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야구2K'는 마음속에서 버린 게임이었다.

인턴 기자 시절에 때마침 관심 있는 야구게임이 나왔고, 리뷰를 작성했다. 흥행은 처참했다. 게임성은 좋았지만, 2K시리즈의 고질적인 단점을 온라인에 가져오면서 근본적으로 회생이 불가능해 보였다. 실사 야구는 국내에서 성공하기 힘들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뜻밖에도 그 녀석이 돌아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업데이트도 아니고, 리뉴얼도 아니다. 아예 다시 만들었다. 모든 것이 바뀌어 있었다. 그중에서도 눈에 들어온 것은 자기가 한 명의 선수가 되어 플레이하는 마이플레이어 모드였다. 2K시리즈에서 가장 사랑받은 모드다. 그래, 이런 걸 추가했어야지.

'프로야구2K14'라는 타이틀에서는 전작과의 계승을 거부한다는 강한 의지가 느껴졌다. 플레이를 했다. 아무리 그래도 얼마나 바뀌었느냐는 생각으로. 그리고 플레이 10분 만에, 다시 리뷰를 써야겠다고 다짐했다.

다시 태어난 게임에서 다시 태어나는 느낌을 받았다.

▲ 구장 퀄리티부터 깜짝 놀라게 했다



"그 대관중 속에서, 시합을 멈추고 혼자 베이스를 도는 기분은 최고지?"
- 만화 『H2』, 쿠니미 히로


마이플레이어 모드 첫 플레이어는 오지환이었다. LG트윈스 팬으로서 피할 수 없는 선택이었다. 게임 오프닝에서 알을 깐 뒤 짓는 특유의 억울한 표정을 지나치지 못했다. 손목 힘만으로 담장을 넘기는 엄청난 잠재력과 동시에 시즌 2관왕을 달성하는 존재감까지. 물론 그 2관왕이라는 것이 실책과 삼진이라는 사실은 함정.

'포텐'만큼은 최강이라는 말을 넘어 진짜 최강으로 키워보자. 일단 실제와 같은 유격수로 선택했다. 타입은 슬러거(거포). 잠실 구장 외야석을 뚫어주마.



물론 현실은 냉혹했다. 막 신예 거포로 넘어온 오지환은 어느 정도 괜찮은 파워 말고는 선구안과 교타력이 바닥을 기는 선수였다. 알맞게 휘두른 것 같았는데, 어김없이 헛스윙이다. 어쩌다 맞은 타구가 힘없이 2루수 앞으로 굴러갔다. 이런, 1사 만루 찬스였는데? 병살타를 치고 덕아웃으로 돌아가는 느낌은 남달랐다. 퇴장하면서 삶은 계란으로 얻어맞지도 않을까 하는 걱정.

대체 실제 프로 타자들은 이런 변화구를 어떻게 골라내는 걸까. 특히 싱커가 그렇게 무서운 구질이라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실제 야구를 보면서 "왜 선풍기질이야!" 라고 분노하던 팬들은 반드시 마이플레이어모드를 플레이해보길 권한다. 타자 플레이 이후, 그런 소리를 들으면 괜히 내가 욕먹는 것 같아 침울해지기도 했다.

'오풍기'라고 불려도 할 말이 없었던 오지환은 조금씩 성장해갔다. 경기를 마치면 결과에 따라 SP라는 포인트를 받게 되고, 이것으로 원하는 능력치를 올릴 수 있다. 선구안과 파워 위주로 꿋꿋하게 키웠다. 선구안이 올라갈수록 공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투수가 던지는 순간 공의 코스와 구질이 미리 감지되는 경우가 많아졌고, 노려치기도 가능해졌다.

▲ 녹색 '타격UP' 표시가 떴다면, 그야말로 한 방 날릴 기회


타자를 키울 때 재미있는 것은 타격뿐이 아니다. 안타나 볼넷으로 출루하면, 그때부터 플레이어는 타자가 아닌 주자로 변신한다. 자신이 주루플레이를 해야 한다. 너무 리드를 크게 가져가다가 견제사를 당하기도 일쑤. 애매한 타구를 보고 뛸지 말지를 빠르게 판단해야 했다. 야구에서 '뇌주루'라 불리는 플레이, 익숙하지 않을 때는 일상적으로 저지르고 만다.

날렵한 수비수가 되는 것도 필수 미덕이었다. 이번에는 유격수의 로망을 버리지 못하고 오지환의 실제 포지션을 골랐지만, 포지션 선택은 완벽하게 플레이어의 자유다. 그 어떤 선수라도 외야수와 내야수, 그리고 포수와 투수까지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다. 수비 역시 어려운 상황에서 빠르게 송구를 결정할 수 있는 센스를 갖춰야 훌륭하게 수행할 수 있었다.

