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놈게임스토리 이진희 기획자]

  • 주제: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는 게임 스토리 구조의 비밀
  • 강연자 : 이진희 - 놈게임스토리 / normgamestory
  • 발표분야 : 게임기획
  • 권장 대상 : 콘텐츠 기획자, 게임 시나리오 작가
  • 난이도 : 기본적인 사전지식 필요


  • [강연 주제] 이번 세션에서는 국내에서 만들어 온 게임의 스토리가 왜 재미없었는 지에 대한 근본적인 이유를 살펴봅니다. 많은 사람이 생각하는 것처럼 게임 시나리오 작가의 역량 부족 때문은 아니라는 근거 있는 변명도 하려고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스토리 구조에 관한 이야기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게임의 스토리 구조는 게임에서 콘텐츠를 만드는 작업자라면 반드시 알고 있어야하는 개념으로, 제대로 이해하기만 한다면 기존과는 완전히 다른 관점에서 게임 스토리를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MMORPG의 퀘스트 스토리는 왜 재미가 없을까. 게임마다 스토리는 어떻게 다를까. VR/AR에서 스토리는 어떤 역할을 할까. 게임 스토리에서 중요한 것은 시작일까, 클라이맥스일까. 재미없는 스토리의 문제는 도대체 무엇이고, 어디에서 그 원인을 찾아볼 수 있을까?

    NDC 2019 두번째날, 놈게임스토리의 이진희 기획자는 이러한 스토리와 관련된 문제점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블레이드 앤 소울', '열혈강호2', '아이언리그' 등의 퀘스트와 게임 시나리오 콘텐츠 기획을 담당한 바 있는 이진희 기획자는 이날 강연에서 그의 경험을 토대로 쌓은 게임 스토리에 대한 이해와 노하우를 전달하는 시간을 가졌다. 특히, 게임 스토리의 구조와 게임마다 다른 스토리의 특징에 대해서 들어볼 수 있었다.



    ■ 수집형 RPG 스토리는 왜 텍스트로 이루어질까 - 게임 스토리, 지향하는 바에 따라 달라진다


    위 완성도를 그림으로 표현한 스토리의 전개를 보자. 위와 같은 그림의 스토리는 몇 점으로 평가할 수 있을까?

    스토리에서 구조는 조형물의 뼈대나 건축에서 기둥과 같은 역할을 한다. 제대로 된 뼈대가 없다면 원하는 형태의 조형물을 만들 수 없듯이, 스토리 구조는 시나리오를 제작하는데 중심이자 기본이 되는 요소다. 이날 강연에서 이진희 기획자는 스토리 구조 설명을 통해 게임 스토리, 특히 MMORPG의 스토리에 대한 여러 가지 이야기를 전했다. 

    게임 스토리는 게임의 지향점에 따라서 그 성격이 조금 달라진다. 게임의 지향점이란 간단하게 게임에서 추구하는 요소다. 예를 들어, 일반적으로 콘솔 RPG에서의 지향점은 ‘모험’이다. 따라서 스토리도 모험의 목적을 만들어주는 방향으로 이루어지며, 필드라는 공간이 중요해진다. 전체적으로 게임 속에 스토리텔링을 위한 도구가 많다. 

    수집형 RPG는 지향점이 ‘성장’이다. 따라서 과정이 생략되고 결과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자동 전투 기능이 추가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다수의 몬스터가 필요하지 않으며, 필드의 의미도 축소된다. 이는 스토리텔링을 위해 게임 내에 활용할 수 있는 요소가 적다는 뜻이다. 따라서 수집형 RPG는 텍스트 위주로 스토리가 전달된다. 


    이진희 기획자는 이렇게 게임마다 스토리 방법론은 서로 다르고, 그 구조를 이해하고 접근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MMORPG나 신규 플랫폼 VR/AR의 스토리가 호평받지 못한 이유가 있다면, 게임마다 다른 구조에 대해서 왜 다른지 이해하지 않고, 고민하지 않고 제작했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게임에 따라서 방향성이 달라진다면, 게임의 분류는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쉽게 우리는 ‘장르’를 떠올리지만, 그 기준이 되어주지는 못한다. 이진희 기획자는 그 기준 중 하나를 ‘캐릭터와 플레이어’로 꼽았다.

