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의미로 보면, '게임'이라는 말은 참 모호합니다. 수많은 종류의 서브컬처가 모여 만들어진 커다란 상위 개념이거든요. 인간이 즐기는 유희 중 대부분은 게임의 형태를 갖고 있습니다. 역으로 세부 장르들을 짚어 내려가다 보면 흥미로운 영역에 도달하곤 합니다. 그중 하나가 오랜 전통을 가진 '보드게임'이고, 한 발짝 더 분류하면 트레이딩 카드 게임(TCG)이 나옵니다. 그곳의 세계적 대표 주자가 바로 '매직: 더 개더링'입니다.

시작부터 너무 먼 길을 돌아갔나요? 이 게임이 서 있는 위치를 생각하면 이렇게 설명하는 편이 맞겠다 싶습니다. 한 장르의 핵심에 서 있지만, 동시에 국내에서는 마이너 게임에 속합니다. 그러면서도 전국 곳곳에 MTG클럽이 존재해 활발한 교류가 펼쳐집니다. 메이저와 마이너가 역설적으로 교차하는 지점에 있는 게임이지요.

해외 주류와 멀어져 있는 듯했던 국내 매직계에, 올해부터 희소식이 날아들었습니다. 지난 3월 호주 멜버른 그랑프리에서 한국인 최초 우승자가 탄생한 것이지요. 이어 5월에는 미국 미니애폴리스 그랑프리에서 박준영 씨가 우승컵을 들어올렸습니다. 어려운 여건에도 우직하게 실력을 갈고 닦은 한국 게이머들의 저력을 여기서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강남 해즈브로코리아 사무실에서 첫 번째 우승자인 남성욱 씨를 만났습니다. 우연히 카드게임 하나를 만난 소년이 어떤 길을 거쳐 세계대회 우승을 이뤄냈는지, 그리고 그가 말하는 게임의 가치란 어떤 것인지 들어보았습니다.


매직: 더 개더링(Magic: the Gathering)

두 사람 이상이 즐기는 세계 최초의 트레이딩 카드 게임이다. 리차드 가필드(Richard Garfield)에 의해 개발되었으며, 제조사는 위자즈 오브 더 코스트(Wizards of the Coast)이다. 생명력 20을 가진 두 플레이어가 자신의 덱(카드뭉치)을 가지고 각종 생물과 주문을 통해 대결을 벌이며, 생명력이 0 이하로 떨어지면 패배하게 된다. 지금까지 3만 장 가까운 종류의 카드가 발매되었다.


▲ 멜버른 그랑프리 우승자 남성욱


매직: 더 개더링(이하 매직)은 언제, 어떤 계기로 시작하게 되었나요?

고등학생 시절 수학여행에서 처음 봤어요. 보통은 포커나 고스톱을 몰래 가져오는데, 누군가가 이벤트로 받은 매직 카드를 가져왔어요. 친구들끼리 플레이해보면서 처음 접하게 됐어요. 보드게임도 널리 알려지지 않은 시기였고, 일대 일로 할 수 있는 게임이라 더 좋았죠.


세계 대회 우승자의 첫 대회가 궁금하네요.

전국에 보통 매직클럽이라고 부르는 매장 샵이 있는데, 당시 PC통신에서 제가 사는 대전에 그런 게 있단 말을 듣고 처음 가봤어요. 시작한 지 3개월 만이었죠. 거기서 카이스트에 다니는 형들과도 같이 놀던 기억이 나네요. 사람들과 어울리다 보니 재미가 있고, 우리끼리 즐기는 것을 넘어서 연구할 가치가 있겠다고 느꼈어요.

처음으로 참가한 큰 대회는 크리스마스 토너먼트였어요. 남자들만 칠팔십 명 정도가 우르르 왔죠.


크리스마스에... 남자 80명이 토너먼트를...

눈물 나죠(웃음). 지금까지 가장 기억에 남는 대회이기도 해요. 처음이라 많이 긴장하기도 했어요. 제 성적은 3승 3패였어요. 아무런 정보도 없이 짠 자작덱으로 말이죠. 그 날을 계기로 실력이 향상됐어요. 결국 국가대표 선발전까지 나가게 됐고요.


그 다음 맞이한 게 바로 세계대회군요.