결국 2할 초반대 타율에서 전전하던 내 오지환은 세 번째 시즌에서 그야말로 '포텐'이 폭발했다. 타율은 3할 위를 노닐었고, 무엇보다 장타율이 5할대였다. 원하는 코스에만 오면 펜스 직격이거나 2루타였다. 구장 디자인도 워낙 잘 되어 있어서, 넓은 잠실 구장에서 펜스 바로 앞까지 타구가 갈 경우 '다른 구장이었다면' 하는 아쉬움이 들기도 했다.

▲ MVP도 심심하면 따내는 간판 타자가 됐다


팽팽한 동점 상황, 7회말 투 아웃 만루. 타석에 5번 타자로 들어선다. 응원 소리는 점점 커진다. 공 두 개를 연속으로 골라낸다. 제 3구, 선구안이 감지해낸다. 원하는 코스에 정확하게 직구가 들어온다.

공이 배트에 감기는 소리가 다르다. "제대로 맞았습니다!" 캐스터의 외침과 함께 공이 하늘 저 멀리 날아간다.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나는 그 순간, 경기장에서는 나 홀로 천천히 그라운드를 돌고 있었다.

만화에서 보던 그 말이 맞구나. 혼자 경기를 멈추는 이 기분은 최고네.

▲ 결정적인 순간 뜨는 클러치 모먼트 연출은 정말 사람을 살 떨리게 한다

▲ 막혀 있던 숨이 뻥 뚫리는 바로 그 순간




"투수를 위대하게 만드는 것은 팔이 아니다. 뇌라고 불리는 두 귀 사이에 있는 것이다"
- 그레그 매덕스


두 번째로 키울 선수는 이대호였다. 왜 계속 슬러거만 키우냐고 할 법하지만, 오산이다. 내가 그린 것은 사직 마운드의 지배자, 선발투수 이대호였다. 0.1톤의 묵직한 몸집에서 뿜어나오는 150km 칼등심 직구를 꽂아줄 것이다.

선택한 팀은 2010년 롯데. 야구를 봐온 사람이라면 신의 한 수라며 무릎을 탁 치리라 믿는다. 롯데 타선의 화력이 절정에 달한 시기다. 득점지원 듬뿍 받으면서 꿀을 빨겠다는 심오한 계산에서 우러나온 선택이었다.

▲ 이대호가 투수를 했다면 이런 모습일까


정말 잘 골랐다는 것을 게임 플레이에서 깨달았다. 실제로 타선이 폭발하기 시작했다. 매 경기마다 5점, 6점은 기본이고 두 자릿수 득점도 심심치 않게 나왔다. 화끈한 불망망이에 가슴이 뻥 뚫리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있었다. 이대호가 같이 불을 지른다. 투수 이대호가.

풋내기 투수의 선발 등판은 쉽지 않았다. 첫 타자를 땅볼 처리한 기쁨도 잠시, 코너를 노린 직구가 정확히 가운데로 들어갔다. 제구력이 낮을 때는 정말 장담할 수가 없다. 어김없이 연속 안타를 맞으면서 주자는 1,3루.

그리고 다음 타자의 1루 땅볼, 잘 잡아낸 1루수가 갑자기 멈칫한다. 조금 늦게 깨달아버렸다. 1루 커버! 1루수가 멀리서 땅볼을 잡았을 때는 투수가 먼저 1루로 달려가 공을 받아야 한다. 서둘러 출발했지만 이미 늦었고, 타자가 먼저 1루를 밟고 지나갔다. 깔끔하게 실점. 투수는 공을 던지는 순간 아홉 번째 수비수가 된다는 기본 상식을 잊어버린 거다.

설레는 데뷔 등판은 2이닝 7실점으로 끝났다. 게임 속에 SNS가 존재했다면, 화끈한 욕 쪽지를 한 다발 감상할 수 있지 않았을까.

다행히도 게임이라 2군으로 쫓겨나는 일은 없었다. 등판을 거듭하면서 타자들이 꽤나 똑똑하다는 걸 깨달았다. 같은 코스에 같은 구질을 던지면 어김없이 배트에 맞춘다. 정말 좋은 투수는 뇌가 발달된 투수다. 전략을 잘 세울수록 타자들은 잘 속았다. 그 사이 조금씩 체력과 구위가 성장했고, 슬라이더 각도 예리해졌다.