    “전 영화를 전공했기 때문에 처음에는 당연히 플롯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작업했어요. 하지만 게이머들의 반응을 이끌어낸 것은 플롯이 아니라 캐릭터였죠. 이후 캐릭터 중심 게임인 AOS 장르 작업을 하면서 다시 한번 그 중요성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RPG부터 캐릭터 중심의 AOS, 그리고 AR 게임까지. 여기서 중요한 부분은 게임마다 조금씩 달라지는 ‘플레이어의 역할’이다. 

    게임의 본질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꼭 언급되는 단어가 있다. 바로 ‘경험’이다. 이진희 기획자는 1986년 개발된 슈퍼마리오2와2017년 출시된 호라이즌 제로 던을 예로 들었다. 슈퍼마리오에서 호라이즌 제로 던이 출시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지났고, 그래픽과 사운드 등 많은 부분에서 발전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게임 경험 자체가 달라지지는 않았다. 

    “그렇게 생각하면, 과연 ‘차세대 게임’이라는 것이 존재하는가에 대해서 의문을 가지게 되죠.” 

    이진희 기획자는 새로운 경험의 가능성을 VR에서 찾는다. 기존 게임이 간접 경험을 전달했다면 VR 게임은 직접 경험을 다루기 때문이다. 이전까지는 아이언맨을 플레이하는 재미였다면 VR은 직접 아이언맨이 되는 경험을 제공한다. 플레이어의 역할이 달라지는 또 하나의 전환점인 것이다.



    ■ 플레이어와 캐릭터, 그 관계에 따른 스토리 구조 - 중간적 관점의 스토리텔링이 어려운 이유


    그럼 플레이어의 역할과 관련해 스토리 구조는 어떻게 달라질까. 이진희 기획자는 크게 1인칭 관점, 3인칭 관점, 그리고 중간적 관점으로 나눠 설명을 이어갔다.

    1인칭 관점은 소설로 생각해보면 화자와 주인공이 일치하는 경우다. VR 게임이 여기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내가 게임 속에 들어가고, 캐릭터가 되어서 플레이하는 것이다. 여기서는 매개체가 되어주는 캐릭터가 존재하지 않는다. 

    3인칭 관점은 주인공과 화자가 다른 경우로, 캐릭터와 플레이어가 구분된다. 대부분의 게임이 여기에 속한다. 유저는 매개체인 캐릭터를 통해서 게임을 경험하게 된다.

    중간적 관점은 캐릭터와 플레이어가 겹치는 부분이 있는 경우다. 쉽게 말해 아바타를 떠올리면 된다. 게임의 매개체인 캐릭터지만, 아바타는 특성 자체가 단순 캐릭터라고 볼 수 없다. 플레이어를 대신하는 존재로, 하나의 인격체로 대우 되기도 한다. 따라서 3인칭 게임처럼 간접 경험이지만 좀 더 직접 경험에 가까워진다. MMORPG의 대부분이 3인칭과 1인칭의 중간단계라고 볼 수 있다. 


    캐릭터와 플레이어의 접점이 가까울수록 게임의 몰입도는 증가한다. 1인칭 관점이 몰입감이 좋은 이유는 플레이어가 바로 주인공이 되기 때문이다. 현실 공간이 반영되는 위치 기반 AR 게임도 비슷하다. 플레이어는 게임 캐릭터가 되어 일종의 역할 놀이 상황극을 하게 되고 게임 세계와 공간에 적극적으로 몰입하게 된다. 이진희 기획자는 1인칭 관점 게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게임을 하고 있다’는 생각 자체가 들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점이라고 짚었다.

    이러한 관점의 차이는 게임의 구조적 차이점에 영향을 준다. 예를 들어 3인칭 관점인 일반적 콘솔 RPG는 주인공이 한 명이다. 반면 중간적 관점에서는 같은 세계에 다수의 주인공이 존재하게 된다. 서버에 있는 모든 플레이어가 주인공이 되는 것이다. 

