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 인터내셔널5(The International5, 이하 TI5)가 모두 끝났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팀인 EG가 우승했고, 무엇보다 지난 TI4때와 같은 '노잼 메타'가 아니라 치고받는 '꿀잼 메타'여서 더욱 기뻤다. MVP 피닉스 스위트룸은 MVP 피닉스의 모든 선수들, 그리고 '싱싱'과 '데몬', 그 지인들이 모인 탓에 꽉꽉 들어찼다.

▲ TI 결승전 선수 소개 현장

EG를 정말 좋아하기 때문에 경기가 치러지는 동안에는 일이고 뭐고 반쯤 정신을 놓은 채 매우 격한 리액션을 하면서 경기 감상에 정신이 없었다. EG가 대승을 거두면 소리를 지르면서 박수를 치고 한타에서 EG가 망하면 탄식을 지르거나 가끔씩 저절로 욕이 튀어나오기도 했다. 평소에 감정 기복이 거의 없는 편인 내가 이 정도로 격하게 반응한다는 사실에 스스로도 놀라웠다.

▲ EG 우승 후 현장 인터뷰

결국 EG의 3:1 승리, TI 우승을 상징하는 용사의 아이기스는 EG의 손에 들어갔다. 평소에는 어떤 팀이 경기를 승리하면 알아서들 자기네 스위트룸으로 왔는데, 결승 후의 EG는 챔피언 신분이라서 그런지 스태프들이 호위를 하면서 앞장서서 길을 만들어 줬다. 역시 사람은 출세하고 볼 일인 것 같다.



EG 스위트룸이 있는 주변 복도와 그 아래 1층은 'USA'를 외치는 수많은 인파들로 발 디딜 곳이 없을 정도였다. 메인 중계진이 있는 중계석에서 EG 선수들이 간단한 인터뷰를 하러 왔을 때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몰려왔는지 저 안에 서 있으면 숨이나 제대로 쉴 수 있을지 의문일 정도였다.

스위트룸으로 올라온 EG 선수들은 아주 잠깐의 휴식을 취한 후 ESPN 인터뷰를 위해 하나하나 차례로 방을 나섰다. 선수 보호를 위해 인간 벽(?)을 만들고 있던 스태프 중 한 명에게 타 매체들과의 인터뷰는 따로 없느냐는 질문을 했지만 ESPN 인터뷰 외에 따로 인터뷰 진행은 없다고 한다. '피어'와 '수메일' 인터뷰를 꼭 하고 싶었던 나로서는 매우 섭섭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도 이따금씩 열린 방 문을 통해 선수들을 볼 수는 있었다. '유니버스'는 가족처럼 보이는 이들과 아이기스를 들고 함께 기념 사진을 찍고 있었고, 방 한편에 마련된 소파에 앉은 '피어'는 어머니와 이야기를 나눴다. '프리 투 플레이'를 통해 '피어'의 이야기가 잘 알려진 마당에 저런 광경을 보니 마음이 찡했다. 이제 '피어'는 책상 뿐만 아니라 자기가 원하는 건 뭐든지 살 수 있을 것이다.

평소 스위트룸 앞을 찾아오는 EG 팬들에게 가장 친근한 태도를 보였던 '아우이2000'은 ESPN과의 인터뷰가 끝나고 팬들에게 사인을 해주기 위해 주변을 둘러봤다. 그러다 무언가 엄청난 것을 발견한 '아우이2000'은 옆에 있는 스태프에게 '지금 저 사람들이 다 사인 받으려고 줄을 선 거냐'고 물었다. 스태프가 그렇다고 답하자 '아우이2000'은 '히익'하는 표정을 짓고 스위트룸으로 숨더니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


EG 스위트룸 바로 옆 방은 팀 시크릿의 스위트룸이었다. '쿠로키'와 '자이'는 EG 스위트룸으로 몰려드는 인파를 피해 금방 자리를 떠났으나, '아티지'만은 한참을 근처에서 기웃거리며 EG 스위트룸을 힐끗힐끗 쳐다봤다. '아티지'는 EG 매니저 '찰리 양'과도 반갑게 인사를 나눴으나 그 후로도 한동안 자리를 뜨지 못하고 EG 스위트룸 근처를 방황했다.

