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은 솔직하게.

스팀에서 무료로 할만한 작품은 '팀포트리스2'나 '도타2'외엔 없다고 생각했다. 두 작품 모두 메이드 인 밸브. 사실상 다른 게임사가 만든 게임 중 눈에 차는 게 없었다는 의미다.

게임이 괜찮으면 과도한 캐시 정책이 발목을 잡았고, 그것이 아니라면 그냥 게임이 구렸다. '워프레임'이 밸브 외 게임사 작품으로서 그나마 자존심을 세워주고는 있으나, 굳이 필요없는 데 진입 장벽을 세운 건 참 마음에 안 들었다. 스팀에서 좋은 무료 게임이라니, 우주에서 공기 찾는 것만큼 어려웠다.

2월 1일 출시된 'Loadout(이하 로드아웃)'에 그리 관심이 가지 않았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이미 벌 만큼 벌어 빵빵한 회사들조차 쓸만한 무료 게임을 못 내놓는 상황인데, 이런 자그마한 인디 회사의 작품에 관심을 쏟는다는 것은 말 그대로 오버였다.

스크린샷에는 사람 내장을 갖고 장난치는 물컹한 자극만이 가득했다. 짧은 시간 관심 좀 받다가 슬그머니 사라질 게임 그 이상은 안 되어 보였다.

그런데 이런 생각이 트레일러 영상을 보고 난 뒤 조금은 바뀌게 된다. 영상은 예상대로 자극적. 그런데 거기에 서양 특유의 찐덕한 유머가 더해져 있다. 오버오버 열매를 닥치는 대로 집어먹은 캐릭터들의 움직임에도 불필요한 건더기는 보이지 않았다. "뜻밖에 깔끔한 게임일 수도 있겠는데? 좋아, 속는 셈 치고 한번 깔아는 보자."

* 본문에 포함된 영상 및 스크린샷에는 다소 잔인한 표현이 있습니다.




▲ '로드아웃' 잭해머 플레이 영상


딱 세 번 놀랐다. 근육이 다 살로 변한 은퇴선수가 자기 몸에 꼭 맞는 정장을 찾은 듯 기뻤다. 착착 붙는 조작감에서, 살아있는 캐릭터 디자인에서, 그리고 계속 파고들 여지가 보이는 성장 요소에서.

밀리터리 FPS가 잠식한 한국 게이머에게 하이퍼 FPS는 생소하다. 한때 '퀘이크3:아레나'가 학교 컴퓨터실에 전파되며 나름 존재감을 알리기도 했지만, 그마저도 하는 사람은 소수였다. 많이 맞아봐야 총알 6방 정도로 마무리되는 한국형 FPS 시장에서 하이퍼한 조작감은 그냥 마이너스다. 쉽게 죽이는 게임들 많은데 굳이 정신없는 전투로 갈아탈 이유가 없었으니까.

'로드아웃'의 포지션은 하이퍼 슈팅에 가깝다. 그런데 인디 개발사 작품이라고는 보기 어려울 정도로 다듬어진 조작감이 더해졌다. 즉, 밀리터리 FPS에 익숙한 유저라도 적응에는 큰 무리는 없을 듯 했다. '팀포트리스2'가 이러한 조작감을 완성했고, '로드아웃' 역시 이를 따라가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 게임은 TPS라는 차별점을 강조했다. 익살맞은 캐릭터들이 쏘고, 구르고, 찢어지는 장면에서는 '팀포트리스2' 이상의 역동성도 느껴진다.

▲ 메인화면부터 흘러 넘치는 박력을 주체할 수 없다.

▲ 자세, 표정 모두 만점짜리 리액션.


깔끔한 그래픽도 장점이다. 이런 그래픽 스타일은 '팀포트리스2'에서 선보인 바 있고, 충분히 쓸만하다는 게 검증되었다. 사진 뺨치는 그래픽은 아니지만, 캐릭터의 역동성을 강조되면서 발생하는 위화감이 크게 줄었다. 무엇보다 적을 식별하기 쉽다는 건 매우 큰 장점이다.

'로드아웃' 역시 이러한 프레임을 따르기에 해당 장점들을 오롯이 들여오는 데 성공했다. 빠른 시점 전환이 이루어지는 게임에서 피아식별의 용이함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다만, 캐릭터 디자인 및 배경 색감이 '팀포트리스2'와 비슷하다는 비교는 피할 수 없어 보인다. 개인적으로는, 디테일하게 들어가면 '로드아웃'만의 외적 특징도 분명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이걸 유저들에게 강요하거나 설득할 생각은 없다.

▲ 다양한 장점을 지닌 카툰 풍 그래픽.


깨알 같은 부위 파괴 요소도 게임의 디테일을 높였다. 적의 머리에 총알 몇 방 꽃아 주면, 눈알과 척추, 뇌만 남은 채 열심히 뛰어다니는 진풍경이 펼쳐진다. 총알이 복부에 박히면 뻥 뚫린 구멍 사이로 팔딱거리는 심장도 구경할 수 있다. 팔, 다리도 마찬가지.

'콜오브듀티'같은 작품에 이런 시스템이 적용된다면, 분명 부담요소다. 나보다 사람답게 잘 생긴 캐릭터들이 흘러내리는 내장 주워담아가며 뛰는 장면은 상상만으로도 그로테스크하기 짝이 없다. '솔저오브포춘'이 이런 대담한 시도를 보여줬는데, 꽤 불쾌했던 기억이 있다. 뭐, 타격감으로 이해해보려고도 했지만…. 어쨌든 잔인했다.