    이진희 기획자는 난이도로 보자면 3인칭 관점의 스토리를 작업하기가 쉽다고 설명했다. 우리가 이전까지 경험해왔던 영화나 드라마의 구조와 똑같기 때문이다. 그와 비교하면 중간적 관점은 새로운 스토리 구조로 되어 있어 작업이 조금 더 어려워진다.

    영화의 첫 10분, 드라마의 1화가 중요한 이유

    그럼 본격적으로, 스토리 구조는 어떻게 이루어져 있을까. 이진희 기획자는 3막 구조를 설명하며 이어갔다. 아리스토텔레스의 3막 구조는 간단하게 ‘모든 이야기에는 시작, 중간, 끝이 있다’로 이해할 수 있다. 먼저 1막은 세계관과 주인공, 그리고 갈등을 소개하는 역할을 한다. 어떤 세계에서 주인공은 어떤 고민을 하는가를 알려주는 단계다. 이 세계의 균형이 깨지면서 갈등이 일어나고, 2막에서는 본격적으로 해결하는 과정을 다룬다. 그리고 3막에서는 어떻게 해결되었는지, 다시 균형을 되찾는 결말을 담는다. 

    헐리우드에서는 이 3막 구조를 좀 더 자세하게 체계화해서 정리한다. 이진희 기획자는 이 모델은 실제 게임에 적용하려고 하면 맞아떨어지지 않는 부분이 많았지만, 구성점 개념은 이해해둘 필요가 있다고 짚었다. 구성점은 사건이 전환되는 시점으로, 전환점이라고도 한다. 예를 들어 무협지에서 주인공이 소중한 사람이 죽임을 당하자 복수를 꿈꾸게 되는 스토리가 있다면, ‘소중한 사람이 죽는 사건’이 스토리의 전환점이 된다. 

    그럼 게임에 맞는 구성표는 없을까. 이진희 기획자는 게임에 맞춰 체계화한 스토리 구조를 소개하며 설명했다. 


    게임에서는 크게 세 가지 사건으로 구성되며, 3막 자체가 엔딩의 개념이 된다. 1막에서 사건은 첫 구성점이 된다. 주인공이 모험에 떠나게 되는 계기가 되는 사건이다. 2막에서는 가장 극적인 사건이 다뤄지며, 클라이맥스라고 보면 된다. 게임 스토리는 1막, 2막, 3막의 주요 사건을 구성한 다음, 중간마다 그 외 사건들을 추가하면서 작성된다. 

    그럼 다시 아까 소개했던 스토리 전개 그림으로 가볼까. 이진희 기획자는 1막, 2막, 3막 중 1막이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1막에서 몰입이 되지 않는다면 클라이맥스는 무의미해진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세계관과 주인공, 적대자가 누구인지만 잘 설명해줘도 기본적인 스토리 구조가 잘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영화 공모전 관계자와 이야기해보면 출품작의 70%가 1막을 제대로 구성하지 못한다고 하더라고요. 반대로 보면 1막 구성만 제대로 해도 상위 30%로 인정받는 시나리오를 작성할 수 있다는 말이죠. 영화의 첫 10분, 드라마의 1화가 중요한 이유도 여기에 있어요. 그렇게 생각해보면 위의 말 그림으로 표현된 스토리는 70점을 줄 수 있겠네요.”

    그럼 캐릭터를 중심으로는 어떻게 이루어져 있을까. 이진희 기획자는 먼저 그레마스 행위자 모델을 언급하며, 용어 자체도 어렵고 게임에 잘 맞지 않아 적용하기 쉽지 않다고 설명했다. 그는 게임에 맞는 게임 캐릭터 구조를 소개하며 설명을 이어갔다.


