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제 이름은 '드류 크레센티(Drew Crecente)'입니다. 전 제니퍼 앤스 그룹의 상무이고, 제니퍼는 제 딸의 이름입니다. 제 딸은 그 아이의 전 남자친구에게 살해당했습니다."

상쾌한 아침에 듣는 첫 발언치고는 상당히 충격적이었다. GDC의 경우 대다수가 개발자이기 때문에 강연에 앞서 도란도란 게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보통이다. 그랬던 강연장이 순식간에 숙연해졌다. 무슨 일인가 싶었다. 강연자인 드류 크레센티는 흔히 볼 수 있는 외모의 소유자였지만, 지금껏 본 그 누구보다 강한 눈빛을 드러내고 있었다. 숙연함 속에 궁금함이 생겼다. 무엇이 저 남자를 강단에 서게 만들었는가. 그가 이 많은 '게임 개발자'들 사이에서 할 이야기가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드류는 살짝 웃으며 미안하다고 말했다. 그 역시 이런 숙연한 분위기를 썩 바라는 것은 아닌 듯싶었다. 이어 그는 그가 속한 단체인 '제니퍼 앤스 그룹'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제니퍼 앤스 그룹'은 그가 딸의 이름을 따 지은 단체였다. 말했다시피, 그의 딸은 전 남자친구의 범죄로 인해 희생되었다. 미국을 포함한 세계 각지에서 새로운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TDV(Teen Dating Violence : 청소년 계층에서 연인 사이에 벌어지는, 혹은 연인 사이였던 대상에 대한 장, 단기적 범죄로, 육체적, 정신적, 성적 영역이 포함된다)'의 여파이다.

제니퍼 앤스 그룹은 TDV에 대해 체계적으로 연구하고, 이를 예방하기 위해 설립된 단체이다. 제니퍼 앤스 그룹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미국에서 TDV의 여파에 시달린 학생의 수는 전체 학생 수의 44%에 달한다. 올바른 연애관이 없는 10대의 풋풋한 연애가, 그만큼 위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를 예방하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일단 교육의 대상이 청소년이다. 일생 중 가장 공부를 많이 해야 하지만, 가장 공부를 싫어하는 시기다. 그런 이들에게 딱딱한 강연을 통한 예방 교육이 얼마나 효과가 있을까. 그는 절실했다. 더욱 부드러우면서도 효과적으로 청소년 계층에게 접근할 방법이 필요했다.

그 끝에서 찾아낸 것이 바로 '게임'이었다. 그는 말했다. "게임을 즐기는 청소년의 수는 상당히 많습니다. 여러 조사를 하는 과정에서 그것을 알 수 있었죠. 그때 영감을 얻었습니다. 청소년에게 가장 다가가기 쉬운 수단은 게임이 아닐까 하는 생각 말이죠."


물론 시작부터 쉽지는 않았다. 그는 영국과 미국에 총 50만 건이 넘는 문서를 배포해 자신의 뜻을 알렸고, 이 과정에서 5종의 게임을 등록할 수 있었다. 때는 2008년. 처음으로 TDV를 예방하는 게임이 제작되는 순간이었다.

그 이후로도 제니퍼 앤스 그룹은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다. 결코 빠르지는 않았다. 무자본으로 시작한 그의 운동은 오로지 그의 소명 의식, 그의 가족이 겪었던 고통을 다른 이들이 느끼지 않기를 바라는 그 마음뿐이었다. 그렇게 느리지만, 제니퍼 앤스 그룹은 성과를 만들어냈다. 2014년이 되자, 그의 운동을 지지하는 개발자들의 수는 늘어났고, TDV를 예방하는 게임의 종류 역시 그만큼 늘어났다. 총 22종의 게임. 제니퍼 앤스 그룹이 TDV예방을 위해 그간 창조해낸 게임의 수였다.


그는 그렇게 완성된 게임 중 두 가지를 청중들에게 소개했다. 'The Guardian'이란 이름의 간단한 플랫포머 게임, 그리고 'Grace's Diary'라는 포인트 앤 클릭 어드벤쳐 게임이었다.

'The Guardian'은 간단하게 구성된 플랫포머 게임으로, 게임 중간 중간 계속해서 질문지를 던진다. 그리고 그 질문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플레이어는 자연스럽게 TDV에 대한 상식적, 법률적 지식. 그리고 TDV가 끼치는 여러 부정적인 영향을 학습하게 된다.

