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금했다.

2주쯤 전, 코엑스에서 만난 오큘러스 리프트의 서동일 지사장이 자신있게 말했다. "지금 다들 시연하시는 DK2 기기가 한 순간에 오징어로 보일 겁니다."

바로 '크레센트 베이'에 대한 이야기였다. 궁금할 수 밖에 없었다. 오큘러스가 가진 최고의 기술을 모아 만든 테크니컬 프로토타입인 '크레센트 베이'. DK2도 인상깊게 사용해본 나로서는 꼭 한번쯤 머리에 써보고 싶을 수 밖에.

하지만 기회는 쉽게 찾아오지 않았다. 당연한 문제였다. 크레센트 베이의 수량은 전 세계에 30대뿐이 없었다. 그리고 그 중 29대는 본토인 미국에 있었다. 미국을 제외한 전 세계에 딱 한대 존재하는 크레센트 베이. 기회가 찾아오고 말고가 아니었다. 그냥 눈으로 구경만 하는 것도 힘들거란 생각을 했다.

한창 지스타를 준비하며 주말도, 퇴근도 없는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이메일이 도착했다. 오큘러스로부터 온 메일. 눈을 사로잡는 것은 단 하나의 문구였다. "'크레센트 베이'의 시연 기회를 드립니다." 서둘러 약속을 잡고, 부산으로 향했다. 갖은 고통을 겪은 끝에 도착한 지스타2014 B2C관의 오큘러스 부스. 시연을 위해 줄을 선 수 많은 유저들 사이로 살짝 보이는 VIP룸의 문틈에서는 내 눈에만 보이는 크레센트 베이의 밝은 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 크레센트 베이 -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

▲ 현장에서 실제로 본 '크레센트 베이'


크레센트 베이는 현재까지 오큘러스에서 발표한 HMD 중 가장 마지막에 발표된 버전이다. 개발자용 키트를 뜻한 DK가 붙지 않은 이유는 개발자용으로 판매할 예정이 아니기 때문이다. 크레센트 베이는 지난해 오큘러스가 들고 나왔던 'HD 프로토타입'과 마찬가지로 만들어낸 테크니컬 프로토타입니다. 그간 그들이 쌓아 온 노하우가 모두 실려있는 기기라는 뜻이다.

떨리는 마음으로 설명을 듣고 머리에 얹었다. DK2에 비해 머리를 조이는 느낌이 덜하면서도 눈에 착 붙는다. 게다가 기존 버전처럼 헤드셋을 낄 필요도 없다. 처음부터 양쪽에 스피커가 달려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너덜거리던 끈보다 깔끔하게 플라스틱으로 마감된 머리 지지대를 보니 디자인은 잘 뽑아놓은 것 같다. 부피는 어느정도 되지만, 이전 버전인 DK2에 비하면 가벼워졌다.

시작과 동시에 나타난 화면. 오큘러스에서 자체 개발한 데모 프로그램이다. 사실 데모 프로그램이다보니 게임으로서의 기능보다는 오큘러스의 활용도와 비주얼적 측면을 강조하는 면이 없지않아 있다. DK2를 사용해 개발하는 개발진들에게는 개발에 대한 영감과 방향성을 심어주고, 기기의 활용도를 보여줄 수 있는 수단이다.

여기서 크레센트 베이의 면모가 잘 드러났다. 가장 큰 차이는 끈만 존재하던 뒤통수에 센서가 달렸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전방위 모션 트래킹은 힘들었던 오큘러스가 이제 상하좌우전후 모두를 넘나들게 되었다.

인상깊은 데모 중 하나가 거울이 있는 방이었다. 거울 속에는 마치 가극에서나 쓸법한 치장된 가면이 하나 둥둥 떠 있었는데, 이게 내 얼굴의 위치와 같았다. 실시간으로 내 움직임에 따라 거울상으로 움직였다. 방이다 보니 뒤에는 테이블이 있는데 엎드려서 테이블을 올려다보니 테이블 밑 마감재의 질감까지 눈에 들어온다. 굉장한 퀄리티다.