    먼저 주인공이 있고, 이루고자 하는 목표가 있다. 그리고 이를 방해하는 적대자가 있으며, 반대로 주인공을 돕는 조력자가 있다. 이 네 가지를 바탕으로 캐릭터 스토리 모델이 구성된다. 좀 더 자세히 보자면, 주인공이 이루고자 하는 목표를 내적, 외적 갈등으로 나눠볼 수 있다. 외적 갈등은 일반적으로 적대자를 뜻하지만, 때때로 태풍과 같은 자연재해가 그 역할을 하기도 한다. 이진희 기획자는 일반적으로 적대자 캐릭터를 직접 설정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덧붙였다.

    내적 갈등은 심리적 요인으로, 영화에서는 중요시하는 요소지만 게임에서 표현하기는 쉽지 않다. 따라서 게임에서는 ‘약점’으로 등장하곤 한다. 이 약점은 게임에서 주인공이 성장해야 하는 이유가 되어주며, 캐릭터에 몰입할 수 있게 만들어주고, 갈등을 만들어주기도 한다. 

    또한가지 중요한 것은 세계를 위협하는 대상과 같은 스케일이 큰 갈등을 만들어야 한다는 점이다. 주인공은 스토리의 주인이기 때문에 사소한 갈등뿐만 아니라 중요한 갈등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이진희 개발자는 서브 퀘스트 또한 세계 갈등에 연관시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서브 퀘스트에 몰입하기 어려운 이유가 여기에 있어요. 주인공은 용사인데 배고프다며 음식 배달 같은걸 요구하면, 몰입이 되겠어요?”

    ▲매트릭스를 예시로 분석한 캐릭터 스토리 모델




    ■ MMORPG의 퀘스트, 왜 재미가 없죠?- 세계의 영웅에게 왜 허드렛일을 시키나


    MMORPG의 스토리는 왜 재미가 없을까. 

    MMORPG의 스토리 구성은 어렵다. 이진희 기획자는 MMORPG 스토리 개발을 5년 진행했고, 이후 개념을 체계화하는 데까지 3년이 걸렸다고 이야기하기도 했다. 8년 동안 MMORPG의 스토리에 대해서 연구하면서 그에게 가장 큰 고민이 됐던 것은 “왜 MMORPG의 퀘스트는 재미가 없는가”였다. 

    이에 대해 그에게 실마리를 찾게 해준 것은 영화 ‘트랜스포머’였다. ‘트랜스포머’에 대한 일반적인 평가는 “볼거리는 많지만 스토리는 재미없다”로 귀결된다. 이진희 기획자는 그 문제를 ‘주인공 역할의 부재’에서 찾는다. 

    ‘트랜스포머’의 주인공이 누구냐고 질문을 던지면 선뜻 대답하기가 어렵다. 주인공보다 더욱 강력한 옵티머스 프라임이라는 조력자가 있기 때문이다. 윗위키는 주인공임에도 역할이 없다. 이진희 기획자는 ‘트랜스포머’의 이러한 문제가 MMORPG의 구조와 일치한다고 설명했다. 

    3인칭 관점 게임들은 고전적인 스토리 구조를 가진다. 주인공은 갈등에 대한 해결 능력을 갖추고 있고, 이를 활용해 갈등을 해결하는 과정을 거친다. 하지만 MMORPG의 퀘스트 NPC는 주어진 갈등을 해결할 수 없고, 플레이어의 도움을 받아서 갈등을 해결한다. MMORPG의 플레이어는 주인공이 아니고, 따라서 재미가 반감된다는 것이다.


    연장선상에서 ‘와우’와 ‘블소’의 스토리 구조를 살펴보자. 와우에서 주인공은 어떤 세력의 누군가다. 누군지 명확하지 않기 때문에 다수의 주인공이 존재해도 이상하지 않다. 그에 비해 블소의 주인공은 홍문파 막내라는 특수한 설정이 있다. 유일한 주인공이라는 점에서 3인칭 게임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진희 기획자는 블소의 경우 3인칭 관점에 가까워지려는 노력을 했기 때문에 호평을 받은 케이스지만, 반대로 다수가 존재하면 이상해진다. 모든 플레이어는 클론의 형태가 되니까. 

    와우에서도 주인공을 특수하게 설정하는 퀘스트가 일부 존재한다. 3인칭 관점에 가까워질수록 몰입도는 높아진다. 주인공 설정을 어떻게 할 것인가는 선택의 문제다. 

