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시애틀에서 열렸던 디 인터내셔널5(The International5, 이하 TI5)는 북미의 EG의 우승으로 마감됐다.

MVP 핫식스와 MVP 피닉스는 각각 동남아 예선을 1, 2위로 통과하며 한국 도타2에 큰 희망을 가져왔다. 본선에서 MVP 핫식스는 아쉽게 최하위를 기록했지만 MVP 피닉스는 그룹 스테이지 조 5위를 기록한 데 이어 뉴비와 엠파이어를 꺾고 본선 8강까지 진출하는 기염을 토했다. 변방 축에도 못 끼던 한국 도타2의 대반란이었다.

MVP 피닉스는 지난 2월, 도타2 아시아 챔피언쉽(이하 DAC) 이후 MVP 피닉스, MVP 핫식스로 찢겨져 리빌딩을 감행해야 했다. 양 팀은 새로 팀을 꾸린지 불과 3개월 만에 동남아 예선을 통과하고 6개월 만에 TI 8강에 오른 것이다. 그렇기에 MVP 형제 팀의 성장은 더욱 괄목할 만하다.

특히 MVP 피닉스는 그룹 스테이지에서 항상 자신들에게 패배를 안겨줬던 iG를 만나 매치 승리를 거뒀고 사상 최강의 전력을 가진 팀이란 평가를 받던 팀 시크릿과 무승부를 기록했다. 특히 경기 초중반에 조금만 불리하면 모래성처럼 무너지거나 중후반에 갈피를 못 잡고 역전당하던 것이 과거의 MVP 피닉스였으나 TI5에서 그런 모습은 없었다. 유리할 때 이길 줄 알았고, 불리하면 역전할 줄 알았다.

TI5 본선 플레이오프에서 MVP 피닉스는 이길 수 없을 것이라 생각됐던 엠파이어를 상대로 2:0 완승을 거뒀다. 똑같이 난전을 특기로 삼는 팀이기 때문에 객관적 전력이 더 강한 엠파이어의 승리가 예상됐지만 MVP 피닉스는 레인전에서 상대를 누르는 놀라운 모습을 보였다. 특히 이 경기에서 '큐오' 김선엽은 단신으로 엠파이어의 코어 영웅 셋을 상대로 1:3 대결에서 승리하기도 했다. MVP 피닉스는 단순히 좋은 성적을 거두는 것 뿐만이 아니라 관객들을 열광시키는 퍼포먼스를 갖춘 경기를 펼쳤다.


한국 도타2는 이토록 눈부신 발전을 하며 사상 최고의 성적을 기록했지만, 이후로도 이 성적이 유지될지에 대한 의견에는 물음표를 띄울 수 밖에 없다. 첫 번째 문제는 한국 도타2의 상징과도 같던 캡틴 '마치' 박태원의 군 입대로 인한 은퇴다. MVP 핫식스의 캡틴 이승곤을 포함해 다른 선수들이 캡틴을 맡을 수는 있지만 가장 오래 캡틴을 하면서 밴픽 이해도가 높은 박태원의 부재는 한국 도타2에게 매우 뼈아픈 손실이다.

두 번째는 박태원을 제외한 다른 선수들의 이탈 가능성이다. 가장 큰 걱정거리는 김선엽의 행보다. 김선엽은 한국 선수들 중 거의 유일하게 레인전부터 상대를 찍어누를 정도로 강력한 모습을 자랑한다. 김선엽이 보여준 엄청난 퍼포먼스에 반한 해외 도타2 팬들은 '큐오갓'이라며 김선엽을 칭송했고, MVP 피닉스가 탈락한 뒤에도 TI5 메인 중계진의 중계 과정에서 김선엽의 플레이가 하루에 두 번 이상 언급됐다.

