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풍노도의 6살, 당시 나의 가장 큰 자부심은 1년간 엄마를 졸라서 산 패밀리 컴퓨터(패미컴)였다. 팩에 바람 후후 불어 꼽기만 하면 마리오, 록맨, 욕심쟁이 오리 아저씨 스크루지가 TV 화면에 나타났고, 꼬꼬마였던 내 눈에는 하나같이 멋져 보였다. 그때 나에겐 게임이 가장 쿨한 놀이 방식이었다. 내 또래 녀석들도 그렇게 받아들였다. 친구들은 온종일 내 방을 들락거렸고, 나는 쿨한 녀석이라는 자부심을 5년이나 유지할 수 있었다.

철옹성 같던 당당함은 패미컴 오너 5년 차에 접어들면서 금이 가기 시작했다. 메가드라이브의 소닉은 세상 누구보다도 빠르게 달렸고, 당시 내 눈에는 그게 훨씬 더 쿨해 보였다. 슈퍼패미컴으로 등장한 마리오는 더 이상 거추장스러운 너구리 꼬리 따위를 달고 있지 않았다. 위엄 넘치는 망토를 걸친 마리오는 슈퍼맨이 도망가도 따라잡을 것처럼 빠르고 활기차게 움직였다. 차세대기가 뿜어내는 가공한 재미 앞에 발가벗겨진 나는, 그렇게 조금씩 움츠러들고 있었다.

그리고 패미컴만 7년 동안 갖고 놀던 시점에서 결정타를 맞았다. 중학교 때 소풍을 갔는데, 당시 내 친구들 사이에서는 '디아블로1'이 최고의 화젯거리였다. 부처를 처음 만났을 때의 공포, 성큼성큼 다가와 썩둑 썩둑 썰어나가는 압박감, 뚱뚱보 주제에 발은 더럽게 빨라서 떨쳐낼 수가 없다는 등, 녀석을 잡기 위해서는 계단이 필수라는 등, 그때까지도 패미컴만 갖고 놀던 내게는 도통 알 수 없는 이야기 투성이였다.

"야, 너도 우리 집에 와. 한 번 해봐. 이거 진짜 끝내준다니까."

거기서 가장 쿨해 보였던 애가 내게 말했고, 나와 '디아블로1'의 역사적인 첫 만남은 그렇게 이루어졌다. 시체가 나뒹구는 교회 지하의 음습한 공기가 내 몸 깊숙이 파고들었다. 칼과 방패만으로 좀비를 처단하는 워리어의 등짝, 그 터프함은 반항하던 시절 제임스 딘의 미간과도 같았다.

이제 패미컴은 더 이상 쿨하지 않았다. 그저 우리 집 거실 TV 아래서 7년이나 숙성된 묵은지일 뿐. 게임팩은 다시 먼지가 쌓였고, 나는 학업 정진의 필수 요소가 컴퓨터라고 열심히 엄마를 설득했던 기억이 난다.

그때는 몰랐다. 내가 게임 기자가 되고, 고전 게임 이야기를 풀면서 다시 패미컴을 떠올리게 될 줄은.






고전 게임을 소개하라는 임무를 받은 후 '디아블로1'의 쿨한 등짝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쭉 고민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계속 마음에 걸리는 한 작품이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시리즈다. 초등학생 시절, 친구들과 함께 즐기면 플레이 스테이션도 부럽지 않았던 시리즈.

'디아블로1'과의 팽팽한 줄다리기는 결국 이 녀석의 승리로 끝났다. 워낙 오래 한 게임이라 정이 든 걸까. 기사로나마 이야기 풀면서 다시 한 번 보고 싶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패미컴 라인업에선 나름 유명한 작품이고, 기자와 비슷한 나이의 유저라면 한 번쯤 이름은 들어보았으리라는 생각에 결정을 내렸다. 만약 이 게임을 처음 본다면, '과거에 이런 괜찮은 작품이 있었다'는 이야기 정도로 들어주면 더 바랄 게 없겠다.

여덟 작품 합본 게임팩 하나에 나의 초등학생 시절을 모두 바친, '열혈 시리즈'가 오늘의 주인공이다.

▲ 열혈물어(River City Ransom) 팬 메이드 영상 (제작 - Miracle Kidz)





열혈 시리즈의 개발사인 테크노스 재팬은 사실 오락실 좀 다녀 본 아케이드 키드에게 더 친숙한 이름이다. 전설적인 벨트스크롤 액션 게임 '더블 드래곤'의 역사가 이들의 손에서 탄생했으니까.