    MMORPG, 아바타와 세계관이 중요하다

    MMORPG는 게임 세계에서 영웅이 되는 역할 놀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플레이어의 매개체가 되는 아바타의 커스터마이징은 디테일하게 제공될수록 몰입도를 높여준다. 유저가 마음대로 설정할 수 있기 때문에 특정 외형과 관련된 대사는 추가할 수 없게 된다. 

    몰입감을 떨어트리는 주인공의 대사도 배제된다. 아바타가 곧 플레이어의 역할이 되는데 주인공의 대사가 들어가면 플레이어 의지와 상관없는 행동을 하는 것이니까. 따라서 MMORPG에서는 NPC가 등장해 그 역할을 대신한다. 대신 대사를 말해주고 스토리와 퀘스트를 진행하는 것이다. 따라서 게임의 세계관과 공간의 설정이 중요해진다. 이진희 기획자는 매력적인 MMORPG의 시작은 세계관에서 시작된다고 설명했다. 

    “MMORPG의 스토리를 구성하는 입장에서는 이 모든 요소가 큰 제약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어요.”

    이와함께 MMORPG 스토리에서 중요한 것은 다른 플레이어와의 관계다. 같은 세계를 다수의 주인공들이 공유하는 게임인 만큼 3인칭의 유일한 주인공이라는 설정과는 대비된다. MMORPG의 주요 콘텐츠가 다른 유저와의 경쟁이나 협력에 초점을 맞추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또한, MMORPG에서는 모든 플레이어를 만족하게 해야 하고, 특정 플레이어에 맞춰서 환경을 변화시킬 수 없다는 특징이 있다. NPC가 특정 플레이어를 따라가버리거나 몬스터가 한 플레이어에 의해 사라져버리면 다른 플레이어가 퀘스트를 진행할 수 없게 된다. MMORPG에서 환경은 일시적으로 변화하거나 인스턴스 던전 형식으로 구성될 수는 있지만, 필드는 계속해서 원상복귀 되어야 한다. 

    고전적 스토리 구조의 게임이 몰입감이 뛰어난 이유는 유저의 행동에 의해 환경이 변화하기 때문이다. MMORPG는 환경에 변화를 주기 어려워서 스토리 몰입감이 떨어질 수밖에 없고, 역할 놀이로서의 특징이 더 중요하기 때문에 스토리 요소는 다소 간과되곤 한다. 이진희 기획자는 MMORPG의 이러한 기본적 흐름을 이해하고 제작에 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그럼 MMORPG의 스토리는 어떻게 구성되어야 할까.

    MMORPG의 스토리는 퀘스트를 통해 진행된다. 중요한 것은 이 스토리가 플레이어에게 자신의 갈등처럼 느껴지도록 해야 한다는 점이다. 이진희 기획자는 HBO의 역사 드라마 ‘로마’를 예로 들어 설명했다. ‘로마’에서 주인공인 주요 영웅들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역사 속 인물들이다. 그리고 조력자로는 가상의 인물이 등장한다. 이러한 흐름은 MMORPG의 스토리 구조와 흡사하다. 플레이어는 이 가상의 인물인 조력자의 역할이지만, 주인공의 목표가 자신의 목표처럼 다가올 수 있다면 몰입감 있는 스토리를 구성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는 메인 퀘스트에서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문제는 서브 퀘스트다. 

    “배고픈 농부의 도움… 이런 퀘스트가 있잖아요? 이 퀘스트의 문제는 지극히 개인적인 갈등으로, 플레이어에게 자신의 스토리라고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이에요. 중요한 것은 NPC들의 갈등과 세계관을 연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몬스터들이 난폭해져서 도와달라는 퀘스트가 있다면 몬스터가 난폭해진 이유를 마왕의 부활 전조 현상이라고 엮는 등, NPC의 개인적 갈등을 세계관에 기반을 두도록 구성해야한다는 것이 이진희 기획자의 설명이다. 그는 MMORPG의 세계관이 중요한 이유는 세계관이 부실하다면 양질의 서브 퀘스트를 만들 수 없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시스템적인 요소를 이용하는 경우도 있다. 이진희 기획자는 퀘스트 진행 정도에 따라서 환경이 달라지는 이상변화 시스템을 예시로 꼽았다. 일시적이지만 인스턴스 형식으로 3인칭 관점 스토리 전개를 진행할 수 있는 이상변화 시스템은 NPC와 환경 변화를 적극적으로 활용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다만, MMORPG가 지향하는 바와는 조금 다르므로 남발하기보다는 중요한 스토리를전개할 때 적절히 사용해야 한다. 



