을 달성했을 때. 훨씬 어려운 보스를 만나 상대할 때 어떤 기분일지 생각해보니 몸이 부르르 떨렸다. 그저 관심이나 가져 볼 요량으로 시연회에 왔건만, 테스트가 끝날 때의 감정은 그보다 더 컸다. "나오면 꼭 해봐야겠군." 행사장을 나오며 머릿속에 든 생각이었다.


▲ '이프리트 토벌전' 영상



■ 사라진 북미, 그리고 일본의 경계


'렐름 리본'을 알지 못하던 시절, 내가 쉽사리 이 게임에 손을 대지 못했던 가장 큰 이유는 '게임'에서 보일 거로 생각한 '일본의 색'에 대한 본능적인 거부감 때문이었다. 미형의 캐릭터, 유전 법칙을 무시하는 총천연색 머리, 태생이 귀엽게 생긴 이종족들과 뭔가 훈훈한 분위기까지, '렐름 리본'은 이 모든 코드를 다 가지고 있었다. 북미 시장에서 볼 수 있는 게임 코드와는 상당히 다른 모습이다.

▲ 이런 느낌?

그러나 직접 겪어본 '렐름 리본'은 달랐다. 일본 특유의 느낌은 오롯이 살아 있지만, 게임의 시스템에서는 고집이 느껴지지 않았다. 새삼 높아만 보였던 북미와 일본의 벽이 점점 사라지고 있음이 느껴졌다. 브라질의 개발사인 '비홀드 스튜디오'의 작품인 '크로마 스쿼드'는 일본 특유의 전대물 감성을 100% 담아냈다. 일본 게임이라고 해서 북미의 감성을 품지 못할 이유가 없다는 거다.

그리고 '렐름 리본'은 그 사례로 충분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한국어로 다듬어진 '렐름 리본'은 현재 국낸 MMORPG 시장에서 대세를 이루는 게임들과 비교해봐도 충분히 견줄 수 있는 작품이란 것을 알 수 있었다. 이제 남은 것은 오픈을 기다리는 일, 그리고 지켜보는 일이다. 세계를 무대로 이미 적지 않은 성과를 거두고 있는 '렐름 리본'이 명실상부 MMORPG 강국이라 불리는 대한민국에서도 그 존재감을 드러낼 수 있을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