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제 : 요구조건이 빡빡한 게임에서 레벨 디자이너로 살아남기 - 프라시아 전기 개발을 통해 12년 만에 깨달은 것들
  • 강연자 : 김기진 - 넥슨코리아 / Nexon Korea
  • 발표분야 : 커뮤니케이션 , 레벨디자인 , 로우폴리, 게임기획
  • 권장 대상 : 레벨 디자이너
  • 난이도 : 사전지식 불필요 : 관련 전공이나 경력이 전혀 없더라도 이해할 수 있는 내용


  • [강연 주제] 게임 디자이너로서는 세계를 만드는 일에 가장 가까운 일을 하는 레벨 디자이너는 자신의 의도를 게임에 반영하기 위해 연필과 종이부터 시작해서 파워포인트, 엑셀, 스케치업 등 다양한 도구를 써 왔습니다. 레벨 디자이너의 창조성을 극한으로 끌어올리고 레벨 업무를 효과적으로 진행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본 세션에서는 효과적인 레벨디자인 기획과 문서 포맷에 대한 방법론 뿐만 아니라, 그만큼 중요하지만 종종 무시되곤 하는 협업의 중요성에 대한 12년 만의 개인적인 깨달음을 여러분에게 공유하고자 합니다. 또한 로우폴리 레벨디자인을 활용한 도입이 얼마나 효과적이었는지, 실무에서 발생한 온갖 난관을 어떻게 해결했는지. 또한 아트와 기획의 중재자이자 중간 다리로서 궁극적으로 레벨디자이너가 어떠한 역할을 수행하면 좋을지를 구체적인 실제 사용 사례와 이미지, 동영상 등을 활용해서 소개합니다.



    레벨 디자이너는 게임 개발에 있어서 게임의 세계를 만드는 데 반드시 필요한 직군이다. 언뜻 보기에 레벨 디자이너는 단순히 사냥터나 마을 등의 공간과 위치만 정의하면 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레벨 디자이너가 자신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려면 생각보다 다양한 능력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단순히 계곡과 강, 들판의 위치를 정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그 위에 어떤 이야기와 플레이 경험을 게임에 녹여내려면 레벨 디자이너가 반드시 필요하다. 따라서 레벨 디자이너는 콘텐츠, 시나리오 라이터, 배경 아티스트의 감각을 조금씩 갖춰야 하는데, 그 이유는 바로 협업 때문이기도 하다. 게임 개발은 협업의 연속이고 레벨 디자이너는 많은 부서와 상호 협력한다.


    예를들어 컴뱃 디자이너는 전투가 원활하게 진행되는 것을 최우선으로 본다. 그로 인해 배경이 덜 예뻐지더라도 크게 중요한 문제는 아니다. 반대로 원화나 에셋, 실제로 맵을 제작하는 배경 아티스트 입장에서는 무엇보다 예쁘고 멋있는 게 최우선이다. 이렇듯 개발팀 내에서도 서로 간에 원하는 부분이 다르다. 그 사이에서 일이 제대로 진행되도록 균형을 잡고 정리하는 것이 바로 레벨 디자이너의 역할이다.

    이러한 레벨 디자이너의 역할에 대해서 넥슨코리아 김기진 파트장은 '프라시아 전기'를 개발 과정에서의 경험을 공유하면서 자신이 깨달은 레벨 디자이너의 역할과 협업 과정을 소개했다.


    ■ 프라시아 전기의 맵 설계, 문제점 발견과 해결까지


    프라시아 전기 개발 초기에는 20미터 대로 사건이라는 큰 시련이 있었다. 개발 초기에 한 맵에 긴 언덕길이 있었는데, 지상에서부터 20m 높은 곳에 있는 20m 폭의 대로였다. 예상대로 라면 아래쪽으로 저 멀리 사냥터가 보이는 최고의 전경이어야 했지만, 실제로 테스트해보니 부하가 말도 못할 수준이었다.

    분명 이론상으로는 멋진 기획이었지만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제야 개발팀에서는 많은 것들이 실제로 전혀 검증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고, 연약한 토대 위에 콘텐츠를 쌓아 올리고 있었다는 상황에 부딪히게 된다. 그동안 김기진 파트장 역시 이미 존재하던 내부 기준을 충실히 지켜가면서 그 안에서만 열심히 만들고 있었다. 그는 이러한 일의 정말 무서운 점은 실제로 인게임 테스트로 면밀하게 검증하지 않으면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인다는 점을 꼽았다.