다행히 '로드아웃'은 이런 느낌이 적었다. 캐릭터 디자인이 워낙 과장되었기에 이런 부위 파괴가 잔인함으로 비칠 여지가 줄어든 거다. '닌자가이덴2'가 잔인함으로 유명세를 떨치면서도 한편으론 '상쾌한 액션'을 대변하기도 했는데 '로드아웃'도 같은 느낌이랄까. 최소한의 서양 문화를 이해하는 유저라면 '웃어넘길 만한 잔혹함'정도로 볼 수 있겠다.

▲ '로드아웃' 데스 스내치 플레이 영상


FPS는 장르 특성상 취향만 맞는다면, 시작한 지 10분 내로 게임이 가진 거의 모든 재미를 느낄 수 있다. 하지만 그게 전부라는 약점도 함께 한다. 이걸 메우기 위해 어떤 게임은 스토리를 강화하고, 또 다른 어떤 게임은 계급 제도를 도입한다. 전자는 압축된 재미를 단기간에 보여주며, 후자는 거의 자기만족에 가깝다. 자기 스스로 성취도를 느낄 만한 선을 두고, 그것을 넘어가는 재미를 찾지 못한다면 특별한 의미를 두기 어렵다.

'로드아웃'의 시스템은 후자에 가깝다. 전형적인 멀티플레이어 전용 게임이니만큼, 이야기를 풀어가는 요소는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래서 캐릭터 성장…. 아니, 정확히는 무기 성장 요소를 도입했는데, 이게 단순하면서도 파고들 여지가 많다. 캐릭터명 뿐만 아니라 무기에도 이름을 붙여줄 수 있는 것은 보너스.

주목할 부분은 무기 커스터마이징 시스템이다. 다른 슈팅 게임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소재지만, '로드아웃'은 커스터마이징 파츠들이 워낙 개성이 강해 튜닝하는 재미가 큰 편이다. 심지어 총알까지 바꿀 수 있어, 같은 라이플이라도 완전히 다른 느낌으로 사용할 수 있다.

이러한 파츠들은 서로 맞물리지 않는 장단점을 가졌다. 즉, 어느 한 파츠나 총기가 압도적으로 강한 경우는 없다.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른 실력이 아니라면, 무슨 총을 잡든 재미있게 즐길수 있다는 뜻. 그리고 하이퍼 슈팅 게임은 총기 밸런스보다는 유저의 실력이 더욱 중요한 장르 중 하나다.

이와 별개로 테크트리 시스템도 구현되었는데, 무기의 프레임을 바꾸는 곳이다. 게임을 하다 보면 같은 라이플을 쓰더라도 어떤 녀석은 총알이 더럽게 아프고, 또 어떤 녀석은 무지하게 빠른 걸 볼 수 있다. 이러한 직업별 세분화가 여기에서 결정된다고 보면 된다. '팀포트리스2'와 같은 확실한 직업 구분은 없지만, 이런 테크트리 시스템을 잘 활용하면, 더욱 효율적인 팀플레이를 즐길 수 있다.

여담으로, 서비스 초기인 만큼 아직 구현된 전투 모드는 적은 편이다. 그래도 일반적인 하이퍼 슈팅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모드들은 대부분 체험 가능했고, 전체적인 재미에 합격점을 줄 수 있었다. '캡쳐더플래그'를 모티브로 한 '잭해머' 모드, '팀데스매치'를 개량한 '데스 스내치' 모드는 꼭 즐겨보는 것을 추천한다.

▲ 무기 커스터마이징 시스템으로 자신의 고상한 취향을 맘껏 뽐낼 수 있다.

▲ '문명5'를 보는 듯한 테크트리 시스템.


간단히 총평을 내려 보자. 게임 내적으로 눈에 띄는 차별점은 없지만, 여러 가지 요소를 깔끔하게 다듬은 느낌이 강하다. 돌려 말하면, 개발사의 센스는 콘텐츠가 아니라 주로 외적인 부분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는 뜻. 대다수의 인디 개발사는 부족한 자본이라는 리스크를 안고 개발에 들어간다. 그렇기에 앞서 언급한 개발 방식은 주로 메이저급 개발사에서 자주 볼 수 있다. 대표적인 회사가 '블리자드'다.

'엣지 오브 리얼리티'는 인디 개발사임에도 메이저들의 개발 방식을 고수했다. '로드아웃'에 눈이 번쩍 뜨일 만큼 신선한 요소는 없다. 그래픽은 '팀포트리스2'와 몇 가지 유사한 부분이 있고, TPS 시점은 '기어스 오브 워'와 닮았다. 여러 가지 재료를 섞어 만든 비빔밥 같은 작품이지만, 단순 잡탕으로 치부하긴 애매하다. 그 맛이 제법 괜찮기 때문.

밸런스 영향 없는 결제 시스템, 외국 서버임에도 안정적인 지연 속도, 여기에 뛰어난 접근성을 갖춘 '로드아웃'은 2월 4일 현재 스팀 동시접속자 순위 10위에 랭크되어 있다. 밸브 외 개발사가 만든 무료 게임에서는 1위. 이 순위가 언제까지 갈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의 초심을 잃지 않고 유저 친화적인 업데이트가 뒷받침되어 준다면 장기간 TOP 10에 머무를만한 자격은 있어 보인다.

▲ '로드아웃' 블리츠 플레이 영상

▲ 캐쉬는 오직 캐릭터를 꾸미는 데만 사용된다.

▲ 참가자들이 맵을 투표하는 시스템을 채용.

▲ 라운드가 끝나면 빵빵한 보상을 얻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