'열혈 시리즈'와 '더블 드래곤'은 짝짝 붙는 손맛과 높은 전투 자유도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었다. 패미컴에서 두 시리즈의 후속작을 꾸준하게 선보인 테크노스 재팬은 해당 플랫폼 내 액션 명가 이미지를 빠르게 구축했다.



시리즈의 시초로 알려진 '열혈경파'는 1986년에 출시됐다. 이후 등장하는 시리즈와 비교하면 그래픽 표현 방식에서 상당한 차이를 보이지만, 특유의 골때리는 액션은 이때부터 조짐이 보였다. 김화백보다도 앞선 시대에 근성을 부르짖은 정의덕후 '쿠니오', 그리고 영혼의 라이벌 '리키'가 이 작품을 통해 세상에 등장했다. 기자는 패미컴 버전으로 접했고 그리 많이 즐기지도 않았지만, 여자 깡패 미스즈의 미친 존재감은 아직도 생생하다.

많은 올드 게이머들의 뇌리에 각인된 열혈 시리즈 스타일은 1989년 출시된 '열혈물어'를 통해 정립된다. 전작에서부터 슬슬 조짐이 보였던 쿠니오의 하체는 '열혈물어'를 통해 나무랄 데 없이 짧아졌으며 동시에 우리 추억 속에 있는 바로 그 캐릭터가 탄생한다.

이때부터였다. 짧은 다리에 뭉툭한 체형, 가슴에 딱 붙인 주먹은 열혈 시리즈의 트레이드 마크로 자리매김했다. 25년이 훌쩍 지난 지금 다시 봐도 훌륭한 캐릭터. 시대가 시대이니만큼 좀 촌스럽게 보여도 이해할 준비 됐는데, 열혈 시리즈의 캐릭터는 여전히 현역처럼 군더더기가 없다.

1995년 12월 테크노스 재팬의 도산 후 상당한 시간이 흐른 후에야 열혈 시리즈가 부활했는데, 더욱 발전한 기술력을 두고도 패미컴 버전 열혈 시리즈 캐릭터 디자인만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단순히 게임 그래픽의 완성도 여부를 떠나, 캐릭터 디자인이 시리즈의 정체성을 반영하는 사례는 흔하지 않다. 패미컴의 전설로 꼽히는 슈퍼마리오나 록맨 조차도 시대의 발전에 따라 2D에서 3D로, 한층 현대적인 디테일이 첨가되었는데 열혈 시리즈의 캐릭터는 그대로였다. 강산도 변한다는 세월을 두 번 넘게 보냈는데도. 당시 열혈 시리즈의 캐릭터 완성도, 그리고 이에 대한 팬들의 애정이 어느 정도였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질리지 않는 캐릭터 디자인도 한몫했지만, 개인적으로 열혈 시리즈를 오랫동안 플레이할 수 있었던 배경으로는 매력적인 사운드트랙을 꼽고 싶다. '더블 드래곤'에서 드러난 테크노스 재팬의 실력은 열혈 시리즈에서도 그대로 이어졌다. 특히 상기할 만 한 점은, 어느 한 게임의 음악만 좋은 것이 아니라 열혈물어 이후 모든 게임이 평균 이상의 퀄리티를 보여줬다는 것.

이 중에서 열혈물어의 더블 드래곤 형제 등장 BGM, 열혈 하키의 대설산 스테이지 음악 BGM은 기자가 꼽는 백미다. 열혈물어의 최종 보스 야마다를 만나러 가기 직전, 세계관 내 최고의 격투 센스로 무장한 류이치, 류지 형제의 등장음악은 테크노스 재팬의 출세작 '더블 드래곤1'의 그것과 일치한다. 갖은 개고생을 거치고 온 쿠니오와 리키 앞을 가로막는 거대한 장벽이라는 설정을 풀풀 풍기는 음악, 특히 '더블 드래곤1'을 즐겼던 유저라면 더욱 특별한 감정을 느낄 수 있다.

대설산 스테이지 음악도 비슷한 이유다. 경기를 진행할수록 피로가 누적된 열혈 팀은 점차 꼴이 말이 아니게 변해가는데, 그 모습은 경기 전 라커룸 장면에서 확인할 수 있다. 모든 기력을 쏟아낸 후 바닥에 엎어져 있는 팀원들을 향해 '파이팅!'을 외치는 쿠니오. 하지만 그 역시 온몸에 붕대를 감은 환자인 상황. 게다가 상대는 제대로 된 헬멧까지 착용한 정식 하키부인데다 최종 보스 보정까지 휘감아, 무지막지한 난이도를 보여준다. 누가 봐도 뻔한 승부, 그런데도 도전을 멈추지 않는 열혈 팀의 승리에 대한 염원이 잘 담긴 BGM이라 생각한다. 물론, 개인적인 감정이 듬뿍 담긴 선정이다.