두 자릿수를 넘나들던 평균자책점은 조금씩 줄어들면서 5점 선까지 회복됐다. 이것도 좋은 투수라고는 할 수 없지만, 적어도 사람 같아서 다행이다 싶었다. 이 글이 끝난 뒤에도, 에이스 이대호 만들기 프로젝트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


▲ 투수 클러치 모먼트 연출은, 과장이 아니고 정말 영화다


플레이 자체는 투수보다 타자가 재미있었다. 투수가 얼마나 섬세한 포지션인지를 체험했기 때문이다. 단순히 게임 내에서 흔들리는 것뿐 아니라, 주자가 나가기 시작하면 플레이어에게도 은근히 스트레스가 온다. 헛스윙 삼진을 당해도 금세 다음 타석을 노릴 수 있는 타자가 마음은 더 편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육성의 재미는 투수가 최고라고 말할 수 있다. 각 구질별로 구속과 제구를 연마할 수 있고, 특정 조건을 만족하면 구질을 진화시키기도 한다. 슬라이더가 진화해 첫 패스트볼이나 슬러브를 새로 가지거나, 체인지업을 진화시켜 서클 체인지업을 보유하는 경우가 그렇다. 물론 전혀 다른 구질을 새로 계발할 수도 있다. SP를 쓸 곳은 무궁무진하다.

▲ 자, 어떤 구질 테크트리를 타볼까...는 SP 좀 주세요 엉엉


여러 타자를 돌려가며 플레이한 결과, 포지션마다 난이도 차이도 소소하게 있다. 편하게 수비하고 싶은 유저라면 2루수나 3루수, 혹은 1루수를 플레이하길 바란다. 포수도 어렵지 않은데, 수비 시간이 길다는 점은 유념해야 한다. 외야수가 좀 어렵다. 중견수보다 오히려 좌익수와 우익수가 타구 판단이 까다로웠다. 하지만 펜스를 타고 점프 캐치로 홈런 타구를 잡아내는 쾌감을 느끼고 싶다면 외야수만큼 매력적인 포지션도 없다.

▲ 세부 기록도 자세히 나온다


게임 자체가 가지고 있는 매력은 충분했다. 우선 정말로 '리얼'해졌다. 촘촘해진 구장 묘사와 팀에 맞는 관중들의 모습은 거들 뿐, 사운드가 진짜다. 직관(야구장 직접 관람)을 최근에 가본 사람이라면 느낄 것이다. 응원 소리를 실제 그대로 게임에 담았다.

각 선수별 응원가는 물론이고 풀 카운트에서의 특수 응원, 이기고 있을 때의 후반 응원 등 실제 야구장에서 상황에 따라 사용하는 응원가가 적재적소에 튀어나온다. 오류도 있다. 현대 유니콘스와 싸우고 있는 SK 와이번스 응원가가 흘러나온다거나, 해태 시절 정성훈이 타석에 서자 '엘지의 정성훈'이라는 응원 외침이 들린다거나. 하지만 지금 존재하지 않는 팀의 응원 육성을 담기란 불가능하니,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너무 길어질 수 있어 마이플레이어 위주로 설명했지만, 그것을 제외하고 보더라도 일반 경기 자체만으로 충분한 재미를 가지고 있었다. 초심자 배려 부분에서 환골탈태라는 말이 아깝지 않다. 이제 마우스만으로 대부분의 조작이 가능해지면서 직관적으로 변했다. 기존 키보드 조작의 손맛을 계속 느끼고 싶은 코어 유저들은 설정에서 이전 조작법을 선택하면 된다.

과금 시스템 역시 합리적으로 구성된 편이다. . 원하는 라인업 구성을 위해 무한으로 카드를 질러야 하는 슬픔은 안녕이다. 일일 드래프트 시스템을 통해 자신이 원하는 선수를 골라 영입할 수 있다. 아예 무과금이거나 소량의 과금만으로도 선수 육성과 컨트롤 연습을 통해 충분히 좋은 성적을 내는 것이 가능하다. 마이플레이어 모드에서 키운 선수를 내 팀의 엔트리에 넣을 수 있는 시스템도 깨알 재미를 선사한다.

▲ 일일 드래프트 시스템은 과금 요소를 상당 부분 억제하고 있다


사소하게 지적할 사항도 분명 있었다. 노아웃 만루에서 병살을 쳤는데 타점이 올라가는 경우가 대표적이다. 현재 야구 룰에서 병살타는 점수가 나더라도 타점으로 인정되지 않는다. 현재 패치에서는 혹시 수정되었을지도 모르지만. 그리고 이벤트 선물을 받을 경우 그것을 수령해 인벤토리로 옮겨 사용하는 과정이 너무 길다. 그 일련의 과정에 일곱 번의 클릭이 소모되었다. UI에서 메뉴 간의 이동이 전체적으로 번거로운 편이다.

하지만 '프로야구2K14'는 장점이 수십 배 많은 게임이다. 온라인 야구게임에 도전해 소리소문 없이 거꾸러졌던 2K스포츠와 넥슨은 야구 게임의 첫 계단부터 다시 밟아올라가는 데 성공했다. 전작의 유저가 너무 적었기 때문에 소문이 빠르게 퍼지지 못하는 점은 아쉽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이 말만큼은 반드시 남겨야 할 것 같다.

당신이 실사 야구게임에 발을 들여보고 싶다면, '프로야구2K14'는 정답을 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