    하지만 기존의 맵이 안 좋은 평가를 받고 보니, 제작한 맵들도 다를 바 없이 대로 폭은 너무 넓어서 땅바닥만 보이고 영지간 거리는 지나치게 길고 사냥터 내부 구조는 대부분 다 비슷비슷한 개미굴 같은 형태가 됐다. 내부 기준에 충실하게 제작된 맵들의 상황과 진실이 적나라하게 드러나자 개발팀은 큰 고민에 빠졌다.


    당시 프라시아 전기의 사냥터는 단순히 너비로만 설계되고 있었다. 그 안쪽을 어떻게 채워야 할지에 대한 기획적인 고민이 부족했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배경에서 작업 시에 아무런 정보 없이 사냥터 내부를 꾸며야 했다. 꾸밈이 게임 플레이에 방해되면 안 되니 소극적으로 군데군데 메꾸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게임 플레이 시에 비슷한 느낌이 반복되는 개미굴이 된 셈이었다.

    영지의 크기도 실제로 뛰어 보니 실제로는 들어가야 할 공간들보다 훨씬 커서 이동이 지루했고, 쿼터뷰에서 입체감을 주기 위해 넣은 20m 고저 차도 실제로는 쓸 수 없는 높이라는 점이 확인됐다. 배경에서 열심히 맵을 만들어 놨더니 죄다 갈아엎어야 하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프라시아 전기 개발팀은 프로그래머, 레벨 디자이너, 아티스트가 모두 포함된 쿼터뷰 태스크포스 만들어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지금까지 개발된 콘텐츠와 레벨을 모두 버려서라도 새로운 기준을 세우는 게 팀의 목적이었다. 다행히 쿼터뷰에서 밀도를 강화한다는 건 모두가 동의한 해결 방향이었다. 검증에 쓸 수 있는 시간은 두 달. 이 시간 내로 맵의 밀도를 끌어올려서 이를 확실하게 검증해야 했다.

    태스크포스팀은 블렌더를 통해 실제로 맵을 만들어 보기로 했다. 사용하기 쉬운 블렌더 툴을 이용해 로우폴리 방식으로 맵을 짧은 시간 안에 구현할 수 있었고, 이를 통해 해당 맵의 구성이 유효한지를 보다 빠르게 판단할 수 있었다. 로우폴리 맵은 어제 작업한 결과물과 오늘 작업한 결과물이 천지차이가 될 수 있을 정도로, 짧은 시간 안헤 해당 맵의 구성이 유효한지 검증하기엔 최적의 능력이었다.


    이를 통해서 실제로 길 폭이 20m가 아니라면 얼마나 되어야 할지를 쿼터뷰 TF에서 검증했고, 영지의 크기를 얼마나 줄여도 기존의 사냥터를 소화할 수 있을지 등도 테스트로 직접 확인이 가능했다. 단순하지만 표현할 건 확실히 표현하는 로우폴리 특성상 상상력을 조금만 동원하면 실제와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레벨 디자인 방식도 공간을 정리하는 것에서 좀 더 나아가서 크고 작은 꾸밈 공간으로 사냥터 내부를 좀 더 섬세하게 꾸미는 방식으로 접근했다. 이를 통해 아티스트는 꾸밈 공간과 플레이 공간의 밸런스 사이에서 고민할 필요 없이 제작과 꾸밈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었고, 레벨 디자이너는 게임 플레이에 필요한 공간을 충분히 확보할 수 있게 됐다. 김기진 파트장은 이렇게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과정에서 아트와의 커뮤니케이션 통로를 확보한 것도 큰 수확 중 하나였다고 회고했다.



    ■ 레벨 디자인은 세밀하게, 그러나 분명하지는 않게


    물론 기존의 경험이 모두 실패는 아니었다. 해보지 않았다면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를 알 수 없었을 것이고, 단지 테스트가 늦었을 뿐이었다. 맵이 제작 완료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로우폴리 레벨을 통한 목업 단계에서의 테스트를 진행했더라면, 이 문제를 더 빠르게 발견할 수 있었을 수도 있다는 아쉬움이 있었다.