▲ '열혈물어' 더블드래곤 형제 등장 테마


열혈물어 이후 시리즈는 크게 두 갈래로 구분된다. 물어와 시대극으로 이어지는 액션 게임, 그리고 쿠니오의 만능 스포츠맨 설정을 맘껏 활용한 스포츠 게임. 물론, 열혈물어 이전에 돗지볼부가 출시되기는 했지만, 캐릭터 디자인이나 시스템 면에서 후술할 작품과는 상당한 차이를 보여 예외로 뒀다.

열혈물어에서 보여줬던 존 클리어 방식은 열혈 시대극에서 비로소 완성되었다고 할 정도로 뛰어난 구성을 자랑한다. 단순한 일직선 클리어가 아닌, 적들을 찾아 맵 여기저기를 들쑤시며 다니도록 유도했는데, 당시 등장한 게임 중 굉장히 높은 자유도를 지닌 작품이었다.

각 맵의 개성이 뚜렷한 데다 숨겨진 요소도 많아 반복 플레이 시에도 별다른 지루함은 느낄 수 없었다. 또한, 시리즈를 통틀어 가장 다양한 전투 기술이 등장, 단순히 적을 만나 싸우는 것 자체만으로도 깊이 있는 플레이가 가능했다. 이후 비슷한 방식으로 몇 개의 열혈 시리즈가 더 등장했지만, 개인적으로는 열혈 시대극의 완성도를 따라온 작품은 없다고 생각한다.



스포츠 물은 열혈 시리즈에서 가장 많은 영역을 차지하며, 기존 스포츠 게임과는 상당히 다른 구성이 눈에 띈다. 열혈 시리즈 특유의 과격한 액션은 스포츠 물에서도 그대로 구현되었고, 이것으로 인해 열혈 스포츠 물의 정체성이 완성됐다. 실제로 축구나 농구 등에서 다득점한 팀이 승리한다는 공식은 같지만, 그 과정은 실로 처절하기 이를 데 없다.

특히, 패미컴 버전 열혈 스포츠 물에서는 점수보다 전투에 신경써야 할 상황이 자주 발생한다. 축구와 하키, 농구에서 골이란 참혹한 결전 끝에 승리한 자만이 맛볼 수 있는 열매와도 같다.

시리즈 내 캐릭터의 개성은 열혈 스포츠 물에서 더욱 두드러졌다. 세계관 최고의 스프린터 모치즈키는 어느 스포츠에서든 준족을 자랑하며, 열혈물어에서 등장한 더블 드래곤 형제는 걸출한 전투력으로 플레이어 앞을 가로막는다.

각 시리즈별로 등장하는 팀도 다양한 편이고 주, 조연급 캐릭터를 제외하곤 겹치는 팀도 없다. 그런데도 각 캐릭터의 능력치는 세세하게 구별되었으며 배경 이야기까지 담겼다. 이는 결과적으로 시리즈가 등장할 때마다 열혈 세계관이 확장되는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왔고, 팬들로서는 설정에 더욱 파고들 만한 여지가 마련된 셈이다. 특유의 호쾌한 액션, 그리고 종목별 개성 있는 설정은 열혈 시리즈의 대중성을 넓히는데 큰 공헌을 했다.



1990년 닌텐도에서 슈퍼패미컴이 출시되면서 패미컴의 전성기는 조금씩 저물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열혈 시리즈는 역사의 뒤안길로 떠날 채비를 끝낸 패미컴에서 즐길 수 있었던 최후의 명작 중 하나였다. 열혈물어가 1989년 출시되었고, 이후 테크노스 재팬은 약 5년간 꾸준히 패미컴 버전으로 신작을 선보였는데 그때 다른 게임사들은 이미 슈퍼패미컴으로 노선을 변경하고 있었다.

꾸준히 한우물만 파던 테크노스 재팬은 패미컴의 명작 개발사 중 하나로 이름을 올리는 데 성공했다. 그렇지만 시대는 슈퍼패미컴을 중심으로 한 4세대 게임기로 흘러갔고,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테크노스 재팬은 도산을 맞이하고 말았다.