네, 첫 세계대회는 08년 월드 챔피언십이었죠. 130여개 국가가 참석해서 각 나라마다 내셔널 챔피언십을 거치고, 1~3등까지 월드에 진출에 세계 최강을 가리는 방식이에요. 저는 3등을 기록하면서 유명한 플레이어인 이지훈 씨, 김신익 씨와 함께 참가했고요. 첫날 제 경기는 위자드 홈페이지에서 중계방송도 했어요. 해외 유명 플레이어들과 대결을 벌인 게 기뻤고, 그 맛을 봤기 때문에 올해 우승까지 가능했던 것 같아요.


결국 멜버른 그랑프리에서 한국인 최초로 우승을 했잖아요. 우승하는 순간 어떤 생각이 들었나요?

그냥 어리벙벙했어요. 사실 누군가와 내가 한 게임 해서 이겼을 뿐인 상황이잖아요. 그런데 그게 너무 중요한 순간이었던 거죠. 트로피를 받고 집에 가서야 "내가 우승한 건가?" 싶었어요.

상대 플레이어가 중요 카드를 꼭 받고 그거에 맞춰서 운영해야 하는 덱이었는데, 드로우가 좋지 않았어요. 덱 상성은 제가 밀렸는데 운이 좋은 상태에서 실수 없이 완벽하게 플레이하고 이긴 것 같아요. 다른 게임도 마찬가지지만 특히 매직은 실수 한 번으로 엄청나게 기울어지거든요. 많은 경험을 쌓아서 실수하지 않는 게 중요한 게임이에요.

▲ 해즈브로코리아 사무실 전경, 아기자기한 놀이 용품이 가득하다


정말 쉼없이 달려오셨는데, 이렇게 게임 하나에 모든 노력을 기울이다 보면 우리나라에선 부모님의 반대에 부딪히는 경우가 많잖아요.

다행히도 제 부모님은 개방적이셨어요. 제가 무슨 일을 하더라도 항상 아들을 믿어주셨죠. 언제나 "나쁜 짓만 아니면, 원하는 것을 하고 거기에 스스로 책임을 져라"고 하셨어요. 제가 공부를 전혀 안 하는 것도 아니어서, 공부가 끝나면 무엇을 해도 괜찮았어요. 취미생활을 인정하는 분이셨죠.

성적도 괜찮았나요? 그렇다면 정말 대단하네요.

공부는 10등에서 15등 사이를 왔다갔다 했고, 대학에서는 전자과를 전공했어요.


여러 국가의 게임 대회나 행사를 돌아보면서, 한국과 다른 특징을 느꼈나요?

우리나라는 카드게임을 도박과 같은 개념으로 많이 보잖아요. 그래서 기성 세대는 아이들과 게임하는 걸 꺼려하는 것 같아요. 해외 대회장을 가면 남성뿐 아니라 여자 플레이어도 많고, 가족 단위도 보여요. 70대가 넘은 노부부가 직접 게임을 하러 오기도 하고, 아예 유모차를 들고 와서 게임하는 분들도 있어요.

국내 대회가 전부 20~40대 남성들로 이루어진 점을 생각하면 문화 충격이죠. 그만큼 매직이라는 게임을, 나아가 보드게임이나 카드게임을 건전한 취미로 본다는 겁니다. 주말에 몇 시간 와서 페스티벌처럼 즐기는 문화예요. 우리나라도 이렇게 됐으면 좋겠어요.


세계적인 선수들도 많이 만나봤을 텐데요. 해외 매직 프로들의 환경은 어떤가요?

우리나라에서 임요환 같은 유명한 선수와 게임을 할 기회가 생기면 승패에 상관없이 팬들이 좋아하잖아요. 일본은 매직에 그런 프로들이 있어요. 일반 샵에서도 그들의 싸인 카드를 팔 정도죠. 그만큼 잘 하는 플레이어에 대한 대우가 좋아요.

미국은 유명한 프로와 게임해보기 위해 몇십만 원씩 지불하는 이벤트도 있어요. 플레이어를 높게 쳐주는 프로 개념에서 스포츠화가 잘 되어 있다고 생각해요. 류현진 선수가 잠시 한국에 와서 야구지도를 해준다고 하면 큰 비용을 내서라도 참여할 사람이 많은 것처럼 말이죠. 매직 같은 게임이 e스포츠와 연결되면 어떤 가능성이 생기는지 볼 수 있었죠.