▲ 여러분을 위한 모자이크

두 번째로 주목할만한 점은 양옆에 붙어있는 스피커였다. 이 스피커 역시 오큘러스의 모션 트래킹에 완벽하게 적응되어 있었다. 데모 중 하나는 이상한 외계인이 나에게 말을 거는 데모였다. 당연히 외계어니 알아들을 수는 없는데, 내가 고개를 돌릴 때 마다 기막히게 눈을 마주치며 따라왔다.

대화 중 뒤에 뭐가 있나 싶어 뒤를 도는 순간 깜짝 놀랐다. 앞에서 들려오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오는 것 아닌가. 공룡이 돌아다니는 데모에서는 눈을 감고 있으니 공룡이 어디에 있는지 소리만으로 감이 잡힌다. 청각이 공간지각에 얼마나 큰 역할을 하는지 몸소 느꼈다.

▲ 제3자가 볼 땐 항상 어리둥절

길지도 짧지도 않은 시연 과정이 끝나고, 천천히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사실 머릿속으론 시연 내내 생각하고 있었다. '이건 다 가상이다'하고 말이다. 그래도 갑자기 나타나는 공룡이나 까마득한 절벽 위에 서있는듯한 경험은 알면서도 내 본능을 자극했다. 전에도 썼던 말이지만, 무협소설에 나오는 환술과 진법같은 느낌이다.

VR의 한계는 시연자가 가상임을 자각할 때 찾아온다. 진짜같은 경험은 있을지언정, 진짜는 아니니까. 속고 속이는 싸움이다. 오큘러스가 내 감각기를 얼마나 속이고, 나는 그 속에서 얼마나 많은 허점을 보느냐가 성패의 분기점인 것이다. DK2까지는 사실 반반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내 마음은 '진짜같이 잘 만들었네'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번 것은 달랐다. 시연 중간중간 자꾸 내가 좁은 방안에 있다는 사실을 잊고 TV를 향해 돌진하는 것을 관계자들이 뜯어말렸을 정도니까.

하지만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즐겁게 시연을 마치고 다음날 다시 만난 오큘러스, 서동일 지사장을 직접 만난 자리에서 그가 나에게 건네준 것은 또 다른 기기였다. 모바일로 이식된 VR디바이스. 오큘러스의 노하우로 삼성이 제작한 '기어VR' 이었다.


■ 기어VR - 이거 진짜 쓰기전엔 판단불가입니다...

▲ 기어VR의 모습. 따로 패널이 있는 것이 아닌, 스마트폰을 패널에 끼워넣게 된다.


조금은 부정적인 시각이었다. 일단 스마트폰 패널을 직접 눈에 가까이 가져다 대야만 사용할 수 있다는 것에서 오는 근본적인 편견이었다. 항상 언론에서 말하는 것이 스마트폰에서 방출되는 전자파에 대한 위험성이다 보니 더 꺼려졌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한번 써보라고 권하는 서동일 지사장의 권유에도 한 번은 물러섰던 것도 사실이다.

그 때 서동일 지사장이 나한테 말했다. "이거 진짜 써보시기 전에는 절대 몰라요." 그 말에 혹해 기기를 머리에 쓰고 말았다. 곧 반으로 나뉜 스마트폰 패널을 통해 눈으로 들어오기 시작한 영상. 첫 느낌은 '오히려 DK2보다 화질이 좋잖아?'였다.

그 생각을 말하자 서동일 지사장도 동의했다. 실제로 현재 나오는 스마트폰의 액정 패널은 굉장히 뛰어난 수준이니 말이다. 시연한 데모 프로그램은 두 종류였다. 처음으로 시연한 것은 극장 시뮬레이터였다. 말 그대로 거대한 극장에 와있는 듯한 느낌을 주는 프로그램인데, 이게 생각보다 걸작이었다. 모바일이니만큼 게임보다는 시청각쪽에 초점을 맞추는게 더 멋질 것이라는 예감은 적중했다.