    또한, 문제를 인식하고 쿼터뷰TF를 통해 수정을 결단한 리더 그룹의 판단도 매우 중요했다. 실무자 선에서 아무리 이 정도 퀄리티로 안 된다고 수정이 필요하다고 말해도 일정이 나오지 않으면 보완은 불가능하다. 빠르게 제작된 목업으로 계획을 공유하고 결과물을 보여줄 수 있을 거라는 신뢰감의 강화에도 블렌더를 이용한 로우폴리 레벨 디자인은 효과적이었다.


    그렇게 프라시아 전기는 이전 레벨 디자인 문서에서 꾸밈 공간과 플레이 공간이 명확히 분리되면서 한층 발전했다. 사냥터를 체크무늬로 표시하고, 분홍색으로 이루어진 꾸밈 공간과 보라색 공간은 각 영지의 내러티브 설정마다 실체가 다르게 설계됐다.

    물론 초기부터 분업이 효과적인 건 아니었다. 꾸밈 공간이라는 개념은 극도로 애매한 속성을 갖는데, 그 중 확실한 건 플레이어가 진입할 수 없는 곳이라는 점이다. 어떤 식으로 꾸며지든 원화와 배경이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그런데 레벨 목업의 특성상 공간이 미터 단위로 정확하게 되면서 창조적인 아티스트라도 불가능한 게 생겼다.

    프라시아 전기의 쿼터뷰 시야 기준으로는 10m 폭의 공간에 나무를 빼곡히 심어도 '숲'이라는 느낌을 줄 수 없다. 그렇기에 35m라는 자연 배경 꾸밈 공간 구축이 필요했고, 이렇게 매우 넓은 수준이 레벨 디자이너와 배경 아티스트 간의 상호 협의로 탄생하게 된다. 이후로도 많은 규칙이 세워졌고 이러한 규칙은 불필요한 커뮤니케이션을 줄이는 데 큰 도움이 됐다.

    그는 이런 협업 과정에서 목업이 디테일해질수록 아티스트의 창조성을 저해할 수 있다는 깨달음을 얻었다고도 전했다. 목업의 산과 강, 목책과 성 등을 있는 그대로 하이폴리곤으로 대체하는 것은 모두에게 좋은 일은 아니었다고. 지나칠 정도로 세심한 레벨 디자인이 누군가의 일을 쉽게 만들어준 것이 아니라, 무의미하게 만들었던 셈이다.


    김기진 파트장은 '레벨 디자인은 아주 세밀하게 미터 단위로 설계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동선은 플레이 경험이자 곧 내러티브이기 때문에, 레벨 디자이너는 플레이 공간에 관한 큰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플레이 공간 위에 올려지는 박스들은 분명하게 무언가를 구체적으로 묘사하지는 않는다. 텐트일 수도 있고 그 앞에 모닥불이나 짐 상자들일 수도 있지만, 그 위치는 주황색 박스로만 표현된다.

    대략적인 컨셉은 있지만 그것을 구상하는 디자인 Look & Feel에는 한 발짝 물러서서 아티스트에게 이후의 권한을 넘기게 됐다. 따라서 레벨 디자인 문서와 목업은 배경 아티스트에게 영감을 주는 일종의 뮤즈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만약 이 구도가 되지 않는다면 한쪽이 다른 쪽에 지나치게 끌려다녀서 게임 플레이가 힘들어지거나, 그 반대로 게임 플레이는 편하지만 그리 멋지진 않은 일이 발생한다. 이는 개발자로서는 둘 다 피하고 싶은 일이다.

    끝으로 김기진 파트장은 앞으로도 어떤 특정 콘텐츠 시스템의 완성도를 올리기 위해 우선 목업으로 맵을 온전히 설계하여 목업 위에서도 모든 게임 플레이 및 테스트가 원활하여지도록 만드는 게 개인적인 욕심이라고 전했다. 이를 통해 게임 플레이 경험을 검증한 다음 이를 로우폴리 레벨 디자인으로 다시 정제하여 실제 맵 제작 시에 시행착오 없이 완성도 높은 퀄리티의 맵을 제작하는 과정에 크게 기여하고 싶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 나중에는 지금까지 없었던 전혀 새로운 경험을 주는 레벨을 가진 게임을 만들어 보고 싶다고 전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