▲ PAX 2014 카드게임존, 남녀노소 가득 모여 TCG를 즐기는 모습


일반적으로 매직 유저들은 개인마다 선호하는 색이나 덱 특성이 있던데요. 어떤가요?

프로의식이라고 할 수도 있는데, 저는 뭐든지 그 환경에서 가장 강한 덱을 굴리려고 해요. 최근엔 블랙으로 좋은 성적을 내서 애착을 갖고 있고요. 매직은 서너 달마다 카드가 나오다 보니 변화가 잦은 점이 참 좋아요. 현대에 잘 어울리는 게임이라고 생각해요.


그럼 좋아하는 카드는 따로 있나요? 매직이 콜렉팅 요소도 갖추고 있잖아요.

'리바이어썬'이라는 카드를 수집했어요. 180장 정도 모았죠. 큰 심해어가 도시 같은 걸 집어삼키려는 그림이 어린 나이에 매력적이었고, 공방 10/10 능력치도 드물어서 좋아했어요. 그런데 얼마 전 이사하면서 잃어버렸어요.


매직을 해보고 싶지만 어렵다는 생각에 주저하거나 포기한 분들도 있는데요.

매직은 여타 보드게임 종류와 다르다고 생각해요. 즐기는 것도 좋지만, 그보다는 투쟁심을 갖고 상대를 이기는 걸 좋아하는 분들이 오히려 잘 진입하시는 것 같아요. 처음에는 카드를 모르기 때문에 실력차가 날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승부욕이 필요하죠.

정 어렵다 싶으면 친구들과 승패 관련없이 한두 번씩 즐기면서 시작하시는 게 좋아요. 매직은 대회 룰이 엄격하죠. 하지만 친구들끼리 놀 때는 룰을 자기가 만들어도 된다고 생각해요. 놀다 보면 특정 룰이 재미없고 이상할 때가 있어요. 그러면 과감히 그걸 버리고 노는 거예요. 흥미가 생기고 알아보다 보면 자연스럽게 "이 룰은 이래서 필요하구나" 느낄 때가 있어요.

자유롭게 접근해서 조금씩 알아가는 게 좋다고 봐요. 그러다 보면 토너먼트도 나오고 경쟁 레벨에 접어드는 분도 생기고요. 한편 여럿이 모여 즐기는 걸 좋아하는 분들은 방금 말했듯 편하게 노셔도 됩니다.

▲ 지난 5월 인천에서 열린 '프로투어 매직 2015 퀼리파이어'


직접 모여 즐길 수 있다는 점이 매직의 특징 같은데요. 오프라인 매장의 장점도 있겠어요.

요즘은 사기 트레이드도 할 수가 없어요. 검색하면 시세 정보가 다 나오니까. 가면 카드 주시는 분도 많고요. 주저하지 말고 주말에 잠깐씩 가서 같이 놀며 보시면 좋을 것 같아요. 모든 보드게임은 우리들끼리 할 때는 룰에 연연할 것 없이 즐기기만 하면 그것만으로도 존재 이유라고 생각해요.


매직 외에 즐기는 다른 게임도 있나요?

대세 게임인 리그오브레전드(LoL)도 가끔 하죠. 주로 탑이나 서폿, 정글을 많이 가요. 다른 TCG나 CCG 온라인게임도 조금씩 해봤지만 다시 매직으로 돌아가게 되더라고요.


보드게임도 많이 아신다 들었는데, 대중적으로 몇 게임만 추천한다면?

정말 많은 종류가 있지만, 처음 하는 분들에게는 '모노폴리'부터 추천을 시작하는 편이죠. '부루마블'의 원조격이고, 어린 아이들에게 부모가 기본 시장 개념을 알려줄 수 있어서 쉽고 무난하다고 생각해요. 추리를 좋아하면 '클루'도 괜찮죠.

정말 좋아하는 게임은 '달무티'요. 1부터 12까지 차례대로 카드를 내는 단순한 게임이지만 시작부터 중세 계급이 있고, 계급을 오르내리면서 신분 상승을 노리게 되죠. 고등학교 때 음료수 내기로 많이 했어요. 노예를 몇 번 연속으로 걸리면 사 오는 걸로. 지금 비록 노예지만 좋은 카드 한두 장 겨우 아껴서 조금씩 올라가는 재미도 있었고요.