▲ 전면커버를 씌운 모습. 흡사 싸이클롭스가 된 기분

오히려 움직임이나 상 간의 유격이 잘 느껴지지 않는 고정초점의 콘텐츠이다 보니 멀미기운도 없었고, 편안하게 시청이 가능했다. 중간 중간 조작은 더 쉬웠다. 극장을 구현해놓은 프로그램이다 보니, 스크린 아랫쪽에 비상구가 있는데, 그곳에 초점을 맞춘 후 기계 오른쪽에 조그맣게 있는 터치패드를 톡 쳐주면 끝이다.

두 번째 프로그램은 간단한 모바일 게임이었다. 예전에 시연했던 '이브 발키리'와 비슷한 비행 슈팅 게임. 게임으로서의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시선이 향하는 곳으로 방향을 틀게 되는 조작법 상, 180도 이상의 선회비행은 목에 무리를 줄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게임으로서가 아닌, 모바일 게임의 개발 가이드로서의 능력은 분명 출중했다. 오래 사용하면 패널을 가까이서 접하게 되니 눈이 좀 아플 수 밖에 없겠지만, 기어VR은 내 생각보다 훨씬 뛰어난 기기임을 부정할 수 없었다. 기기에 맞는 스마트폰을 구해야 한다는 부차적인 문제는 존재했지만 말이다.

오큘러스가 준비한 두 가지 신규 시연은 이렇게 끝이 났다. 2주쯤 전, 서동일 지사장은 몇 달 내로 상용화가 이뤄질 것이라는 놀라운 이야기를 건넸었다. 사실은 반신반의했다. 오큘러스가 분명 차세대 디스플레이 후보 1순위로 불리는 VR디바이스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VR시장은 아직 유저층, 마켓, 상품 중 어떤것도 제대로 구축되어 있지 않은 상황. 그저 들은 말로만 판단할 일은 아니었다. 결국 조금 더 이야기를 나누어볼 필요가 있었다.


■ 서동일 지사장 - 시장 확대를 위해서라면 청사진도 공개할 수 있다.


▲ 오큘러스 리프트 한국지사 서동일 지사장


Q. 지스타 현장에서 보니 느낌이 또 다르다. 지스타 방문은 몇 번째인가?

개인적으로는 9년째 방문하고 있다.(웃음) 오큘러스와 함께 한 햇수로는 3년째다. 첫 해에는 아무도 없이 혼자 방문해 명함만 돌리고 다녔다. 그리고 2년차에는 제대로 된 팀이 생겨 'HD 프로토타입' 모델을 시연했고, 그때부터 B2B와 B2C에 참여했다.


Q. 작년에 가져온 HD 프로토타입에 비해 이번에는 어느정도 안정되어있는 DK2를 들고 왔는데, 유저들의 반응은 어떤가?

이틀동안 나름대로 설문을 통해 리서치를 진행했다. 유저분들의 반응은 상당히 좋은 편이었다. 특히 언리얼 엔진으로 만든 콘텐츠들(쇼다운, 이브 발키리)의 시연이 매우 만족도가 높았다.


Q. 이번 지스타에서 본 작품들 중 오큘러스와 연동하면 좋을 것 같아 보이는 눈에 띄는 작품이 있었나?

아무래도 가장 눈에 들어온 작품은 엔씨소프트의 '프로젝트 혼'이었다. 게임도 게임이지만, 오큘러스 리프트는 1인칭에 가장 특화되어 있고, 액션 게임의 감각을 살려주기 좋은 장치다. 아무래도 메카닉을 다루는 프로젝트 혼이 오큘러스와 맞는 부분이 많을 것 같았다.

