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열했던 그룹 스테이지가 끝나고 2017 미드 시즌 인비테이셔널(이하 MSI)은 이제 4강 본선 토너먼트만을 남겨 놓고 있다. 클래스가 다른 실력을 보여준 SKT T1이 일찌감치 4강 진출을 확정 지은 반면, 나머지 팀들은 마지막까지 결과를 알 수 없었기에 그야말로 처절한 사투를 펼쳤다. 예측을 뒤집는 경기가 많이 나왔지만, 대부분의 경기를 통해서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뭐니 뭐니 해도 LoL은 딜러가 잘해야 이기는 게임이라는 것이다.

팀 게임인 LoL에서 딜러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정글러가 몇 번의 유효 갱킹으로 라이너에게 힘을 실어줘도, 서포터가 날카로운 로밍과 스킬샷으로 라인전 승리를 이끌어도, 탑 라이너가 라인전 주도권을 잡아 압도적으로 성장해도 딜러의 기량이 부족하다면 그 경기는 패배로 귀결된다.

단적인 예로 TSM의 원거리 딜러 '와일드터틀'이 조금만 더 자신의 목숨을 귀하게 생각했다면, MSI 4강에 이름을 올린 팀은 TSM이 됐을 것이다. 반면, 본선 토너먼트에 진출한 SKT T1, WE, 플래시울브즈, G2의 딜러들은 위기의 상황 속에서도 자신의 역할을 충분히 다하며 팀을 4강에 올렸다. 그래서 이번 2017 MSI에서 활약한 각 팀의 딜러들이 보여준 활약상을 조명해보는 시간을 가졌다.



■ SKT T1 '페이커' 이상혁, 미드 피즈로 한타 정석을 보여주다




'페이커' 이상혁은 전 세계 LoL 팬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는 선수다. 이번 MSI는 그에게 있어서 다시 한번 '세계 최고의 선수'라는 타이틀을 증명할 무대였다. 부담감이 그를 짓눌렀지만, 이상혁은 자신이 최고의 선수임을 다시 한번 증명했다. 이상혁은 2017 롤챔스 스프링 결승전 1세트에서 선보였던 피즈를 국제무대에서 대만의 맹주 플래시 울브즈를 상대로 다시 꺼냈다. 그리고 AP 암살자 챔피언이 한타에서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정답을 보여줬다.

그룹 스테이지 3일 차 2경기에서 SKT T1은 피오라 중심의 스플릿 운영을 시도했다. '후니' 허승훈의 피오라가 'MMD"의 노틸러스를 압도하면서 탑 라이너들 간의 균형이 무너졌지만, '메이플'의 신드라와 '베티'의 트위치가 비교적 잘 성장했기 때문에 한타는 지켜봐야 하는 상황이었다. 플래시 울브즈의 노틸러스까지 합류하면서 사실상 4:5의 구도의 한타가 펼쳐졌다.

이상혁은 적의 사각에서 침투해서 가장 먼저 '메이플'의 신드라를 노렸다. 간발의 차이로 신드라가 피즈의 궁극기를 피하면서 신드라가 살아남았지만, 신드라를 제외한 다른 선수들은 피즈의 존재를 파악하지 못했다. 이상혁은 빠르게 타겟을 바꾸고 안전한 위치에서 프리 딜을 넣고 있는 트위치를 노렸다. 피즈의 날카로운 침투를 뒤늦게 알아차린 플래시 울브즈는 가장 중요한 딜러인 트위치의 목숨을 내어줄 수밖에 없었다.

트위치가 끊긴 순간부터 한타의 결과는 불 보듯 뻔했다. 핵심 딜러를 잃은 플래시 울브즈는 급격하게 무너졌고 결국 패하고 말았다. 이상혁이 보여준 것처럼 미드 AP 암살자가 한타에서 가장 먼저 해야 하는 일은 상대 팀의 딜러를 끊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암살자 챔피언은 마치 외줄 타기를 하는 것처럼 매 순간 신중하게 움직여야 한다. 자칫 잘못하면 죽기 위해서 불길에 뛰어드는 한 마리의 불나방이 될 수 있다. 이상혁은 신중하게 자신이 해야 할 플레이를 했고, 전 세계 팬들 앞에서 자신의 가치를 증명했다.

▲ 사각에서 파고들어 상대 원딜을 암살한 '페이커'의 피즈




■ WE '시예', 미드 루시안으로 난공불락의 SKT T1을 무너뜨리다




중국의 LPL 리그는 EDG와 RNG의 양강 구도로 오랫동안 굳어져 있었다. 하지만, 새롭게 정비한 WE가 굳어졌던 양강 구도를 무너뜨리고 LPL을 제패했다. 오랫동안 부진했던 WE가 중국 최강의 팀으로 등극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그 이면에는 폭발적인 경기력 상승을 이룬 미드라이너 '시예'가 있었다. '시예'는 LPL에서 넓은 챔피언 폭과 기복 없는 경기력으로 중국의 LoL 팬들에게 확실한 눈도장을 찍었다. 그는 MSI에서 세계 최강의 SKT T1을 상대로 미드 루시안이라는 깜짝 픽을 꺼냈다.