한국에서의 게임 인식은 좋지 못한 게 사실인데, 게임 과몰입 같은 이슈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요.

부모님 입장에서는 아이들이 게임만 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어요. 어리다 보니 자제하기 어려운 애들이 많잖아요. 한 시간만 하라 했는데 두세 시간 하고 있는 등. 하지만 조카들을 봐도 학원 가고 또 어딜 가고 하다 보면 놀 시간이 없어요. 아이들도 스트레스를 받거든요. 풀 수 있는 무언가가 필요해요. 부모님이 전부 해줄 수 있느냐 하면 다들 바쁘다 보니 힘들거든요.

아이들이 게속 학원 다니고 밖에 있다가 집에 오면 스트레스를 풀 게 게임뿐인데, 집 안에서는 게임밖에 안 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프로게이머가 꿈이 아니라면 게임만 하는 건 문제가 될 수 있지만, 그걸 나라에서 정책으로 뭔가 할 수 있다고 보이진 않아요. 제재만 하다 보면 산업을 악화시켜주는, 커다란 경제적 효과를 막는 결과만 될 수 있거든요

일본은 빠칭코 문화가 있어요. 돈 출입 등을 국가에서 관리하면서 크게 문제없이 운영되고 있고요. 하나의 문화로 정착되면서 일본 관광코스 중 하나가 됐어요. 연금 받는 노년층 분들이 한두 시간씩 찾아와 잃고 따고 하면서 즐기는 모습을 흔히 봤어요. 거기에 일하는 젊은이들도 많아지면서 문화이자 내수경제를 할 수 있는 사이클이 생기고 있었어요.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무조건 안 된다고 하니 산업 종사자뿐 아니라 게임하는 아이들과도 소통이 되지 않는 거죠. 사회적 문제가 되는 부분도 있지만 강압적으로 틀어막는 것보다는 서로 타협점을 가지고 천천히 나아가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해요.

▲ 인터뷰를 가진 해즈브로코리아 미팅 룸


남성욱이라는 플레이어에게, 게임이란 뭘까요?

예전에는 '가장 즐거운 취미생활'이었고, 지금은 '일'이 됐죠. 취미라면 이길 수도 질 수도 있지만, 일이 되고 나서는 매진을 많이 하게 됐어요. 매일 빠지지 않고 네다섯 시간 연습하고 연구하는 게 일이에요.. 모르는 사람이 보면 중독인 줄 아는데, 사실 프로게이머들이 하루 8~9시간 연습하는 것도 일이 되니까 하는 거잖아요.


취미에서 일로 바뀌면서 스트레스가 생기진 않았나요?

그렇진 않아요. 연습할 때는 컴퓨터 게임을 주로 해서 이동량이 많이 없어요. 몸관리가 힘든 건 조금 안타깝네요. 가장 좋을 때는 오프라인 대회로 해외에 나갈 때예요. 매직 대회는 대부분 세계의 유명 관광지에서 하거든요. 그렇게 여행하는 느낌을 받으면서 여러 사람도 만나고 있어요.


마지막으로 인벤 독자 여러분께 한 마디 부탁할게요.

인터뷰를 보시는 분들 중 일부는 매직을 즐기고 계시거나 그러신 적이 있겠고, 아예 생소한 분도 있을 것 같네요. 예전에 하신 분은 집에 굴러다니는 카드들 시세를 한번 알아보세요. 계 타실 수도 있어요(웃음). 전국 어디나 매직클럽이 있기 때문에, 친구들끼리 스타 한판 하러 PC방에 가듯 다시 찾아가보시는 것도 재미있을 겁니다.

처음 접하는 분들은 올해 나온 컴퓨터 게임(매직 2015-플레인즈워커의 결투)을 튜토리얼 겸 즐겨보시면 좋아요. 하다가 경쟁심이 생긴다 싶으면 매직클럽도 가보시고요. 아마 의외로 나이 있는 분들이 많을 거예요. 진지하게 게임하는 걸 지켜보면 무시할 수 없는 모습을 발견하게 되죠. 술만 마시는 취미를 가진 사람은 알 수 없는, 조그마한 카드게임에 열정을 가지고 진지하게 임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말이에요.


▲ 남성욱 씨는 5월, 세계 프로투어 준우승의 쾌거도 이뤄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