챔피언인 EG가 키 아레나를 떠나자 그토록 사람들로 북적대던 키 아레나는 이내 고요해졌다. 더 이상 키 아레나에는 선수들도, 코스프레 유저들도, 그 사진을 찍으려는 사람들도, 선수들의 경기에 환호하던 관객들도, 스위트룸에 음식과 음료를 비치하러 돌아다니는 직원들과 대회 스태프들도 없었다.

불과 두 시간 전만 해도 로샨 구덩이에서 EG의 궁극기 콤보가 작렬할 때 지붕이 떠나가라 'USA'나 '레츠고 EG'가 울려퍼졌고, 경기가 끝난 후 뒤풀이로 데드마우즈가 디제잉을 하는 소리가 들렸던 장소지만 이제는 몇몇 인원들이 키 아레나에 설치된 케이블 선을 회수하는 소리 말고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밤 9시부터는 키 아레나 근처의 EMP 뮤지엄에서 애프터파티가 있었다. 나는 뒷정리를 하고 숙소에 가방을 내려놓은 뒤, 10시가 조금 넘은 시각에 애프터파티 장소에 도착했다. 바에서 음료나 주류를 요청하면 바텐더들이 그것을 제공해줬고, 뮤지엄 여기저기에는 뷔페식으로 차려진 음식들도 비치되어 있었다.

드문드문 선수들도 눈에 들어왔다. 나투스 빈체레 팬으로 유명한 토비완은 이미 몇 잔 걸쳤는지 얼굴이 새빨개져서는 소파에 앉아 '덴디'와 어깨동무를 하고 큰 소리로 수다를 떨고 있었다. '노테일'은 자기 여자친구와 함께 손을 잡고 뮤지엄 구석에서 식사를 하고 있었으며, '아티지'와 '이터널엔비'는 가장 큰 소파를 차지한 채 같이 술을 마시고 있었다.

뮤지엄 2층 한편은 클럽처럼 조명을 어두컴컴하게 해 놓은 채 디제잉이 한창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장소에 와서 박자에 몸을 맡기며 파티를 즐기고 있었다. 나도 몇 시간 그곳에서 시간을 보냈으나, 다음 날 아침 일찍 공항으로 떠나야 했기에 더 오래 있지는 못하고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에 하늘을 보자 처음으로 시애틀 밤 하늘에 구름이 떠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내가 시애틀에 온 이후로는 항상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날씨였고, 본선 플레이오프가 막바지에 달했을 때나 한 번 정도 흐릿한 날씨가 있어서 이런 밤하늘은 볼 수가 없었다.

TI5가 끝나면서 시애틀도 원래의 우중충한 날씨로 돌아갈 준비를 하는 것 같았다. 약 열흘 간의 시애틀 출장. 어느새 이곳에 상당히 익숙해졌는데 다시 떠나야 한다는 사실이 실감이 안 나기도 한다. 마치 시애틀 여행이 꿈이었던 것처럼, 몇 달이 지나면 지금 이 순간의 기분을 제대로 기억조차 하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비록 일 때문에 온 여행이었기에 내 마음대로 멀리까지 돌아다니진 못했을지라도 이번 시애틀 여행이 내 생애 최고의 여행이었다는 것이다. 통역도, 가이드도, 정해진 타임 테이블도 없이 모든 것을 나 혼자 결정하고 스스로의 힘만으로 처리해야 했기에 막연한 불안함도 가지고 있었지만 적어도 시애틀에 도착한 후로는 그런 불안함은 말끔히 사라졌다.

기회가 다시 찾아온다면, 여건이 된다면 내년에도 한국 도타2의 발전을 확인하러 이 장소에 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늦은 밤, EG의 우승에 흥분해 길거리에서 'USA!'를 외치는 사람들의 함성을 뒤로하고 시애틀에서의 마지막 밤을 맞이한다.




신동근의 잠 못 이루는 시애틀

1편 - 도타2의 성지 시애틀, 감격의 땅에 그 첫 발을 내딛다
2편 - 으아아, 이 비밀 상점이 내 지갑을 빨아먹는다!
3편 - 생동감이 넘치는 시애틀의 명소, 파이크 플레이스 마켓으로
4편 - 진검승부! 모든 것이 끝나는 TI의 최종장, 키 아레나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