    ■ VR/AR에서의 스토리텔링이란? - 기술의 변화에 주목하는 시나리오 제작자가 되어야


    VR 및 AR은 둘 다 리얼리티라는 단어를 사용하지만, 맥락 자체는 조금 다르다. AR은 현실을 기반으로 하며, VR은 현실보다 극적인 가상 세계를 기반으로 한다. 그만큼 게임을 하고 있다는 생각 자체가 들지 않도록 해야한다. 문제는 기술적 한계가 몰입에 방해된다는 점이다. 

    이러한 문제에는 낮은 해상도와 3D 멀미, 이동이 자유롭지 못해 현실 부조화가 일어난다는 점이 있으며, HMD의 무게 자체도 게임을 하고 있다는 점을 계속해서 의식하게 한다. 

    VR 콘텐츠가 FPS로 자주 제작되는 이유는 직접적으로 접촉하는 게임플레이가 아니라 컨트롤러를 사용하는 점에서 들어맞기 때문이지만, 사실 FPS의 재미를 뜯어보면, 단순히 슈팅에 그치지 않는다. 이동하고, 위치를 선점하고, 적에게 기습하는 등 다양한 요소가 들어가 있다. 이진희 기획자는 VR FPS는 슈팅 요소는 살릴 수 있지만, 그 장르적 특성을 생각해보면 불완전하게 구현할 뿐이라고 짚었다. 이는 모바일에서도 비슷하다. 모바일 FPS의 문제는 슈팅에 초점이 맞춰져 있을 뿐, 플랫폼 특성상 조작이 불편해 그 재미를 담지는 못한다.

    이진희 기획자는 불완전한 이동방식에 대해 대응할 수 있는 게임 콘텐츠를 만들어야 한다고 설명했다. 이동의 단점을 오히려 게임의 요소로 승화시켜야 한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포켓몬 GO가 성공한 이유는 쉽게 IP의 힘이라고 속단해버리는 경향이 있지만, 사실 포켓몬 GO는 기술을 활용한 스토리텔링에 성공한 사례라고 볼 수 있다. 트레이너가 되어보는 역할 놀이에 충실한 것이다. 포켓몬 GO는 기본적으로 1인칭 관점으로, 현실 공간이 게임의 공간으로 확장된다. 트레이너의 역할을 직접 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찾아볼 수 있다.

    이후 포켓몬 GO의 여러 아류작이 출시됐지만, 포켓몬 GO만큼 크게 흥행한 사례가 없었던 이유는 위치정보의 차이에서 찾아볼 수 있다. 나이언틱은 전작 인그레스부터 위치정보를 쌓아올 수 있었으며, 이를 활용할 수 있는 여건이 만들어져있었다는 것이다. 이진희 기획자는 이에 덧붙여 이후 작품들은 포켓몬 GO와의 차별화를 위해 RPG요소를 강화하는 전략을 내세우기도 했는데, 이는 오히려 AR 게임의 정체성을 해치고, 이도 저도 아닌 게임이 되었다고 설명했다.

    이진희 기획자는 앞으로의 VR/AR 게임에 대하여, 완벽한 역할 놀이가 가능한 세계를 만들어주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그만큼 시나리오 작가의 역할이 중요하며, 시나리오 작가에게는 기술의 변화에 대해서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는 마지막으로, 게임의 지향점에 맞는 스토리 구조를 이해하고, 특징을 알아둔다면 작업의 완성도를 높일 수 있을 것이라고 다시금 강조하며 강연을 마무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