개발사가 사라지면 후속작을 기대하기 어려운 법이다. 어렸을 적 나는 '이까짓 열혈 시리즈 100개를 모아와도 디아블로가 훨씬 재밌어'라면서 가볍게 넘겼지만, 시간이 흐른 지금 이 기사를 쓰면서 어느 때보다도 큰 아쉬움을 느낀다.

그렇게 열혈 시리즈는 팬들의, 그리고 나의 추억 속 한편에 조용히 자리 잡았다. 당시 개발진 중 일부가 별도로 회사를 세워 후속작을 내기도 했지만, 패미컴 버전 열혈 시리즈의 그 쫄깃한 맛은 다시 느낄 수 없었다.

▲ 열혈신기록 엔딩 BGM. 시리즈의 마지막같은 음악.





기자의 게임 인생에서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한 게임, 열혈 시리즈 중 개인적으로 인상 깊게 즐긴 작품만을 선별해 간략히 소개한다. 모두 애정을 가진 작품이고 어떻게 보면 친구 같은 그런 게임이라, 개인적인 감정이 퍽 많이 실렸다는 점을 미리 말하겠다.


■ 열혈 격투전설 (1992년 출시)



장르를 불문하고 일단 주먹부터 날리는 열혈 시리즈 중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작품. 주제부터 격투기니까 어찌 보면 당연하다. 타 시리즈와는 비교를 거부하는 섬세한 전투를 맛볼 수 있다. 상대방을 그로기 상태로 만든 뒤 잡기 기술을 꽂아 넣을 때의 그 손맛은 느껴본 사람만이 알 수 있다.

특이점으로 주인공은 쿠니오가 아닌, 플레이어가 직접 생성한 캐릭터이며 체감상으로 리키가 쿠니오보다 강한 몇 안 되는 시리즈 중 하나다. 리키의 잡기 기술은, 내가 쓰면 즐겁지만 당하면 쓰라린 것이 뭔지 알려주는 좋은 예시였다.

빠른 속도감과 체계적인 공방 시스템, 아이템으로 인한 변수와 합체 요소 등이 탑재됐고, 덕분에 여러 번 즐겨도 일정 수준 이상의 재미를 보장한다.


■ 열혈신기록 (1992년 출시)



타 열혈 시리즈 대비 파고들 요소가 많은 것은 아니지만, 종목 하나하나의 개성이 뚜렷한 작품이다. 승부 과정은 실로 처절하기 이를 데 없으며, 꼴찌는 최대한 경기를 깨끗하게 진행한 사람의 몫이다.

허들은 넘는 게 아닌 부수는 것, 수영장에 피라니아를 푸는 것은 기본, 심지어 금메달로 구매한 불법 물약을 다음 경기를 대비해 마시는 엽기적인 수법까지 준비되었다. 머리가 커버린 지금 돌이켜 보면, 해서는 안될 짓이지만 어렸을 적에는 그런 것도 모르고 마냥 즐거워했다. 그래도 기자는 이렇게 멀쩡하게 컸다.


■ 열혈 농구 (1993년 출시)



패미컴 열혈 시리즈 중 비교적 후반에 출시된 작품으로, 스케일이 큰 것은 아니지만 독특한 요소가 상당히 많은 것이 특징이다. 3단 농구대 시스템이라던지, 상대 팀 보드에서 떨어진 골대를 주워다 아군 보드에 붙이는 요소 등은 전례를 찾기 어려운 수준. 앞으로도 그렇지 않을까.

열혈 스포츠 물에선 드물게 주인공 팀이 강력한 편에 속하는데, 다른 게 아니라 리키의 필살 슛이 너무나도 막강하기 때문이다. 아이스하키, 축구와 마찬가지로 타이밍만 알면 필살기를 난사할 수 있는데, 리키의 슛은 무조건 하늘 끝까지 치솟은 뒤 순서대로 골망을 가르는 위엄 넘치는 모습을 자랑한다.

타 구기 종목에 비해 호흡이 빠른 종목답게, 게임의 템포도 박진감이 넘쳤던 것으로 기억한다. 즉, 안 그래도 처절한 우리의 열혈 팀이 어느 때보다도 많이 때리고, 또 두들겨 맞는 작품이다. 아이스하키와 함께 열혈 시리즈 중 초보와 고수의 실력 차가 가장 많이 나는 게임이라 생각한다.