'Grace's Diary'또한 장르의 차이가 있을 뿐, TDV에 대한 지식을 천천히 주입시키는 것은 동일하다. 'Grace'라는 소녀가 되어 하루하루를 진행하는 포인트 앤 클릭 방식의 이 게임은 플랫포머 게임을 잘 플레이하지 못하는 청소년들도 쉽사리 플레이할 수 있게 만들어 놓은 게임이다.

정말 '간단하다'라고 말할 수 있는 이 두 종류의 게임은 생각 외로 괜찮은 효과를 거두고 있었다. 유럽권의 몇몇 학교에서 두 게임을 통해 실험했고, 다양한 부분에서 청소년들의 의식이 성장하는 효과를 거둘 수 있었다.

하지만 드류 크레센티의 발언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그는 이런 '게임'을 통한 '폭력'의 근절을 다양한 분야에서 적용할 수 있다고 말했다. "청소년층에서 흔히 일어나는 사회적 문제는 단순히 TDV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가장 흔한 '학교폭력', 청소년 임신이나 무분별한 성행위로 인한 성병 문제, 그리고 자살 문제까지, 개선해야 할 문제가 산재해 있다고 할 수 있죠. 이런 문제들 또한 '게임'을 통한 자연스러운 접근으로 개선할 수 있다고 전 믿습니다."

그는 게임을 통해 사회의 여러 가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고 있었다.


아이러니였다. 게임, 그리고 폭력은 각종 사회 문제를 둘러싼 이슈에서 단골처럼 올라가는 손님들이다. 인기 있는 게임들의 소재는 폭력과 상당한 직, 간접적 연관성을 지닌다. 당연한 일이다 '게임'은 미디어 중 유일하게 '체험'이 가능하다. 간접적 경험만이 가능한 영화, 만화, 책 등의 소재에 비하면 상당한 이점이다.

한없이 자극을 추구하는 인간이 이렇게 좋은 소재를 그냥 둘리가 없다. 현실에서는 할 수도, 해서도 안되는 반사회적 행동들이, 게임의 소재로 쓰이는 것은 자연스러운 디지털 진화의 과정일 것이다.

하지만 그래서 더욱 게임은 탄압의 대상이 되곤 한다. 아직 게임과 현실상의 폭력이 연관되었다는 점을 시사하는 객관적인 실험이나 연구의 결과가 나온 바가 없기 때문에 그들의 주장은 설득력이 없지만, 게임이 폭력과 항상 결부된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 와중에 드류 크레센티는 '게임'을 통한 폭력의 예방을 말했다. 슬픈 사연을 가진 한 남자의 이상론으로 끝날 수 있었던 이야기를, 그는 노력을 통해 현실로 이뤄냈고 나아가 더 많은 영역에 긍정적인 변화를 주기 위해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유일하게 '체험'이 가능하다는 것. 그래서 게임은 반사회적 행동들이 자주 소재로 쓰인다.
그 와중에 드류 크레센티는 게임을 통한 폭력의 예방을 말했다.


강연의 종장에 이르러 참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게임은 과연 문화인가?' 그간 수도 없이 도마 위에 올랐고, 국내에서는 국회의원들까지 나서서 국회 한자리에 자리를 내 토론회를 진행했던 주제다. 나 역시 이 키워드를 대하면서 복잡한 감정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어찌 됐건 게임을 업으로 지고 살아가는 업계인으로서 게임이 '문화'의 한 축으로 인정받는다는 사실이 기분이 나쁠 리 없으니 말이다.

그 때문에 참 여러 가지 말도 많이 하고 다녔다. 게임에 대한 편견을 갖고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던 친척들에게는 게임이 벌어들이는 외화의 액수를 말했고, 게임 중독자가 살인을 저질렀다는 뉴스 기사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는 '어째서 모든 책임을 게임에 전가하는가?' 라는 의문을 던졌다.

'게임'은 '문화'라는 나의 생각은 그때와 변함이 없다. 하지만 드류 크레센티의 강연은 철없어 보이는 근거로 '게임'을 '문화'라 말하던 나를 부끄럽게 만들기 충분했다. '게임'이 진짜 '문화'로 거듭나는 것은 그 규모와 관계없이 게임이 세상을 조금 더 살기 좋고 아름답게 만들며, '게임' 그 자체가 가진 힘으로 사회의 수준을 끌어올릴 수 있을 때 완성되는 것이 아닐까?