미드 루시안의 잠재력과 강력함을 SKT T1이 예측하지 못했을 리가 없다. 그러나 '시예'의 루시안은 그 예측범위를 가볍게 뛰어 넘어버렸다. 아무도 예측하지 못하는 킬 각을 잡는 것으로 유명한 '페이커' 이상혁조차 '시예'의 루시안이 만들 수 있는 킬 각을 간과하고 솔로 킬을 당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잘 성장한 '시예'의 루시안이 말 그대로 경기를 지배했다. 21분, 탑에서 펼쳐진 4:4 한타 구도에서 '시예'는 완벽하게 이니시를 열며 한타 압승을 만들었다. 가장 먼저 앞쪽에 나와 있던 이즈리얼을 끊은 것이 주효했다. 동물적인 감각으로 오리아나의 궁극기 각을 피한 플레이도 일품이었다. 불리함을 뒤집기 위해서 무리하게 싸움을 건 SKT T1의 실수를 WE는 놓치지 않고 완벽하게 받아쳤다. '시예'의 루시안이 만들어낸 스노우 볼 효과로 WE는 난공불락의 SKT T1에게 그야말로 압승을 거뒀다.

▲ 완벽한 이니시와 포커싱을 보여준 '시예'의 루시안




■ 플래시 울브즈 '메이플', 안정감과 다재다능함




플래시 울브즈는 LMS에서 3연속 우승을 기록하며 대만의 절대 강자로 올라섰지만, 세계 무대에서 그들이 보여준 성과는 비교적 미비했다. 한국을 상대했을 때만 위력적이었고, 다른 지역팀을 상대로는 기복이 심했다. 이번 MSI에서도 플래시 울브즈는 4승 6패를 기록하며 여전히 기복이 있는 경기력을 보여주고 있지만, 그들이 잘할 때 보여주는 경기력은 실로 파괴적이다.

특히 팀의 미드 라이너인 '메이플'은 이번 MSI에서 믿음직스럽게 팀의 중심을 지키고 있다. LMS에서 가장 다재다능한 미드 라이너로 꼽히고 있는 '메이플'은 지난 LMS 정규 시즌 동안 6.9의 평균 KDA를 기록하며 압도적인 실력을 뽐내고 있다. '메이플'은 한국의 솔로 랭크에서 실력을 갈고닦은 것으로 유명하다. 뛰어난 라인전 실력을 바탕으로 이번 MSI에서도 발군의 기량을 보여주고 있다.

플래시 울브즈는 가장 중요한 경기였던 그룹 스테이지 5일 차 순위 결정전에서 TSM을 상대로 한 수 위의 기량을 선보이며 4강행 마지막 티켓을 따냈다. 이 경기에서 '메이플'은 탈리야로 엄청난 활약을 펼쳤다. 궁극기인 '바위 술사의 벽'을 지속적으로 활용해서 완벽한 한타 구도를 만들었고, '지각 변동' 스킬을 연이어 적중시키며 TSM을 무너뜨렸다.

팽팽했던 미드 대치 상황에서 '메이플'의 탈리야가 보여준 슈퍼 플레이로 전황이 급격하게 플래시 울브즈에게 기울었다. 적의 진영을 붕괴시키고 지속 딜을 넣으며 아군 쪽으로 적을 튕겨내는 것. '의외성 덩어리'인 탈리야가 현재 가장 핫한 미드 챔피언 중 하나로 평가 받는 이유를 '메이플'이 제대로 설명했다.

▲ 팽팽한 균형을 무너뜨리는 '메이플'의 탈리야




■ G2 '즈벤', 원딜의 위치 선정이란 이런 것!




G2의 원거리 딜러 '즈벤'은 이번 MSI에서 '원딜 캐리'란 무엇인지 제대로 보여주고 있다. '즈벤'이 플레이하는 챔피언을 집중해서 보면, 원딜이 어떻게 포지션을 잡아야 하는지 알 수 있다. 그는 결코 무모하게 앞으로 나가서 잘리지 않는다. 아군이 자신이 보호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폭발적으로 딜을 넣는다. 그리고, 확실할 때만 앞으로 치고 나가서 결정타를 넣는다.

'즈벤'은 장점은 완벽한 포지셔닝과 딜링 능력뿐만이 아니다. 오브젝트를 앞두고 아군이 잘려 위기에 놓였을 때는 날랜 카이팅으로 상대를 제거하며 오히려 위기를 기회로 바꾼다. 한 치의 실수 없이 매 순간 침착한 플레이를 펼친 '즈벤'은 노데스, 킬 관여율 100%를 기록하며 팀을 여러 차례 승리로 이끌었다. G2의 최대 단점인 불안정함이 침착한 '즈벤'의 플레이로 많이 상쇄됐다. '즈벤'은 패배를 맛봤던 SKT T1과의 개막 경기에서도 노데스에 킬 관여율 100%, 팀 내 딜량 1등을 기록하기도 했다.

해외 외신들은 G2를 꺾기 위해서는 '즈벤'부터 잡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도 그럴 것이 G2의 대들보였던 정글러 '트릭' 김걍윤이 심하게 흔들리면서 팀을 여러 차례 위기에 빠뜨렸지만, 위기 상황마다 '즈벤'이 소위 '멱살 캐리'를 보여주며 팀을 위기에서 구했기 때문이다. 엄청난 성장을 거듭하고 있는 '즈벤'은 이번 대회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원거리 딜러임이 틀림없다.

▲ 완벽한 위치 선정으로 적을 녹이는 '즈벤'의 케이틀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