그런 김선엽은 현재 학업과 프로게이머란 갈림길 사이에서 진로를 고민하고 있다. 김선엽은 "아직 무엇을 선택할지는 결정하지 않았다"고 했지만 혹시라도 김선엽이 이탈을 할 경우 한국 도타2는 돌이킬 수 없는 치명상을 입을 수도 있다. 그 외에도 'kpii', '넛츠', '제락스' 등 외국인 선수들의 잔류 가능성 또한 불투명하다. TI를 위해 합류한 선수들인 만큼 TI가 끝난 현재 팀에 계속 남을 것이라고 장담하기 어렵다. 한국 팀의 전력 손실 가능성, 그리고 그 정도가 커지고 있다는 뜻이다.

▲ 단발성으로 끝난 해외 팀과의 경기

마지막 문제는 가장 심각한 문제라고 할 수 있다. 바로 국내 리그가 전무하다는 것이다. 한국 도타2가 변방 취급조차 받지 못하던 시절, NSL에 '데몬'이 나타났고 KDL에서 제퍼가 등장하면서 한국 도타2는 크게 발전할 수 있었다. 제퍼에게 연달아 박살나던 상황에서도 리그가 꾸준히 지속됐기에 한국 팀들은 다음을 노릴 수 있었다.

그러나 2014년 12월 KDL 파이널위크를 끝으로 '도버지'로 불렸던 박성민 실장이 다른 부서로 이동했고, 그와 동시에 한국에서 도타2 리그는 사라졌다. 언제 리그를 다시 열 것이라는 예고도 없고, 기약도 없다. TI4 이후 TI5 전까지는 약 4개월 간 KDL 기간이 겹쳐 있었으나, 내년 TI6는 1년 내내 한 번의 리그도 없이 시간을 보내야 할 수도 있다. 그런 상황에서 한국 팀이 TI5같은 성적을 거둘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리그가 없을 경우 나타나는 부작용은 실력 하락 뿐만이 아니다. 당장 누군가가 TI5를 보고 자극을 받아 도타2 프로에 입문하려고 해도 국내 리그 하나 없는 종목에 쉽게 뛰어들 사람은 없다. 자신의 경기를 남들에게 보여줄 기회조차 없는데 누가 의욕을 갖고 게임을 하겠는가.

리그가 없으면 실력 하락, 신규 선수의 유입 차단 뿐만 아니라 기존 선수들의 추가 이탈까지 걱정해야 한다. MVP 임현석 감독과 저녁 식사를 했던 자리에서 임현석 감독은 '국내 리그만 있었어도 박태원이 바로 은퇴하지 않고 조금 더 국내에서 경기를 하다 갈 수 있었다. 리그가 없기 때문에 팀 운영 역시 쉽지만은 않은 상황'이라며 아쉬움을 표했다. 지금처럼 리그 하나 없이 TI만을 바라보고 1년 내내 달리라는 것은 팀에게도, 기존의 선수들에게도 말이 되지 않는다.

KDL은 상금이 적은 리그가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KDL 진행 당시엔 한국 리그 수준에 비해 상금이 지나치게 높다는 얘기까지 나왔다. KDL과 비슷하게, 아니 오히려 그보다 상금이 조금 적더라도 리그 참가 팀을 동남아 지역까지 넓힌다면 참가할 팀은 충분히 나타난다. 더 과감한 투자를 한다면 스타래더나 ESL과 같은 지역별 예선 대회를 열고 크라우드 펀딩 방식으로 상금을 늘릴 수도 있다. 물론 말처럼 쉽게 되는 일은 아니겠지만 제대로 된 대회 하나 없는 지금보다는 뭘 해도 나을 것이다.

한국 도타2는 TI5를 기점으로 사상 최대의 성과를 거뒀지만, 역설적이게도 동시에 최대의 위기를 맞았다. 지금처럼 '국내 리그 전무'인 상황이 계속 이어진다면 나중에는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시나리오가 현실로 다가올 수 있다. 유저풀을 넓인 후에 대회를 열 것이냐, 아니면 대회를 개최함으로써 유저풀을 늘릴 것이냐는 문제는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처럼 뭐가 정답이라고 하기 힘든 어려운 문제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볼 수 있는 리그가 없다면 팬들도, 선수들도 없을 것이라는 것이다. TI5가 그저 단 한 순간의 꿈으로 끝날 것인지, 아니면 이제부터 시작인지는 두고 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