▲ 메카닉이 등장하는 엔씨소프트의 차기작 '프로젝트 혼'


Q. 이번 지스타에서 좋은 성과를 거두었다고 생각하는가?

B2C와 B2B모두 굉장히 바빴다. 기어VR에 관련되어 삼성과 진행한 사업 이야기도 있었고, 다양한 게임개발사들과의 협력도 진행했다. 작년 지스타까지만 해도 조금은 외로웠는데, 이번 지스타 무대는 굉장히 많은 것을 이루어낸 것 같다.


Q. 오큘러스 리프트의 변천사를 보면, 그 발전 속도가 굉장히 빠르다. 그 원동력은 뭐라고 생각하는가?

페이스북과의 병합 이후, 인력의 충원이라던가 하드웨어의 소싱면에서 상당 부분 부담이 줄어들었다. 실제로 직원 수도 단기간 내에 엄청나게 늘어 현재 전세계의 직원 수가 250명에 육박한다. 덕분에 개발 과정에서 발생하는 시간 손실도 상당 부분 줄일 수 있었고, 직원들이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는데 힘쓸 수 있었다.


Q. 오큘러스 리프트의 초기 버전인 DK1에 대한 청사진을 지난 9월 공개하면서 논란이 일었다. 오큘러스 리프트가 아직 상용화가 된 단계가 아닌데, 굳이 지적 재산권을 포기하면서 청사진을 공개한 이유가 있는가?

아무래도 가장 큰 이유는 VR시장을 더욱 크게 키우고 싶었기 때문이다. 언젠가 VR시장이 형성되는 것은 기정사실이겠지만, 아직까지는 그 어떤 시장도 형성되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때문에 DK1의 청사진을 공개한다면, 더 많은 기업들이 VR시장에 대해 관심을 가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더불어 우리가 갖고 있는 VR디바이스 관련 노하우는 이미 최고라고 생각하고 있기에 어느정도 모험을 할 수 있었던 것도 같다.
▲ 9월부로 DK1의 청사진이 공개되었다.


Q. '크레센트 베이'의 경우 개발자용 키트로 제작된 것이 아닌, 기술력을 보이기 위해 프로토타입으로 제작된 것으로 알고 있다. 실제 상용화 버전은 크레센트 베이와 비교해 볼 때 어떤 차이가 있는가?

크레센트 베이는 우리가 상용화를 진행하는데 있어 존재하는 하드웨어 스펙의 마지노선이다. 쉽게 설명하자면, 상용화 버전의 오큘러스는 무조건 크레센트 베이 이상의 성능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Q. 기어 VR의 경우 적용되는 어플리케이션이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관련 소프트웨어는 준비되어 있는가?

기어 VR의 전용 앱마켓은 현재 준비중에 있다. 머지않은 시점에 북미 시장에서 기어 VR이 출시되면서, 동시에 앱마켓도 함께 세상에 모습을 드러낼 예정이다. 이 앱마켓의 경우 오큘러스를 착용한 상태로 볼 수 있도록 고안되었다. 덕분에 현재는 모바일 관련 개발사들도 B2B부스에서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Q. KGC 현장에서 수 개월 내 상용화가 가능할 것이라고 말했다. 아직까지 그 계획은 차질없이 진행되고 있는가?

큰 문제 없이 잘 진행되고 있다. 조만간 여러분 앞에 찾아갈 수 있을 것이다.


Q. 인벤에서 선정하는 지스타 최고의 기술상을 수상하게 되었다. 소감이 어떠한가?

굉장히 기분이 좋다. 아마 본사에서도 매우 기쁘게 여길 거라 생각한다. 내년에도 더 멋진 하드웨어를 선보이기 위해 항상 노력하겠다. 어서 부스에 붙이러 가봐야 할 것 같다.(웃음)

▲ 테크 부문 인벤 지스타 어워드를 수상한 오큘러스 리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