■ 열혈 아이스하키 (1992년 출시)



묵직한 바디첵으로 말하는 남자의 스포츠, 아이스하키가 열혈 시리즈를 만나면 어떤 상황이 벌어지는지 보여주는 작품. 하키채는 퍽보다 상대 팀 선수 등짝을 후려치는 데 주로 사용되며, 쓰러진 선수 또 때리는 것은 승리를 향한 정석이었다.

패미컴 열혈 시리즈임에도 나름 진지한 스토리를 보유한 것 또한 특징이다. 슈퍼패미컴으로 등장한 '쿠니오들의 만가' 같은 작품은 그야말로 절망의 극치를 보여주지만, 패미컴 열혈 시리즈는 대체로 밝고 유쾌한 분위기가 많았다. 물론, 게임 초반에는 열혈하키 역시 밝은 편이지만 스테이지를 진행할수록 웃음기 빼는 이야기 전개를 보여준다. 일본어를 알 턱이 없는 초등학생 시절에도 그 분위기 변화가 느껴졌을 정도.

BGM이 좋은 열혈 시리즈 중에서도 특히 완성도 높은 곡이 많이 수록된 작품이다. 본문에서 밝힌 것처럼 최종 스테이지인 대설산 BGM은 마지막 결전 분위기를 나무랄 데 없이 표현했으며, 그 외 BGM도 높은 수준을 보여준다.

■ 열혈물어 (1989년 출시)



1989년, 패미컴의 전성기가 끝나갈 시점에 나온 작품인 만큼, 초기 열혈 시리즈임에도 불구하고 깔끔한 그래픽과 절륜한 타격감이 돋보인다. 모든 열혈 시리즈가 그렇듯 친구와 함께라면 더욱 재미있게 즐길 수 있는데, 우선 난이도를 최고로 올리는 것을 추천한다. 게임이 너무 쉬워서가 아니다. 난이도 높이면 정말 연신 뒷목을 잡게 할 정도로 어렵고, 친구랑 같이해도 어려운 거 매한가지다. 플레이어만큼 강해진 적을 한명 한명 눕힐 때마다 살아남은 오늘을 감사하게 되며, 등을 맡긴 친구와는 뜨거운 전우애가 흐른다. 당시 이런 작품은 별로 없었다.

패미컴에 한글 패치 따위는 없기에 순전히 일본어로만 즐겼는데, 스토리를 이해하지 못하면 고교 정문에서 크나큰 난관을 만나게 된다. 문이 열리지 않는다면 돌아가자. 공원에 답이 있다.


■ 열혈시대극 (1991년 출시)



수많은 열혈 팬이 인정하는 명작 중 하나. 열혈물어와 비교해 확 늘어난 볼륨, 높은 자유도가 주요 특징이다. 플레이타임이 제법 긴 편이지만, 잘 짜인 레벨 디자인 덕분에 그다지 지루함이 느껴지지는 않는다.

열혈물어는 이 작품을 위한 준비 과정이었다고 보일 정도로 크나큰 발전을 보여준다. 수많은 캐릭터를 직접 플레이할 수 있는 데다, 각자 개성있는 필살기를 보유해 조작하는 맛이 살아 있었다. RPG나 액션 어드벤처에서 볼 수 있는 RPG 요소, 장소 이동 간에 발생하는 로딩을 제외하면 오픈 월드에 가까운 구조도 당시에는 신선하게 다가왔다.

다만, 열혈 시리즈 중에서도 특히 일본색이 짙다는 점은 경우에 따라 단점이 될 수 있다. 모든 게이머에게 추천하기는 어려운 작품.


■ 열혈사커리그 (1993년 출시)



스포츠 계열 열혈 시리즈 중에서는 독보적인 완성도를 보여주는 작품. 엔딩을 위해 달려야 하는 플레이 타임도 굉장히 긴 편에 속하고, 전작 '열혈돗지볼: 축구'와는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수많은 추가 요소가 담겼다.

선수 배치 및 팀 전략 설정 등 보다 진지하게 스포츠 물로 접근... 하는 듯했으나, 열혈 특유의 격투 본능 앞에서는 큰 의미가 없다. 그래도 라커룸에서 설정한 전술대로 움직이는 우리 팀 선수들을 구경하는 재미는 꽤 쏠쏠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날씨가 흐리면 비가 오고, 빗물 웅덩이 위에 서 있는데 벼락이 떨어지면 그대로 감전되는 등 디테일한 요소가 많고, 그것들이 경기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워낙 변수가 많다 보니 몇 번을 다시 플레이해도 새로운 재미를 느낄 수 있는 작품 중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